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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발도 푸글리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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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발도 푸글리에세는 아르헨티나의 피아니스트이자 탱고 음악가로, 1939년 자신의 악단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그는 정치적 신념을 솔직하게 드러내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로 인해 탄압을 받기도 했으며, 국제적인 활동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푸글리에세는 하층민적인 격렬한 스타카토와 정교한 음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연주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레쿠에르도》, 《라 윰바》 등이 있으며, 그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음악가로 여겨지며 '산 푸글리에세'라는 신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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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발도 푸글리에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스발도 푸글리에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피아노 연주 모습
본명오스발도 페드로 푸글리에세
출생1905년 12월 2일
출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망1995년 7월 25일 (향년 89세)
사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활동 기간1924년–1995년
악기피아노
음악 스타일
장르탱고
밀롱가
왈츠
직업
직업음악가
작곡가
편곡가
레이블
레이블EMI Odeon
관련 활동
협력 아티스트훌리오 데 카로
아니발 트로일로
오스발도 프레스edo
후안 다리엔초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르만도 쿠포
알베르토 모란
미겔 몬테로

2. 생애

그의 아버지 돈 아돌포 푸글리에세(1877–1945)는 아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도록 격려했고, 어머니 아우렐리아 테라그노(1880–1947)는 그가 연습할 때 종종 "¡Al Colón!"("콜론으로!")이라고 속삭였다. 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한 테아트로 콜론을 가리키는 말로, 그곳에서는 그 나라 최고의 예술가들만이 공연을 펼쳤다. 그의 형제들인 아돌포 비센테와 알베르토 로케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마리아 콘셉시온 플로리오와 리디아 엘만, 두 번 결혼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1971년에 사망했고, 피아니스트인 딸 루셀라 델마 "베바" 푸글리에세(1939년 출생)를 두었다.

1936년부터 공산당원이었던 푸글리에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냈고, 공산주의에 대한 공감으로 권력자들의 적대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음악가들의 직업 안정과 임금 인상을 위해 "음악가 및 관련 예술가 협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엔리케 메디나에 따르면, 푸글리에세가 처음 투옥된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페론 정부 시절이 아니라 1939년에 발생했다. 당시 그는 공산당 새 본부 개관식에서 오케스트라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좌파의 명망있는 인물을 투옥하여 반항을 처벌하려 했다"고 한다. 그는 경찰서에서 존경을 받았고, 장교의 사무실에서 마테차를 마시도록 초대받았으며, 며칠 후 석방되었다. 푸글리에세가 감옥에 갇히면, 오케스트라는 피아니스트 없이 연주하며 그의 피아노에 붉은 카네이션을 놓았다. 1956년에는 레볼루시온 리베르타도라 독재 정권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다.

1961년, 그는 쿠바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밀롱가 파라 피델''을 썼다. 1960년대 후반,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정부는 푸글리에세의 라디오 방송과 공공 장소 출입을 금지했다. 푸글리에세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수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1955년에는 데보토 감옥에서 복도를 청소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음반 발매를 연간 10개로 제한하기도 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협동조합으로 조직하고 단원들에게 기여도에 따라 급여를 지급하여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1973년 말, 페론은 푸글리에세를 포함한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조직하고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페론은 푸글리에세에게 "해결하지 못한 작은 문제들에 대해 사과"했고, 푸글리에세는 "모든 것은 이미 잊혀졌다"고 답했다. 페론은 "당신과 같은 위대한 사람만이 용서할 줄 압니다"라고 말했다.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악단은 소련, 중국, 일본 등 세계 각지를 순회 공연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4] 그의 업적에 대해 아르헨티나, 프랑스, 쿠바 정부로부터 높은 문화적 명예를 받았다.[4]

1985년 12월 26일, 푸글리에세는 80세의 나이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1995년 7월 25일, 89세의 나이로 짧은 투병 끝에 사망했다.[2] 그의 장례식은 코리엔테스 거리를 따라 역주행하는 인상적인 운구 행렬과 함께 큰 관심을 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음악 활동 ( ~ 1939년)

