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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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문화는 14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일본 야마구치 지역을 중심으로 오우치 씨가 번성하며 꽃피운 독자적인 문화를 의미한다. 오우치 씨는 교토를 모방한 도시 설계를 도입하고, 명,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 각국과의 교역을 통해 문화를 융합하여 선진성, 국제성을 갖춘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무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력을 확보하여 문화를 지원했으며, 출판 사업과 다양한 종교 및 사상이 공존했다. 그러나 오우치 씨의 쇠퇴와 함께 대부분의 문화 유산은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유리광사 5층탑, 상영사 설주정 등 일부 건축물만이 남아 오우치 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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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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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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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
지역 | 스가와라 씨 영지, 주코쿠 지방 서부 |
중심 인물 | 오우치 씨 |
주요 문화 요소 | |
종교 | 선종 |
건축 | 교토 풍의 건축 양식 |
정원 | 교토 풍의 정원 양식 |
의상 | 교토 풍의 의상 |
음식 | 교토 풍의 음식 |
행사 | 교토의 행사 모방 |
주요 유적 및 관련 시설 | |
유적 | 오우치 씨 관련 유적 |
관련 시설 | 오우치 문화 마을 |
특징 | |
개요 | 무로마치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오우치 씨가 주코쿠 지방 서부에 구축한 문화 |
배경 | 오닌의 난 이후 교토의 문화가 쇠퇴하자, 오우치 씨가 교토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킴 |
영향 | 야마구치 지역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침 |
2. 역사적 배경
오우치 히로요는 남조에서 북조로 전향하여 스오, 나가토 두 구니를 통일하고, 1363년 2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알현하고자 교토를 방문했다. 이때 교토와 야마구치의 지형이 흡사한 점에 착안하여 야마구치를 '서쪽의 교토(西の京)'로 삼아 교토풍의 조방제를 도입, 대로(大路)와 소로(小路)를 갖춘 시가지를 정비하도록 명하고 여러 곳에서 문화인들을 불러 모았다.[17]
무로마치 중기, 오우치 씨는 일본 제일의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재력을 의지한 문화인과 구게(公家)를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에서 야마구치로 대거 이동시켰고, 야마구치는 교토 못지않은 번영을 누렸다. 또한, 오우치는 명나라,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 및 교류를 통해 이들 나라의 문화를 가미한 독자적인 오우치 문화를 발전시켰다.[18]
이처럼 외국의 문화를 수입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오우치 문화의 특징에 대해 야마구치 시에서는 '선진성·선견성·관용성·독자성·국제성'을 볼 수 있다고 표현한다.[19]
당시 야마구치의 번영은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20]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21]의 기술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오우치 문화 유산은 대부분 무로마치 말기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루리코지 5중탑이나 상영사(常栄寺) 설주정(雪舟庭) 등의 건축물이 오우치 문화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체류와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여 일본 최초의 교회 다이도지(大道寺)에서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리는 등 서양 문화도 유입되었다.
2. 1. 성립 배경
오우치 히로요는 남조에서 북조로 전향하여 스오, 나가토 두 구니를 통일하고, 1363년 2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알현하고자 교토를 방문했다. 이때 교토와 야마구치의 지형이 흡사한 점에 착안하여 야마구치를 '서쪽의 교토(西の京)'로 삼아 교토풍의 조방제를 도입, 대로(大路)와 소로(小路)를 갖춘 시가지를 정비하도록 명하고 여러 곳에서 문화인들을 불러 모았다.[17]무로마치 중기, 오우치 씨는 일본 제일의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재력을 의지한 문화인과 구게(公家)를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에서 야마구치로 대거 이동시켰고, 야마구치는 교토 못지않은 번영을 누렸다. 또한, 오우치는 명나라,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 및 교류를 통해 이들 나라의 문화를 가미한 독자적인 오우치 문화를 발전시켰다.[18]
이처럼 외국의 문화를 수입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오우치 문화의 특징에 대해 야마구치 시에서는 '선진성·선견성·관용성·독자성·국제성'을 볼 수 있다고 표현한다.[19]
2. 2. 번영과 쇠퇴
남조에서 북조로 전향하여 스오, 나가토 두 구니를 통일한 오우치 히로요는 1363년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알현하고자 교토를 방문했다. 이때 교토와 야마구치의 지형이 흡사한 점에 착안하여 야마구치를 '서쪽의 교토(西の京)'로 만들기 위해 교토풍의 조방제를 도입, 대로(大路)와 소로(小路)를 갖춘 시가지를 정비하고 각지에서 문화인들을 초빙했다.[17]
무로마치 중기 이후 오우치 씨는 일본 제일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인과 구게(公家)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를 떠나온 이들이 야마구치로 대거 이동하면서, 야마구치는 교토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다. 또한 오우치 씨는 명나라,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활발히 교역하고 교류하여 이들 나라의 문화를 흡수, 독자적인 오우치 문화를 발전시켰다.[18]
야마구치 시는 이러한 오우치 문화의 특징으로 선진성, 선견성, 관용성, 독자성, 국제성을 꼽는다.[19]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20]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21]의 기록에서도 당시 야마구치의 번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오우치 문화 유산은 대부분 무로마치 말기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루리코지 5중탑, 상영사(常栄寺) 설주정(雪舟庭) 등의 건축물이 그 상징으로 남아있다.
