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카토미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나카토미씨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가 후지와라 성을 받은 후 그의 조카인 나카토미노 오미마로가 잠시 이었던 씨족이다. 이후 오미마로의 아들인 오나카토미노 키요마로가 고켄 상황을 지지하며 진고케이운 3년에 '오나카토미 아손'을 하사받고 정2위 우대신까지 올랐다. 헤이안 시대에는 오나카토미씨의 신기백이 쇠퇴하고 시라카와 가문이 이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세 신궁의 제주 및 신기대부를 세습하고 지방 신사의 신직을 장악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나카토미씨 - 후지나미가 (오나카토미씨)
후지나미가는 간메이 천황 시대 나카토미노 렌의 사성을 받은 나카토미 쓰네이와를 가조로 하는 오나카토미씨에서 분가한 가문으로, 에도 시대 쇠퇴 후 후지나미 카게타다 대에 재건을 다짐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후지나미 겐츄는 마필 사육 및 개량에 기여했다. - 오나카토미씨 - 오나카토미노 요리모토
오나카토미노 요리모토는 헤이안 시대의 오오나카토미 씨 가문 출신 귀족이자 가인으로, 신기관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스자쿠 천황 시대에는 이세 신궁 제주를 겸임했고, 무라카미 천황 시대에는 다이조사이 제주로서 공을 인정받아 승진했으며, 우다 상황의 신임을 받으며 가인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 일본의 씨족 - 마쓰다이라씨
마쓰다이라씨는 기원이 불분명하나 세이와 겐지 닛타씨의 후예로 여겨지기도 하고 가모씨나 스즈키씨의 일족일 가능성도 있으며 미카와국 유래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의 무가로, 14세기경 미카와 마쓰다이라 마을에 세력을 확립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하고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다. - 일본의 씨족 - 시마즈씨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오나카토미씨 | |
---|---|
기본 정보 | |
씨족명 | 오나카토미씨 (大中臣氏) |
씨성 | 오나카토미노 아손 (大中臣朝臣) |
출자 | 나카토미씨 (中臣氏) |
씨조 | 오나카토미노 키요마로 (大中臣清麻呂) |
종별 | 신별 (神別) (천신) |
본관 | 야마시로국 (山城国) 등 |
주요 인물 | 오나카토미노 요시노부 (大中臣能宣) 오나카토미노 스케치카 (大中臣輔親) 이세노 타이후 (伊勢大輔) |
후예 | 후지나미가 (藤波家) (공가・화족) 나카씨 (那珂氏) (무가) 나카고리씨 (中郡氏) (무가) 카네야마씨 (金山氏) (무가) 키리무라씨 (桐村氏) (무가) 오마타씨 (小俣氏) (무가) 와이즈미와다씨 (和泉和田氏) (무가) 아이바씨 (饗庭氏) (무가) |
2. 기원 및 성립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후지와라 성을 하사받은 후,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어렸기 때문에 가마타리의 조카이자 데릴사위인 나카토미노 오미마로가 잠정적으로 후지와라씨를 이었다. 훗날 성장한 후히토에게 몬무 천황의 칙령이 내려져 후지와라 성은 가마타리의 적자 후히토와 그 자손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사람은 나카토미씨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오미마로도 나카토미씨로 돌아갔지만, 후히토의 후원으로 주나곤으로 승진했다.
오미마로의 아들 키요마로는 덴표호지 8년(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에서 고켄 상황을 지지하여 진고케이운 3년(769년) 6월에 "오나카토미 아손"을 사성받았다. 기요마로는 정2위, 우대신까지 올랐다.
오나카토미씨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것은 적류로 여겨지는 키요마로의 계통으로, 신기하쿠와 이세 제주를 세습했다. 헤이안 시대의 오나카토미노 요시노부와 그의 아들 오나카토미노 스케치카, 손자 이세노 타이후는 가인으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 중기의 나카토미노 이치시를 마지막으로 나카토미씨(오나카토미씨)의 신기백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시라카와 가문이 신기백을 세습하면서, 이세 제주 및 신기다이후를 세습하게 된다. 또 지방 유력 신사의 신직도 장악하게 된다.