그의 아버지 돈 아돌포 푸글리에세(1877–1945)는 그가 더 열심히 노력하도록 밀어붙였고, 어머니 아우렐리아 테라그노(1880–1947)는 그가 연습할 때 종종 "¡Al Colón!"("콜론으로!")이라고 속삭였는데, 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한 테아트로 콜론을 가리키는 말로, 그곳에서는 그 나라 최고의 예술가들만이 공연을 펼쳤다. 그의 다른 형제들인 아돌포 비센테와 알베르토 로케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마리아 콘셉시온 플로리오와 리디아 엘만과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1971년에 사망했고, 그는 딸 루셀라 델마 "베바" 푸글리에세(1939년 출생)를 두었는데, 그녀는 피아니스트였다.

1918년, 그는 인쇄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중퇴했다.[1] 그의 아버지는 마침내 그를 설득하여 콘세르바토리오 오데온에서 안토니오 다고스티노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했다.[1]

그는 19세였던 1924년에 그의 첫 번째 탱고인 "Recuerdo"를 작곡했다.[2] 2년 후, 마침내 음반으로 발매되면서 이 곡은 클래식이 되었다.[2]

1939년, 푸글리에세는 33세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합작 형태로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했으며, 1939년 8월 11일 카페 엘 나시오날 (코리엔테스 가 980번지 – "탱고의 대성당")에서 데뷔했다.[3] 이후 페드로 마피아 악단이나 페드로 라우렌스 악단 등을 거치면서 그들을 배출한 훌리오 데 카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2. 2.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악단 결성 (1939년 ~ )

1939년, 오스발도 푸글리에세는 합작 형태로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했으며, 같은 해 8월 11일 카페 엘 나시오날(코리엔테스 가 980번지, "탱고의 대성당")에서 데뷔했다.[1]

푸글리에세 악단은 1959년 구소련을 시작으로 세계 순회 공연을 가졌다. 구소련에서는 3개월 동안 80개 도시에서 공연했고(하루에 두세 번 공연한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한 달 동안 28개 도시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도 칠레(1990년), 멕시코, 콜롬비아(1980년), 페루, 쿠바(1984년, 1988년, 1992년), 일본(1965년에 5개월 동안 135회 공연, 1979년, 1989년), 미국(1979년 시카고), 중동, 프랑스(1984년), 포르투갈, 스페인(1985년, 1988년 마드리드 테아트로 알베니즈에서 가수 호안 마누엘 세라트와 합동 공연, 바르셀로나), 벨기에, 네덜란드(아스토르 피아졸라와 함께 1989년 6월 29일 암스테르담에서 공연), 핀란드, 그리고 우루과이(솔리스 극장, 1987년)를 포함한 거의 모든 남미 및 중앙 아메리카 국가에서 공연했다.[1] 푸글리에세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아르헨티나, 프랑스, 쿠바 정부 등으로부터 높은 문화적 명예를 받았다.[1]

1985년 12월 26일, 푸글리에세는 80세의 나이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에서 콘서트를 열었다.[1] 이 공연에서 그는 다섯 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으며, "사실... 오늘 밤은 우리의 장르, 우리가 사랑하는 탱고를 사랑하는 대중, 민중의 밤입니다."라는 겸손한 소감을 남겼다.[1] 이 행사는 루이스 브란도니와 엑토르 라레아가 진행했다.[1]

당시 오케스트라 단원은 다음과 같았다:[1]

  • 반도네온: 로베르토 알바레스, 알레한드로 프레비그니아노, 파비오 라핀타
  • 바이올린: 오스발도 몬테르미, 페르난도 로드리게스, 디에고 레렌데구이, 가브리엘 리바스
  • 비올라: 메레이 브레인
  • 더블 베이스: 아밀카르 톨로사
  • 피아노: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연주된 곡 목록은 다음과 같다:[1]

