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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밋 틸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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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밋 틸 피살 사건은 1955년 흑인 소년 에밋 틸이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로 납치, 구타,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짐 크로우 법이 시행되던 미국 남부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전국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틸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공개하여 인종 차별의 참혹함을 알렸고, 이 사건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비롯한 시민권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틸의 살해범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후 자백을 통해 살해 사실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2000년대 재수사, 증언 번복 논란, 기념 사업 등 다양한 형태로 기억되고 있으며, 미국 민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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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밋 틸 피살 사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에밋 루이스 틸
출생일1941년 7월 25일
출생지시카고, 일리노이주, 미국
사망일1955년 8월 28일
사망 장소드루, 미시시피 주, 미국
사망 원인린치 (총상 및 신체 훼손)
안장지버 오크 묘지, 앨십, 일리노이 주
교육제임스 매코시 초등학교
부모마미 틸-모블리
루이스 틸
수상미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사후 수여, 2022년)
에밋 틸
1954년 크리스마스에 그의 어머니가 찍은 틸의 사진
관련 사건
관련 사건에밋 틸 피살 사건

2. 생애

에밋 틸은 1941년 7월 25일 시카고에서 마미와 루이스 틸 사이에서 태어났다.[171] 에밋의 어머니 마미는 델타 지역의 작은 마을인 미시시피주 웹에서 태어났다. 델타 지역은 야주미시시피 강의 유역에 있는 미시시피 북서부의 여러 카운티를 포함한다. 마미가 두 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가족은 흑인 차별과 불평등을 피해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는 대이동의 일환으로 시카고 근처의 일리노이주 아르고로 이사했다.[171] 아르고는 "리틀 미시시피"로 불릴 정도로 남부 이주민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마미의 어머니 집은 일자리와 집을 구하려는 이주민들의 중간 기착지로 자주 사용되었다.[172]

1950년대에 미시시피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였고, 델타 카운티는 미시시피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일부였다.[172] 마미가 태어난 탤러해치 카운티의 1949년 백인 가구당 평균 소득은 690달러였고, 흑인 가족의 경우 462달러였다.[173] 농촌 지역에서 흑인에게는 경제적 기회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백인 소유의 땅에서 소작인으로 살았다. 흑인들은 1890년 이후 사실상 참정권을 박탈당했고 투표 및 정치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다. 백인들은 또한 인종 차별과 짐 크로우법을 제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마미는 에밋을 주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키웠다; 그녀와 루이스 틸은 1942년 마미가 그가 불성실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헤어졌다. 루이스는 나중에 마미를 공격하여 의식을 잃을 때까지 목을 졸랐고, 그녀는 그에게 뜨거운 물을 뿌리는 것으로 대응했다.[174] 마미에게서 떨어져 있으라는 법원 명령을 위반한 혐의로, 루이스 틸은 1943년 판사에 의해 감옥에 가거나 미 육군에 입대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945년, 아들의 네 번째 생일 몇 주 전에, 루이스 틸은 이탈리아 여성 살해와 다른 두 명의 강간 혐의로 군사 재판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처형되었다.[175]

여섯 살 때, 에밋은 소아마비에 걸려 지속적인 말더듬증을 겪게 되었다.[176] 마미와 에밋은 디트로이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녀는 1951년 "핑크" 브래들리를 만나 결혼했다. 에밋은 시카고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해서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다시 시카고로 돌아갔고, 그의 어머니와 계부는 그해 늦게 합류했다. 1952년 결혼이 파경된 후, "핑크" 브래들리는 혼자 디트로이트로 돌아갔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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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미 틸-브래들리와 에밋은 친척들과 가까운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의 번화한 동네에서 함께 살았다. 그녀는 더 나은 급여를 받기 위해 미국 공군의 민간인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틸이 때로는 정신이 팔리기도 했지만 집안일을 돕기에 충분히 근면했다고 회상했다. 틸의 어머니는 그가 때때로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부부의 별거 후, 브래들리는 마미를 방문하여 그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1살의 틸은 부엌칼을 들고 브래들리에게 그가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했다.[178] 그러나 틸은 일반적으로 행복했다. 그는 사촌 및 친구들과 장난을 쳤고, 야구 경기를 하며 자유 시간을 보냈다. 틸은 옷을 잘 입었고,[10] 종종 또래들 사이에서 관심의 중심이었다.[179]

2. 1. 어린 시절

에밋 틸은 1941년 7월 25일 시카고에서 마미와 루이스 틸 사이에서 태어났다.[171] 에밋의 어머니 마미는 델타 지역의 작은 마을인 미시시피주 웹에서 태어났다. 델타 지역은 야주미시시피 강의 유역에 있는 미시시피 북서부의 여러 카운티를 포함한다. 마미가 두 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가족은 흑인 차별과 불평등을 피해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는 대이동의 일환으로 시카고 근처의 일리노이주 아르고로 이사했다.[171] 아르고는 "리틀 미시시피"로 불릴 정도로 남부 이주민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마미의 어머니 집은 일자리와 집을 구하려는 이주민들의 중간 기착지로 자주 사용되었다.[172]

1950년대에 미시시피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였고, 델타 카운티는 미시시피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일부였다.[172] 마미가 태어난 탤러해치 카운티의 1949년 백인 가구당 평균 소득은 690달러였고, 흑인 가족의 경우 462달러였다.[173] 농촌 지역에서 흑인에게는 경제적 기회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백인 소유의 땅에서 소작인으로 살았다. 흑인들은 1890년 이후 사실상 참정권을 박탈당했고 투표 및 정치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다. 백인들은 또한 인종 차별과 짐 크로우법을 제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마미는 에밋을 주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키웠다; 그녀와 루이스 틸은 1942년 마미가 그가 불성실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헤어졌다. 루이스는 나중에 마미를 공격하여 의식을 잃을 때까지 목을 졸랐고, 그녀는 그에게 뜨거운 물을 뿌리는 것으로 대응했다.[174] 마미에게서 떨어져 있으라는 법원 명령을 위반한 혐의로, 루이스 틸은 1943년 판사에 의해 감옥에 가거나 미 육군에 입대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945년, 아들의 네 번째 생일 몇 주 전에, 루이스 틸은 이탈리아 여성 살해와 다른 두 명의 강간 혐의로 군사 재판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처형되었다.[175]

여섯 살 때, 에밋은 소아마비에 걸려 지속적인 말더듬증을 겪게 되었다.[176] 마미와 에밋은 디트로이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녀는 1951년 "핑크" 브래들리를 만나 결혼했다. 에밋은 시카고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해서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다시 시카고로 돌아갔고, 그의 어머니와 계부는 그해 늦게 합류했다. 1952년 결혼이 파경된 후, "핑크" 브래들리는 혼자 디트로이트로 돌아갔다.[177]

마미 틸-브래들리와 에밋은 친척들과 가까운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의 번화한 동네에서 함께 살았다. 그녀는 더 나은 급여를 받기 위해 미국 공군의 민간인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틸이 때로는 정신이 팔리기도 했지만 집안일을 돕기에 충분히 근면했다고 회상했다. 틸의 어머니는 그가 때때로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부부의 별거 후, 브래들리는 마미를 방문하여 그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1살의 틸은 부엌칼을 들고 브래들리에게 그가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했다.[178] 그러나 틸은 일반적으로 행복했다. 그는 사촌 및 친구들과 장난을 쳤고, 야구 경기를 하며 자유 시간을 보냈다. 틸은 옷을 잘 입었고,[10] 종종 또래들 사이에서 관심의 중심이었다.[179]

2. 2. 미시시피 방문 계획

1955년 여름, 에밋 틸의 외삼촌인 모스 라이트가 시카고에 있는 틸과 그의 어머니를 방문하여 미시시피 델타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틸은 직접 그곳을 보고 싶어 했다. 라이트는 틸과 그의 사촌인 휠러 파커를 함께 데려갈 계획이었고, 또 다른 사촌인 커티스 존스도 합류할 예정이었다. 소작인이자 파트타임 목사인 라이트는 미시시피주 머니에 살았는데, 이 마을은 그린우드에서 북쪽으로 8마일(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틸이 델타로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시카고와 미시시피는 서로 다른 곳이며, 남부에서 백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1882년부터 린칭에 대한 통계가 수집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미시시피주에서만 500명 이상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사법 외 폭력으로 사망했으며, 남부 전체에서는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인종적 동기의 살인이 드물었지만 여전히 발생했다.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간의 성적 접촉 암시는 흑인 남성에게 심각한 처벌을 가할 수 있었다.[1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참전 용사들이 남부에서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짐 크로우 법의 집행이 다시 강화되었다.[12]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판결에서 공립학교 분리를 위헌으로 판결한 후 인종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13] 많은 분리주의자들은 이 판결이 인종 간 데이트와 결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백인들은 법원 판결에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남부의 분리는 흑인들을 사회적 평등으로부터 강제로 제한하는 데 사용되었다.[13] 틸이 미시시피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 라마 스미스라는 흑인 활동가가 브룩헤이븐의 카운티 법원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백인 용의자 3명이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다.

3. 피살 사건

틸은 시카고에서 나고 자랐다. 1955년 8월 20일, 14세의 틸은 미시시피주 머니 시에 거주하는 삼촌과 사촌 형제들을 방문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그의 어머니는 걱정하며 방문을 만류했지만, 남부의 인종 차별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8월 24일, 그는 사촌 형제 등 또래들과 함께 물건을 사려고 소매점에 들어갔다. 틸이 소매점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확인된 것은 그가 풍선 껌 한 통을 샀다는 것, 알려진 것은 그가 계산대 일을 보던 식료품점 주인 로이(Roy Bryant)의 아내인 백인 여성 캐롤린 브라이언트에게 휘파람을 불고 손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남부에선 금기에 해당하는 행동이었다.[286]

나흘 뒤인 8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틸이 사촌 집에서 잠을 자던 중, 로이와 그의 이복 동생 밀엄(J.W Milam)이 틸을 끌고 갔다. 틸이 실종된 지 사흘 뒤 인근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몸은 구타의 흔적으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으며, 머리 등 곳곳에 총상이 있었다. 그의 신원을 확인해준 것은 아버지의 유품으로 어머니가 그에게 끼워준 반지였다.[288][286]

로이 브라이언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자, 그는 상점에 들어온 몇몇 젊은 흑인 남성들을 공격적으로 심문했다. 그날 저녁, 브라이언트는 J. W. 워싱턴이라는 흑인 남성과 함께 길을 걷고 있던 흑인 십 대에게 다가갔다. 브라이언트는 워싱턴에게 그 소년을 붙잡아 픽업 트럭 뒷좌석에 태우라고 명령한 뒤, 틸과의 사건을 목격한 캐롤린의 일행이 그 소년을 확인하도록 데려갔다. 친구나 부모가 브라이언트의 가게에서 그 소년을 보증했고, 캐롤린의 일행은 브라이언트와 워싱턴이 붙잡은 소년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브라이언트는 그 사건의 소년이 시카고에서 왔고 모스 라이트와 함께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몇 목격자들은 브라이언트와 그의 36세 이복 형제인 존 윌리엄 "J. W." 밀람이 틸을 집에서 데려갈 것을 논의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1955년 8월 28일 이른 아침, 오전 2시에서 3시 30분 사이에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모스 라이트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갔다. 권총과 손전등으로 무장한 그는 라이트에게 시카고에서 온 소년 3명이 집에 있는지 물었다. 틸은 다른 사촌과 침대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고, 오두막에는 총 8명이 있었다.[44] 밀람은 라이트에게 "말을 한 흑인"에게 그들을 데려가라고 요구했다. 틸의 증조모는 그들에게 돈을 제안했지만, 밀람은 틸에게 옷을 입으라고 재촉하며 거절했다. 모스 라이트는 그들에게 틸이 북부 출신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알렸다. 밀람은 "목사님,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었고, 라이트는 "64세"라고 대답했다. 밀람은 라이트가 누구에게 말하면 65세까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들은 틸을 트럭으로 끌고 갔다. 라이트는 그들이 차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이 아이가 맞는지 묻는 것을 들었고, 누군가가 "예"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남자의 목소리였는지 여자의 목소리였는지 묻자, 라이트는 "남자의 목소리보다 더 가벼운 목소리 같았다"고 말했다. 1956년 잡지 ''룩''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살인을 자백했는데,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캐롤린이 틸을 알아보도록 그를 가게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틸이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이 자신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5]

밀람과 브라이언트는 틸을 녹색 픽업 트럭 뒤에 묶고 미시시피주 머니로 차를 몰았다. 일부 목격자에 따르면, 그들은 틸을 브라이언트의 식료품점으로 데려가 흑인 남성 두 명을 섭외했다. 그들은 드루의 창고로 차를 몰고 가는 길에 틸을 권총으로 구타하여 정신을 잃게 했다고 한다. 당시 18세였던 윌리 리드는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나중에 앞좌석에 백인 남성 두 명과 뒷좌석에 "흑인 남성 두 명"을 보았다고 회상했다.[45] 일부는 흑인 남성 두 명이 밀람을 위해 일했고 구타에 가담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추측했지만, 나중에 그들은 현장에 없었다고 부인했다.[46][47]

윌리 리드는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창고에서 구타 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리드는 이웃에게 말했고 둘 다 창고 근처의 우물까지 길을 따라 걸어갔고, 그곳에서 밀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밀람은 그들이 아무것도 들었는지 물었다. 리드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창고를 지나가면서 고함을 들었다. 지역 이웃은 또한 "너무 꽉 조여진" (르로이 콜린스)가 창고 뒤에서 트럭의 피를 씻고 틸의 부츠를 발견했다. 밀람은 사슴을 죽였고 부츠는 그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틸이 미시시피주 글렌도라의 탈라해치 강 근처 블랙 베이유 다리에서 총에 맞아 던져졌다고 주장했다.[48] 그들은 머니에 있는 로이 브라이언트의 집으로 돌아갔고, 틸의 옷을 태웠다고 한다.

