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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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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규는 임진왜란 시기 활동한 승려이자 승병장이다. 그는 충청도의 사찰에서 승려로 지내다, 스승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저항했다.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으나, 금산 전투에서 안국사 혜경이 지키는 일본군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사후에는 통정대부의 직함을 받았으며, 금산 칠백의총에 그의 승병들과 조헌의 의병들이 기려지고 있다. 박지원의 《연암집》, 황경원의 《강한집》, 조인영의 《운석유고》 등에서 영규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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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허당 영규 진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허당 영규 진영
법명영규(靈圭)
당호기허당(騎虛堂)
출생일1537년
출생지조선 충청도 공주
입적일1592년
입적지조선 전라도 금산
출가갑사
종파선종
직업승려, 의병장
스승서산대사

2. 생애

영규는 충청도에서 승려로 활동했으며, 서산대사의 제자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승병을 조직, 조헌의 의병과 합류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조헌과 함께 수도 탈환을 계획했으나, 장교들의 의견에 따라 안국사 혜경이 이끄는 일본군이 점령한 금산을 공격하기로 한다. 1592년 9월 22일 조헌의 부대가 먼저 공격에 나섰으나 전멸하고, 며칠 뒤 영규의 부대도 공격을 감행했으나 영규를 포함한 대다수가 전사하며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다.[1]

2. 1. 출가와 승려로서의 삶

영규는 충청도의 한 불교 사찰을 이끌었던 승려였다.[1] 1592년, 서산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던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산에 상륙시킨 일본 침략군에 저항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2. 2. 임진왜란 발발과 의병 봉기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서산대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산에 상륙시킨 침략군에 저항하라는 요청을 하였고, 영규는 이 요청을 받고 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저항했다.[1] 영규의 의병군은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청주성을 일본군으로부터 탈환했다.

2. 3. 청주성 탈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영규는 스승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산에 상륙시킨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승병을 일으켰다. 영규의 승병은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1]

2. 4. 금산 전투와 순국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영규는 스승 서산대사의 요청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산에 상륙시킨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여 의병을 조직했다.[1] 영규의 의병대는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청주성을 탈환했다.

조헌과 영규는 수도 탈환을 계획했으나, 장교들의 주장에 따라 안국사 혜경이 요새화하려던 금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592년 9월 22일, 조헌의 군대가 먼저 공격에 나섰으나 지도자를 포함하여 모두 전사했다. 며칠 뒤 영규의 군대도 공격을 시작했으나, 영규 역시 전사하고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다.[1]

2. 5. 조선 조정의 포상

영규는 사후에 조선 조정으로부터 통정대부 직함을 받았다.[1]

2. 6. 금산 칠백의총과 기념 사업

영규의 승병들과 조헌의 의병들은 금산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 위치한 사당에 기념되어 있다.[1] 영규는 사후에 조선 조정으로부터 통정대부 직함을 받았다.[1]

3. 전기 자료

영규 대사의 생애와 관련된 주요 전기 자료는 다음과 같다.

저자저서주요 내용
박지원연암집》 권10, 영규비(靈圭碑)임진왜란 당시 영규의 활약상과 순절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 비문[1]
황경원《강한집》 권9, 영규대사 사절기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의 제자 영규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으나,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실과 그의 충절과 용맹함을 기리는 내용[1]
조인영《운석유고》 권12, 영규대사 순의 비명영규대사의 행적, 의병 활동, 전사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


3. 1. 연암집

영규는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청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행적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박지원의 《연암집》 권10에 실린 영규비(靈圭碑)는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중요한 자료이다.[1]

영규비는 박지원이 영규의 순절 사실을 기록한 비문으로, 임진왜란 당시 영규의 활약상과 순절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청주성 전투에서 영규가 이끄는 승병들이 왜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장면은 비문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1]

이 비문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 속에서 불교계의 역할과 승병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또한, 박지원 특유의 문체와 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1]

3. 2. 강한집

황경원의 《강한집》 권9에 실린 영규대사 사절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1]

영규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청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사절기는 영규대사의 순절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충절과 용맹함을 기리고 있다.

《강한집》에 실린 영규대사 사절기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활약상과 영규대사의 순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청주성 탈환 전투와 금산 전투의 전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3. 3. 운석유고

조인영의 《운석유고》 권12에는 영규대사의 순의를 기리는 비명이 실려 있다. 이 비명은 영규대사의 행적과 의병 활동, 그리고 전사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비명에는 영규대사가 의병을 일으키게 된 배경과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 민중들의 항쟁 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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