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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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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샤 전투는 1514년 9월 8일,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 연합군이 모스크바 대공국 군대를 격파한 전투이다. 스몰렌스크 함락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의 벨라루스 지역 침공에 맞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오르샤 인근에서 결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연합군은 모스크바군의 측면 공격을 격퇴하고 포병과 기병의 협공으로 승리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의 세력 확장은 4년간 멈추었으나, 연합군은 스몰렌스크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이 전투는 16세기 유럽에서 대규모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외교적 선전을 통해 자국의 위상을 높였다. 현대에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등에서 기념되고 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는 자국 역사에서 중요한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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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오르샤 전투
관련 전쟁모스크바-리투아니아 전쟁 (1512-1522)
오르샤 전투 그림 (한스 크렐 작품으로 추정)
"오르샤 전투" 그림 (한스 크렐의 화풍)
날짜1514년 9월 8일
장소벨라루스 오르샤, 리투아니아 대공국 (현재)
결과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
교전국 2모스크바 대공국
지휘관
지휘관 1


지휘관 2이반 첼랴드닌 (포로)
병력 규모
병력 112,000 ~ 35,000명
병력 212,000 ~ 40,000명
사상자
사상자 1알 수 없음
사상자 2사망 및 부상자 13,000 ~ 40,000명 추정

2. 전투 전야

1512년 말, 모스크바 대공국은 현재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인 루테니아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튜튼 기사단의 알브레히트 1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지그문트 1세에게 봉신 서약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의 지원을 받았다.[22]

1514년 7월, 모스크바 군은 스몰렌스크 요새를 함락시켰고,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크리체프, 므스티슬라블, 두브로브나 등의 도시들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맞서 지그문트 1세는 35,000명의 병력을 모아 동쪽으로 진군했다. 이 병력은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잘 훈련된 기병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지기스문트 왕은 4,000-5,000명[22]의 병력을 이끌고 바리사우를 구원하러 떠났고,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가 이끄는 약 30,000명의 주력군은 모스크바군을 격퇴하기 위해 움직였다.[22]

8월 말, 베레지나 강, 보브르 강, 드루트 강에서 몇 차례 소규모 충돌이 있었으나, 모스크바군은 전면전을 피했다. 이후 모스크바군은 오르샤와 두브로브노 사이 크라피브나 강 인근에 진영을 설치했다. 이반 첼랴드닌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이 드네프르 강의 두 다리 중 하나를 건널 것이라고 예상하고 병력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로그스키는 두 개의 부교를 이용해 훨씬 북쪽에서 강을 건넜다. 9월 7일 밤, 오스트로그스키는 16,000명의 리투아니아 기병을 중앙에, 폴란드 보병 대부분과 보조 부대를 양익에 배치하고 결전을 준비했다. 보헤미아와 실레지아 보병은 중앙 전열에 배치되었다.

2. 1. 스몰렌스크 함락

1512년 말, 모스크바 대공국은 오늘날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 해당되는 루테니아의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게 새로운 전쟁을 걸어왔다.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1세 호엔촐레른 폰 브란덴부르크-아나스바흐는 반기를 들고 지기스문트 1세에게 봉신의 의무를 다하길 거절했다. 알브레히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말리안 1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22]

스몰렌스크 요새는 대공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요새였으며, 동쪽으로부터 대공국을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방어지점 중 하나였다. 이 요새는 모스크바군의 공격을 여러 번 격퇴하였으나, 1514년 7월, 모스크바군은 45,000명의 병력과 300문의 대포를 이끌고 요새를 공격했고, 마침내 요새를 함락시켰다. (일부 역사가들은 모스크바군의 군대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래 논쟁 자료를 볼 것.)

Russo-Polish war, image from Jacob Piso ''Die Schlacht von dem Kunig von Poln und mit dem Moscowiter'', 1514

2. 2.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결성

1512년 말, 모스크바 대공국은 오늘날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 해당되는 루테니아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게 새로운 전쟁을 걸어왔다.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1세는 지기스문트 1세에게 봉신의 의무를 다하길 거절하고 반기를 들었다. 알브레히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22]

스몰렌스크 요새는 대공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요새였으며, 동쪽으로부터 대공국을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방어지점 중 하나였다. 1514년 7월, 모스크바군은 이 요새를 함락시켰다.