1956년 ''룩'' 잡지에 게재된 윌리엄 브래드포드 휴이와의 인터뷰에서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틸을 때리고 강둑에서 강으로 던져 그를 겁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휴이에게 틸을 때리는 동안 그가 그들을 망할 놈들이라고 불렀고, 그들만큼 훌륭하다고 선언했으며, 백인 여성과의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틸을 트럭 뒤에 태우고 면화 압착기로 가서 32kg짜리 선풍기를 가져가기 위해, 틸을 처분할 장소를 찾기 위해 강을 따라 몇 마일을 운전했다. 그들은 강가에서 그를 총으로 쏘고 선풍기로 몸에 무게를 실었다.[25]

모스 라이트는 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20분 동안 현관에 머물렀다. 그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라이트와 다른 남자는 머니로 가서 휘발유를 구한 다음 틸을 찾기 위해 주변을 운전했다. 실패하고 오전 8시까지 집에 돌아왔다. 라이트로부터 자신이 생명을 두려워하여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 커티스 존스는 레플로어 카운티 보안관에게 전화를 걸고 시카고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황한 그녀는 에밋의 어머니 매미 틸-브래들리에게 전화했다. 라이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미시시피주 섬너로 차를 몰고 갔고, 엘리자베스의 오빠가 보안관에게 연락했다.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레플로어 카운티 보안관 조지 스미스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소년을 삼촌의 집에서 데려갔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같은 날 밤 브라이언트의 가게 앞에서 그를 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납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틸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곧 전국 유색 인종 지위 향상 협회(NAACP)의 미시시피 주 현장 비서인 메드가 에버스와 NAACP의 볼리바 카운티 지부장인 암지 무어가 관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면화 따는 사람으로 위장하여 틸을 찾을 수 있는 정보를 찾기 위해 면화밭으로 들어갔다.

납치 및 살해 3일 후, 틸의 부어오르고 훼손된 시신은 탈라해치 강에서 낚시를 하던 두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의 머리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는 오른쪽 귀 위로 총을 맞았고, 눈이 소켓에서 빠져나왔으며, 등과 엉덩이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고, 쇠톱날로 목에 고정된 선풍기 날에 의해 그의 몸에 무게가 실렸다. 틸은 옷을 입지 않았지만 "L. T."와 "1943년 5월 25일"이 새겨진 은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외상과 물에 잠긴 것으로 인해 알아볼 수 없었다. 모스 라이트가 틸을 확인하기 위해 강으로 불려 갔다. 틸이 착용하고 있던 은반지가 제거되어 라이트에게 돌려졌고, 증거로 지방 검사에게 전달되었다.

3. 1. 사건의 배경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린칭이 빈번하게 발생했다.[184] 특히 미시시피주에서는 1882년 이후 약 500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린칭으로 사망했다.[184] 1950년대 중반에는 린칭 건수가 감소했지만, 인종 차별에 의한 살인은 끊이지 않았다. 남부 전체에 걸쳐 시행된 인종 격리 시스템은 인종 간 교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에게 접근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가혹한 처벌이 따랐다.[185]

1954년, 미국 대법원이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공립학교 인종 분리 교육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인종 간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186] 인종 분리주의자들은 이 판결이 이종 간 결혼을 합법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남부 백인들은 사회적 평등에 대한 압력에 반발하여 흑인을 더욱 억압했다.[186]

에밋 틸이 미시시피주 머니 시를 방문하기 일주일 전, 브루크헤이븐 시에서 흑인 남성 가 총격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용의자들은 무죄로 풀려났다.[187]

시카고에서 성장한 틸은 남부의 인종차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286] 1955년 8월, 틸은 미시시피 주 머니 시에 사는 친척을 방문했다. 틸은 소매점에서 백인 여성 캐롤린 브라이언트에게 휘파람을 불고 손을 댔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남부에서는 금기시되는 행동이었다.[286]

3. 2. 브라이언트 식료품점에서의 만남

에밋 틸은 1955년 8월 21일 미시시피주 머니에 도착하여 친척집에 머물렀다.[286] 8월 24일, 틸은 사촌 등 또래들과 함께 브라이언트 식료품 및 정육점에 갔다.[286] 이 가게는 백인 부부인 로이 브라이언트와 캐롤린 브라이언트가 소유하고 있었다.

가게 안에서 틸이 캐롤린 브라이언트에게 한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틸이 풍선 껌 한 통을 샀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286] 틸이 가게 밖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지갑에 든 백인 소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자랑했다는 주장이 있다.[25] 그러나 틸의 사촌 시메온 라이트는 틸이 백인 소녀의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브라이언트에게 추파를 던지라고 부추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반박했다.[15]

시메온 라이트와 휠러 파커에 따르면, 틸은 브라이언트에게 휘파람을 불었다.[20] 틸이 말을 더듬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때때로 휘파람을 불었다는 보도도 있었다.[22] 그의 어머니는 틸이 "b" 발음을 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말하기 전에 휘파람을 불어 껌을 요구하는 문제를 극복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23]

살인 재판에서 캐롤린 브라이언트는 틸이 자신의 손을 잡고 "데이트할래요, 자기?"라고 말하고, 허리를 잡으며 "무슨 일이야, 자기,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25] 또한 "날 무서워할 필요 없어, 자기"라고 말하며 "한 '입에 담지 못할' 단어"를 사용했고 "나는 전에 백인 여자와 사귄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26] 그러나 역사학자 티모시 타이슨은 2008년 인터뷰에서 브라이언트가 틸이 언어적, 신체적 추파를 던졌다는 재판 증언이 거짓이라고 인정했다고 밝혔다.[27][28][29] 브라이언트는 타이슨에게 "그 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30]

시메온 라이트는 틸이 브라이언트와 단둘이 가게 안에 남겨진 지 "1분도 안 되어" 가게에 들어갔고, 부적절한 행동이나 "음탕한 대화"를 듣지 못했다고 반박했다.[35] 틸이 "물건 값을 지불하고 우리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고 말했다.[35]

가게를 떠난 후, 브라이언트는 차에서 권총을 꺼내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틸과 일행은 즉시 떠났다.[26] 틸이 브라이언트가 차로 가는 동안 휘파람을 불었다는 것은 인정되었다.[26]

캐롤린의 남편 로이 브라이언트는 사건 당시 집을 비운 상태였고, 8월 27일에 돌아왔다.[39] 캐롤린 브라이언트는 처음에 남편에게 틸과의 만남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로이는 가게를 자주 방문하는 사람에게서 이 사건을 전해 들었다.[38]

브라이언트 식료품점 (2009년)


브라이언트 식료품 미시시피 자유의 길 표지, 2018

3. 3. 납치 및 살해

1955년 8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로이 브라이언트와 그의 이복 형제 J. W. 밀람은 모스 라이트의 집에서 에밋 틸을 납치했다.[288][286] 이들은 권총과 손전등으로 무장하고 라이트에게 시카고에서 온 소년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44] 틸의 증조모가 돈을 제안했지만, 밀람은 거절하고 틸에게 옷을 입으라고 했다. 모스 라이트는 틸이 북부 출신이라 남부의 사정을 잘 모른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밀람은 라이트에게 누구에게라도 이 사실을 발설하면 "65세까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들은 틸을 트럭에 태워 끌고 갔고, 라이트는 차 안의 누군가가 "예"라고 말하며 틸이 맞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소리를 들었다.[44]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틸을 미시시피 주 드루의 한 창고로 끌고 가 권총으로 구타했다.[45] 당시 18세였던 윌리 리드는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앞좌석에는 백인 남성 두 명, 뒷좌석에는 흑인 남성 두 명이 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45] 윌리 리드는 집으로 걸어가던 중 창고에서 구타 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었고, 이웃과 함께 창고 근처 우물까지 갔을 때 밀람이 나타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냐고 물었다. 리드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창고를 지나가면서 고함을 들었다고 증언했다.[45]

일부에서는 틸이 미시시피주 글렌도라의 탈라해치 강 근처 블랙 베이유 다리에서 총에 맞아 던져졌다고 주장한다.[48] 1956년 ''룩'' 잡지 인터뷰에서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틸을 때리고 강둑에서 강으로 던져 겁주려 했지만, 틸이 그들에게 반항하며 백인 여성과의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25] 그들은 틸을 트럭 뒤에 태우고 면화 압착기로 가서 70파운드(약 32kg)짜리 선풍기를 가져와 틸의 몸에 매달아 강에 던졌다.[25]

납치 3일 후, 틸의 부어오르고 훼손된 시신은 탈라해치 강에서 낚시를 하던 두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다.[288][286] 그의 머리는 심하게 훼손되었고, 오른쪽 귀 위로 총을 맞았으며, 눈이 빠져나와 있었다. 등과 엉덩이에는 구타 흔적이 있었고, 목에는 쇠톱날로 고정된 선풍기 날이 달려 있었다.[288][286] 틸은 옷을 입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유품인 "L. T."와 "1943년 5월 25일"이 새겨진 은반지를 끼고 있었다.[288][286] 모스 라이트가 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강으로 불려갔고, 은반지는 증거로 지방 검사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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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시신 발견

에밋 틸이 실종된 지 3일 후, 탈라해치 강(Tallahatchie River)에서 낚시를 하던 두 소년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손상된 시신을 발견했다.[208][209] 특히 머리 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오른쪽 귀 위 머리 부분에는 총으로 관통된 총상이 있었으며, 눈알 하나가 없었고, 등에서 엉덩이까지 심하게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목에는 철사로 회전익이 추로 묶여 있었다.[208][209] 시신에는 옷이 없었지만, "L. T."라는 이니셜과 "1943년 5월 25일"이 새겨진 은반지가 남아 있었다.[208][209]

틸의 시신은 권총으로 구타를 당했고, 머리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는 오른쪽 귀 위로 총을 맞았고, 눈이 소켓에서 빠져나왔으며, 등과 엉덩이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고, 쇠톱날로 목에 고정된 선풍기 날에 의해 그의 몸에 무게가 실렸다.[288][286] 그의 신원을 확인해준 것은 아버지의 유품으로 어머니가 그에게 끼워준 반지였다.[288][286]

얼굴은 외상 및 강에 잠긴 탓에 식별이 불가능했다. 모세 라이트는 틸을 식별하기 위해 타라해치 강으로 갔다. 틸의 시신에 있던 은반지는 시신에서 꺼내 라이트에게 돌려준 후 지방 검사에게 인계되었다.[211]

4. 장례

에밋 틸의 어머니 메이미 틸은 아들의 시신을 시카고로 운구하여 지역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아들의 훼손된 얼굴을 공개하는 5일간의 공개 관 장례식을 통해 백인들의 끔찍한 증오범죄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다.[286][289] 약 10만 명의 시민(대부분 흑인)이 틸의 시신을 보았다고 전해진다.[286][289] 메이미 틸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남부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깨닫고 민권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289]

에밋 틸 장례식에서 마미 틸


틸의 어머니가 훼손된 시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 곁에는 약혼자 진 모블리가 있다.