2. 1. 나카토미씨에서 분리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후지와라 성을 하사받은 후,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어렸기 때문에 가마타리의 조카이자 데릴사위인 나카토미노 오미마로가 잠정적으로 후지와라씨를 이었다. 후에 성장한 후히토에게 정식으로 몬무 천황의 칙령이 내려져, 후지와라 성은 가마타리의 적자 후히토와 그 자손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사람은 나카토미씨로 복귀하도록 명했다. 오미마로도 나카토미 성으로 돌아갔지만, 후히토의 후원으로 주나곤으로 승진했다. 오미마로의 아들 기요마로는 덴표호지 8년(764년)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에서 고켄 상황을 지지하며 승진을 거듭하여, 진고케이운 3년(769년) 6월에 "오나카토미 아손"을 사성받았다. 기요마로는 정2위, 우대신까지 올랐다.[1]후에, 나카토미씨의 적류 또는 이에 가깝다고 여겨진 "산몬"(나카토미씨 계도)이라고 불리는 가문이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들 가문에게도 오나카토미씨의 칭호가 허용되었다.[2]
2. 2. 오나카토미 칭호 하사
기요마로는 덴표호지 8년(764년)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에서 고켄 상황을 지지하며 승진을 거듭하여, 진고케이운 3년(769년) 6월에 "오나카토미 아손" 칭호를 하사받았다.[1] 기요마로는 정2위, 우대신까지 올랐다.후에, 나카토미씨의 적류 또는 이에 가깝다고 여겨진 "산몬"(『나카토미씨 계도』)이라고 불리는 가문[1]이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들 가문에게도 오나카토미씨의 칭호가 허용되었다.[2]
3. 주요 인물 및 가계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후지와라 성을 하사받았으나,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어렸기 때문에 가마타리의 조카이자 데릴사위인 나카토미노 오미마로가 잠정적으로 후지와라씨를 이었다. 훗날 성장한 후히토에게 몬무 천황의 칙령으로 후지와라 성이 주어졌고, 다른 사람들은 나카토미씨로 돌아갔다. 오미마로는 나카토미씨로 돌아갔지만 후히토의 후원으로 주나곤까지 승진했다. 오미마로의 아들 기요마로는 덴표호지 8년(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때 고켄 상황 편에 서서 승진, 진고케이운 3년(769년) 6월에 '오나카토미 아손'을 하사받고 정2위 우대신까지 올랐다.[1]
이후 나카토미씨 적류 또는 그와 가깝다고 여겨지는 '산몬'(三門, 나카토미씨 계보)이라는 가문에도 오나카토미씨 성이 허용되었다.[2]
헤이안 시대 중기 나카토미노 지카사다 이후 나카토미씨(오나카토미씨)의 신기하쿠는 사라지고, 시라카와 가문이 신기하쿠를 세습하며 이세 제주 및 신기다이후를 세습, 지방 유력 신사의 신직도 장악했다. 적류 자손은 에도 시대에 후지나미가를 칭했다.
