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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군 이전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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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산군 이전 묘역은 조선 성종의 13남인 영산군 이전과 그의 후손 묘역으로,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조성되어 묘제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북한산 기슭에 위치하며, 영산군 묘를 중심으로 장흥군, 이경의, 이종의 묘가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영산군 묘역의 문인석과 장명등은 16세기 묘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묘역이 위치한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일대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주변 환경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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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군 이전 묘역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영산군 이전 묘역 정보
영산군 이전 묘역
영산군 이전 묘역
국가대한민국
위치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9, 산103-1
문화재 지정 정보
유형기념물
지정 번호26
지정일2007년 2월 15일
묘역 정보
시대조선시대
소유자이홍구
면적344m2
기수11기

2. 지정 사유

영산군 이전 묘역은 조선 제9대 성종의 13남 영산군 이전(李恮)과 그 아들인 장흥군(長興君) 이상(李祥), 손자 이경의(李鏡義), 증손자 이종(李琮) 등 4대에 걸친 묘역으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묘제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전의 묘역과 문인석, 장명등 등 묘역 내 부착된 석물들은 당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므로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한다.[1]

한편 문화재보호구역은 문화재인 이전 묘역 보호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지역, 즉 진관외동 산7-2 등 2필지, 총 1146m2를 지정하여 동 묘역 주변의 역사・문화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1]

3. 묘역 조성 배경

성종의 13남 영산군 이전과 그 후손들의 묘역은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조성되었다. 영산군 이전이 1538년에 세상을 떠나 북한산 기슭에 묻혔고, 증손자인 이종이 1614년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히면서 묘역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묘역은 정북(正北)을 바라보는 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영산군의 묘가 가장 위쪽에 있고, 그 아래로 아들 장흥군, 손자 이경의, 증손자 이종의 묘가 차례대로 단차를 두고 자리하고 있다.

4. 묘역 구성

영산군 이전 묘역은 북한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체 묘역은 정북(正北)을 바라보는 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배치되어 있다. 맨 위쪽에 영산군의 묘가 있고, 그 아래쪽으로 장흥군, 이경의, 이종의 묘가 차례대로 단차를 두고 있다. 각 묘역은 조성 시기에 따라 묘제 양식의 차이를 보인다.

영산군 이전 묘역은 16세기 초반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조선시대 묘제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영산군 이전 묘역의 분묘와 석물들은 당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학술적 가치가 높다.[1]

후손들의 묘역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영산군 이전 묘역을 보호하는 완충 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묘역이 위치한 은평구 진관외동 산47-2와 산47-3 등 2필지(총 1,146m2)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주변 역사·문화 환경이 보존되고 있다.[1]

4. 1. 영산군 이전 묘역

영산군 이전 묘역은 조선 성종의 13남 영산군 이전과 그의 아들 장흥군 이상, 손자 이경의, 증손자 이종 등 4대에 걸친 묘역으로,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조성되어 묘제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묘역은 북한산 기슭에 자리하며, 정북(正北)을 바라보는 오좌자향(午坐子向)이다. 영산군의 묘가 맨 위에 있고, 그 아래로 후손들의 묘가 차례로 단차를 두고 있다.

영산군의 묘는 쌍분삼위장(雙墳三位葬) 형태로, 영산군과 후취(後娶)인 교성군부인 경주 정씨의 합장묘 1기와 금릉군부인 청송 심씨의 묘 1기가 있다. 청송 심씨의 묘는 1970년에 진관사 뒤편에서 이전해 왔다. 분묘 뒤편에는 사성(莎城)이 조성되어 있다.

영산군과 경주 정씨 합장묘 앞에는 1994년에 새로 세운 묘갈이 원래 묘갈의 비좌에 꽂혀 있다. 청송 심씨 묘 앞에는 197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성군과 경주 정씨의 묘갈 1기와 16세기 제작 추정 묘갈 1기가 나란히 있다. 원래 묘갈은 명종 때 좌의정을 지낸 성세창이 갈명(碣銘)을 썼으나, 현재는 비좌(碑座)만 남아있다. 청송 심씨의 묘갈은 이수(螭首), 비신(碑身), 비좌(碑座)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면에는 '金陵郡夫人沈□□□'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은 영산군과 경주 정씨의 묘 앞에만 있다. 혼유석은 직사각형 형태가 2장 붙여져 있고, 상석은 계체석에 걸쳐져 있다. 향로석에는 호족(虎足)이 새겨져 있다.

계체석 아래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망주석은 원수(圓首), 운두(雲頭), 연주(蓮珠), 염의(簾依), 8면 주신(八面柱身), 8면 대석(臺石)이 모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문인석은 좌우 모두 2m가 넘는 큰 규모로,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모습이다. 얼굴은 16세기 문인석의 특징처럼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향좌측 문인석에는 총탄 자국이 있고, 향우측 문인석은 코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장명등은 16세기부터 나타나는 특징적인 형태를 보인다. 사각형 형태이나 개석(蓋石)이 대석(臺石)보다 커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화사석(火舍石)과 대석(臺石)은 한 개의 석재로 되어 있고, 대석 위의 화사석에는 4면에 정사각형 화창(火窓)이 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에 박공(pediment)이 설치되고, 그 위에 연잎을 덮은 모양으로 조각되었으며,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가 설치되어 있다.