번호곡명
1아라발
2로스 마레아도스
3데스푸에스 (아벨 코르도바)
4킨토 아뇨 (아드리안 기다)
5차카부케안도
6아 에바리스토 카리에고
7멜로디아 데 아라발 (아벨 코르도바)
8알마그로 (아드리안 기다)
9레쿠에르도
10치케
11말라 훈타
12라 칸시온 데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벨 코르도바)
13콘타메 우나 이스토리아 (아드리안 기다)
14코파카바나
15프로토콜레안도
16밀롱가 파라 가르델 (아드리안 기다, 아벨 코르도바)
17데스데 엘 알마
18라 윰바
19라 마리포사
20토다 미 비다
21엘 엔코파오



"라 윰바"는 푸글리에세의 옛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연주되었다:[1]


  • 바이올린: 오스카 에레로 (1943–1978), 호르헤 브루스키 (1980–1983)
  • 첼로: 키케 라노 (1963–1973), 실비오 푸치 (1973–1983)
  • 비올라: 노르베르토 베르나스코니 (1954–1978)
  • 콘트라베이스: 알시데스 로시 (1970–1978)
  • 반도네온: 오스카 카스타냐로 (1943–1951), 이스마엘 스피탈니크 (1956–1971), 아르투로 페논 (1961–1984), 훌리안 플라자 (1959–1968), 오스발도 루기에로 (1939–1968), 빅토르 라바옌 (1959–1968), 다니엘 비넬리 (1968–1982)


푸글리에세 악단의 연주 스타일은 독특하다. 격렬한 스타카토와 모든 악기가 서로 얽혀 정교한 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1] 초기에는 연주 템포의 완급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푸글리에세가 편곡에서 사운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프레이즈마다 완급이 붙게 되었다.[1] 1940-50년대에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부가 화음, 글리산도, 톤 클러스터가 1960년대 이후 증가하여 "푸글리에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1] 「라 쿰파르시타」에서는 첫 부분의 A 멜로디를 통째로 삭제하는 대담한 편집을 하기도 했다.[1] 1968년, 반도네온 연주자 오스발도 루기에로를 비롯한 주요 멤버들이 대거 이탈했지만, 푸글리에세는 빈자리를 보충하여 악단을 유지했다.[1]

푸글리에세 악단은 1943년 오데온(EMI)에서 레코드 녹음을 시작하여 1961년 필립스로 이적했다가 1972년 오데온(EMI)으로 복귀했다.[1] 오데온(EMI)에서 약 300곡의 세션 녹음을 남겼다.[1]

2. 3. 정치적 활동과 탄압

1936년부터 공산당원이었던 푸글리에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는 음악가들의 직업 안정과 임금 인상을 위해 "음악가 및 관련 예술가 협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공감은 권력자들의 적대감을 사기도 했다.

작가 엔리케 메디나에 따르면, 푸글리에세가 처음 투옥된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페론 정부 시절이 아니라 1939년에 발생했다. 당시 그는 공산당 새 본부 개관식에서 오케스트라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좌파의 명망있는 인물을 투옥하여 반항을 처벌하려 했다"고 한다. 그는 경찰서에서 존경을 받았고, 장교의 사무실에서 마테차를 마시도록 초대받았으며, 며칠 후 석방되었다.

푸글리에세가 감옥에 갇히면, 오케스트라는 피아니스트 없이 연주하며 그의 피아노에 붉은 카네이션을 놓았다. 이 아이디어는 당시 사회자였던 에두아르도 모레노가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증언들은 카네이션이 종종 돈 오스발도가 나중에 나타나 청중에게 주곤 했다고 이야기한다.

1956년, 푸글리에세는 레볼루시온 리베르타도라 독재 정권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과 함께 "카르데날 작전"으로 체포되어 침몰 예정이었던 배 "파리"에 갇혔다. 그날 밤, 푸글리에세의 오케스트라는 라디오 스플렌디드에 출연해야 했고, 지휘자 없이 피아노에 붉은 카네이션을 꽂고 나타났다. 로돌포 기올디와 오레스테 카스트로누에보를 포함한 익명의 활동가들의 노력과 배가 침몰될 것이라는 소문 덕분에 그는 석방될 수 있었다.