초전의 승리에 고무된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그의 병력들을 벨로루시로 집결시켜 크리체프, 믄스티슬라브, 두브로브노와 같은 도시들을 공략할 것을 명했다.

이러는 동안 폴란드의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 지기스문트 1세는 동방의 적과 상대하기 위해 약 3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다. 병사들은 수적으로는 불리하였으나, 대부분 잘 훈련된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 휘하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와 폴란드 왕국 군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부대 종류규모구성
리투아니아 대공국 기병대16,000명
폴란드 기병대14,000명중기병, 경기병
용병 보병부대3,000명
자원병2,500명대부분 보헤미아 출신



지기스문트 왕은 벨라루스로 진군하여 4,000-5,000명[22]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바리사우를 구원하기 위해 떠났고, 약 30,000명에 달하는 주력군은 모스크바군을 물리치기 위해 움직였다.[22]

2. 3. 양측의 진군

1512년 말, 모스크바 대공국은 오늘날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 해당되는 루테니아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게 새로운 전쟁을 걸어왔다.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1세는 반기를 들고 지기스문트 1세에게 봉신으로서 의무를 다하기를 거절했다. 알브레히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22]

스몰렌스크 요새는 대공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요새였으며, 동쪽으로부터 대공국을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방어 거점 중 하나였다. 이 요새는 모스크바군의 공격을 여러 번 격퇴하였으나, 1514년 7월, 모스크바군은 45,000명의 병력과 300문의 대포를 이끌고 요새를 공격했고, 마침내 요새를 함락시켰다.

초전의 승리에 고무된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그의 병력들을 벨라루스로 집결시켜 크리체프, 므스티슬라블, 그리고 두브로브노와 같은 도시들을 공략할 것을 명했다.

이러는 동안 폴란드의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 지기스문트 1세는 동방의 적과 상대하기 위해 약 3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다. 병사들은 수적으로는 불리하였으나, 대부분 잘 훈련된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 휘하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와 폴란드 왕국 군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부대 종류규모구성
리투아니아 대공국 기병대16,000명
폴란드 기병대14,000명중기병, 경기병
용병 보병부대3,000명
자원병2,500명대부분 보헤미아 출신



벨라루스로 진군한 지기스문트 왕은 4,000-5,000명[22]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바리사우를 구원하기 위해 떠났고, 약 30,000명에 달하는 주력군은 모스크바군을 물리치기 위해 움직였다.[22] 8월 말, 베레지나 강, 보브르 강, 그리고 드루트 강을 교차하는 곳에서 몇 번의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으나, 모스크바군은 직접적인 결전은 피했다.

사소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모스크바군은 크라피브나 강가에 있는 오르샤와 두브로브노 사이의 지역으로 진군한 다음 진영을 설치했다. 이반 첼랴드닌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이 드네프르 강을 두 개의 다리 중 하나로 건널 것이라 확신하고, 그의 병사들을 분산시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도강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스트로그스키의 군세는 두 개의 부교를 이용해 훨씬 북쪽에서 강을 건넜다. 9월 7일 밤, 모스크바와 최종 결전을 벌일 준비가 되었다. 사령관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는 16,000명의 리투아니아 기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폴란드 보병대 대부분과 보조 부대를 양익에 배치했다. 보헤미아와 실레지아 보병대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기병대로 구성된 예비 부대의 앞인 전열 중앙에 배치하였다.

2. 4. 오르샤 인근의 대치

1512년 말, 모스크바 대공국은 오늘날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 해당되는 루테니아의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게 새로운 전쟁을 걸어왔다.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1세 호엔촐레른 폰 브란덴부르그-아나스바흐는 반기를 들고 지기스문트 1세에게 봉신의 의무를 다하길 거절했다. 알브레히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말리안 1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22]

스몰렌스크 요새는 대공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요새였으며, 동쪽으로부터 대공국을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방어지점 중 하나였다. 이 요새는 모스크바군의 공격을 여러 번 격퇴하였으나, 1514년 7월, 모스크바군은 45,000명의 병력과 300문의 대포를 이끌고 요새를 공격했고, 마침내 요새를 함락시켰다.