수십 년 동안 남부 전역에서 린치와 인종차별적 살인이 발생했지만, 틸의 죽음은 사회적 카스트 제도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살해된 14세 소년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다.[49] 이 사건은 인종 분리, 법 집행, 북부와 남부의 관계, 미시시피의 사회적 현상 유지,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와 백인 시민 위원회의 활동, 냉전에 대한 감정 등 다양한 문제들을 불러일으켰으며, 미국과 해외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49]

틸의 실종 기사가 ''그린우드 커먼웰스''에 실린 후 다른 미시시피 신문들도 이를 보도했다.[50] 틸의 시신이 발견된 다음 날, 틸과 어머니가 함께 웃는 사진이 ''잭슨 데일리 뉴스''와 ''빅스버그 이브닝 포스트''에 게재되었고, 틸의 죽음에 대한 사설과 독자 투고가 실렸다.[50] 이 중에는 "이제 미시시피 주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들이 불량배 백인 쓰레기들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전에 '일어나서 계산해야 할' 때입니다."라는 내용도 있었다.[50]

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된 후[214] 시카고로 옮겨졌다. 메이미 틸은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220] 공개 관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207] 수만 명의 사람들이 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줄을 섰고, 며칠 후 로버츠 템플 하나님의 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틸의 훼손된 시신 사진은 ''시카고 디펜더''와 잡지 ''제트'' 등 흑인 간행물에 게재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53] ''타임''은 틸의 훼손된 시신 위에 있는 메이미 틸의 모습을 담은 ''제트'' 사진을 100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미지" 중 하나로 선정했다.[53] 틸은 알시프, 일리노이의 버 오크 묘지에 묻혔다.[54]

버 오크 묘지에 있는 틸의 무덤


시카고 시장 리처드 J. 데일리와 일리노이 주지사 윌리엄 스트래튼은 미시시피 주지사에게 정의 실현을 촉구했다. 그러나 미시시피 신문들은 시카고 영안실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거짓 보도하고, 틸 사건의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등 왜곡된 보도를 이어갔다.[55]

5. 수사 및 재판

## 초기 수사

두 명의 백인 남성 로이와 밀엄이 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2명의 피고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286] 린치에 가담한 다른 백인들 중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286] 무죄로 방면된 두 피고는 한 잡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틸을 죽였다고 무용담처럼 자랑하기까지 했다.[288]

재판은 틸의 시신이 발견된 지역인 탤러해치 카운티 서부의 군 법원 청사에서 열렸다. 서머는 여관이 하나뿐인 작은 마을이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기자들로 붐볐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이 재판을 "시민권 운동의 첫 번째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라고 불렀다.[58] 흑인 방문객에게는 호텔이 열려 있지 않았다. 마미 틸-브래들리가 증언하기 위해 도착했고, 재판은 미시간 출신 흑인 하원 의원 찰스 딕스의 관심을 끌었다. 브래들리, 딕스, 그리고 여러 명의 흑인 기자들은 마운드 바유에 있는 T. R. M. 하워드의 집에 머물렀다.

재판 시작 전날, 프랭크 영이라는 젊은 흑인이 하워드에게 와서 범행의 증인 두 명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레슬리 밀람(J.W.의 형제)의 창고에서 틸이 구타당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흑인 직원인 리바이 "투 타이트" 콜린스와 헨리 리 로긴스였다. 콜린스와 로긴스는 J. W. 밀람, 브라이언트, 그리고 틸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검찰은 콜린스와 로긴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그들의 증언을 막기 위해 미시시피주 찰스턴 감옥에 그들을 수감했다.

## 재판 과정

재판은 틸의 시신이 발견된 탤러해치 카운티 서부의 군 법원 청사에서 열렸다.[286] 서머는 여관이 하나뿐인 작은 마을이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기자들로 붐볐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이 재판을 "시민권 운동의 첫 번째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라고 불렀다.[58] 흑인 방문객에게는 호텔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증언을 위해 온 마미 틸-브래들리는 미시간 출신 흑인 하원 의원 찰스 딕스와 함께 마운드 바유에 있는 T. R. M. 하워드의 집에 머물렀다.[229]

재판 시작 전날, 프랭크 영이라는 젊은 흑인이 하워드에게 범행의 증인 두 명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레슬리 밀람의 창고에서 틸이 구타당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흑인 직원인 리바이 "투 타이트" 콜린스와 헨리 리 로긴스였다. 검찰은 콜린스와 로긴스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그들의 증언을 막기 위해 미시시피주 찰스턴 감옥에 그들을 수감했다.[230]

1955년 9월에 열린 재판은 5일간 지속되었다. 법정은 280명의 방청객으로 가득 찼으며, 흑인 참석자들은 분리된 구역에 앉았다.[231]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점심 식사 후 돌아온 흑인 방청객들을 향해 "안녕, 니거들!"이라고 인사했다.[232] 북부에서 온 방문객들은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것에 놀랐고, 배심원들은 근무 중 맥주를 마실 수 있었으며, 많은 백인 남성 방청객들은 권총을 착용하고 있었다.[233]

밀람 재판에서 J. W. 밀람을 지목하는 틸의 삼촌 모스 라이트


변호 측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의 신원에 의문을 제기하며, 틸이 정말 죽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틸을 데려갔지만 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변호 측은 모스 라이트가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틸을 데려간 사람들로 식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밀람만 뚜렷하게 보았다고 말하며 밀람을 지목했고, 이는 남부에서 흑인이 법정에서 백인의 유죄를 증언한 최초의 사건으로 여겨진다.[60]

마미 틸-브래들리는 아들에게 미시시피에서 예의를 지키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변호 측은 시카고에 있는 관 속에서 아들을 확인한 것과 생명 보험 증서에 대해 질문했다.[238]

재판 동안, 레플로어 카운티 보안관 조지 스미스 등은 콜린스와 로긴스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콜린스와 로긴스가 밀람, 브라이언트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증인 세 명을 찾았다. 그 중 두 명은 누군가 구타당하는 소리, 타격 소리, 비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238]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틸이 살아 있었고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백인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변호하기 위해 증언했다. 그린우드의 한 의사는 시신이 너무 부패해서 식별할 수 없었으므로 틸이기에는 너무 오래 물속에 있었다고 진술했다.[240]

캐롤린 브라이언트는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었지만,[36][62] 피고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변호 측은 항소를 돕기 위해 그녀의 증언을 기록해 두기를 원했다.[85]

결론 진술에서 한 검사는 틸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살인이 아닌 엉덩이를 때리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럴드 채텀은 정의를 외치며 음모를 암시하는 보안관과 의사의 진술을 조롱했다. 변호 측은 검찰 측의 이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배심원들이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유죄로 판결한다면 그들의 "선조들이 무덤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라고 말했다. 1955년 9월 23일, 백인 배심원단은 67분간의 심의 끝에 밀람과 브라이언트를 모두 무죄로 판결했다.[63] 한 배심원은 "우리가 탄산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241]

재판 후 분석에서 결과에 대한 비난은 다양했다. 배심원은 탤러해치 카운티의 언덕 지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백인과 흑인이 토지 및 기타 농업 기회를 놓고 경쟁했고, 인종 차별에 격렬했다. 검찰은 밀람이나 브라이언트를 개인적으로 아는 잠재 배심원을 기각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94][245] 한 배심원은 유죄를 두 번 투표했지만, 세 번째 토론에서 무죄를 선고했다.[242] 나중의 인터뷰에서 배심원들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유죄임을 알았지만, 흑인을 살해한 백인에게 종신형이나 사형이 적합한 형벌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인정했다.[243]

1955년 11월, 대배심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납치 혐의로 기소하는 것을 거부했다.[244] 재판 후 T. R. M. 하워드는 라이트, 리드, 그리고 밀람과 브라이언트에 반대 증언을 한 다른 흑인 증인에게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 시카고로 이주하는 비용을 지불했다.[245]

## 불공정한 판결과 그 배경

두 명의 백인 남성 로이 브라이언트와 J. W. 밀럼은 틸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286] 린치에 가담한 다른 백인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286] 무죄로 풀려난 두 피고는 잡지 인터뷰를 통해 틸을 살해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렸다.[288]

재판은 틸의 시신이 발견된 탤러해치 카운티 서부의 군 법원 청사에서 열렸다. 서머는 여관이 하나뿐인 작은 마을이었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기자들로 붐볐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이 재판을 "시민권 운동의 첫 번째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라고 평가했다.[58] 브루노 하웁트만과 머신 건 켈리의 재판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이 재판이 자신이 본 재판 중 가장 많은 홍보를 받았다고 회고했다.[26] 그러나 흑인 방문객에게는 호텔이 제공되지 않았다.

재판 시작 전날, 프랭크 영이라는 젊은 흑인이 T. R. M. 하워드에게 범행 목격자 두 명을 알고 있다고 제보했다. 레슬리 밀람(J.W.의 형제)의 창고에서 틸이 구타당할 당시 그곳에서 일했던 흑인 직원 리바이 "투 타이트" 콜린스와 헨리 리 로긴스였다. 검찰은 콜린스와 로긴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트라이더 보안관은 그들의 증언을 막기 위해 미시시피주 찰스턴 감옥에 감금했다.

재판은 1955년 9월, 5일간 진행되었다. 참석자들은 당시 날씨가 매우 더웠다고 기억했다. 법정은 280명의 방청객으로 가득 찼지만, 흑인 참석자들은 분리된 구역에 앉아야 했다. 흑인 기자들은 백인 기자들과 멀리 떨어진, 배심원단에서 더 먼 흑인 전용 구역에 앉아야 했다. 스트라이더 보안관은 점심 식사 후 돌아온 흑인 방청객들을 향해 "안녕, 니거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북부에서 온 몇몇 방문객들은 법정이 매우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배심원들은 재판 중 맥주를 마실 수 있었고, 많은 백인 남성 방청객들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변호 측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의 신원에 의문을 제기했다. 시신을 확실하게 식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틸의 사망 여부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틸을 증조부 집에서 데려갔지만 그날 밤 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들은 모스 라이트가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틸을 데려간 사람들로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모스 라이트는 용감하게도 법정에서 밀람을 지목하며 "저기 있어"라고 증언했다. 이는 남부에서 흑인이 법정에서 백인의 유죄를 증언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60]

흑인 뉴스 통신사인 전국 흑인 출판 협회(후에 전국 신문 출판 협회로 이름 변경)에서 일하는 기자 제임스 힉스는 법정에 참석했고, 라이트의 증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 순간을 역사적인 순간이라 칭하며 "전율"로 가득 찼다고 묘사했다. ''뉴욕 포스트''의 한 기자는 라이트가 밀람을 지목한 후 "그가 한 일에 대한 그의 힘의 대가를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잘 말해주는 헐떡거림"으로 앉았다고 기록했다. ''뉴올리언스 타임스-피카윤''에서 재판을 취재한 기자는 "내 경력에서 본 가장 극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61]

마미 틸-브래들리는 아들에게 미시시피에서 예의를 지키라고 당부했고, 백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를 받으면 주저 없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고 증언했다.

재판 과정에서 레플로어 카운티 보안관 조지 스미스, 하워드, 그리고 흑인과 백인 기자 여러 명이 콜린스와 로긴스를 찾으려 노력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콜린스와 로긴스가 레슬리 밀람의 재산에서 밀람, 브라이언트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증인 세 명을 찾았다. 그 중 두 명은 누군가 구타당하는 소리, 가격 소리, 비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한 증인은 너무 작은 목소리로 증언해 판사로부터 여러 번 더 크게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피해자가 "엄마,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스트라이더 보안관은 틸이 살아 있으며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백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증언했다. 그린우드의 한 의사는 법정에서 시신이 너무 부패하여 틸로 식별하기에는 너무 오래 물속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캐롤린 브라이언트는 법정에서 증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커티스 스완고 판사가 틸의 납치 및 살인과 관련이 없다는 검찰 측의 이의를 받아들여 배심원은 그녀의 증언을 듣지 못했다.