3. 1. 오나카토미노 기요마로 계통
오나카토미씨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것은 키요마로 계통으로, 신기하쿠와 이세 제주를 세습했다. 헤이안 시대 오나카토미노 요시노부, 그의 아들 오나카토미노 스케치카, 손녀 이세노 타이후는 가인으로 업적을 남겼다.인물 | 설명 |
---|---|
오나카토미노 요시노부 | 헤이안 시대 중기의 관인이자 가인. 36가선 중 한 명. |
오나카토미노 스케치카 | 요시노부의 아들. 가인으로 활동. |
이세노 타이후 | 스케치카의 손녀. 뛰어난 가인으로, 궁중에서 활약하며 많은 작품을 남김. |
4. 쇠퇴와 영향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후지와라 성을 하사받은 후,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어렸기 때문에 카마타리의 조카이자 데릴사위인 나카토미노 오미마로가 잠정적으로 후지와라씨를 이었다. 후에 성장한 후히토에게 몬무 천황의 칙령이 내려져 후지와라 성은 카마타리의 적남 후히토의 자손만으로 하고, 다른 사람은 나카토미씨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오미마로도 나카토미씨로 돌아왔지만, 후히토의 후원으로 츄나곤으로 승진했다. 오미마로의 아들인 키요마로는 텐표호지 8년(764년)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때문에 코켄 상황에 등극해 승진을 거듭했고, 진고케이운 3년(769년) 6월에 '오나카토미 아손'을 하사받았다. 키요마로는 정2위 우대신까지 올랐다.[1]
후에 나카토미씨 적류 혹은 그와 가깝다고 여겨지는 '산몬(三門)'(나카토미씨 계보)이라는 집안이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자 이들 집에 대해서도 오나카토미씨의 성이 허용되었다.[1]
오나카토미씨 가운데 가장 힘을 가진 것은 적류로 여겨지는 키요마로의 계통으로, 신기백과 이세 제주를 세습했다.
4. 1. 신기백 세습 중단
헤이안 시대 중기 오나카토미노 지카사다를 마지막으로 나카토미씨(오나카토미씨)의 신기백은 자취를 감추었다.[1] 대신 시라카와 가문이 신기백을 세습하면서, 이세 제주 및 신기대부를 세습하게 되었다.[2] 또한 지방 유력 신사의 신직도 장악하게 되었다.[1]4. 2. 지방 신사 장악
헤이안 시대 중기의 나카토미노 이치시를 마지막으로 나카토미씨(오나카토미씨)의 신기백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시라카와 가문이 신기백을 세습하게 되면서, 이세 제주 및 신기대부를 세습하게 되었다. 오나카토미씨는 지방 유력 신사의 신직도 장악하게 되었다.4. 3. 문화적 영향
오나카토미씨는 헤이안 시대에 오나카토미노 요시노부와 그의 아들 오나카토미노 스케치카, 그의 손자 이세노 타이후 등 뛰어난 가인을 배출하여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1]5. 계보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후지와라 성을 하사받은 후,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어렸기 때문에 가마타리의 조카이자 데릴사위라고도 하는 나카토미노 오미마로가 잠정적으로 후지와라씨를 이었다. 후에 성장한 후히토에게 정식으로 몬무 천황의 칙령이 내려져, 후지와라 성은 가마타리의 적자 후히토와 그 자손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사람은 나카토미씨로 복귀하도록 명했다. 오미마로도 나카토미 성으로 돌아갔지만, 후히토의 후원으로 중납언으로 승진했다. 오미마로의 아들 기요마로는 덴표호지 8년(764년)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에서 고켄 상황을 지지하며 승진을 거듭하여, 진고케이운 3년(769년) 6월에 "오나카토미 아손"을 사성받았다. 기요마로는 정2위, 우대신까지 올랐다.[1]
후에, 나카토미씨의 적류 또는 이에 가깝다고 여겨진 "산몬"(『나카토미씨 계도』)이라고 불리는 가문이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들 가문에게도 오나카토미씨의 칭호가 허용되었다.[2]
오나카토미씨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떨친 것은 적류로 여겨진 기요마로의 계통으로, 진기하쿠와 이세사이슈를 세습했다. 헤이안 시대의 오나카토미노 요시노부와 그의 아들 오나카토미노 스케치카와 그의 손자 이세노 다이스케는 가인으로서도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 중기의 오나카토미노 지카사다를 마지막으로 나카토미씨(오나카토미씨)의 진기하쿠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시라카와가가 진기하쿠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세사이슈 및 진기다이후쿠를 세습하게 되었다. 또한, 지방의 유력 신사의 신직도 장악하게 되었다.
적류 자손은 에도 시대에 후지나미가를 칭하게 되었다.
참조
[1]
문서
三門
[2]
문서
大中臣朝臣
079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