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고등학교 (서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산고등학교는 1907년 남강 이승훈 선생이 민족 교육을 목표로 설립한 학교이다. 일제강점기 민족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으며, 1954년 서울로 이전했다. 축구부를 비롯한 여러 운동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광수, 김소월, 김홍일 등 독립운동가와 문인들을 배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산고등학교 (서울) - 오산고등학교 축구부 (서울)
오산고등학교 축구부 (서울)은 오산학교 시절부터 오랜 역사를 지닌 축구부로, 1921년부터 활동했으며, 해체 후 2012년 FC 서울 U-18 팀으로 재창단되어 K리그 주니어 등 주요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윤시호 감독의 지도 아래 운영되고 있다. - 오산고등학교 (서울) - 오산고등보통학교 축구단
오산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은 일제강점기 초창기에 활동하며 전조선아마추어 축구대회 준우승, 전국체육대회 4강 등의 성적을 거두었고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한민국의 축구팀이다. - 1907년 설립된 단체 - 국제개발연구센터
국제개발연구센터는 개발도상국의 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 기술 및 지식 연구를 지원하며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캐나다의 연구 지원 기관이다. - 1907년 설립된 단체 - 프랑스 문화원
프랑스 문화원은 프랑스 외무부 산하 기관으로, 전 세계에서 프랑스 문화와 언어를 알리고 국제 교류를 증진하며 프랑스어 교육, 문화 소개, 유학 지원 등을 제공한다.
오산고등학교 (서울)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학교 이름 | 오산고등학교 |
한자 표기 | 五山高等學校 |
영어 표기 | Osan High School |
교훈 | 사랑, 정성, 존경 |
개교 | 1907년 |
설립 형태 | 사립 |
학교장 | 양주영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로7길 17 (보광동) |
학생 수 | 422 명 (2024년 5월 1일 기준) |
교직원 수 | 50 명 (2024년 5월 1일 기준) |
상징 | 교목: 잣나무, 교화: 무궁화 |
학교 법인 | 오산학원 |
관할 관청 | 서울특별시교육청 |
웹사이트 | 오산고등학교 |
2. 역사
오산학교는 1907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남강 이승훈에 의해 민족 교육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105인 사건, 삼일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등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해 폐교와 재건을 반복하는 시련을 겪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 세력을 피해 교사와 학생 다수가 월남하였다.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학교를 재건하였고, 1954년 서울특별시로 이전하여 현재의 용산구 보광동에 자리 잡았다. 이후 학교 시설 확충과 교육 제도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1. 설립과 민족 교육 (1907년 ~ 1945년)
1907년 7월 1일, 남강 이승훈은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용동에 소학교 강명의숙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정주군 갈산면 오산리에 중등 교육기관인 오산학교(4년제)를 창립하였다. 1908년 5월 15일 백이행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10년 7월 11일에는 제1회 졸업생 11명을 배출했다.20세기 초,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압박이 강해지는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실업가였던 이승훈은 안창호가 조직한 신민회의 이념에 공감하여 민족 운동과 국민 교육을 위한 인재 육성을 목표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개교 당시 교사 2명, 학생 7명이었으며, 과목은 수신, 역사, 지리, 영어, 산술, 대수, 헌법, 물리, 천문학, 생물, 광물, 노래, 체조, 훈련 등이었다. 기독교에 귀의한 이승훈은 1909년에 교육 이념을 기독교로 정하고 학교를 중학교와 초등학교로 나누었다.
창립자인 이승훈은 민족 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총독부의 주목과 경계를 받는 인물이었다. 한국 병합 이후인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1일에 선포된 독립 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기독교 대표)이 되었다. 삼일운동에서 오산학교는 정주 일대 운동의 거점이 되었으나, 이승훈은 투옥되었고 학교도 폐교되었다.
