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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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 미키오는 일본의 육상 선수이자 지도자, 스포츠 행정가로,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세단뛰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일본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선수 은퇴 후에도 육상 발전에 기여했으며, 일본 육상 경기 연맹(JAAF) 강화 담당 헤드 코치와 일본 올림픽 위원회(JOC) 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1964년 도쿄 올림픽 육상 경기 일본 대표 총감독을 맡았으며, 와세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기념 시설과 대회가 존재하며, "강한 자는 아름답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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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미키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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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오다 미키오 |
원어 이름 | 織田 幹雄 |
로마자 표기 | Oda Mikio |
출생일 | 1905년 3월 30일 |
출생지 | 히로시마현아키군 가이타 (현재의 가이타정 이나리초) |
사망일 | 1998년 12월 2일 |
사망지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
키 | 167cm (5ft 7in) |
몸무게 | 65kg (143lbs) |
국적 | 일본 |
학력 | |
모교 | 와세다 대학교 |
스포츠 정보 | |
종목 | 육상 경기 |
세부 종목 | 높이뛰기, 멀리뛰기, 세단뛰기 |
소속 클럽 | 와세다 대학교, 도쿄 |
개인 최고 기록 | |
높이뛰기 | 1m 92 (1927년) |
멀리뛰기 | 7m 52 (1931년) |
세단뛰기 | 15m 58 (1931년) |
메달 | |
1928년 암스테르담 | 세단뛰기 금메달 |
극동 선수권 대회 | |
1923년 오사카 | 세단뛰기 금메달 멀리뛰기 금메달 높이뛰기 동메달 |
1925년 마닐라 | 세단뛰기 금메달 |
1927년 상하이 | 세단뛰기 금메달 멀리뛰기 금메달 10종 경기 금메달 |
1930년 도쿄 | 세단뛰기 금메달 멀리뛰기 은메달 장대높이뛰기 은메달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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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링크 |
2. 생애
오다 미키오는 1905년 히로시마현 가이타정에서 태어났다. 1923년 오사카에서 열린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세단뛰기 일본 신기록을 세우고,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도 우승했다.[4] 1924년 파리에서 열린 1924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여 세단뛰기에서 6위를 차지했다.[2]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1928년 하계 올림픽에 다시 참가하여 세단뛰기에서 15.21m의 기록으로 우승, 일본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2] 오다는 “홉・스텝・앤드・점프”라고 불리던 경기 종목을 “삼단뛰기”라고 번역했다.
1931년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했다. 같은 해 세단뛰기 세계 신기록 15.58m를 세웠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일본 육상 팀의 감독 겸 주장을 역임했다.[2]
은퇴 후에는 스포츠 행정에 힘썼으며, 1948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IAAF 기술 위원회에도 참여했다.[2] 1952년 헬싱키 올림픽과 1954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육상 팀 감독을 역임했다.[2]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오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림픽 깃발이 15.21m 높이로 게양되었다.
1964년 올림픽을 위해 요요기에 건설된 400m 육상 트랙인 오다 필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그의 업적은 오다 미키오 기념 국제 아마추어 육상 경기 대회 설립으로 이어졌다.[3] 1965년부터 와세다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76년 올림픽 훈장을 받았고, 1988년 문화공로자로 추대되었으며, 1989년 일본 육상 경기 연맹 명예 회장이 되었다.
2. 1. 유년 시절
1905년(메이지(明治) 38년), 히로시마현 아키군 가이타정(현 가이타정 이나리정)에서 태어났다.[8]가이타신조소학교(현 가이타정립 가이타 소학교)에 입학,[8] 재학 중에 가이타정과 이웃 히로시마시 후나고시촌의 신조소학교 3개교가 합병하여 고즈라 신조고등소학교가 생겨 그 학교를 졸업했다. 고즈라 신조고등소학교의 후신은 히로시마 시립 후나고시 소학교이지만,[22] 이러한 경위에서 오다의 출신 학교는 가이타 소학교로 통일되어 있다.[8] 신조소학교 시절 아키군의 체육대회에서 200m 달리기에서 우승했다. 화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1918년(다이쇼(大正) 7년), 히로시마시 중심부에 있는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중학교(현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타이지 고등학교)에 입학, 같은 해 1학년 때 교내 8마일 마라톤(약 13km)에서 우승했다.[23] 그러나 당시 학교에는 육상부가 없었고, 다리에 자신이 있던 오다는 서일본에서 가장 강했던 축구부에 입부했다. 제4대 일본축구협회 회장인 노즈 겐과 히로시마 카프 설립으로 알려진 다니가와 노보루는 축구부 6년 선배이며, 축구 일본 대표 선수인 후카야마 시즈오는 5년 선배였다. 주발은 왼발이었지만 양발로 공을 찰 수 있었고, 입부 당시에는 경기에 나설 수 없었지만 3학년부터 풀백(DF)이나 왼쪽 윙(FW)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24] 훗날 육상 도약 경기에서도 오다는 이 왼발을[25] 사용하게 되었다.