초전의 승리에 고무된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그의 병력들을 벨로루시로 집결시켜 크리체프, 믄스티슬라브, 그리고 두브로브노와 같은 도시들을 공략할 것을 명했다.

이러는 동안 폴란드의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 지기스문트 1세는 동방의 적과 상대하기 위해 약 3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다. 병사들은 수적으로는 불리하였으나, 대부분 잘 훈련된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 휘하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와 폴란드 왕국 군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부대 종류규모
리투아니아 대공국 기병대16,000명
폴란드 기병대 (중기병과 경기병 모두 포함)14,000명
용병대로 구성된 보병부대3,000명
자원병 (대부분 보헤미아에서 옴)2,500명



벨라루스로 진군한 지기스문트 왕은 4,000-5,000명[22]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바리사우를 구원하기 위해 떠났고, 약 30,000명에 달하는 주력군은 모스크바군을 물리치기 위해 움직였다.[22] 8월 말, 베레지나, 보브르 그리고 드러트 강을 교차하는 곳에서 몇번의 지엽적 충돌이 벌어졌으나, 모스크바군은 직접적인 결전은 피했다.

사소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모스크바군은 크라피브나 강가에 있는 오르샤와 두브로브노 사이의 지역을 진군한 다음 진영을 설치했다. 이반 첼랴드닌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이 드네프르 강을 두 개의 다리 중 하나로 건널것이라 확신하고, 그의 병사들을 분산시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도강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스트로그스키의 군세는 두개의 부교를 이용해 훨씬 북쪽의 지역에서 강을 건넜다. 9월 7일 밤, 모스크바와 최종결전을 벌일 준비가 되었다. 사령관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는 16,000명의 리투아니아의 기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폴란드 보병대의 거의 대부분과 보조부대를 양익에 배치했다. 보헤미아와 실레지아 보병대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기병대로 구성된 예비부대의 앞인 전열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3. 전투

1514년 9월 8일, 이반 첼랴드닌이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포위하려 했으나, 첫 공격은 실패했다. 첼랴드닌은 수적 우위에 자신감을 가졌지만, 자신의 부대 지휘에만 몰두하여 전체적인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 리투아니아 경기병대가 후퇴하는 척하며 모스크바군을 유인했다. 모스크바 기병대는 숲 속에 숨겨진 포병대의 공격을 받았고, 양 측면에서 나타난 폴란드군에게 포위되었다. 첼랴드닌은 퇴각 명령을 내렸고,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에게 5km 가량 추격당했다.

모스크바군의 패배는 지휘관들의 작전 조율 실패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전략적인 유인책에 기인한다. 지그문트 폰 헤르베르스테인은 40,000명의 모스크바군 전사를,[22] 폴란드 연대기는 30,000명 사망, 3,000명 포로를 기록했다.[22]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모스크바군 진영에서 300문의 대포를 획득했다.[22]

모스크바 군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과 추정치가 엇갈린다. 폴란드 측 기록은 80,000명[9], 40,000명[6] 등 다양한 숫자를 제시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12,000명[5]에서 20,000명[15]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3. 1. 모스크바군의 초기 공세와 실패

1514년 9월 8일 새벽 직후, 이반 첼랴드닌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모스크바군은 폴란드군이 배치된 측면을 공격하여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을 포위하고자 했다. 이 협공은 첼랴드닌과 불가코프-고리차 공작(Prince Bulgakov-Golitsa)이 각각 한 축을 맡아 진행했다. 첫 공격이 실패하자 모스크바군은 원래 위치로 물러났다. 첼랴드닌은 3:1에 가까운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부대의 지휘를 놓쳤고, 예비대로 대기하던 리투아니아 기병대의 반격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22]