결론 진술에서 한 검사는 틸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살인이 아니라 엉덩이를 때리는 정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럴드 채텀 검사는 정의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음모를 암시하는 보안관과 의사의 진술을 비웃었다. 마미 브래들리는 그의 최종 진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변호 측은 틸이 살해된 밤의 사건에 대한 검찰 측의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배심원들이 브라이언트와 밀람에게 유죄를 선고한다면 그들의 "선조들이 무덤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미시시피에서 살인죄에 대한 판결은 종신형, 사형, 또는 무죄, 세 가지뿐이었다. 1955년 9월 23일, 백인 배심원단은 67분간의 짧은 심의 끝에 밀람과 브라이언트에 대한 무죄를 평결했다. 한 배심원은 "우리가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 후 결과에 대한 비난은 엇갈렸다. 배심원은 탤러해치 카운티의 언덕 지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선발되었는데,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백인과 흑인이 토지 및 기타 농업 기회를 놓고 경쟁하는 곳이었다. 검찰은 밀람이나 브라이언트를 개인적으로 아는 잠재적 배심원을 기각했는데, 이는 그러한 배심원이 무죄를 선고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휘태커는 피고인들을 아는 사람들은 보통 그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는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한 배심원은 유죄에 두 번 투표했지만, 세 번째 토론에서 다른 배심원들과 함께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인터뷰에서 배심원들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유죄임을 알았지만, 흑인을 살해한 백인에게 종신형이나 사형은 적합한 형벌이 아니라고 믿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두 명의 배심원은 2005년까지도 변호 측의 주장을 믿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검찰이 틸이 사망했는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이 틸의 시신인지 증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64]

1955년 11월, 대배심은 틸을 납치했다는 자백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납치 혐의로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스 라이트와 윌리 리드라는 젊은 남자가 대배심 앞에서 증언했다. 재판 후 T. R. M. 하워드는 라이트, 리드, 그리고 밀람과 브라이언트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한 다른 흑인 증인들이 보복을 피해 시카고로 이주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신변 보호를 위해 윌리 루이스로 이름을 바꾼 리드는 2013년 7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시카고 지역에 거주했다. 그는 대중의 관심을 피했고, 심지어 아내에게 친척이 말해줄 때까지 자신의 과거를 비밀로 유지했다. 리드는 2003년에 방영된 PBS 다큐멘터리 ''에밋 틸 살인 사건''에서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하기 시작했다.[65]

## 판결 이후의 상황 전개

로이 브라이언트와 J. W. 밀럼은 틸 살해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286] 무죄 방면 후, 이들은 잡지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틸을 살해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288] 이 사건으로 인해 흑인 사회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깊은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166]

브라이언트와 밀럼은 틸 살해를 인정한 후 미시시피에서 지지 기반을 잃었다. 흑인들은 그들의 가게를 보이콧하여 파산시켰고, 은행은 대출을 거부했다.[26] 밀럼은 농작물 재배를 위한 대출과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71] 이들은 텍사스로 이주했으나 악명은 계속 따라다녔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반감을 샀다.[72]

밀럼은 중장비 기사로 일하다 건강 악화로 은퇴했고, 여러 범죄로 재판을 받다가 1980년 척추암으로 사망했다.[71] 브라이언트는 텍사스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시력이 나빠져 그만두었고, 미시시피주 룰빌에서 가게를 열었으나 식품 보조금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94년 암으로 사망했다.[73]

마미 틸은 재혼 후 교사가 되었고, 아들의 살해 사건에 대해 교육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1992년, 그녀는 브라이언트가 틸 살해에 대한 인터뷰에서 후회 없이 틸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262]

키스 보챔프는 틸 살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에밋 루이스 틸의 숨겨진 이야기''를 제작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자 했다.[58] PBS는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에서 ''에밋 틸 살해 사건''을 방영했고, CBS 기자 에드 브래들리는 ''60분'' 보고서를 통해 사건을 조사했다.[74]

2004년, 미국 법무부는 사건을 재개하여 다른 관련자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76] 2007년 대배심은 캐롤린 브라이언트 돈햄에 대한 혐의를 제기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77]

5. 1. 초기 수사

두 명의 백인 남성 로이와 밀엄이 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2명의 피고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286] 린치에 가담한 다른 백인들 중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286] 무죄로 방면된 두 피고는 한 잡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틸을 죽였다고 무용담처럼 자랑하기까지 했다.[288]

재판은 틸의 시신이 발견된 지역인 탤러해치 카운티 서부의 군 법원 청사에서 열렸다. 서머는 여관이 하나뿐인 작은 마을이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기자들로 붐볐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이 재판을 "시민권 운동의 첫 번째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라고 불렀다.[58] 흑인 방문객에게는 호텔이 열려 있지 않았다. 마미 틸-브래들리가 증언하기 위해 도착했고, 재판은 미시간 출신 흑인 하원 의원 찰스 딕스의 관심을 끌었다. 브래들리, 딕스, 그리고 여러 명의 흑인 기자들은 마운드 바유에 있는 T. R. M. 하워드의 집에 머물렀다.

재판 시작 전날, 프랭크 영이라는 젊은 흑인이 하워드에게 와서 범행의 증인 두 명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레슬리 밀람(J.W.의 형제)의 창고에서 틸이 구타당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흑인 직원인 리바이 "투 타이트" 콜린스와 헨리 리 로긴스였다. 콜린스와 로긴스는 J. W. 밀람, 브라이언트, 그리고 틸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검찰은 콜린스와 로긴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그들의 증언을 막기 위해 미시시피주 찰스턴 감옥에 그들을 수감했다.

재판은 1955년 9월에 열렸으며 5일간 지속되었다. 법정은 280명의 방청객으로 가득 찼으며, 흑인 참석자들은 분리된 구역에 앉았다.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점심 식사 후 돌아온 흑인 방청객들을 향해 "안녕, 니거들!"이라고 밝게 인사했다.

변호 측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의 신원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다. 그들은 시신을 확실하게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고, 틸이 정말 죽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변호 측은 또한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틸을 그의 증조부 집에서 데려갔지만 그날 밤 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들은 모스 라이트—검찰 측에서는 "엉클 모스"라고 불렀고 변호 측에서는 "모스"라고 불렀다[59]—가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틸을 그의 오두막에서 데려간 사람들로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라이트의 증언은 놀랍도록 용감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아마도 남부에서 흑인이 법정에서 백인의 유죄를 증언한 최초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았다.[60]

흑인 뉴스 와이어 서비스인 전국 흑인 출판 협회(후에 전국 신문 출판 협회로 이름 변경)에서 일하는 기자 제임스 힉스는 법정에 참석했고, 라이트가 밀람을 지목하며 "저기 있어"라고 말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며 "전율"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마미 틸-브래들리는 아들에게 미시시피에서 예의를 지키라고 지시했고, 만약 백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변호 측은 시카고에 있는 관 속에서 아들을 확인한 것과 그가 가입한 400달러의 생명 보험 증서에 대해 질문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레플로어 카운티 보안관 조지 스미스, 하워드, 그리고 흑인과 백인 기자 여러 명이 콜린스와 로긴스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찾을 수 없었지만 콜린스와 로긴스가 레슬리 밀람의 재산에서 밀람과 브라이언트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증인 세 명을 찾았다. 그 중 두 명은 누군가 구타당하는 소리, 타격 소리, 비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틸이 살아 있었고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백인이라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변호를 위해 증언했다. 그린우드의 한 의사는 법정에서 그 시신이 너무 부패해서 식별할 수 없었으므로 틸이기에는 너무 오래 물속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결론 진술에서 한 검사는 틸이 한 일은 잘못되었지만, 그의 행동은 살인이 아니라 엉덩이를 때리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럴드 채텀은 정의를 열정적으로 외치며 음모를 암시하는 보안관과 의사의 진술을 조롱했다. 마미 브래들리는 그의 최종 진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변호 측은 틸이 살해된 밤의 사건에 대한 검찰 측의 이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배심원들이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유죄로 판결한다면 그들의 "선조들이 무덤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시시피에서는 사형에 대해 세 가지 결과만 가능했다. 종신형, 사형 또는 무죄. 9월 23일, 백인 배심원단은 67분간의 심의 끝에 밀람과 브라이언트를 모두 무죄로 판결했다. 한 배심원은 "우리가 탄산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 후 분석에서 결과에 대한 비난은 다양했다. 배심원은 탤러해치 카운티의 언덕 지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백인과 흑인이 토지 및 기타 농업 기회를 놓고 경쟁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밀람이나 브라이언트를 개인적으로 아는 잠재 배심원을 기각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러한 배심원이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중의 인터뷰에서 배심원들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유죄임을 알았지만, 흑인을 살해한 백인에게 종신형이나 사형이 적합한 형벌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두 명의 배심원은 2005년까지도 변호 측의 주장을 믿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검찰이 틸이 죽었는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이 틸의 시신인지 증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55년 11월, 대배심은 틸을 데려갔다는 자신들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납치 혐의로 기소하는 것을 거부했다. 모스 라이트와 윌리 리드라는 젊은 남자가 대배심 앞에서 증언했다. 재판 후 T. R. M. 하워드는 라이트, 리드, 그리고 밀람과 브라이언트에 반대 증언을 한 다른 흑인 증인에게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 시카고로 이주하는 비용을 지불했다. 나중에 발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윌리 루이스로 이름을 바꾼 리드는 2013년 7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시카고 지역에 계속 살았다. 그는 홍보를 피했고, 심지어 아내에게 친척이 말해줄 때까지 자신의 과거를 비밀로 유지했다. 리드는 2003년에 방영된 PBS 다큐멘터리 ''에밋 틸 살인 사건''에서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65]

5. 2. 재판 과정

재판은 틸의 시신이 발견된 탤러해치 카운티 서부의 군 법원 청사에서 열렸다.[286] 서머는 여관이 하나뿐인 작은 마을이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기자들로 붐볐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이 재판을 "시민권 운동의 첫 번째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라고 불렀다.[58] 흑인 방문객에게는 호텔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증언을 위해 온 마미 틸-브래들리는 미시간 출신 흑인 하원 의원 찰스 딕스와 함께 마운드 바유에 있는 T. R. M. 하워드의 집에 머물렀다.[229]

재판 시작 전날, 프랭크 영이라는 젊은 흑인이 하워드에게 범행의 증인 두 명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레슬리 밀람의 창고에서 틸이 구타당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흑인 직원인 리바이 "투 타이트" 콜린스와 헨리 리 로긴스였다. 검찰은 콜린스와 로긴스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그들의 증언을 막기 위해 미시시피주 찰스턴 감옥에 그들을 수감했다.[230]

1955년 9월에 열린 재판은 5일간 지속되었다. 법정은 280명의 방청객으로 가득 찼으며, 흑인 참석자들은 분리된 구역에 앉았다.[231]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점심 식사 후 돌아온 흑인 방청객들을 향해 "안녕, 니거들!"이라고 인사했다.[232] 북부에서 온 방문객들은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것에 놀랐고, 배심원들은 근무 중 맥주를 마실 수 있었으며, 많은 백인 남성 방청객들은 권총을 착용하고 있었다.[233]

변호 측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의 신원에 의문을 제기하며, 틸이 정말 죽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틸을 데려갔지만 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변호 측은 모스 라이트가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틸을 데려간 사람들로 식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밀람만 뚜렷하게 보았다고 말하며 밀람을 지목했고, 이는 남부에서 흑인이 법정에서 백인의 유죄를 증언한 최초의 사건으로 여겨진다.[60]

마미 틸-브래들리는 아들에게 미시시피에서 예의를 지키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변호 측은 시카고에 있는 관 속에서 아들을 확인한 것과 생명 보험 증서에 대해 질문했다.[238]

재판 동안, 레플로어 카운티 보안관 조지 스미스 등은 콜린스와 로긴스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콜린스와 로긴스가 밀람, 브라이언트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증인 세 명을 찾았다. 그 중 두 명은 누군가 구타당하는 소리, 타격 소리, 비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238]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틸이 살아 있었고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백인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변호하기 위해 증언했다. 그린우드의 한 의사는 시신이 너무 부패해서 식별할 수 없었으므로 틸이기에는 너무 오래 물속에 있었다고 진술했다.[240]

캐롤린 브라이언트는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었지만,[36][62] 피고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변호 측은 항소를 돕기 위해 그녀의 증언을 기록해 두기를 원했다.[85]

결론 진술에서 한 검사는 틸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살인이 아닌 엉덩이를 때리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럴드 채텀은 정의를 외치며 음모를 암시하는 보안관과 의사의 진술을 조롱했다. 변호 측은 검찰 측의 이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배심원들이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유죄로 판결한다면 그들의 "선조들이 무덤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라고 말했다. 1955년 9월 23일, 백인 배심원단은 67분간의 심의 끝에 밀람과 브라이언트를 모두 무죄로 판결했다.[63] 한 배심원은 "우리가 탄산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241]

재판 후 분석에서 결과에 대한 비난은 다양했다. 배심원은 탤러해치 카운티의 언덕 지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백인과 흑인이 토지 및 기타 농업 기회를 놓고 경쟁했고, 인종 차별에 격렬했다. 검찰은 밀람이나 브라이언트를 개인적으로 아는 잠재 배심원을 기각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94][245] 한 배심원은 유죄를 두 번 투표했지만, 세 번째 토론에서 무죄를 선고했다.[242] 나중의 인터뷰에서 배심원들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유죄임을 알았지만, 흑인을 살해한 백인에게 종신형이나 사형이 적합한 형벌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인정했다.[243]

1955년 11월, 대배심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납치 혐의로 기소하는 것을 거부했다.[244] 재판 후 T. R. M. 하워드는 라이트, 리드, 그리고 밀람과 브라이언트에 반대 증언을 한 다른 흑인 증인에게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 시카고로 이주하는 비용을 지불했다.[245]

5. 3. 불공정한 판결과 그 배경

두 명의 백인 남성 로이와 밀엄이 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2명의 피고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린치에 가담한 다른 백인들 중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286] 무죄로 방면된 두 피고는 한 잡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틸을 죽였다고 무용담처럼 자랑하기까지 했다.[288]

재판은 틸의 시신이 발견된 지역인 탤러해치 카운티 서부의 군 법원 청사에서 열렸다. 서머는 여관이 하나뿐인 작은 마을이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기자들로 붐볐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이 재판을 "시민권 운동의 첫 번째 대규모 미디어 이벤트"라고 불렀다.[58] 브루노 하웁트만과 머신 건 켈리의 재판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이 재판이 자신이 본 재판 중 가장 많은 홍보를 받았다고 언급했다.[26] 흑인 방문객에게는 호텔이 열려 있지 않았다.