2. 2. 육상 입문
1918년 히로시마시 중심부에 있는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중학교(현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타이지 고등학교)에 입학한 오다는, 같은 해 1학년 때 교내 8마일 마라톤(약 13km)에서 우승했다.[23] 당시 학교에는 육상부가 없었기에 서일본에서 가장 강했던 축구부에 입부했다.[24] 일본축구협회 회장을 역임한 노즈 켄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설립으로 알려진 타니가와 노보루는 축구부 선배였다. 오다는 왼발을 주로 사용했지만 양발로 공을 찰 수 있었고, 3학년부터 풀백(DF)이나 왼쪽 윙(FW)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경기에 출전했다.[24] 훗날 육상 도약 경기에서도 오다는 이 왼발[25]을 사용하게 되었다.1920년 히로시마 이치중 3학년 때,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육상 십종경기 대표였던 노구치 겐자부로가 히로시마에서 강습회를 열었고, 오다는 이 강습회에 참가했다.[1] 이때 오다는 높이뛰기에서 자신의 키(당시 155cm)보다 높이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를 본 노구치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 육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8]
1921년 히로시마 이치중 4학년 때 육상부(당시 보행부)가 생기면서 축구부를 그만두고 육상부에 입부했다.[1] 당시 강호였던 축구부가 운동장을 점유했기 때문에 구석에서 연습했고,[26] 육상부에는 지도자가 없었기에 서점을 돌아다니며 독학으로 연습했다.[8] 멀리뛰기의 공중 동작이 잘 되지 않아, 집 근처를 흐르는 세노가와를 향해 뛰면서 발의 움직임을 연습했다.[6][7]
1922년 히로시마 이치중 5학년 때, 오사카에서 열린 전국 중등학교 육상 경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교장에게 직접 부탁하여 허락을 받았다.[26] 히로시마 이치중은 오다를 포함한 3명만으로 이 대회에 처음 참가하여[26] 초대 우승을 차지했고, 오다 자신도 높이뛰기와 멀리뛰기에서 우승했다.[26] 한 달 후, 17세 때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서 열린 제6회 극동선수권대회 1차 예선에서 높이뛰기 1m73, 멀리뛰기 6m29의 일본 신기록을 수립했다.[23]
1923년 가정의 경제적 이유로 수업료가 없는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임시교원양성소에 진학했다.[1] 같은 해, 제6회 극동선수권대회에 일본 대표로 처음 선출되었다.[23] 첫 국제 대회 출전이었던 오다는 멀리뛰기, 세단뛰기에서 우승했다.[23] 당시 마이니치 신문은 "일본 제일의 점퍼", "도약의 천재", "점프의 기린아"라고 칭찬했다.[23]
1924년 히로시마 고시 임시교원양성소 2학년 때, 파리 올림픽에 출전했다.[1] 오다는 높이뛰기에서는 예선 탈락했지만, 세단뛰기에서 14m35(일본 신기록)를 기록하여 일본 육상 사상 첫 입상(6위)을 달성했다.[8][1]
2. 3. 올림픽 금메달과 와세다 대학 시절
1924년, 히로시마현 출신 오다는 파리에서 열린 1924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선발되어 멀리뛰기, 높이뛰기, 세단뛰기 세 종목에 모두 참가했다.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는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세단뛰기에서는 14m35(일본 신기록)를 기록하여 일본 육상 사상 첫 입상(6위)을 달성했다.[8][2]
1925년, 오다는 장학금을 받고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하여 와세다대학 경주부에 소속되었다. 경주부에는 히로시마 이치중(현 히로시마 국태사 고등학교)의 선배이자 절친인 오키타 요시오(1923년 입부)와 남부 주헤이(1924년 입부)가 있었다. 특히 남부와는 이후 70년이 넘도록 평생의 절친으로 지내며 서로 돕고 실력을 키워 큰 업적을 남겼다.