이전의 묘역과 묘역 내 분묘, 문인석 등 석물들은 당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4. 2. 장흥군 이상 묘역

장흥군 이상 묘역은 영산군 이전 묘역 아래쪽에 단을 달리하여 자리하고 있다. 묘역에는 분묘 2기가 있는데, 묘갈 기록에 따르면 장흥군 묘를 기준으로 현부인 죽산 안씨 묘가 오른쪽(향좌측)에 조성되어 있다.

장흥군의 원래 묘갈은 비신이 사라지고 복련이 조각된 비좌만 남아있다. 1995년에 새로 세운 묘갈은 분묘와 원래 묘갈 비좌 사이에 있다. 원래 묘갈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는데, 혼유석은 많이 훼손되어 원래 크기를 알기 어렵다. 상석과 향로석은 영산군 이전 묘역의 것들과 유사하다.

상석이 걸쳐진 계체석은 향우측 부분이 토압으로 밀려나온 상태이다. 계체석 아래에는 망주석이 좌우 대칭으로 각각 1기씩 배치되어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문인석이 있으나 왼쪽 문인석은 사라져 없다. 망주석과 문인석은 영산군 묘와 유사하지만 크기는 더 작다. 장명등은 없다.

4. 3. 이경의 묘역

영산군 이전 묘역의 이경의 묘역은 장흥군 묘역 아래에 있다. 묘역에는 2기의 분묘가 있는데, 향좌측(왼쪽)의 분묘가 향우측(오른쪽)보다 크다. 묘갈을 비롯한 석물들은 향좌측 분묘 앞에 집중되어 있다. 1995년에 새로 세워진 묘갈에는 이경의와 신부인(愼夫人) 창원 황씨가 합장되어 있고, 그 오른쪽(향좌측)에는 신부인 곡산 노씨의 묘가 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묘갈과 석물들의 배치를 보면 곡산 노씨의 묘는 향좌측이 아니라 향우측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좌측 묘 앞에는 장흥군 묘역과 비슷하게 원래 묘갈의 비좌(받침돌)가 1995년 묘갈 앞에 있고, 그 앞으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상석과 향로석의 형태는 장흥군 묘역의 것과 유사하다.

계체석 아래쪽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좌우 대칭으로 각각 1기씩 배치되어 있다. 망주석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근래에 설치되었다. 문인석은 장흥군 묘의 문인석과 형태가 유사하지만, 크기는 더 작다.

4. 4. 이종 묘역

이종 묘역에는 분묘 1기가 있는데, 이종과 신부인 현풍 곽씨의 합장묘이다. 묘 앞에는 1995년에 새로 설치된 묘갈이 있고,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혼유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계체석은 설치되지 않았으나, 망주석이 놓인 곳과는 단차가 있다. 상석보다 한 단 아래 좌우로 설치된 망주석은 근년에 설치된 것으로, 이경의 묘역 내의 것과 같은 형태이다. 문인석은 설치되지 않았다.[1]

5. 묘제 변화상

영산군 이전 묘역과 그 후손들의 묘역은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조선시대 묘제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영산군 묘역의 장명등은 16세기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사각형이지만, 지붕돌(개석)이 받침돌(대석)보다 불균형적으로 커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불을 밝히는 곳(화사석)과 대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대석은 허리가 잘록한 사각형(요고형)인데, 윗부분보다 아랫부분이 더 크다. 화사석에는 네 면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창(화창)을 냈다. 지붕은 사모지붕에 박공을 설치하고 연잎을 덮은 모양으로 조각했으며, 꼭대기에는 둥근 장식(보주)을 올렸다. 이러한 형태는 창빈 안씨 묘역, 화의군 묘역, 류홍 묘역 등 16세기 중반에 조성된 다른 묘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영산군 묘역의 문인석은 키가 2m가 넘는 큰 규모로, 금관조복을 착용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얼굴은 실제 사람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반면, 아들 장흥군 묘역에는 장명등이 없고, 망주석과 문인석은 영산군 묘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작다. 손자 이경의 묘역의 문인석은 장흥군 묘의 것과 비슷하지만 더 작다. 증손자 이종 묘역에는 문인석이 없다.

이처럼 영산군 묘역과 후손 묘역의 석물 변화를 통해 16세기에서 17세기로 가면서 묘제가 간소화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영산군 묘역의 문인석과 장명등은 당시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6. 문화재 보호구역

문화재 보호구역은 문화재인 이전(李恮) 묘역 보호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지역, 즉 진관외동 산47-2 등 2필지, 총 1146m2를 지정하여 동 묘역 주변의 역사·문화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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