재판 시작 전날, 프랭크 영이라는 젊은 흑인이 범행의 증인 두 명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레슬리 밀람(J.W.의 형제)의 창고에서 틸이 구타당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흑인 직원인 리바이 "투 타이트" 콜린스와 헨리 리 로긴스였다. 검찰은 콜린스와 로긴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그들의 증언을 막기 위해 미시시피주 찰스턴 감옥에 그들을 수감했다.

재판은 1955년 9월에 열렸으며 5일간 지속되었다. 참석자들은 날씨가 매우 더웠다고 기억했다. 법정은 280명의 방청객으로 가득 찼으며, 흑인 참석자들은 분리된 구역에 앉았다. 흑인 기자들은 분리된 흑인 구역에 앉아야 했고, 백인 기자들과 멀리 떨어진 배심원단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점심 식사 후 돌아온 흑인 방청객들을 향해 "안녕, 니거들!"이라고 밝게 인사했다. 북부에서 온 몇몇 방문객들은 법정이 놀라울 정도로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발견했다. 배심원들은 근무 중 맥주를 마실 수 있었고, 많은 백인 남성 방청객들은 권총을 착용하고 있었다.

변호 측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의 신원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다. 그들은 시신을 확실하게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고, 틸이 정말 죽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변호 측은 또한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틸을 그의 증조부 집에서 데려갔지만 그날 밤 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들은 모스 라이트가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틸을 그의 오두막에서 데려간 사람들로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라이트의 증언은 놀랍도록 용감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아마도 남부에서 흑인이 법정에서 백인의 유죄를 증언한 최초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흑인 뉴스 와이어 서비스인 전국 흑인 출판 협회(후에 전국 신문 출판 협회로 이름 변경)에서 일하는 기자 제임스 힉스는 법정에 참석했고, 라이트가 밀람을 지목하며 "저기 있어"라고 말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며 "전율"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뉴욕 포스트''의 한 기자는 그가 지목한 후 라이트가 "그가 한 일에 대한 그의 힘의 대가를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잘 말해주는 헐떡거림"으로 앉았다고 언급했다. ''뉴올리언스 타임스-피카윤''에서 재판을 취재한 기자는 그것이 "내 경력에서 본 가장 극적인 일"이라고 말했다.[61]

마미 틸-브래들리는 아들에게 미시시피에서 예의를 지키라고 지시했고, 만약 백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레플로어 카운티 보안관 조지 스미스, 하워드, 그리고 흑인과 백인 기자 여러 명이 콜린스와 로긴스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찾을 수 없었지만 콜린스와 로긴스가 레슬리 밀람의 재산에서 밀람과 브라이언트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증인 세 명을 찾았다. 그 중 두 명은 누군가 구타당하는 소리, 타격 소리, 비명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한 명은 너무 작게 증언해서 판사가 여러 번 더 크게 말하라고 명령했고, 피해자가 "엄마,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보안관 스트라이더는 틸이 살아 있었고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백인이라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변호를 위해 증언했다. 그린우드의 한 의사는 법정에서 그 시신이 너무 부패해서 식별할 수 없었으므로 틸이기에는 너무 오래 물속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캐롤린 브라이언트는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었지만, 커티스 스완고 판사가 틸의 납치 및 살인과 관련이 없다는 검찰 측의 이의를 받아들여 배심원은 참석하지 않았다.

결론 진술에서 한 검사는 틸이 한 일은 잘못되었지만, 그의 행동은 살인이 아니라 엉덩이를 때리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럴드 채텀은 정의를 열정적으로 외치며 음모를 암시하는 보안관과 의사의 진술을 조롱했다. 마미 브래들리는 그의 최종 진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변호 측은 틸이 살해된 밤의 사건에 대한 검찰 측의 이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배심원들이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유죄로 판결한다면 그들의 "선조들이 무덤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시시피에서는 사형에 대해 세 가지 결과만 가능했다. 종신형, 사형 또는 무죄. 9월 23일, 백인 배심원단은 67분간의 심의 끝에 밀람과 브라이언트를 모두 무죄로 판결했다. 한 배심원은 "우리가 탄산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 후 분석에서 결과에 대한 비난은 다양했다. 배심원은 탤러해치 카운티의 언덕 지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백인과 흑인이 토지 및 기타 농업 기회를 놓고 경쟁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밀람이나 브라이언트를 개인적으로 아는 잠재 배심원을 기각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러한 배심원이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후, 휘태커는 이것이 실수였다고 언급했는데, 피고인들을 아는 사람들은 보통 그들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한 배심원은 유죄를 두 번 투표했지만, 세 번째 토론에서 나머지 배심원들과 함께 무죄를 선고했다. 나중의 인터뷰에서 배심원들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유죄임을 알았지만, 흑인을 살해한 백인에게 종신형이나 사형이 적합한 형벌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두 명의 배심원은 2005년까지도 변호 측의 주장을 믿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검찰이 틸이 죽었는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이 틸의 시신인지 증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64]

1955년 11월, 대배심은 틸을 데려갔다는 자신들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납치 혐의로 기소하는 것을 거부했다. 모스 라이트와 윌리 리드라는 젊은 남자가 대배심 앞에서 증언했다. 재판 후 T. R. M. 하워드는 라이트, 리드, 그리고 밀람과 브라이언트에 반대 증언을 한 다른 흑인 증인에게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 시카고로 이주하는 비용을 지불했다. 나중에 발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윌리 루이스로 이름을 바꾼 리드는 2013년 7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시카고 지역에 계속 살았다. 그는 홍보를 피했고, 심지어 아내에게 친척이 말해줄 때까지 자신의 과거를 비밀로 유지했다. 리드는 2003년에 방영된 PBS 다큐멘터리 ''에밋 틸 살인 사건''에서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65]

5. 4. 판결 이후의 상황 전개

로이 브라이언트와 J. W. 밀럼은 틸 살해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286] 무죄 방면 후, 이들은 잡지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틸을 살해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288] 이 사건으로 인해 흑인 사회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깊은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166]

브라이언트와 밀럼은 틸 살해를 인정한 후 미시시피에서 지지 기반을 잃었다. 흑인들은 그들의 가게를 보이콧하여 파산시켰고, 은행은 대출을 거부했다.[26] 밀럼은 농작물 재배를 위한 대출과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71] 이들은 텍사스로 이주했으나 악명은 계속 따라다녔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반감을 샀다.[72]

밀럼은 중장비 기사로 일하다 건강 악화로 은퇴했고, 여러 범죄로 재판을 받다가 1980년 척추암으로 사망했다.[71] 브라이언트는 텍사스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시력이 나빠져 그만두었고, 미시시피주 룰빌에서 가게를 열었으나 식품 보조금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94년 암으로 사망했다.[73]

마미 틸은 재혼 후 교사가 되었고, 아들의 살해 사건에 대해 교육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1992년, 그녀는 브라이언트가 틸 살해에 대한 인터뷰에서 후회 없이 틸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262]

키스 보챔프는 틸 살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에밋 루이스 틸의 숨겨진 이야기''를 제작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자 했다.[58] PBS는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에서 ''에밋 틸 살해 사건''을 방영했고, CBS 기자 에드 브래들리는 ''60분'' 보고서를 통해 사건을 조사했다.[74]

2004년, 미국 법무부는 사건을 재개하여 다른 관련자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76] 2007년 대배심은 캐롤린 브라이언트 돈햄에 대한 혐의를 제기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77]

6. 언론 보도와 사회적 반응

이 사건은 흑인 사회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민권운동이 남부 전역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이 사건은 미국 배심원제가 소수 인종에게 불리하다는 문제점을 전면에 드러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288] 같은 해 1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로자 파크스가 버스 흑백분리에 저항하였고, 이후 1년여 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확산되었다.[286]

주요 국제 도시의 신문과 종교 및 사회주의 출판물은 평결에 대한 분노와 미국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보도했으며, 특히 미시시피의 남부 신문들은 법원 시스템이 제 역할을 다했다고 썼다.[246] 틸의 이야기는 재판 이후 몇 주 동안 계속해서 뉴스에 등장하며, 신문, NAACP 및 다양한 고위급 인종 분리주의자들 사이에서 흑인에 대한 정의와 짐 크로 법 사회의 적절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1955년 10월, 《잭슨 데일리 뉴스(Jackson Daily News)》는 틸의 아버지 루이스 틸에 대한 미국 군대에 의해 억압된 사실을 보도했다. 루이스 틸은 이탈리아에서 복무하던 중 여성 2명을 강간하고 3번째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1945년 7월 피사 인근에서 육군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매미 틸-브래들리와 그녀의 가족은 루이스가 "고의적인 비행"으로 살해되었다는 말만 들었기에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미시시피 상원 의원 제임스 이스트랜드와 존 C. 스테니스는 육군 기록을 조사하여 루이스 틸의 범죄를 밝혀냈다. 에밋 틸 살인 재판은 끝났지만, 그의 아버지에 대한 뉴스는 1955년 10월과 11월 몇 주 동안 미시시피 신문의 머리 기사로 보도되었다. 이는 에밋 틸의 행동과 캐롤린 브라이언트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247]

이중 처벌 금지 원칙에 의해 보호받는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1956년 《Look 매거진》과 3,600달러에서 4,000달러 사이의 금액으로 저널리스트 윌리엄 브래드포드 휴이/William Bradford Huie영어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인터뷰는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변호했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휴이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브라이언트와 밀람의 변호사들이 질문을 했다. 두 변호사 모두 이전에 의뢰인들의 살인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휴이에 따르면, 나이 많은 밀람이 젊은 브라이언트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밀람은 틸을 쐈다고 인정했고,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유죄라고 믿지 않았고 잘못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49]

밀람이 틸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인용문. 국립 시민권 박물관, 테네시주 멤피스에 전시됨


브라이언트와 밀람에 대한 휴이의 인터뷰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들의 뻔뻔한 틸 살해 자백은 저명한 시민권 지도자들이 연방 정부에 사건을 더 철저히 조사하도록 압박하게 했다. 틸의 살인은 1957년 민권법의 의회 통과에 기여했다. 이 법은 개인의 시민권이 침해될 때 미국 법무부가 지역 법 집행 문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26]

주요 해외 도시, 가톨릭, 개신교, 유대인, 사회주의 계열을 포함한 각 언론은 일제히 이 판결에 격분하며 미국의 사회 풍습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미국 남부, 특히 미시시피 주의 신문들은 사법 제도가 그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다고 썼다.[246]

윌리엄 포크너는 "두려움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만약 틸 사건의 실상이 "Look 매거진"의 설명과 같다면: 두 명의 무장한 어른이 어둠 속에서 14세 소년을 납치하여 협박을 위해 끌고 다녔다. 그러나 14세 소년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무기도 없이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무장한 어른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두 사람은 소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도대체 우리 미시시피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253]

에밋 틸은 미디어 문화와 문학 학술 문화에서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랭스턴 휴즈는 이후 "미시시피, 1955년"으로 알려지게 된 "무제 시"를 1955년 10월 1일 "시카고 디펜더"의 칼럼에서 틸에게 헌정했다. 그웬돌린 브룩스는 1960년에 "미시시피를 배회하는 브론즈빌 어머니. 한편, 미시시피 어머니는 베이컨을 굽는다"(A Bronzeville Mother Loiters in Mississippi. Meanwhile, A Mississippi Mother Burns Bacon)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죄로 기소된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가 주변의 중상을 받으면서도 직무를 수행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밥 딜런은 1962년에 "에밋 틸의 죽음"을 녹음했다.