1928년, 오다는 1928년 하계 올림픽에 다시 참가했다.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는 다시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8월 2일[29] 세단뛰기에서 15.21m의 기록으로 우승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일본 선수가 되었다.[2] 당시 영어로 “홉・스텝・앤드・점프”(현재는 트리플 점프)라고 불린 경기 종목을 오다가 와세다 대학 시절 경기 대회 프로그램을 만들 때 “삼단뛰기”라고 번역했다.[16][14]
오다의 금메달 시상식과 관련된 일화는 #일화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1929년, 오다는 와세다대 경주부 주장이 되었다.
2. 4. 은퇴 이후
1931년(쇼와 6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 운동부에 소속되었다.[8] 같은 해 제1회 일반 대 학생 육상 경기 대회(신궁)에서 당시 삼단뛰기 세계 기록(15m58)을 수립했다.[31] 오다는 여러 일본 신기록을 갱신했지만, 세계 기록을 갱신한 것은 이 기록뿐이며, 이 기록도 남부가 갱신하게 된다.[31]1932년(쇼와 7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끝난 후, 야마모토 타다오키를 주례로 결혼했다.[32] 이후 부상으로 육상의 최전선에서 물러났으며, 1934년(쇼와 9년) 제34회 일본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에서 높이뛰기 1m85를 뛰어 2위를 차지한 것이 기록상 마지막이었다.
그 후에도 오다는 육상 경기 지도자로 활약했다. 당시에는 지도자가 없었고, 육상 코치는 오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현역 시절인 전쟁 전부터 은퇴 후인 전후에 걸쳐 주로 아사히 신문·마이니치 신문 주최로 남부 등과 함께 현청 소재지를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육상 지도를 위해 전국을 순회했다.
종전 4개월 후인 1945년(쇼와 20년) 12월 9일, 오다의 제안으로 도쿄 대학 경기장에서 경기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육상 경기 애호가들이 모였으며 오다도 높이뛰기에 출전했다. 같은 날, 히라누마 료조를 회장으로 일본 육상 경기 연맹(JAAF) 신조직이 발족되었고, 오다는 JAAF 강화 담당 헤드 코치에 취임했다.
경쟁 육상에서 은퇴한 후, 스포츠 행정에 힘썼으며, 1948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IAAF 기술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헬싱키에서 열린 1952년 하계 올림픽과 마닐라에서 열린 1954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육상 팀 감독을 역임했다.[2] 도쿄에서 열린 196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36년 전 오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림픽 깃발이 정확히 15.21m 높이로 게양되었다.
1964년 올림픽을 위해 요요기에 건설된 400m 육상 트랙인 오다 구장은 오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그의 스포츠 업적은 1967년부터 개최된 연례 육상 경기 대회인 오다 미키오 기념 국제 아마추어 육상 경기 대회의 설립으로 인정받았다.[3]
1965년부터 와세다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76년, 오다는 올림픽 운동 최고 영예인 올림픽 훈장을 수여받았다. 1988년, 오다는 문화공로자로 추대되었고, 1989년에는 일본 육상 경기 연맹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3. 주요 업적
오다 미키오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 모두 일본 육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선수 시절 주요 업적
- 1923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세단뛰기 일본 신기록(17세)을 세우고,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도 우승했다.[4]
-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세단뛰기에서 15.21m로 우승하여 일본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2][9][10][11]
- 1931년 세단뛰기 세계 신기록 15.58m를 수립했다.
은퇴 후 주요 업적
-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육상 팀 감독 겸 주장을 맡았다.[2]
- 1948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2] 국제 육상 경기 연맹(IAAF) 기술 위원회에도 참여했다.[2]
-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954년 아시안 게임 일본 육상 팀 감독을 역임했다.[2]
- 1964년 도쿄 올림픽 육상 경기 일본 대표 총감독을 맡았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림픽 깃발이 15.21m 높이로 게양되었다.[2]
- "홉, 스텝, 앤드 점프"(현재 트리플 점프)를 "삼단뛰기"로 번역했다.[16][14]
- "육상의 신",[16][17] "일본 육상계의 아버지"로[6][14] 불리며, 전후 일본 육상 경기 지도 및 보급에 힘썼다.
- 1949년 전후 스포츠 최초의 국제 경기였던 전미 수영 선수권 대회에 후루하시 히로노신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스포츠계를 시찰했다.
- 1950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에 복귀가 허락되고 IOC에서 올림픽 참가가 허가되자, 헤드 코치로서 올림픽을 위한 강화 체제를 갖추었다.