그러나 1920년 9월 4일, 김기홍 등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재건하고 다시 개교하였다. 이 무렵 학생 수는 200여 명, 교사는 20여 명이었다. 1925년 8월 29일 재단법인 오산학교 인가를 받았고, 초대 재단 이사장으로 남강 이승훈이 취임했다. 1926년 11월, 조선교육령에 근거하여 사립 고등 보통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아 5년제 정규 학교가 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에서도 400명의 학생이 운동에 참여하였고, 1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1930년 5월 이승훈이 사망하였다. 그의 유언으로 “시체를 생리 표본으로 학생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남겼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오산학교 졸업생들이 교원으로 학교에 돌아와 민족 교육을 계승하였다.
1934년 화재로 본관이 소실되었다. 재건을 위해 당시 이사장이었던 김기홍과 주기용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계의 후원과 협력을 얻어 본관, 대강당, 과학관, 체육관, 수영장 등의 근대식 교육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1939년 5월 15일 교명을 '오산중학교'로 개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2월 19일, 오산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혁명단사건으로 체포·투옥되었다.
2. 2. 해방 이후 (1945년 ~ 현재)
해방 이후 이념 대립이 심화되면서, 1947년 5월 23일 당시 교장이던 주기용을 비롯한 교사와 학생 대다수가 공산주의 세력을 피해 월남하였다.한국 전쟁 중인 1952년 3월 1일,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오산학교 재건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듬해인 1953년 4월 25일 부산시 동대신동 산 4번지에 '오산고등학교'로 학교를 다시 세웠다. 같은 해 5월 9일에는 김기홍이 제3대 재단 이사장으로, 주기용이 제18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 4월 16일 정부의 서울 환도에 따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2가 92번지로 학교를 이전하였고, 부산 교정은 분교로 운영되었다. 1955년 2월 28일에는 재건 후 첫 졸업식(통산 제45회)을 거행하였다. 1956년 4월 1일 원효로 교사에서 현재 위치인 보광동 교정으로 다시 이전하면서 부산 분교는 폐쇄되었다.
이후 학교 시설 확충과 교육 제도 변화에 따라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었다.
- 1957년 5월 15일: 본관 교사 낙성식 거행.
- 1958년 1월 21일: 고등학교 9학급으로 증설 인가.
- 1964년 2월 1일: 법인 명칭을 '학교법인 오산학원'으로 변경하고 인가받음.
- 1969년 2월 17일: 중학교 평준화 시책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됨.
- 1971년 12월 20일: 신관 교사 준공.
- 1974년 12월 20일: 서관(과학실, 강당, 체육실, 도서관) 준공.
- 1981년 9월 21일: 학교 야구부 창단.
- 1983년 3월 1일: 동관 교사 준공 및 고등학교 남녀공학 실시.
- 1985년 10월 5일: 야구부 해단.
- 1987년 12월 4일: 사격장 개장.
- 1990년 3월 1일: 고등학교 학급 수를 36학급으로 감축하고, 남녀공학에서 다시 남학교로 전환.
- 2002년 4월 30일: 정보센터 준공.
- 2012년 12월 27일: 학교 축구부 창단 (FC 서울 U-18팀).
- 2013년 5월 7일: 축구부 기숙사 및 인조잔디 구장 준공.
- 2016년 5월 16일: 백석기념도서관 건립.
- 2018년 11월 2일: 학교법인 오산학원 문금복 이사장 취임.
- 2020년 9월 1일: 고등학교 제29대 신부식 교장 취임.
3. 운동부
1907년에 개교한 오산고등학교는 전신인 오산학교 시절부터 축구부를 비롯한 여러 운동부가 존재하였다.
특히 축구부의 경우, 1921년 2월 서울의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3], 1930년대에는 1932년 관서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4] 또한 1934년 평양에서 열린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 중학부에서 준우승을 기록하였다.[5] 이후 1940년대에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대 해체 이후 오랫동안 활동이 없다가, 2012년 FC 서울과 협력하여 축구부가 재창단되었다.