1961년, 그는 쿠바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밀롱가 파라 피델''을 썼다. 1960년대 후반,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정부는 푸글리에세의 라디오 방송과 공공 장소 출입을 금지했다.

푸글리에세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수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1955년에는 데보토 감옥에서 복도를 청소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음반 발매를 연간 10개로 제한하기도 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협동조합으로 조직하고 단원들에게 기여도에 따라 급여를 지급하여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1973년 말, 페론은 푸글리에세를 포함한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조직하고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페론은 푸글리에세에게 "해결하지 못한 작은 문제들에 대해 사과"했고, 푸글리에세는 "모든 것은 이미 잊혀졌다"고 답했다. 페론은 "당신과 같은 위대한 사람만이 용서할 줄 압니다"라고 말했다.

2. 4. 국제적인 활동과 명성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악단은 1959년에 소련을 순회 공연했으며(3개월 동안 80개 도시에서 공연 – 때로는 하루에 두세 번 공연), 중국(또 다른 한 달 동안 28개 도시), 칠레(1990), 멕시코, 콜롬비아(1980), 페루, 쿠바(1984, 1988, 1992), 일본(1965년 5개월 동안 135회 공연; 1979, 1989), 미국(1979년 시카고에서 공연), 중동, 프랑스(1984), 포르투갈, 스페인(1985; 1988년 마드리드 테아트로 알베니즈에서 가수 호안 마누엘 세라트와 함께 공연, 그리고 바르셀로나), 벨기에, 네덜란드(아스토르 피아졸라와 함께 1989년 6월 29일 암스테르담에서 공연), 핀란드, 그리고 거의 모든 남미 및 중앙 아메리카 국가(우루과이(1987, 몬테비데오의 솔리스 극장) 등)에서 공연하였다.[4] 그의 업적에 대해 그는 아르헨티나, 프랑스쿠바 정부로부터 높은 문화적 명예를 받았다.[4]

1985년 12월 26일, 푸글리에세는 80세의 나이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에서 그는 5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는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오늘 밤은 우리의 장르, 우리가 사랑하는 탱고를 사랑하는 대중, 민중의 밤입니다.” 이 행사는 루이스 브란도니와 엑토르 라레아가 진행했다.

당시 오케스트라 단원은 다음과 같았다.

반도네온바이올린비올라더블 베이스피아노
로베르토 알바레스, 알레한드로 프레비그니아노, 파비오 라핀타오스발도 몬테르미, 페르난도 로드리게스, 디에고 레렌데구이, 가브리엘 리바스메레이 브레인아밀카르 톨로사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연주된 곡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목가수
“아라발”
“로스 마레아도스”
“데스푸에스”아벨 코르도바
“킨토 아뇨”아드리안 기다
“차카부케안도”
“아 에바리스토 카리에고”
“멜로디아 데 아라발”아벨 코르도바
“알마그로”아드리안 기다
“레쿠에르도”
“치케”
“말라 훈타”
“라 칸시온 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아벨 코르도바
“콘타메 우나 이스토리아”아드리안 기다
“코파카바나”
“프로토콜레안도”
“밀롱가 파라 가르델”아드리안 기다, 아벨 코르도바
“데스데 엘 알마”
“라 윰바”
“라 마리포사”
"토다 미 비다"
"엘 엔코파오"



“라 윰바”는 그의 옛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연주되었다.