6. 1. 언론의 논조 변화

에밋 틸 피살 사건에 대한 초기 보도는 국제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주요 국제 도시의 신문, 종교 및 사회주의 출판물은 평결에 대한 비판과 미국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보도했다.[246] 특히 미시시피의 남부 신문들은 법원 시스템이 제 역할을 다했다고 옹호했다.[246]

1955년 10월, 《잭슨 데일리 뉴스(Jackson Daily News)》는 틸의 아버지 루이스 틸에 대한 억압된 사실을 보도했다. 루이스 틸은 이탈리아에서 복무하던 중 여성 2명을 강간하고 3번째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군사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8] 미시시피 상원 의원 제임스 이스트랜드와 존 C. 스테니스는 육군 기록을 조사하여 루이스 틸의 범죄를 밝혀냈다. 이 보도는 에밋 틸의 행동과 캐롤린 브라이언트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8]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보호받는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1956년 《Look 매거진》과 인터뷰를 통해 틸을 살해했음을 자백했다.[249] 이 인터뷰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시민권 운동가들은 연방 정부에 사건 재조사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1957년 시민권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194]

윌리엄 포크너는 1956년 "공포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미시시피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253]

6. 2. 미국 사회의 반응

이 사건은 흑인 사회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민권운동이 남부 전역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이 사건은 미국 배심원제가 소수 인종에게 불리하다는 문제점을 전면에 드러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288] 같은 해 1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로자 파크스가 버스 흑백분리에 저항하였고, 이후 1년여 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확산되었다.[286]

주요 국제 도시의 신문과 종교 및 사회주의 출판물은 평결에 대한 분노와 미국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보도했으며, 특히 미시시피의 남부 신문들은 법원 시스템이 제 역할을 다했다고 썼다.[246] 틸의 이야기는 재판 이후 몇 주 동안 계속해서 뉴스에 등장하며, 신문, NAACP 및 다양한 고위급 인종 분리주의자들 사이에서 흑인에 대한 정의와 짐 크로 법 사회의 적절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1955년 10월, 《잭슨 데일리 뉴스(Jackson Daily News)》는 틸의 아버지 루이스 틸에 대한 미국 군대에 의해 억압된 사실을 보도했다. 루이스 틸은 이탈리아에서 복무하던 중 여성 2명을 강간하고 3번째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1945년 7월 피사 인근에서 육군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매미 틸-브래들리와 그녀의 가족은 루이스가 "고의적인 비행"으로 살해되었다는 말만 들었기에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미시시피 상원 의원 제임스 이스트랜드와 존 C. 스테니스는 육군 기록을 조사하여 루이스 틸의 범죄를 밝혀냈다. 에밋 틸 살인 재판은 끝났지만, 그의 아버지에 대한 뉴스는 1955년 10월과 11월 몇 주 동안 미시시피 신문의 머리 기사로 보도되었다. 이는 에밋 틸의 행동과 캐롤린 브라이언트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247]

이중 처벌 금지 원칙에 의해 보호받는 브라이언트와 밀람은 1956년 《Look》 잡지와 3,600달러에서 4,000달러 사이의 금액으로 저널리스트 윌리엄 브래드포드 휴이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인터뷰는 브라이언트와 밀람을 변호했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휴이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브라이언트와 밀람의 변호사들이 질문을 했다. 두 변호사 모두 이전에 의뢰인들의 살인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휴이에 따르면, 나이 많은 밀람이 젊은 브라이언트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밀람은 틸을 쐈다고 인정했고,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유죄라고 믿지 않았고 잘못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49]

브라이언트와 밀람에 대한 휴이의 인터뷰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들의 뻔뻔한 틸 살해 자백은 저명한 시민권 지도자들이 연방 정부에 사건을 더 철저히 조사하도록 압박하게 했다. 틸의 살인은 1957년 민권법의 의회 통과에 기여했다. 이 법은 개인의 시민권이 침해될 때 미국 법무부가 지역 법 집행 문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26]

주요 해외 도시, 가톨릭, 개신교, 유대인, 사회주의 계열을 포함한 각 언론은 일제히 이 판결에 격분하며 미국의 사회 풍습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미국 남부, 특히 미시시피 주의 신문들은 사법 제도가 그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다고 썼다.[246]

윌리엄 포크너는 "두려움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만약 틸 사건의 실상이 "Look 매거진"의 설명과 같다면: 두 명의 무장한 어른이 어둠 속에서 14세 소년을 납치하여 협박을 위해 끌고 다녔다. 그러나 14세 소년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무기도 없이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무장한 어른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두 사람은 소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도대체 우리 미시시피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253]

에밋 틸은 미디어 문화와 문학 학술 문화에서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랭스턴 휴즈는 이후 "미시시피, 1955년"으로 알려지게 된 "무제 시"를 1955년 10월 1일 "시카고 디펜더"의 칼럼에서 틸에게 헌정했다. 그웬돌린 브룩스는 1960년에 "미시시피를 배회하는 브론즈빌 어머니. 한편, 미시시피 어머니는 베이컨을 굽는다"(A Bronzeville Mother Loiters in Mississippi. Meanwhile, A Mississippi Mother Burns Bacon)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죄로 기소된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가 주변의 중상을 받으면서도 직무를 수행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밥 딜런은 1962년에 "에밋 틸의 죽음"을 녹음했다.

7. 재수사

에밋 틸 살해 사건은 지역 흑인 사회에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법이 그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증가시켰다. 틸의 몇 달 후 아버지가 살해된 델로리스 멜턴 그레샴은 "그 당시에는 '흑인 사냥의 계절'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았죠."라고 말했다.[166]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휴이에게 틸을 살해했다고 인정한 후, 두 사람의 미시시피주에서의 지지 기반은 무너졌다. 그들의 이전 친구와 지지자, 심지어 그들의 방어 기금에 기여했던 사람들까지 그들을 끊었다. 흑인들은 그들의 가게를 보이콧했고, 가게는 파산하여 문을 닫았으며, 은행은 그들에게 농작물 재배를 위한 대출을 거부했다.[26] 밀람은 대출을 확보하고 그에게 임대해 줄 사람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은 후 88 헥타르의 토지와 면화를 심기 위한 4,000달러의 대출을 확보했지만 흑인들은 그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했다. 밀람은 백인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해야 했다.[71]

결국 밀람과 브라이언트는 텍사스주로 이주했지만 그들의 악명은 그들을 따라다녔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계속해서 반감을 샀다. 1961년, 텍사스에서 브라이언트는 탈라해치 카운티 거주자의 차량 번호판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 이름을 들은 거주자는 브라이언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몰고 갔다.[72] 몇 년 후 그들은 미시시피로 돌아왔다.[71]

밀람은 중장비 기사로 일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은퇴해야 했다. 수년에 걸쳐 밀람은 폭행 및 구타, 부도 수표 작성, 도난 신용 카드 사용 등 여러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1980년 12월 31일 61세의 나이로 척추암으로 사망했다.[71]

브라이언트는 텍사스에서 용접공으로 일했지만 시력이 점점 나빠져 이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캐롤린과 이혼했고 1980년에 재혼했다. 브라이언트는 미시시피주 룰빌에 가게를 열었다. 그는 1984년과 1988년 식품 보조금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5년 인터뷰에서 브라이언트는 1956년에 자백했음에도 틸을 살해한 사실을 부인했지만 "에밋 틸이 선을 넘지 않았다면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적 보이콧과 보복을 두려워한 브라이언트는 사생활을 유지하며 사진 촬영을 거부하고 가게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 새로운 세대는 다르며 어두운 밤에 총알에 대해 걱정하고 싶지 않다"고 설명했다.[73] 그는 1994년 9월 1일 63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다.

마미 틸은 진 모블리와 결혼하여 교사가 되었고 성을 틸-모블리로 변경했다. 그녀는 아들의 살해 사건에 대해 계속해서 사람들을 교육했다. 1992년 틸-모블리는 브라이언트가 틸의 살해에 대한 그의 연루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브라이언트는 틸-모블리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틸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주장했고, 아무런 후회도 표현하지 않았으며, "에밋 틸은 죽었습니다. 왜 그냥 죽어있을 수 없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1996년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키스 보챔프는 틸의 시신 공개 사진에 큰 감동을 받아,[58] 틸 살해 사건에 관한 장편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배경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캐롤린 브라이언트 도넘(이 시점에서 재혼한 상태)을 포함하여 14명이나 연루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스 라이트는 "더 가벼운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소년을 데리고 떠나기 직전에 틸이 자신의 앞마당에 있던 사람이라고 확언하는 것을 들었다. 보챔프는 그 후 9년 동안 2003년에 개봉한 ''에밋 루이스 틸의 숨겨진 이야기''를 제작했다.

같은 해 PBS는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의 한 편인 ''에밋 틸 살해 사건''을 방영했다. 2005년 CBS 기자 에드 브래들리는 틸 살해 사건을 조사하는 ''60분'' 보고서를 방영했으며, 그 중 일부에서는 그가 미시시피주 그린빌에 있는 캐롤린 브라이언트의 집을 추적하는 모습이 나왔다.[74]

1991년 스티븐 J. 휘트필드가 쓴 책, 2002년 크리스토퍼 메트리스가 쓴 책, 그리고 이듬해 마미 틸-모블리의 회고록은 모두 살해 사건과 은폐에 누가 연루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21세기의 연방 당국은 탈라해치 강에서 건져낸 시신의 신원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75]

2004년, 미국 법무부(DOJ)는 브라이언트와 밀람 외에 다른 공범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에밋 틸 피살 사건 재수사를 발표했다.[76] 앨라배마 대학교 교수 데이비드 T. 베이토는 틸의 살해 사건이 "케네디 암살 사건과 같은 신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61] 법무부는 민권 운동 당시의 수많은 미결 사건을 조사하여 다른 살인 사건에서도 새로운 증거를 찾기를 희망했다.

틸의 시신은 발굴되었고,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 검시관은 2005년에 부검을 실시했다. 틸의 친척들의 DNA, 틸의 사진과 치아 비교, 인류학적 분석을 사용하여 발굴된 시신이 틸의 시신임이 확인되었다. 심한 두개골 손상, 왼쪽 대퇴골 골절, 양쪽 손목 골절이 있었다. 두개골에서 발견된 금속 파편은 0.45 구경 총에서 발사된 총알과 일치했다.

2007년 2월, 레플로어 카운티 대배심은 주로 흑인 배심원으로 구성되었으며, 흑인 검사인 조이스 차일스가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보챔프가 14명이 틸의 납치 및 살해에 가담했다는 주장에 대한 신뢰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77] 보챔프는 이 결과에 분노했다. 데이비드 T. 베이토와 다큐멘터리 ''프라이즈를 주시하다''의 자료를 작업한 후안 윌리엄스는 역사를 수정하고 다른 미결 사건에서 관심을 돌리려 한 보챔프를 비판했다.[77] 대배심은 캐롤린 브라이언트 도넘에 대한 혐의를 제기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FBI도 대배심도 보챔프가 기소할 수 있는 용의자로 지목한 헨리 리 로긴스가 범죄에 어떤 역할을 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로긴스를 제외하고 보챔프는 그가 연루되었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61]

7. 1. 재수사 결정

2004년, 미국 법무부(DOJ)는 브라이언트와 밀람 외에 다른 공범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에밋 틸 피살 사건 재수사를 발표했다.[76] 앨라배마 대학교 교수 데이비드 T. 베이토는 틸의 살해 사건이 "케네디 암살 사건과 같은 신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61] 법무부는 민권 운동 당시의 수많은 미결 사건을 조사하여 다른 살인 사건에서도 새로운 증거를 찾기를 희망했다.

1996년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키스 보챔프는 틸의 시신 공개 사진에 큰 감동을 받아,[58] 틸 살해 사건에 관한 장편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배경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캐롤린 브라이언트 도넘(이 시점에서 재혼한 상태)을 포함하여 14명이나 연루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스 라이트는 "더 가벼운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브라이언트와 밀람이 소년을 데리고 떠나기 직전에 틸이 자신의 앞마당에 있던 사람이라고 확언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보챔프는 그 후 9년 동안 2003년에 개봉한 ''에밋 루이스 틸의 숨겨진 이야기''를 제작했다.

같은 해 PBS는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의 한 편인 ''에밋 틸 살해 사건''을 방영했다. 2005년 CBS 기자 에드 브래들리는 틸 살해 사건을 조사하는 ''60분'' 보고서를 방영했으며, 그 중 일부에서는 그가 미시시피주 그린빌에 있는 캐롤린 브라이언트의 집을 추적하는 모습이 나왔다.[74]

1991년 스티븐 J. 휘트필드가 쓴 책, 2002년 크리스토퍼 메트리스가 쓴 책, 그리고 이듬해 마미 틸-모블리의 회고록은 모두 살해 사건과 은폐에 누가 연루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21세기의 연방 당국은 탈라해치 강에서 건져낸 시신의 신원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75]

틸의 시신은 발굴되었고,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 검시관은 2005년에 부검을 실시했다. 틸의 친척들의 DNA, 틸의 사진과 치아 비교, 인류학적 분석을 사용하여 발굴된 시신이 틸의 시신임이 확인되었다. 심한 두개골 손상, 왼쪽 대퇴골 골절, 양쪽 손목 골절이 있었다. 두개골에서 발견된 금속 파편은 0.45 구경 총에서 발사된 총알과 일치했다.[266]

2007년 2월, 주로 흑인 배심원으로 구성되고 흑인 검사인 조이스 차일스가 임명한 레플로어 카운티 대배심은 보챔프가 14명이 틸의 납치 및 살해에 가담했다는 주장에 대한 신뢰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보챔프는 그 결과에 분노했다. 데이비드 베이토와 다큐멘터리 ''프라이즈를 주시하다''의 자료를 작업한 후안 윌리엄스는 역사를 수정하고 다른 미결 사건에서 관심을 돌리려 한 보챔프를 비판했다.[77] 대배심은 캐롤린 브라이언트 도넘에 대한 혐의를 제기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FBI도 대배심도 보챔프가 기소할 수 있는 용의자로 지목한 헨리 리 로긴스가 범죄에 어떤 역할을 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로긴스를 제외하고 보챔프는 그가 연루되었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61]