리투아니아 경기병대는 지나치게 늘어진 모스크바군 전열 중앙을 공격하여 분산시키려 했다. 결정적인 순간, 리투아니아 기병대가 주춤하는 듯하더니 퇴각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군은 모든 기병 예비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몇 분간 추격을 뿌리치며 퇴각하던 리투아니아군은 갑자기 방향을 전환했다. 모스크바 기병대는 숲 속에 숨겨져 있던 포병대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 측면에서 폴란드군이 나타나 모스크바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첼랴드닌은 공황 상태에 빠진 모스크바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에게 5km 가량을 추격당했다.[22]

모스크바군의 패배는 첼랴드닌과 고리차 공작이 서로의 작전을 조율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22]

지그문트 폰 헤르베르스테인은 40,000명의 모스크바군이 전사했다고 기록했다.[22] 폴란드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오르샤 전투에서 30,000명의 모스크바군이 사망하고, 첼랴드닌과 8명의 다른 사령관을 포함한 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은 모스크바군의 진영을 공격하여 300문의 대포를 획득했다.[22]

3. 2.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반격

1514년 9월 8일, 새벽 직후 이반 첼랴드닌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모스크바군은 폴란드군, 리투아니아 경기병, 그리고 타타르 병력이 배치된 측면을 공격하여 리투아니아군과 폴란드군을 포위하려 했다. 공격의 한 갈래는 첼랴드닌이 직접 지휘했고, 다른 갈래는 불가코프-골리차 공이 지휘했다. 초반 공격은 실패했고, 모스크바군은 출발 위치로 후퇴했다. 첼랴드닌은 거의 3:1에 달하는 유리한 전력이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줄 것이라고 여전히 확신했다. 그러나 모스크바군의 자신의 부대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다른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때까지 예비대로 유지되었던 리투아니아 경기병과 폴란드 중기병의 반격에 대한 방어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경기병대와 타타르족은 모스크바군의 지나치게 확장된 중앙을 공격하여 분열시키려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폴란드 기병은 주춤하는 듯하더니 후퇴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군은 모든 기병대 예비대를 동원하여 추격했다. 러시아군의 추격을 받으며 몇 분간 후퇴하던 리투아니아 타타르족과 폴란드 기병은 갑자기 측면으로 방향을 돌렸다. 모스크바 기병대는 숲 속에 숨겨진 포병과 마주하게 되었다. 양쪽에서 리투아니아군이 나타나 모스크바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반 첼랴드닌은 철수 명령을 내렸고, 곧 약간의 패닉 상태로 번졌다.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에 의해 5킬로미터나 추격당했다.

모스크바군의 패배는 이반 첼랴드닌과 미하일 골리차가 작전을 조율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한 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지기스문트 폰 헤르버슈타인은 4만 명의 모스크바군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7] 폴란드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3만 명의 러시아인이 사망하고 이반 첼랴드닌과 다른 8명의 지휘관을 포함하여 3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군대는 모스크바군 군영과 300문의 대포를 모두 탈취했다.

3. 3. 모스크바군의 궤멸

1514년 9월 8일, 새벽 직후 이반 첼랴드닌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모스크바군은 폴란드군, 리투아니아 경기병, 그리고 타타르족 병력이 배치된 측면을 공격하여 리투아니아군과 폴란드군을 포위하려 했다. 공격의 한 갈래는 첼랴드닌이 직접 지휘했고, 다른 갈래는 불가코프-골리차 공이 지휘했다. 초반 공격은 실패했고, 모스크바군은 출발 위치로 후퇴했다. 첼랴드닌은 거의 3:1에 달하는 유리한 전력이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줄 것이라고 여전히 확신했다. 그러나 모스크바군의 자신의 부대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다른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때까지 예비대로 유지되었던 리투아니아 경 기병과 폴란드 중기병의 반격에 대한 방어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경기병대와 타타르족은 모스크바군의 지나치게 확장된 중앙을 공격하여 분열시키려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폴란드 기병은 주춤하는 듯하더니 후퇴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군은 모든 기병대 예비대를 동원하여 추격했다. 러시아군의 추격을 받으며 몇 분간 후퇴하던 리투아니아 타타르족과 폴란드 기병은 갑자기 측면으로 방향을 돌렸다. 모스크바 기병대는 숲 속에 숨겨진 포병과 마주하게 되었다. 양쪽에서 리투아니아군이 나타나 모스크바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반 첼랴드닌은 철수 명령을 내렸고, 곧 약간의 패닉 상태로 번졌다.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대에 의해 5킬로미터나 추격당했다.