악기연주자활동 기간
바이올린오스카 에레로1943–1978
바이올린호르헤 브루스키1980–1983
첼로키케 라노1963–1973
첼로실비오 푸치1973–1983
비올라노르베르토 베르나스코니1954–1978
콘트라베이스알시데스 로시1970–1978
반도네온오스카 카스타냐로1943–1951
반도네온이스마엘 스피탈니크1956–1971
반도네온아르투로 페논1961–1984
반도네온훌리안 플라자1959–1968
반도네온오스발도 루기에로1939–1968
반도네온빅토르 라바옌1959–1968
반도네온다니엘 비넬리1968–1982



푸글리에세 악단은 일본에 세 차례 방문했다. 1965년 첫 방문 직전에는 내한 기념반(펼침 LP)이 발매되었다. 1979년 두 번째 방문에서는 "티케", "마라 훈타", "레쿠에르도" 등 수많은 곡들이 FM 방송을 통해 전파를 탔다. 1989년 세 번째 방문에서는 "빛나는 도쿄"를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2. 5. 말년과 사망

그는 1995년 7월 25일, 89세의 나이로 짧은 투병 끝에 사망했다.[2] 그의 유해는 후안 카를로스 페라로(1997)의 작품인 웅장한 영묘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는 그의 팬들의 후한 기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의 장례식은 코리엔테스 거리를 따라 역주행하는 인상적인 운구 행렬과 함께 큰 관심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푸글리에세는 대거장이 되었지만, 정작 피아노 테크닉은 나이가 들면서 쇠퇴해 갔고, 1989년 도쿄 공연에서 「빛나는 도쿄」를 선보인 후 공식적으로 해산이 발표되었다. 나고야 공연에서도 사회자가 해산할 것을 명언했다. 이 이후의 상업 녹음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산하지 않았고, 1990년대에도 정력적으로 고향과 스페인에서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이들 라이브 녹음과 비디오는 유튜브에서 몇 개를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평가는 양식의 불통일성으로 인해 엇갈리지만, 1950년대의 녹음은 보수, 전위의 파벌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다.

3. 주요 작품

Recuerdoes(추억한국어, 1924), Ausenciaes(부재한국어, 탱고 미오, 1931), El frenopáticoes(정신병자한국어), Primera categoríaes(일등석한국어), El encopaoes(취한 자한국어, 1942), Reciénes(갓한국어, 1943), Adiós Bardies(안녕 바르디한국어, 1944), Una vezes(한 번한국어, 1946), Igual que una sombraes(그림자처럼한국어, 1946), La yumbaes(라 윰바한국어), Negrachaes(네그라차한국어, 1948), Malandracaes(말란드라카한국어, 1949), Milonga para Fideles(피델을 위한 밀롱가한국어, 1961), Para Eduardo Arolases(에두아르도 아롤라스에게한국어) 등은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의 가장 유명한 탱고 작품이다.

아니발 트로일로가 "나는 레쿠에르도 단 한 곡의 작곡가이고 싶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레쿠에르도는 푸글리에세가 18세에 작곡한 비범한 작품이다. 1946년에 작곡된 이 곡은 가사가 없지만, 탱고 팬들이 즐겨 듣는 곡이다.

4. '산 푸글리에세' 신화

찰리 가르시아의 공연 중 여러 기술적인 문제로 공연 시작이 지연된 적이 있었다. 음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다가, 팀원 중 한 명이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의 레코드로 테스트를 해보자 모든 것이 개선되기 시작했고, 찰리는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가의 기원을 불러오는 행운의 신화가 생겨났다.

2000년, 푸글리에세가 사망한 지 5년 후, 음악가 알베르토 무뇨스는 탱고 수호성인에게 바치는 기도를 썼다.

스페인어한국어 번역
"Protégenos de todo aquel que no escucha. Ampáranos de la mufa de los que insisten con la patita de pollo nacional. Ayúdanos a entrar en la armonía e ilumínanos para que no sea la desgracia la única acción cooperativa. Llévanos con tu misterio hacia una pasión que no parta los huesos y no nos dejes en silencio mirando un bandoneón sobre una silla. En el nombre de Osvaldo Pugliese"."듣지 않는 모든 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국민 닭다리를 고집하는 자들의 불운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가 조화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시고 불행만이 유일한 협력 행동이 되지 않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소서. 당신의 신비로움으로 우리를 이끌어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반도네온을 의자에 놓고 침묵 속에 바라보지 않는 열정으로 인도하소서.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의 이름으로."