- 1951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부터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까지 연속으로 육상 경기 일본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3. 1. 선수 경력
오다는 가이타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오사카에서 열린 1923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세단뛰기 일본 신기록을 세웠으며,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도 우승했다.[4] 파리에서 열린 1924년 하계 올림픽 일본 올림픽 팀 선수로 선발되어 세 종목 모두에 참가했다.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는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고, 세단뛰기에서는 6위를 차지했다.[2]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1928년 하계 올림픽에 다시 참가했다.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 다시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세단뛰기에서 15.21m의 기록으로 우승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일본 선수가 되었다.[2]
1931년, 오다는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했다. 같은 해 10월 27일, 그는 세단뛰기 세계 신기록 15.58m를 세웠다. 오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32년 하계 올림픽에서 일본 육상 팀의 감독 겸 주장을 역임했다.[2]
경쟁 육상에서 은퇴한 후, 그는 스포츠 행정에 힘썼으며, 1948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IAAF 기술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헬싱키에서 열린 1952년 하계 올림픽과 마닐라에서 열린 1954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육상 팀 감독을 역임했다.[2]
1925년, 장학금을 받고 제1 와세다 고등학원(현 와세다대학 고등학원)에 진학하여 와세다대학 경주부에 소속되었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후에 "일본 레슬링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다 이치로(八田一朗)는 그보다 한 학년 아래였고, 역시 같은 고향 출신으로 후에 일본수영연맹 회장이 되는 후지타 아키라(藤田明)도 후배였다. 경주부에는 히로시마 이치중의 선배이자 절친인 오키타, 그리고 남부 주헤이(南部忠平)가 있었는데, 특히 남부와는 이후 70년이 넘도록 평생의 절친으로, 형제보다 더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지며 서로 갈고 닦아 큰 업적을 남겼다.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경험이 있는 오다였지만, 경주부에서는 1학년 때부터 잡일을 했다. 재학 중, 멀리뛰기와 세단뛰기에서 일본 신기록을 경신했을 뿐만 아니라, 제7회 극동선수권대회 예선에서는 10종 경기에서, 제13회 일본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400m 계주에서 일본 신기록을 수립했다.
1928년, 오키타의 뒤를 따라 와세다대학상학부에 진학했다. 와세다대 경주부에 계속 재적하여, 오키타·남부 등과 함께 경주부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 되었고, 와세다 스포츠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신의 활약과 함께 육상 코치가 없던 시대였기에 나카지마 이타로(中島亥太郎)나 오다를 동경하여 입부한 니시다 슈헤이(西田修平) 등 후배들을 지도했다. 당시 와세다대 경주부 부장이자 같은 해에 발족한 일본대학육상경기연합 초대 회장으로, 후에 1940년 幻의 도쿄 올림픽 유치에 힘썼던 야마모토 타다오키(山本忠興)는 오다를 통해 육상 경기 지식을 습득했다.
같은 해,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출전했고, 올림픽 일본 선수단에는 와세다대 경주부에서 오다 외에도 오키타·남부·오자와·야마구치·스미요시 코사쿠(住吉耕作)·키무라 카즈오(木村一夫)·이누마 세이시치(井沼清七)가 선발되었다. 7월 28일에 열린 높이뛰기에서는 1m88로 8위에 그쳤다. 8월 2일, 세단뛰기가 열렸고, 예선에서 15m21을 기록하여 톱으로 결승에 진출하여, 결국 이 기록으로 '''일본인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은 오다와 수영 남자 200m 평영의 츠루타 요시유키(鶴田義行) 두 사람뿐이었으며, 오다의 메달 획득 6일 후에 츠루타가 획득했다. 당시의 축하연은 국가나 와세다대에서는 열리지 않았고, 고향인 카이다이치정에서 축하해 주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1929년, 와세다대 경주부 주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일선급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전후에도 오다 미키오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인재 육성에 매달렸다.[14] 1948년, 일본올림픽위원회(JOC) 위원에 취임했다. 같은 해 열린 런던 올림픽에는 일본은 아직 참가가 허락되지 않았고, 일본인의 해외 여행도 거의 허락되지 않던 시대였기에, 그는 고향 사람인 마쓰모토 다키조(松本瀧藏) 등의 지원을 받아, 5개월 동안 단신으로 유럽과 미국 육상 경기 대회를 시찰하며 육상 강화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1949년, 전후 스포츠 최초의 국제 경기였던 전미 수영 선수권 대회에 후루하시 히로시(古橋廣之進)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스포츠계를 시찰했다. 거기서 그는 앞으로는 스피드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절감하고 육상계에 제언했으며, 오다의 대학 후배이기도 한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 핫타 이치로(八田一郎)에게도 제언했다. 핫타는 이듬해인 1950년에 미국 레슬링팀을 일본에 초청했다. 그때까지 힘에만 의존하던 일본 레슬링에 미국에서 배운 기술이 더해지면서 일본 레슬링은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다. 같은 해 1949년, 미국체육협회(AAU)의 다니엘 J. 펠리스 사무국장과 GHQ 민간정보교육국(CIE)의 체육관과 협상하여 미국 육상 대표팀과 함께 유럽 순방을 떠나 유럽의 새로운 기술과 세계의 새로운 정세를 흡수했다. 초청받은 스페인에서는 Luis Felipe Areta에게 도약 기술을 지도했다. 후에 아레타는 도쿄 올림픽 남자 멀리뛰기에서 스페인 육상 사상 최초로 입상(6위)을 하자, 스페인 대표팀 단장이었던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오다의 집에 감사 인사를 왔다고 한다.