모스크바군의 패배는 이반 첼랴드닌과 미하일 골리차가 작전을 조율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한 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지기스문트 폰 헤르버슈타인은 4만 명의 모스크바군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7] 폴란드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3만 명의 러시아인이 사망하고 이반 첼랴드닌과 다른 8명의 지휘관을 포함하여 3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군대는 모스크바군 군영과 300문의 대포를 모두 탈취했다. 대규모 패배 소식에 충격을 받은 바실리 3세는 "포로들은 죽은 자만큼이나 쓸모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7]

3. 4. 상반된 기록과 논쟁

오르샤 전투에 대한 기록은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양측에서 상반되게 나타나며, 이로 인해 여러 논쟁이 존재한다.

러시아 측 기록은 대패의 영향으로 상세하지 않다. 러시아 제국의 역사가 세르게이 솔로비오프조차 러시아 외 사료에 의존해야 했다. 반면, 폴란드의 지기스문트 1세는 승리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극대화하려 했다. 이 때문에 양측 군대의 규모, 사상자 및 포로 숫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승리 직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베드로사 전투 이후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유럽에 정치적 선전을 시작했다. 로마에는 찬양문이 보내졌고, 모스크바인을 비기독교적이고 야만적인 아시아인으로 묘사하며, 투르크족, 몽골족과 동맹을 맺어 기독교 세계를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23] 헝가리인 현장 증인은 반(反) 모스크바 정서가 도래했다고 하며,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을 가진 모스크바인들이 잔혹한 정교회 군주에게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다.[24][25]

특히, 모스크바 군의 규모(80,000명)는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반 뇌왕 시기에도 40,000명 이상을 동원하기 어려웠으며, 그나마도 20%는 새로 편입된 몽골인과 인이었다. 따라서 30,000명이라는 사상자 수도 의심스럽다.

지기스문트 왕이 교황 레오 10세와 유럽 군주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30,000명의 모스크바인을 죽이고 46명의 사령관과 1,600명의 귀족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문서에는 포로로 잡힌 귀족들의 이름이 611명뿐이다.

모스크바 군대의 규모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리투아니아 측 기록은 대체로 많은 병력을 언급한다. 지그문트 국왕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80,000명의 "모스크바 무리"를 언급했다.[9] 또한 30,000명을 죽이고 지휘관 46명과 귀족 1,5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지만, 현존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문서에는 포로로 잡힌 귀족이 611명뿐이다. 폴란드 역사가 보훈은 지그문트의 주장을 "선전 데이터"로 간주하고 신중한 접근을 요구했다.[6] 젬바로비츠(또 다른 폴란드 연구자)는 모스크바 군 규모를 약 40,000명으로 추정했다. 70,000~80,000명이라는 숫자가 사실이라면, 미하일 글린스키의 편지를 통해 모스크바 군의 우위를 알고 있던 지그문트 국왕이 왜 약 5,000명(군대의 약 15%)의 친위대를 예비대로 유지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모스크바 연대기(노브고로드 법전, 소피아 법전)는 리투아니아 군이 수적으로 우세했다고 주장한다.[5]

러시아 역사가 A. 로빈은 시민들을 군 복무에 동원해야 했던 도시들의 동원 능력을 바탕으로 오르샤 전투 당시 모스크바 군대의 규모를 추정했다.[10] 그는 1563년 폴로츠크 원정 자료를 바탕으로, 타타르족 400~500명, 국왕 연대 귀족 자제 200명,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출신 3,000명, 기타 도시 출신 약 3,600명 등 총 7,200명 정도의 귀족이 있었다고 추정했다. 하인들을 포함하면 모스크바 군대 규모는 13,000~15,000명에 달할 수 있다. 원정 중 손실, 탈영, 스몰렌스크 주둔군 등을 고려하면 오르샤에 있던 모스크바 군대는 약 12,000명으로 줄어들 수 있다.[5] 이러한 계산 방식은 브라이언 데이비스(텍사스 대학교 샌안토니오),[12] 러시아 역사가 N. 스미르노프, A. 판코프, O. 쿠르바토프,[13] М. 크롬,[14] 그리고 V. 펜스코이의 지지를 받았다.[15] 이전 추정치에서도 16세기 초 러시아는 40,000명조차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언급되었다. 비탈리 펜스코이는 러시아 군대 구조를 분석하여 바실리 3세 치하의 가장 큰 군사 원정에서 모스크바 군이 20,00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4. 영향