3. 1. 현재 운영 중인 운동부
- 축구부 (FC 서울 U-18팀)
- 사격부
- 수영부
- 골프부
축구부는 2012년 8월 28일 오산학원이 FC 서울과 축구팀 운영에 관한 협약을 체결한 후[1], 같은 해 12월 28일 오산중학교 축구팀과 함께 창단되었다. FC 서울의 U-18팀(18세 이하 유소년팀)으로 운영되고 있다.[2]
4. 저명한 동문
오산학교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을 배출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교육의 산실로서 김억, 김소월, 황순원과 같은 문인, 이중섭과 같은 예술가, 주기철, 함석헌과 같은 종교 및 사상 분야의 인물, 김홍일과 같은 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거쳐갔다.
4. 1. 일제강점기
오산학교는 1907년 12월, 민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이승훈(李昇薫)이 평안북도 정주군에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이다. 20세기 초 일제의 압박 속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졌으며, 설립자 이승훈은 안창호의 신민회 이념에 공감하여 학교를 세웠다. 초기에는 수신, 역사, 지리, 영어, 수학, 과학, 헌법, 체조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1909년에는 기독교 정신을 교육 이념으로 삼았다.설립자 이승훈은 민족 운동가로서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다시 투옥되었고 오산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당시 오산학교는 정주 지역 만세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폐교되었던 학교는 1920년 9월, 김기홍 등의 노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26년에는 조선교육령에 따라 5년제 정규 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학생들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으며, 1929년 광주학생사건 때는 400여 명의 학생이 동조 시위를 벌이다 10여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1930년 설립자 이승훈이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되었다고 전해진다.
1934년에는 화재로 본관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김기홍 이사장과 주기용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계의 후원으로 본관, 강당, 과학관 등 근대적 시설을 갖추며 재건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2년, 오산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투옥되는 '혁명단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오산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특히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맞서다 옥중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김홍일 장군과 같은 독립운동가, 김억, 김소월, 황순원, 이중섭과 같은 문인과 예술가, 함석헌과 같은 사상가들이 이 시기 오산학교를 거쳐갔다.
구분 | 이름 | 주요 활동/분야 | 재학/재직 기간 |
---|---|---|---|
학생 | 김억 | 시인 | 1907년~ |
주기철 | 목사, 독립운동가, 순교자 | 중학부 1916년 졸업 | |
김홍일 | 군인, 독립운동가 | 1913년~1918년 | |
김소월 | 시인 | 중학부 1915년~1919년 | |
최용건 | 북한 정치인 | 중퇴 | |
황순원 | 소설가 | 중학부 1920년 | |
함석헌 | 종교인, 사상가 | 1921년~1924년 | |
문선명 | 종교인 (통일교 창시자) | 초등 과정 중 전학 | |
이중섭 | 화가 | ||
교사 | 이광수 | 소설가 | 1910년~ |
김억 | 시인 | 1916년~ | |
염상섭 | 소설가 | 1920년~ | |
유영모 | 사상가 | ||
함석헌 | 종교인, 사상가 | 1928년~1938년 | |
교장 | 조만식 | 독립운동가 | |
홍명희 | 독립운동가, 작가 |
4. 2. 교사 및 교장
'''교사'''이름 | 주요 분야 | 재직 기간 |
---|---|---|
이광수 | 소설가 | 1910년~ |
김억 | 시인 | 1916년~ |
염상섭 | 소설가 | 1920년~ |
유영모 | 사상가 | |
함석헌 | 종교가 | 1928년~1938년 |
'''교장'''
참조
[1]
웹사이트
FC서울, 오산학원과 유소년 축구팀 협약체결
https://mksports.co.[...]
毎日経済新聞/MKスポーツ
2012-08-28
[2]
웹사이트
FC서울, 오산중·고 축구팀 정식 창단
https://m.sports.nav[...]
조선일보/스포츠조선
2012-12-28
[3]
웹사이트
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축구(1)
http://sports.news.n[...]
[4]
뉴스
關西靑少年蹴球(관서청소년축구) 五山軍(오산군)이優勝(우승)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2-09-02
[5]
뉴스
激戰(격전)을演(연)한各决勝戰(각결승전) 三部(삼부)의優勝(우승)은决定(결정)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4-05-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