이러한 해외 여행 경비는 캘리포니아의 프레드 이섬 와다(와다 이사무)(和田勇)와 하와이의 요네야니 카츠미(米谷克巳) 등 미국 거주 일본계 사람들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33] 와다에게는 나중에 그 돈을 돌려주려고 하자, 제2의 고향인 와카야마현의 학교에 기부해 달라고 말하며 돈을 받지 않았다. 제442연대전투단 출신으로 치과의사였던 요네야니에게는, 오다가 런던 올림픽 시찰 전에 들렀던 하와이에서 초라한 정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정장과 모자를 새로 마련해 주었다. 유럽 순방하는 선수 전원의 정장을 선물한 것도 요네야니였다.
1950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에 복귀가 허락되고 IOC에서 올림픽 참가가 허가되자, 오다 헤드 코치가 적절한 코치를 선출하는 형태로 올림픽만을 목표로 하는 강화 체제가 갖춰졌다. 남녀별로 설날 연휴도 반납하고 강화 합숙을 실시했다. 1951년 전후 최초의 해외 원정이 된 뉴델리 아시안 게임부터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까지 연속으로 육상 경기 일본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또한 1951년 7월, 14년 만에 부활시킨 일미 대항전을 전국 12곳에서 18일간 개최했는데, 이 경기 대회는 전후 강화에 크게 기여하여 수십 년의 격차를 1년 만에 만회했다고 한다.
1958년,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이 개장하고, “오다 폴”(후술)이 세워졌다. 같은 해 개최된 도쿄 아시안 게임이 개장 기념 행사가 되었고, 오다는 성화 봉송 최종 주자를 맡아 성화대에 불을 밝혔다.[34]
1959년, 니시다 슈헤이를 대신하여 JAAF(일본육상경기연맹) 강화위원장에 취임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5년간의 강화를 일임받았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입상자 0명이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오다는 중학교체육연맹·고등학교체육연맹·대학연맹·실업단이라는 일관된 틀 위에서의 강화를 생각하고, 강화위원회·지도위원회·연구위원회 3개 위원회가 협력하여 강화에 임한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올림픽 도쿄 대회 선수 강화 지도 본부를 설치하고 본부장을 겸임하여 조직을 통합했다. 강화 지도 본부는 4년간 성공하기 위해 세계의 우수한 코치와 연구자를 초청하여 과학적인 강화법에 도움이 되는 이론과 실천을 배우게 했다. 또한 전임 코치의 설치, 훈련 센터 건설 등의 강화 방침을 결정했다. 특히 세계적인 코치라고 불린 Arthur Lydiard의 마라톤 훈련 방식은 다카하시 스스무와 나카무라 키요시 등에게 큰 영향을 주어, 후일 일본 마라톤계의 번영에 기여했다.
육상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던 같은 고향의 코가케 쇼지를 JAAF 강화 코치로 복귀시키거나, 장대높이뛰기에 출전한 모리타 히사오를 위해 최첨단의 특주품 폴을 올림픽 직전에 미국에 가서 만들게 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육상 강화에 전력을 다했다.