오르샤 전투는 16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 중 하나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승리는 유럽 내 여러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

승리 직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 전투를 유럽에 선전하는 데 활용했다. 로마에는 모스크바를 야만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세력으로 묘사하며, 튀르크 및 타타르와 동맹을 맺어 기독교를 파괴하려 한다는 내용의 기록들이 보내졌다.[16]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리투아니아-폴란드의 승리에 감명받아 야기에우워 왕조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1515년 7월 22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대항하는 동맹은 해체되었다.[7]

4. 1. 모스크바 대공국의 패배와 그 영향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대패에 분노하여 "포로따위 다 죽어버리는 것이 더 쓸모가 있다."라고 말하며 포로 귀환 협정을 거부했다고 한다. 오르샤 전투는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다. 오스트로그스키의 군대는 궤주하는 모스크바군을 계속 추격하여 므스티슬라블과 크리체프를 포함, 모스크바군에 함락된 도시들을 탈환하였고, 모스크바의 세력 확장은 4년 동안 멈추게 되었다.[22] 그러나 겨울 전에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스몰렌스크를 공략할 수 없었다. 오스트로그스키는 9월 말까지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지 못해 바실리 3세에게 방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주게 되었다.

1514년 11월, 사령관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는 빌니우스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성삼위 성당과 성 니콜라스 성당이 건설되었는데, 이 교회들은 오늘날에도 리투아니아의 정교회 성당 건축의 훌륭한 예로 남아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승리에 감탄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말리안 1세는 빈에서 야기에우오 왕가(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다스리던 왕가)와 평화협상을 시작했고, 1515년 7월 22일 평화협상이 체결되고, 리투아니아-폴란드에 적대하는 동맹 결성은 멈추게 되었다.[7]

리투아니아 대공국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의 싸움은 1520년까지 계속되었다. 1522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스몰렌스크를 포함한 리투아니아 영토의 약 4분의 1 정도를 양도하였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이 도시들은 모스크바의 것이었으며 1611년에야 탈환하게 된다. 1522년의 평화협정 이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한 차례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나, 약 40년 동안 중요한 군사적 교전은 일어나지 않는다.[7]

후사르들이 오르샤 전투(1514)에 참전하는 모습

4. 2. 스몰렌스크 탈환 실패

오스트로그스키의 군대는 패주하는 모스크바군을 계속 추격하여 므스티슬라블과 크리체프를 포함, 모스크바군에 함락된 도시들을 탈환하였고, 모스크바의 세력 확장은 4년 동안 멈추게 되었다.[22] 그러나 겨울 전에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스몰렌스크를 공략할 수 없었다. 오스트로그스키가 9월 말까지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실리 3세에게 방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주게 되었다.

4. 3. 외교적, 정치적 영향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대패에 분노하여 "포로따위 다 죽어버리는 것이 더 쓸모가 있다."라고 말하며 포로 귀환 협정을 거부했다고 한다. 오르샤 전투는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다. 오스트로그스키의 군대는 므스티슬라블과 크리체프를 포함하여 모스크바군에 함락된 도시들을 탈환하였고, 모스크바의 세력 확장은 4년 동안 멈추게 되었다.[22] 그러나 겨울 전에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스몰렌스크를 공략할 수 없었다. 오스트로그스키는 9월 말까지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지 못해 바실리 3세에게 방어 시간을 주었다.