레온 지에코와 하비에르 칼라마로를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도 1905년 12월 2일에 태어난 푸글리에세를 부르면 어떤 불편함도 막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지에코는 1992년에 발표된 노래 "Los Salieris de Charly"에서 "우리는 항상 푸글리에세를 언급한다"라고 노래한다. 트리 그룹의 세바스티안 비안치니는 푸글리에세에게 헌정하는 아이러니한 노래("Suerte")를 작곡했다.

마리아 메르세데스 리스카는 "그의 음악 활동을 정치와 섞는 것은 그것을 더럽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의 대화 상대들에게 어떻게 투영하고 형성할 수 있었는지 알고 있는 이 윤리적-미학적 관계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성 푸글리에세"의 이미지에는 예술가와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이 그의 이름이 정치의 부정적인 함정에 좌우되지 않고 종합된다.

5. 평가

찰리 가르시아의 공연 중 음향 문제가 발생했을 때, 푸글리에세의 음반으로 테스트하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로 인해 푸글리에세는 음악가들 사이에서 행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2000년에는 음악가 알베르토 무뇨스가 푸글리에세를 탱고의 수호성인으로 칭송하며 그에게 바치는 기도를 썼다.

스페인어한국어 번역
"Protégenos de todo aquel que no escucha. Ampáranos de la mufa de los que insisten con la patita de pollo nacional. Ayúdanos a entrar en la armonía e ilumínanos para que no sea la desgracia la única acción cooperativa. Llévanos con tu misterio hacia una pasión que no parta los huesos y no nos dejes en silencio mirando un bandoneón sobre una silla. En el nombre de Osvaldo Pugliese"."듣지 않는 모든 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국민 닭다리를 고집하는 자들의 불운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가 조화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시고 불행만이 유일한 협력 행동이 되지 않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소서. 당신의 신비로움으로 우리를 이끌어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반도네온을 의자에 올려놓은 채 침묵 속에 우리를 두지 않는 열정으로 인도하소서.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의 이름으로."



레온 지에코, 하비에르 칼라마로 등 다른 예술가들도 푸글리에세를 언급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면 불운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에코는 1992년 발표한 노래 "Los Salieris de Charly"에서 "우리는 항상 푸글리에세를 언급한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마리아 메르세데스 리스카는 "그의 음악 활동을 정치와 섞는 것은 그것을 더럽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의 대화 상대들에게 어떻게 투영하고 형성할 수 있었는지 알고 있는 이 윤리적-미학적 관계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푸글리에세는 예술과 사회에 헌신한 인물로서, 그의 이름은 정치적인 논란을 넘어선 긍정적인 의미로 기억되고 있다.

5. 1. 한국과의 관계

푸글리에세 악단은 1965년 첫 일본 방문 직전에 내한 기념반(펼침 LP)을 발매했다.[1] 1979년 두 번째 일본 방문 때에는 "티케", "마라 훈타", "레쿠에르도" 등 많은 곡들이 FM 방송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다.[1]

6. 수상 경력


  • 1986년, 훌리오 세사르 사귀에르 시장 재임 기간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 시청은 그를 "명예 시민"으로 선언했다.
  • 1988년, 그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문학 예술 훈장 사령관 칭호를 받았다.
  • 1992년 11월 11일, 그는 쿠바 국무원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문화적 훈장인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메달을 받았다.

참조

[1] 간행물 Pugliese, Osvaldo 2001
[2] 뉴스 Osvaldo Pugliese; Tango Composer, 89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95-07-27
[3] 문서 es:Malabia-Osvaldo_Pugliese_(subte_de_Buenos_Aires)
[4] 웹사이트 agregaran-el-nombre-osvaldo-pugliese-la-estacion-malabia-917 https://enelsubt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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