또한 육상 경기 메달 획득을 위해 당시 신체 능력이 뛰어났던 프로야구 입단 전 야구 선수에게 목소리를 걸고 있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곤도 히로시이다. 오다는 "어떻게든 이 녀석을 도쿄 올림픽에 출전시키지 못할까. 출전하면 금메달은 확실하다"며 "400m 허들 선수로 전향해 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구체적인 경기 종목까지 이야기가 진행된 것은 곤도 뿐이었다. 또한 나가시마 시게오는 "네 속도라면 육상 중거리로 전향하면 메달도 꿈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오다는 육상 경기 일본 대표 총감독(JAAF 강화위원장)으로서 지휘를 맡고, 남부가 육상 경기 감독으로 활약했다. 엔도 코키치를 마라톤으로 전향시켜, 오다의 의도대로 엔도, 키무라 켄지, 테라자와 토오루 3명을 마라톤 대표로 선출하여 엔도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3. 2. 지도자 및 행정가 경력
오다 미키오는 일본 육상 경기 연맹과 일본 올림픽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8년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2] 이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기술 위원회에도 참여했다.[2] 1952년 헬싱키 올림픽과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육상 팀 감독을 역임했다.[2]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육상 경기 일본 대표 총감독을 맡았다. 오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림픽 깃발이 15.21m 높이로 게양되었다.[2]
1989년에는 일본 육상 경기 연맹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다.[2]
3. 3. 기타 업적
오다 미키오는 영어로 "홉, 스텝, 앤드 점프"(현재는 트리플 점프)라고 불리던 경기 종목을 "삼단뛰기"라고 번역했다.[16][14] 와세다 대학 시절 경기 대회 프로그램을 만들 당시 오다가 "삼단뛰기"라고 번역했다.오다는 “'''일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아시아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9][10][11] 오다의 금메달 획득으로 일본 육상은 단숨에 세계 정상급으로 도약했다고 알려져 있다.[12] 삼단뛰기에서는 오다(1928년 올림픽), 남부 주헤이(1932년 올림픽), 다지마 나오토(1936년 올림픽)가 3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일본의 전통 종목"이라고도 불렸다.[13] 참고로 남부와 오다는 평생의 친구였으며, 다지마는 오다의 영향으로 삼단뛰기를 시작했다.[14][15]
“'''육상의 신'''”[16][17] 또는 “'''일본 육상계의 아버지'''”[6][14]라고 불리며, 전후 일본 전국에서 육상 경기를 지도하고 보급하여 육성하였다.
1948년 일본올림픽위원회(JOC) 위원이 되었다. 1949년 전후 스포츠 최초의 국제 경기였던 전미 수영 선수권 대회에 후루하시 히로노신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스포츠계를 시찰했다. 1950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에 복귀가 허락되고 IOC에서 올림픽 참가가 허가되자, 오다 헤드 코치가 적절한 코치를 선출하는 형태로 올림픽만을 목표로 하는 강화 체제가 갖춰졌다. 1951년 전후 최초의 해외 원정이 된 뉴델리 아시안 게임부터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까지 연속으로 육상 경기 일본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4. 일화
오다는 히로시마현 가이타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오사카에서 열린 1923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세단뛰기 일본 신기록을 세웠고, 멀리뛰기와 높이뛰기에서도 우승했다.[4] 1924년 하계 올림픽과 192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1928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일본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2]
193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일본 육상 팀의 감독 겸 주장을 역임했다.[2] 은퇴 후에는 스포츠 행정에 힘썼으며,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 IAAF 기술 위원회에 참여했다. 1952년 하계 올림픽과 1954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육상 팀 감독을 역임했다.[2]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오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림픽 깃발이 15.21m 높이로 게양되었다. 요요기에 건설된 400m 육상 트랙인 오다 구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그의 업적은 오다 미키오 기념 국제 아마추어 육상 경기 대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3]
1976년, 올림픽 훈장을 수여받았고, 1988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추대되었으며, 1989년에는 일본 육상 경기 연맹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00년, 육상 전문가 패널에 의해 사후 아시아 최고의 남성 선수로 선정되었다.
오다는 아사히 신문 기자로 일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가와모토 노부마사는 요미우리 신문에 입사했고, 야다 기미오는 오다의 진로 상담을 받고 오사카 아사히에 입사했다.[63]
그는 “일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아시아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다.[9][10][11] 삼단뛰기를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이기도 하다. “육상의 신”[16][17] 또는 “일본 육상계의 아버지”[6][14]라고 불리며,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 공로상을 수상했다.
4. 1. 암스테르담 올림픽 시상식 일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오다 미키오가 금메달을 획득했을 당시, 일본은 국력이 약해 다른 나라의 부당한 기록에 항의해도 소용없던 시대였다.[7] 백화점에는 다른 나라 국기는 있었지만 일장기는 없었고, 일본인의 우승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기미가요는 「사자레 이시노(さざれ石の)」 부분부터 흘러나왔다.게양용 일장기조차 없어 담당자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오다는 자신이 가지고 온 큰 깃발을 들고 국기 게양대 위로 뛰어올랐다. 일본어로 "이것을 올려라"라고 말했지만, 상대는 무슨 말인지 몰라 깃발을 받아 게양했다. 그 결과, 오다의 일장기만 다른 깃발보다 네 배나 커 불균형적인 모습이 되었고, 사진에도 남아 있다. 당시에는 시상대가 없었고, 국기를 게양하는 형식으로만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오다가 건넨 깃발은 캐나다 팀이 100m에서 우승한 선수를 깃발로 감싸 함께 들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것을 보고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오다는 남부 주헤이와 함께 몸을 감싸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다.