1514년 11월, 사령관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는 빌니우스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성삼위 성당과 성 니콜라스 성당이 건설되었는데, 오늘날에도 리투아니아의 정교회 성당 건축의 훌륭한 예로 남아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승리에 감탄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빈에서 야기에우오 왕가와 평화협상을 시작했고, 1515년 7월 22일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리투아니아-폴란드에 적대하는 동맹 결성은 멈추게 되었다.[22]

리투아니아 대공국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의 싸움은 1520년까지 계속되었다. 1522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스몰렌스크를 포함한 리투아니아 영토의 약 4분의 1정도를 양도하였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이 도시들은 모스크바의 것이었으며 1611년에야 탈환하게 된다. 1522년의 평화협정 이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한 차례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나, 약 40년 동안 중요한 군사적 교전은 일어나지 않는다.[22]

4. 4. 장기적 영향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대패에 분노하여 "포로따위 다 죽어버리는 것이 더 쓸모가 있다."라고 말하며 포로 귀환 협정을 거부했다고 한다. 오르샤 전투는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 오스트로그스키의 군대는 궤주하는 모스크바군을 추격하여 므스티슬라블, 크리체프를 포함, 모스크바군에 함락된 도시들을 탈환하였고, 모스크바의 세력 확장은 4년 동안 멈추게 되었다.[22] 그러나 겨울 전에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스몰렌스크를 공략할 수 없었다. 오스트로그스키는 9월 말까지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지 못해 바실리 3세에게 방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주게 되었다.

1514년 11월, 사령관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는 빌뉴스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성삼위 성당과 성 니콜라스 성당이 건설되었는데, 이 교회들은 오늘날에도 리투아니아의 정교회 성당 건축의 훌륭한 예로 남아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승리에 감탄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빈에서 야기에우오 왕가(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다스리던 왕가)와 평화협상을 시작했고, 1515년 7월 22일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리투아니아-폴란드에 적대하는 동맹 결성은 멈추게 되었다.[22]

리투아니아 대공국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의 싸움은 1520년까지 계속되었다. 1522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스몰렌스크를 포함한 리투아니아 영토의 약 4분의 1 정도를 양도하였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이 도시들은 모스크바의 것이었으며 1611년에야 탈환하게 된다. 1522년의 평화 협정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한 차례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나, 약 40년 동안 중요한 군사적 교전은 일어나지 않는다.[22]

5. 현대의 평가

이 전투는 일부 벨라루스인들에게 국가 부흥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많은 이들이 이를 벨라루스 군사 영광의 날로 간주한다. 1992년 9월 8일, 전투 478주년을 기념하여 민스크 고등 군사 공병 학교와 민스크 고등 군사 지휘 학교(현재 통합된 벨라루스 군사 아카데미)의 사관생도들이 벨라루스군에 대한 최초의 군사 충성 서약을 했으며, 입대식은 국방부 장관 파벨 파블로비치 코즐로프스키가 참석한 가운데 독립 광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후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정권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이 전투의 기념 행사를 적극적으로 억압했다. 2005년 9월, 벨라루스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명령으로 이 전투의 491주년을 기념했던 벨라루스 국가 전선 회원 4명이 거의 (대략 1500EUR)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받았다.

바르샤바 무명 용사의 묘에는 "ORSZA 8 IX 1514"라는 비문으로 오르샤 전투를 기념한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리투아니아 국방부와 리투아니아 정부가 매년 콘서트, 컨퍼런스 및 군사 퍼레이드로 이 전투를 기념한다.

5. 1. 우크라이나의 기념

2014년 10월 14일, 우크라이나 국립 은행은 오르샤 전투 5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주화를 선보였다.[20] 리브네에는 오르샤 승리 거리(Orsha Victory Street)가 있다.[21] --

5. 2.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기념

이 전투는 벨라루스의 민족주의자들에게 벨라루스 국가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벨라루스 당국은 이를 무시했다. 2005년 9월, 벨라루스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명령으로 이 전투의 491주년을 기념했던 벨라루스 국가 전선 회원 4명이 거의 (대략 1500EUR)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받았다.[17][18][19]