7. 2. 대배심의 결론

2004년 미국 법무부(DOJ)는 밀람과 브라이언트 외에 다른 사람이 에밋 틸 피살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사건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76] 2007년 2월, 레플로어 카운티 대배심은 주로 흑인 배심원으로 구성되었으며, 흑인 검사인 조이스 차일스가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보챔프가 14명이 틸의 납치 및 살해에 가담했다는 주장에 대한 신뢰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77] 보챔프는 이 결과에 분노했다. 데이비드 T. 베이토와 다큐멘터리 ''프라이즈를 주시하다''의 자료를 작업한 후안 윌리엄스는 역사를 수정하고 다른 미결 사건에서 관심을 돌리려 한 보챔프를 비판했다.[77] 대배심은 캐롤린 브라이언트 돈햄에 대한 혐의를 제기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FBI도 대배심도 보챔프가 기소할 수 있는 용의자로 지목한 헨리 리 로긴스가 범죄에 어떤 역할을 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로긴스를 제외하고 보챔프는 그가 연루되었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61]

7. 3. 캐롤린 브라이언트 증언 번복 논란

2017년,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티모시 타이슨은 2008년에 캐롤린 브라이언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주장하며, 브라이언트가 재판에서 했던 증언 일부를 조작했다고 밝혔다.[85][29][88] 타이슨에 따르면, 브라이언트는 틸이 자신의 허리를 잡고 욕설을 했다는 증언을 철회하며 "그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83][84] 당시 배심원들은 브라이언트의 증언을 들을 수 없었지만, 법정 방청객들은 들었다. 변호 측은 유죄 판결이 나올 경우를 대비해 항소의 근거로 브라이언트의 증언을 원했다.[85][86] 2007년 인터뷰에서, 72세의 브라이언트는 식료품점에서 틸과 있었던 나머지 사건들은 기억할 수 없다고 말했다.[85] 타이슨은 브라이언트가 "그 소년이 한 어떤 짓도 그에게 일어난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84] 타이슨은 로이 브라이언트가 캐롤린에게 학대적이었고 "그녀가 남편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분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브라이언트가 강압적인 상황에서 증언을 꾸몄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언트는 밀람을 "지배적이고 잔혹하며 친절하지 않은 남자"라고 묘사했다.[84]

''뉴욕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브라이언트의 증언 일부가 거짓임을 인정한 것은 "미시시피와 같은 곳에서 흑인의 생명이 백인의 거짓말에 희생되었던 방식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광범위한 연방 수사국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인종 차별적 살인 사건에서 왜 아무도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새롭게 제기한다."라고 평가했다.[87] ''뉴욕 타임스''는 틸의 사촌인 휠러 파커의 말을 인용했는데, 파커는 "언젠가 그녀[브라이언트]가 그것을 인정해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녀가 인정한 것은 나에게 중요하며, 약간의 만족감을 준다. 백인의 말이 흑인에 대한 법이었고, 많은 흑인들이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것은 정말로 역사에 대해 말해주며, 흑인들이 그 시절에 무엇을 겪었는지를 보여준다."라고 말했다.[88][89]

그러나 타이슨이 주장한 '철회'는 그가 녹음한 인터뷰 테이프에는 없었다. 타이슨은 "그 부분이 테이프에 없는 것은 테이프 레코더를 세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타이슨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 작성했다고 밝힌 손으로 쓴 메모를 증거로 제시했다.[33]

2018년 3월, 미국 법무부는 새로운 정보로 인해 틸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를 재개한다고 의회에 보고했다.[90][91] 그러나 2021년 12월, 법무부는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를 종결했다고 발표했다.[92][93]

8. 시민권 운동에 미친 영향

에밋 틸 피살 사건은 흑인 사회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민권운동이 남부 전역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288] 이 사건은 미국 배심원제가 소수 인종에게 불리하다는 문제점을 전면에 드러냈다.[288]

같은 해 12월, 로자 파크스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버스 흑백분리에 저항하였고, 이후 1년여 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확산되었다.[286]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주도한 틸을 위한 집회에 로자 파크스가 참석했으며,[105]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했다. 파크스는 이때 "나는 에밋 틸을 생각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106]

이 사건은 미국 남부 흑인들이 겪는 불의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마이리 에버스는 이 사건에 대해 "세상에 항의의 불꽃을 일으켜... 전 세계적인 항의를 촉발하고 미시시피의 인종차별에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고 말했다.[268] 마미 틸은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의 전국 투어에 참여하여 아들의 죽음에 대해 알렸으며, 이는 NAACP의 가장 성공적인 모금 운동 중 하나였다.[270] 언론인 루이스 로맥스는 틸의 죽음을 "흑인 봉기"의 시작으로, 학자 클레노라 허드슨-윔스는 틸을 시민권 운동의 "희생양"으로 묘사한다. NAACP 요원 암지 무어는 틸을 적어도 미시시피에서는 시민권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한다.[271]

1987년 에미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Eyes on the Prize''는 에밋 틸의 살해 사건으로 시작하며, 시민권 운동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자세히 다룬다. 스티븐 휘태커는 틸의 죽음과 재판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미시시피는 국가의 눈에 인종차별의 전형이자 백인 우월주의의 성채가 되었다"고 말한다.[194]

클레이본 카슨에 따르면, 틸의 죽음과 1957년 리틀 록 센트럴 고등학교를 통합하는 학생들에 대한 광범위한 보도는 특히 젊은 흑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273] 무하마드 알리(카시우스 클레이)는 틸의 훼손된 시신 사진을 본 후, 지역 철도 차량 기지를 파괴하여 좌절감을 풀었다.[107]

1963년, 미시시피주 선플라워 카운티 주민 패니 루 해머는 투표 등록을 시도하다 투옥되어 구타를 당했다. 1964년 그녀는 유권자 등록 운동을 이끌었다.[276] 1964년 미시시피 자유의 여름에는 63,000명의 흑인 유권자가 등록되었다.[277]

틸 사건은 남부에서 흑인 차별에 대한 정의의 상징이 되었다. 1955년, "시카고 디펜더(The Chicago Defender)"는 독자들에게 투표를 호소하고 무죄 판결에 반대하도록 독려했다.[269]

틸은 문학과 예술에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기념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76년, 에밋을 기념하는 동상이 덴버에서 제막되었고(동상은 그 후 푸에블로 (콜로라도 주)로 옮겨졌다), 틸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함께 걷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틸의 이름은 시민권 운동 기념관에 새겨져 있다.[278] 1991년에는 시카고 시내 71번가에 "에밋 틸 거리"로 명명되었다.

2007년, 털라해치 군은 틸의 가족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282] 같은 해, 존 루이스는 "'''2007년 에밋 틸, 미해결 시민권 범죄 행위에 관한 법률'''"을 후원했다.[283]

2009년, 워싱턴 D.C.의 은 틸의 관을 입수했다. 관장 로니 번치 3세(Lonnie Bunch III)는 "그것은 앞으로 방문객을 (그 전에) 멈춰서 생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전시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285]

9. 기념 및 유산

1976년 덴버에 틸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묘사한 동상이 공개되었고, 이후 콜로라도주 푸에블로로 옮겨졌다. 1984년 시카고의 71번가 일부 구간이 에밋 틸 로드(Emmett Till Road)로 명명되었고, 2005년에는 71번가 다리가 그의 이름을 기려 명명되었다. 1989년, 틸은 시민권 운동에서 사망한 40명 중 한 명으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시민권 기념관의 화강암 조각에 순교자로 등재되었다. 2000년, 틸을 위한 시위가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행진 35주년을 맞아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열렸다. 그의 어머니 매미 틸-모블리가 참석했다. 2005년, 틸이 다녔던 시카고의 제임스 맥코시 초등학교는 에밋 루이스 틸 수학 및 과학 아카데미로 개명되었다.

2006년, 에밋 틸 기념 고속도로가 그린우드와 미시시피주 투트와일러 사이에 지정되었다. 이 도로는 틸의 시신이 시카고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의 어머니에게 반환되기 위해 기차역으로 옮겨진 경로였다. 이 도로는 H. C. "클라렌스" 스트라이더 기념 고속도로와 교차한다. 같은 해 에밋 틸 기념 위원회가 탤러해치 카운티 감독 위원회에 의해 설립되었다. 2007년, 에밋 틸 기념 위원회는 400명이 참석한 행사에서 틸의 가족에게 공식 사과를 발표했다. 2009년 에밋 틸의 유가족은 에밋 틸의 을 스미스소니언 아프리칸ㆍ아메리칸 역사문화 박물관에 기증했으며, 현재는 전시객들에게 공개되어 있다.[291][292][289]

에밋 틸 기념 고속도로, US 49E, 미시시피주 투트와일러, 2019


2006년에 세워진 에밋 틸을 기리는 첫 번째 고속도로 표지판은 "KKK"로 훼손된 후 검은 페인트로 완전히 덮였습니다.[79] 2007년에는 틸의 린칭과 관련된 장소에 8개의 표지판이 세워졌습니다. 틸의 시신이 발견된 "강가" 표지판은 2008년에 뜯겨 강으로 던져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체 표지판은 그 후 몇 년 동안 100개 이상의 총알 구멍을 받았습니다.[80] 또 다른 대체 표지판이 2018년 6월에 설치되었고, 7월에는 총알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세 명의 미시시피 대학교 학생들은 총을 들고 총알 자국이 있는 표지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후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여 형제회에서 정학 처분을 받았습니다.[81] 2019년에는 네 번째 표지판이 세워졌습니다. 이 표지판은 강철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227kg이고 두께는 2.5cm가 넘으며 제조사 측에서는 파괴할 수 없다고 합니다.[82] 2008년, 틸의 시신이 발견된 그라볼 랜딩의 탤러해치 강 옆에 탤러해치 카운티에 세워진 기념 동판이 도난당해 회수되지 못했다. 이 동판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잦은 파괴 행위의 대상"이었다. 2019년 10월, 227kg이 넘는 무게의 방탄 표지판이 1만 달러가 넘는 비용으로 설치되었다. 2019년 11월, 백인 우월주의자 그룹이 표지판 앞에서 선전 영상을 촬영하다가, 더 많은 파괴 행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새로운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2007년, 조지아주 하원 의원 존 루이스는 해결되지 않은(미제) 시민권 시대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기소하기 위한 계획을 제공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에밋 틸 미해결 시민권 범죄법은 2008년에 법으로 제정되었다. 1955년 틸 살해범들의 재판이 열린 서머의 탤러해치 카운티 법원은 2012년에 복원되어 재개장되었다. 에밋 틸 해석 센터가 길 건너편에 문을 열었고, 지역 사회 센터 역할도 하고 있다. 에밋 틸 기념 프로젝트는 틸의 죽음과 그의 삶을 기리는 관련 웹사이트 및 스마트폰 앱이다. 이 앱은 그와 관련된 미시시피 델타 지역의 51개 장소를 식별한다. 2015년 8월 29일, 센터는 60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2015년,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도서관은 에밋 틸 기록 보관소를 만들었다.

2020년, 국립 역사 보존 신탁은 틸의 장례식이 열린 로버츠 템플 하나님의 교회 (Roberts Temple Church of God in Christ)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역사적인 장소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22년, 미국 상원은 틸과 그의 어머니 매미 틸-모블리에게 의회 금메달을 수여하기로 투표했으며, 미국 하원에서의 동시적 조치를 위해 이 안건을 전달했다. 하원은 2022년 12월 21일에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2022년 3월, 의회는 에밋 틸 반린칭 법을 통과시켰다. 2022년 10월, 틸을 기리는 청동 동상이 미시시피주 그린우드의 레일 스파이크 공원에 공개되었으며, 이 동상은 미시시피주의 부분적인 지원을 받았다. 2023년 7월 25일 (틸의 82번째 생일), 바이든 대통령은 틸과 그의 어머니를 기리는 에밋 틸 및 매미 틸-모블리 국립 기념관을 설립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9. 1. 기념 사업

1976년 덴버에 틸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묘사한 동상이 공개되었고, 이후 콜로라도주 푸에블로로 옮겨졌다. 1984년 시카고의 71번가 일부 구간이 에밋 틸 로드(Emmett Till Road)로 명명되었고, 2005년에는 71번가 다리가 그의 이름을 기려 명명되었다. 1989년, 틸은 시민권 운동에서 사망한 40명 중 한 명으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시민권 기념관의 화강암 조각에 순교자로 등재되었다. 2000년, 틸을 위한 시위가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행진 35주년을 맞아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열렸다. 그의 어머니 매미 틸-모블리가 참석했다. 2005년, 틸이 다녔던 시카고의 제임스 맥코시 초등학교는 에밋 루이스 틸 수학 및 과학 아카데미로 개명되었다.