메달은 은도금 금메달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오다의 메달은 구리로 만들어졌고, 같은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쓰루타 요시유키의 메달은 은으로 만들어져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기실에서 당시 네덜란드 공사였던 히로타 고키와 함께 기미가요를 울면서 불렀다.
다만, "거대한 일장기"에 대해 "조직위원회가 일장기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일화는 스포츠 저널리스트 나카조 가즈오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일본의 우승이 예상 밖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주장한다.[57] 나카조에 따르면, 대회 조직위원회 보고서 사진을 보면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모든 종목" 시상식에서 우승국 국기가 크게 게양되어 금, 은, 동메달 구분을 했다(이 대회에는 아직 시상대가 없었다).[57]
나카조는 오다가 이전 파리 대회에서도 6위 입상을 했고, 메달 획득이 예상 밖이라고 여겨질 만한 선수가 아니었으며,[57] 일본 대사관도 있는 네덜란드에서 조직위원회가 일장기를 조달할 수 없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57]
4. 2.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만남
연합군 최고사령관총사령부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는 전쟁 전에 한 번 만났다.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미국 창던지기 대표 William Neufeld|윌리엄 뉴펠드영어와 알게 되었고,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다시 만났을 때 당시 올림픽 미국 선수단 단장을 맡고 있던 맥아더를 소개받았다.[60] 오다는 종전 후 맥아더가 미국의 장군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뉴펠드는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부(CIE) 체육 담당관으로 일본에 와서 일본 스포츠계 재건에 기여했다.
4. 3.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최종 주자 관련 일화
1964년 도쿄 올림픽 개회식의 성화 봉송 최종 주자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인 1945년 8월 6일에 태어난 당시 19세의 사카이 요시노리였다. 원래 최종 주자 후보는 오다를 포함한 메달리스트들이었으나, 오다는 "전후 세대의 젊은 주자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61]사카이 요시노리가 최종 주자로 선정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오다를 비롯한 JOC 관계자들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인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오다와 마찬가지로 히로시마현 출신이자 당시 아사히 신문 운동부에 소속되어 있던 나카조 카즈오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나카조에 따르면, 당시 최종 주자 선정에 대한 결정권은 아오키 한지 JAAF 이사장, 타케다 쓰네노리 JOC 위원장, 히사토미 타츠오 JOC 고문 3명에게 있었다. 아오키가 젊은 유망주 중에서 독단적으로 사카이를 선택했고, 전 황족이었던 타케다가 이를 승인하자 정부도 승인했다는 것이다. 즉, 선정 과정에서 히로시마 원폭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오다는 선정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나카조는 증언한다.[62]
5. 사후
오다 미키오는 일본 육상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사후에도 여러 형태로 기려지고 있다. 1964년 도쿄에서 열린 196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오다의 올림픽 우승 기록인 15.21m 높이로 올림픽 깃발을 게양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2]
1976년, 오다는 올림픽 운동 최고 영예인 올림픽 훈장을 수여받았다.[2] 1988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추대되었고, 1989년에는 일본 육상 경기 연맹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다.[2] 2000년에는 육상 전문가 패널에 의해 아시아 최고의 남성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2]
오다의 고향인 히로시마현 가이타에서는 그를 '고향이 낳은 영웅'으로 여기며, 그의 삶을 학교 교재로 사용할 정도이다.[8]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의 아부라츠보에서 후지사와의 구게누마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던 오다의 묘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도케이지에 있다.