이 전투는 일부 벨라루스인들에게 국가 부흥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많은 이들이 이를 벨라루스 군사 영광의 날로 간주한다. 1992년 9월 8일, 전투 478주년을 기념하여 민스크 고등 군사 공병 학교와 민스크 고등 군사 지휘 학교(현재 통합된 벨라루스 군사 아카데미)의 사관생도들이 벨라루스군에 대한 최초의 군사 충성 서약을 했으며, 입대식은 국방부 장관 파벨 파블로비치 코즐로프스키가 참석한 가운데 독립 광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후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정권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이 전투의 기념 행사를 적극적으로 억압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러시아 분쟁의 더 넓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승리로 오르샤 전투를 공개적으로 기념한다. 2014년 10월 14일, 우크라이나 국립 은행은 오르샤 전투 5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주화를 선보였다.[20] 리브네에는 오르샤 승리 거리(Orsha Victory Street)가 있다.[21]

바르샤바 무명 용사의 묘에는 "ORSZA 8 IX 1514"라는 비문으로 오르샤 전투를 기념한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오르샤 전투를 리투아니아 국방부와 리투아니아 정부가 매년 콘서트, 컨퍼런스 및 군사 퍼레이드로 기념한다.

참조

[1] 간행물 К вопросу о численности и составе польско-литовской армии в битве под Оршей в 1514 г. Праблемы інтэграцыі і iнкарпарацыі ў развіцці Цэнтральнай і Усходняй Еўропы ў перыяд ранняга Новага часу. Мінск 2010
[2] 서적 Sławne bitwy Polaków MADA
[3] 서적 Wojskowość polska w okresie odrodzenia [w:] Zarys dziejów wojskowości polskiej do roku 1864, t. I, pod red. Janusza Sikorskiego
[4] 서적 Zygmunt Stary (1506–1548)
[5] 간행물 К вопросу о численности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в XVI в.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6] 뉴스 Bitwa pod Orsza 08.09.1514 Rzeczpospolita 2006
[7] 웹사이트 Oršos mūšis – didžiausia Lietuvos karinė pergalė prieš Rusiją http://www.delfi.lt/[...] 2006-09-08
[8] 서적 Polish battles and campaigns in 13th–19th centuries https://wceo.wp.mil.[...] Wojskowe Centrum Edukacji Obywatelskiej im. płk. dypl. Mariana Porwita Stowarzyszenie Historyków Wojskowości 2016
[9] 간행물 К вопросу о численности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в XVI в.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10] 간행물 К вопросу о численности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в XVI в.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11] 간행물 К вопросу о численности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в XVI в.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12] 간행물 Форум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13] 간행물 Отклик на статью А. Н. Лобина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14] 간행물 Еще раз о численности русского войска в XVI в. (По поводу статьи А. Н. Лобина)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15] 간행물 Некоторые соображения по поводу статьи А. Н. Лобина «К вопросу о численности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XVI в.» Studia Slavica et Balcanica Petropolitana 2009
[16] 서적 A People Born to Slavery: Russia in Early Modern European Ethnography, 1478–1748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17] 웹사이트 Присяга на Площади Независимости! Минск 06 сентября 1992 г. https://www.youtube.[...]
[18] 웹사이트 День, когда Площадь была заполнена солнцем и народом https://charter97.or[...]
[19] 웹사이트 Белорусские офицеры присягнули на верность Родине https://charter97.or[...]
[20] 웹사이트 Нову ювілейну монету презентував український Нацбанк https://tsn.ua/video[...] ТСН 2014-10-14
[21] 웹사이트 Перегляд документа http://www.city-adm.[...] 2016-04-21
[22] 웹사이트 Oršos mūšis – didžiausia Lietuvos karinė pergalė prieš Rusiją http://www.delfi.lt/[...] 2006-09-08
[23] 서적 A People Born to Slavery: Russia in Early Modern European Ethnography, 1478-1748 Cornell University Press
[24] 문서 Ibid.
[25] 문서 Epistola Pisonis ad Ioannem Coritium, de conflictu Polonorum et Lituanorum cum Moscovites. In Ianus Damianus, Iani Damiani Senensis ad Leonem X. Pont. Max. de expeditione in Turcas Egegia. Basel: Ioannes Froben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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