2006년, 에밋 틸 기념 고속도로가 그린우드와 미시시피주 투트와일러 사이에 지정되었다. 이 도로는 틸의 시신이 시카고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의 어머니에게 반환되기 위해 기차역으로 옮겨진 경로였다. 이 도로는 H. C. "클라렌스" 스트라이더 기념 고속도로와 교차한다. 같은 해 에밋 틸 기념 위원회가 탤러해치 카운티 감독 위원회에 의해 설립되었다. 2007년, 에밋 틸 기념 위원회는 400명이 참석한 행사에서 틸의 가족에게 공식 사과를 발표했다. 2009년 에밋 틸의 유가족은 에밋 틸의 을 스미스소니언 아프리칸ㆍ아메리칸 역사문화 박물관에 기증했으며, 현재는 전시객들에게 공개되어 있다.[291][292][289]

2007년, 조지아주 하원 의원 존 루이스는 해결되지 않은(미제) 시민권 시대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기소하기 위한 계획을 제공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에밋 틸 미해결 시민권 범죄법은 2008년에 법으로 제정되었다. 2008년, 틸의 시신이 발견된 그라볼 랜딩의 탤러해치 강 옆에 탤러해치 카운티에 세워진 기념 동판이 도난당해 회수되지 못했다. 이 동판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잦은 파괴 행위의 대상"이었다. 2019년 10월, 이 넘는 무게의 방탄 표지판이 1만 달러가 넘는 비용으로 설치되었다. 2019년 11월, 백인 우월주의자 그룹이 표지판 앞에서 선전 영상을 촬영하다가, 더 많은 파괴 행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새로운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1955년 틸 살해범들의 재판이 열린 서머의 탤러해치 카운티 법원은 2012년에 복원되어 재개장되었다. 에밋 틸 해석 센터가 길 건너편에 문을 열었고, 지역 사회 센터 역할도 하고 있다. 에밋 틸 기념 프로젝트는 틸의 죽음과 그의 삶을 기리는 관련 웹사이트 및 스마트폰 앱이다. 이 앱은 그와 관련된 미시시피 델타 지역의 51개 장소를 식별한다. 2015년 8월 29일, 센터는 60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2015년,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도서관은 에밋 틸 기록 보관소를 만들었다.

2020년, 국립 역사 보존 신탁은 틸의 장례식이 열린 로버츠 템플 하나님의 교회 (Roberts Temple Church of God in Christ)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역사적인 장소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22년, 미국 상원은 틸과 그의 어머니 매미 틸-모블리에게 의회 금메달을 수여하기로 투표했으며, 미국 하원에서의 동시적 조치를 위해 이 안건을 전달했다. 하원은 2022년 12월 21일에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2022년 3월, 의회는 에밋 틸 반린칭 법을 통과시켰다. 2022년 10월, 틸을 기리는 청동 동상이 미시시피주 그린우드의 레일 스파이크 공원에 공개되었으며, 이 동상은 미시시피주의 부분적인 지원을 받았다. 2023년 7월 25일 (틸의 82번째 생일), 바이든 대통령은 틸과 그의 어머니를 기리는 에밋 틸 및 매미 틸-모블리 국립 기념관을 설립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9. 2. 문화예술 작품

1986년 올버니 대학교에서 상연된 토니 모리슨의 첫 번째 희곡 "꿈꾸는 에밋"(''Dreaming Emmett'')은 에밋 틸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290] 토니 모리슨은 이후 소설 ''솔로몬의 노래''(1977)에서 틸의 죽음을 언급했으며, 1986년에는 틸의 삶과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에밋을 꿈꾸며''를 썼다.[139] 이 연극은 흑인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페미니스트적으로 조명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 복수를 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시각으로 시간을 생각"하면서 영감을 받아 쓰게 되었다.[139][290]

제임스 볼드윈은 1964년 드라마 ''미스터 찰리를 위한 블루스''를 틸 사건을 바탕으로 느슨하게 각색했다. 그는 틸의 살해가 수년 동안 그를 괴롭혔다고 나중에 밝혔다.[137]

1955년 10월 1일, 랭스턴 휴즈는 ''The Chicago Defender''에 실린 자신의 칼럼에 틸에게 헌정하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는 "미시시피—1955"로 알려졌으며 전국적으로 재인쇄되었고, 여러 작가들에 의해 재출판되었다.[136]

1957년 로드 설링이 쓴 ''U.S. 스틸 아워''의 "심판의 날 정오"라는 텔레비전 에피소드는 틸의 살해 사건을 다루었다. 그러나 대본은 틸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살해 피해자가 흑인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수정되었고, 결국 틸 사건과 거의 관련이 없게 되었다.[136]

앤 무디는 자서전 ''미시시피에서 성장하기''에서 틸 사건을 언급하며, 1955년 가을에 처음으로 증오심을 배우게 되었다고 진술했다.[138]

오드레 로드의 시 "잔상"(1981)은 살해와 재판 24년 후 캐롤린 브라이언트를 생각하는 흑인 여성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136]

비비 무어 캠벨의 1992년 소설 ''Your Blues Ain't Like Mine''은 틸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틸에 대한 두 편의 에세이를 썼다. 하나는 재판 전에 쓴 것으로, 미국의 단결을 호소했고, 다른 하나는 1956년 ''하퍼스''에 게재된 "두려움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는 인종 차별의 원칙이 비합리적인 추론에 근거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136]

에밀루 해리스는 2011년 앨범 ''하드 바겐''에 "내 이름은 에밋 틸"이라는 노래를 수록했다.

학자 크리스토퍼 메트리스에 따르면, 틸은 종종 미시시피의 백인들을 괴롭히는 유령으로 문학에서 재구성되어 그들이 악에 연루된 것, 또는 불의에 대한 침묵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137] 2021년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 나무들이 이 주제를 사용한다.[140][141]

2002년 책 ''미시시피 재판, 1955''는 틸의 죽음에 대한 소설화된 이야기이다.

자넬 모네의 2015년 노래 "지옥에서 말하는 것"은 에밋 틸을 포함하여 법 집행 기관과의 만남 또는 인종 폭력으로 사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2016년 예술가 다나 슈츠는 틸의 관 속 사진과 틸의 어머니가 그를 죽은 후에 본 것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 ''열린 관''을 그렸다.[142]

A. C. 빌브루 작사, 스캣맨 크로더스와 램파트가 녹음한 "에밋 틸의 죽음"(1955),[147] 레드 리버 데이브(데이비드 맥에너리)가 TNT 레이블의 트루 스토리 시리즈에서 녹음한 "에밋 틸의 발라드"(1956),[148] 밥 딜런이 작사한 "에밋 틸의 죽음"(1962),[148] 필 옥스가 작사하여 틸을 언급하며 찬양한 "너무 많은 순교자들"(1964),[149] 에밀루 해리스의 26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하드 바겐'' 수록곡인 "내 이름은 에밋 틸"(2013), 미국의 블루스 가수 에릭 빕이 작사 및 녹음한 "에밋의 유령"(2021) 등 에밋 틸에게 영감을 받은 다양한 음악들이 있다.[150]

아바 듀버네이가 감독을 맡고 스미소니언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문화 박물관의 의뢰로 제작된 앤솔로지 영화 《8월 28일: 사람들의 하루》(2016)는 8월 28일에 일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의 6가지 중요한 사건을 묘사하며, 이 중에는 틸의 린칭(lynching)이 포함된다.[151]

《내 조카 에밋》(2017)은 틸의 삼촌 모스 라이트가 틸의 살해범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극화한 단편 영화로, 2018년 최우수 단편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152]

《러브크래프트 컨트리》(2020)는 HBO에서 제작한 SF 텔레비전 드라마로, 라이언 힐이 연기한 틸의 허구적인 버전을 2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 다룬다. 특히 "Jig-A-Bobo" 에피소드는 시카고에서 열린 틸의 장례식을 재현했다.[153]

《여성 운동》(2022)은 틸의 삶과 그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활동을 극화한 텔레비전 시리즈이다.[154]

》(2022)은 에밋의 어머니 마미 틸-브래들리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그의 죽음 이후 교육자이자 활동가로서의 그녀의 삶을 그린다.[155]

이 외에도, ''에밋 틸 피살 사건과 그 움직임: 에밋 틸 살인 사건의 이야기''(1985), ''에밋 틸 살인 사건'', ''에밋 루이 틸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2005), ''눈은 정의를 향해'' 등 다양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루이스 노르단의 저서 ''울프 휘슬''(1993),[156] 크리스 크로우의 청소년 소설 ''미시시피 재판, 1955''(2003),[157] 데이비드 바의 극작품 ''미시시피 주와 에밋 틸의 얼굴''(2005), 마릴린 넬슨의 시 ''에밋 틸을 위한 화환''(2005), 다니엘 블랙의 소설 ''성스러운 장소''(2007),[158] Ifa Bayeza의 뮤지컬 ''에밋 틸의 발라드''(2008),[159] 재닛 랭하트의 극작품 ''앤과 에밋''(2009),[160][161] 버니스 L. 맥패든의 소설 ''물의 집합''(2012),[162] 리사 휘팅턴의 그림 ''에밋 틸: 그녀가 그를 보낸 방법과 그가 그를 데려온 방법''(2012), 주얼 파커 로즈의 청소년 소설 ''유령 소년들''(2018),[164] 퍼시벌 에버렛의 ''나무들''(2021) 등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에밋 틸 사건을 다루고 있다.

9. 3. 에밋 틸의 관

2009년 에밋 틸의 은 스미스소니언 아프리칸ㆍ아메리칸 역사문화 박물관에 기증되어[291][292] 현재 전시객들에게 공개되어 있다.[289] 로니 번치 III 스미소니언 협회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 역사 문화 박물관 관장은 "에밋 틸의 이야기는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이며, "중요한 요소는 관"이라고 언급했다.[135]

2005년 범죄 재수사 과정에서 틸의 유해는 발굴되어 부검 및 DNA 분석을 거쳐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후 틸은 새 관에 다시 안치되었고,[133] 2009년 원래 유리 덮개 관은 묘지 내 낡은 창고에서 녹슨 채 발견되었다. 관은 변색되고 내부 천은 찢어졌으며, 유리 덮개는 온전했지만 동물들이 그 안에서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134] 스미소니언 협회의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 역사 문화 박물관은 한 달 뒤 워싱턴 D.C.에서 관을 인수했다.[135]

10. 주요 참고 자료


  • 데버리 S. 앤더슨, ''에밋 틸: 세상을 충격에 빠뜨리고 시민권 운동을 촉진한 살인사건'' (미시시피 대학교 출판부, 2015).
  • 데이비드 베이토, 린다 베이토, ''블랙 매버릭: T. R. M. 하워드의 시민권과 경제력 투쟁'' (일리노이 대학교 출판부, 2009).
  • 클레이본 카슨, 데이비드 가로우, 제럴드 길, 빈센트 하딩, 달린 클라크 하인 (편집), ''눈으로 보는 투쟁: 흑인 자유 투쟁의 문서, 연설 및 직접 보고서, 1954–1990'' (바이킹, 1991).
  • 연방 수사국, ''에밋 틸 관련 수사 검토 보고서'' (2006년 2월 9일).
  • 엘리엇 건, ''무하마드 알리, 국민의 챔피언'' (일리노이 대학교 출판부, 1998).
  • 헨리 햄튼, ''자유의 목소리: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민권 운동 구술사'' (밴텀 북스, 1990).
  • 데이비스 하우크, 매튜 그런디, ''에밋 틸과 미시시피 언론'' (미시시피 대학교 출판부, 2008).
  • 필립 C. 콜린, "에밋 틸의 유산", ''사우스턴 분기'' (2008년 여름), 45권, 4호, 6-8쪽.
  • 크리스토퍼 메트리스, ''에밋 틸의 린칭: 다큐멘터리 내러티브'' (버지니아 대학교 출판부, 2002).
  • 매미 틸, 크리스토퍼 벤슨, ''무죄의 죽음: 미국을 바꾼 증오 범죄 이야기'' (랜덤 하우스, 2003).
  • 티모시 B. 타이슨, ''에밋 틸의 피'' (사이먼 앤 슈스터, 2017).
  • 휴 스티븐 휘태커, ''남부 정의에 대한 사례 연구: 에밋 틸 사건'' (석사 논문,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1963).
  • 스티븐 화이트필드, ''델타의 죽음: 에밋 틸 이야기'' (존스 홉킨스 대학교 출판부, 1991).
  • 엘렌 위튼, "에밋 틸 살인 사건 재조명" (윌리엄 윈터 인종 화해 연구소, 2005).
  • 시메온 라이트, 허브 보이드, ''시메온의 이야기: 에밋 틸 납치 사건의 목격자 증언'' (로렌스 힐 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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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뉴스 Woman at center of Emmett Till case tells author she fabricated testimony https://www.theguard[...] 2017-01-27
[33] 간행물 Bombshell quote missing from Emmett Till tape. So did Carolyn Bryant Donham really recant? https://www.clarionl[...] 2018-08-21
[34] 웹사이트 Carolyn Bryant lied about Emmett Till. Did author Tim Tyson lie, too? https://www.mississi[...] 20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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