5. 1. 오다 미키오 기념 국제 육상 경기 대회
1967년부터 히로시마 광역공원 육상경기장에서 매년 개최되는 육상 경기 대회이다.[3] 정식 명칭은 '''오다 미키오 기념 국제 육상 경기 대회'''이다.5. 2. 오다 폴

- '''오다 폴''' - 1928년 암스테르담 하계 올림픽에서 일본인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오다 미키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립 가스미가오카 경기장 육상 경기장 개장년도인 1958년에 트랙 안에 우승 기록과 같은 길이인 15.21m의 폴이 세워졌다.[16] 이 오다 폴은 2013년 구 국립 가스미가오카 경기장 육상 경기장 해체와 함께 아지노모토 나쇼날 트레이닝 센터(도쿄도기타구니시가오카)로 이전되었다.[51]
- '''오다 마키오 기념 폴(오다 폴)''' - 히로시마 광역공원 육상경기장에도 국립경기장과 같은 크기의 폴이 있다.[25]
5. 3. 기타
오다의 이름을 딴 여러 시설과 상이 존재한다.- '''오다 미키오 기념 국제 육상 경기 대회''' - 히로시마 광역공원 육상경기장에서 매년 4월 말에 개최되는 일본 그랑프리 시리즈 중 하나이다. 젊은 선수들에게 "오다를 본받아라"는 염원을 담은 대회로, 오다가 생존해 있던 1967년부터 개최되고 있다.[3]
- '''오다 미키오 상''' - 전일본 마스터즈 육상 선수권 대회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되는 상이다.[50]
도쿄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있다.
- '''오다 폴''' - 올림픽에서 일본인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오다의 업적을 기념하여,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경기장 개장년도인 1958년에 트랙 안에 우승 기록과 같은 길이인 15.21m의 폴이 세워졌다.[16] 이 오다 폴은 2013년 구 국립 가스미가오카 경기장 육상 경기장 해체와 함께 아지노모토 나쇼날 트레이닝 센터(도쿄도기타구니시가오카)로 이전되었다.[51]
- '''오다 필드''' - 요요기 공원 육상 경기장의 애칭이다.[46]
- '''오다 미키오 기념 육상 경기장''' - 오다의 모교인 와세다 대학교 도세자와 캠퍼스 안에 있는 와세다대학 경주부 연습 그라운드이다. 2005년에 대선배인 오다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개명되었다.[52][53]
오다의 고향인 히로시마현에도 여러 기념물이 있다.
- '''오다 마키오 기념 폴(오다 폴)''' - 히로시마 광역공원 육상경기장에도 국립경기장과 같은 크기의 폴이 있다.[25]
- 오다의 고향 가이타정의 여러 시설의 국기 게양대 메인 폴은 오다의 금메달을 기념하여 높이 15.21m로 만들어졌다.[8] 현재는 오다의 모교인 가이타정립 가이다 초등학교, 가이타 종합공원 내 야구장 및 테니스 코트 3곳에 설치되어 있다.[25]
- 가이타 종합공원에는 오다의 '''공적비'''와, 15.21m 당시의 발자국 3개가 땅에 새겨져 있는 '''기록 체험 존'''이 있다.[25]
- 가이타정 고향 자료관에는 오다의 유품 몇 가지가 전시되어 있다.[25]
- '''오다 마키오 스퀘어''' - 2020년 4월 1일, 구 지바가 저택 남쪽에 가이타 시민회관과 '''오다 마키오 기념관'''의 복합 시설로 개관하였다.[54] JR 가이타역 북쪽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3층 건물 중 2층 100m2 한 칸이 '''오다 마키오 기념관'''이다.[55]
오다는 히로시마 스포츠계가 낳은 명선수 중 으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3] 특히 오다의 고향 가이타정에서는 고향이 낳은 영웅으로 여겨지며, 그의 삶을 학교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8]
2010년 4월, IAAF는 아시아인으로서 개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오다의 위업을 기념하여, 오다의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했다.[9] 이는 츄죠 카즈오[56]가 오다의 말년인 1996년부터 1997년에 걸쳐 인터뷰한 것을, 아들인 오다 마사오 등이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영어로 번역한 책자가 바탕이 되었다.[43]
6. 어록
織田 幹雄|오다 미키오일본어는 일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아시아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다.[9][10][11] 당시 영어로 “홉・스텝・앤드・점프”(현재는 트리플 점프)라고 불린 경기 종목을 “삼단뛰기”라고 번역했다.[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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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田町
20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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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広島一中出身で、元朝日新聞論説委員。そのいずれにおいても織田の後輩に当た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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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オリンピックあれこ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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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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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alina Konopacka Wins First Ever Women's Discus Gold - Amsterdam 1928 Olymp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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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ic.org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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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John Kuck Wins Shot Put Gold With New World Record - Amsterdam 1928 Olymp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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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ic.org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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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跳ぶ足 日本初の金メダリスト・織田幹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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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送番組センター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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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検証昭和報道167 高度成長と東京五輪
朝日新聞
200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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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リンピックあれこ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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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条一雄のスポーツ炉辺端閉話
201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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矢田喜美雄氏とその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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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極OB会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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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Interview with Mikio Oda, first Japanese Olympic gold medal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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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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