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체류와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고, 일본 최초의 교회인 다이도지(大道寺)에서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리는 등 서양 문화도 유입되었다.
오우치 요시타카는 1542년 이즈모 원정 실패 후 문치파 사가라 다케토 등을 중용하고 구게 등 문화인 지원을 늘렸다. 그러나 이는 영지 내 과세 증가로 이어져 가신과 고쿠진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결국 스에 다카후사, 나이토 오키모리 등 유력 슈고다이들이 1551년 다이네이지의 변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이고 야마구치에 체류하던 구게들을 축출, 오우치 문화는 쇠퇴했다. 이후 스기 시게스케의 반란, 오우치 데루히로의 난 등으로 야마구치는 불탔으며,[29] 간신히 전란을 피한 고쿠세이지(国清寺, 지금의 도슌지洞春寺) 등 문화재는 모리 데루모토에 의해 오미 온조지에 기부되는 등 모리 씨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어 흩어졌다.
3. 오우치 문화를 지지한 경제 기반
오우치 씨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지만, 농업 생산량은 তেমন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업 도시였던 하카타와 항구 도시 모지를 지배하고, 하카타 상인들을 통한 무역[22]과 은광 개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어, 그 경제력은 여러 다이묘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3. 1. 무역과 상업
오우치 씨는 넓은 영토를 다스렸지만, 농업 생산량은 তেমন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업 도시였던 하카타와 항구 도시 모지를 지배하고, 하카타 상인들을 통한 무역[22]과 은광 개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 경제력은 여러 다이묘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오우치 씨는 당시 조선과 명나라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를 단속하여 명나라와 조선과의 사무역(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던 쓰시마 섬의 소 씨 가문을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23] 후기에는 '일본국왕지인'(日本国王之印, 모리 박물관 소장)이라는 통신부를 이용한 대외 무역도 실시하게 된다. 성화의 감합(1468년)과 정덕의 감합(1523년)을 손에 넣어 감합무역을 독점한 호소카와 씨와의 경쟁(닝보의 난 등)을 통해 무역 독점권을 손에 넣었다.[24] 또한, 선진 채취 기술로 이와미 은광의 은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22] 그 양은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감합무역의 주요 수출품과 수입품'''
오우치 씨는 주력 수출품을 영내에서 확보하고자 애썼다. 이와미의 오모리 은광(大森銀山)·사토 은광(佐東銀山) 등의 은광과 나가즈미 동광(長登銅山) 등의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 데라오(寺尾) 광산 등에 남은 옛 정련소 터에서 정제 기술을 개발해 산출을 늘리려 애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칠기(漆器), 벼루, 쓰바(鍔) 등의 기술자를 보호하고 장려하며 문화인을 불러 비호한 것은 보다 질 높은 수출품을 산출하여 많은 수입품을 손에 넣는 것으로 이어졌다. 오우치 씨가 비록 문치에 심취하여 쇠퇴하긴 했지만, 문화의 장려가 무역을 통해 오우치 씨의 이익으로 환원되는 합리적 시스템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또한 오우치 씨는 1346년경부터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던 견직물의 국내 생산에도 힘을 쏟아 비단 보급이나 훗날의 니시진 직이나 하카타 직 같은 견직물 생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3. 2. 감합 무역 독점
오우치 씨는 왜구 단속을 통해 명나라 및 조선과 사무역(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던 쓰시마 섬의 소 씨 집안을 거치지 않은 직접 독자적인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23] 후기에는 '일본국왕지인'(日本国王之印, 모리 박물관 소장)이라는 통신부를 이용한 대외 무역도 실시하였다. 성화 연간의 감합(1468년), 정덕 연간의 감합(1523년)을 손에 넣어 감합무역을 독점한 호소카와 씨와의 경쟁(영파의 난 등)을 통해 무역 독점권을 손에 넣었다.[24]'''감합무역의 주요 수출품과 수입품'''
3. 3. 광산 개발과 기술 장려
오우치 씨는 주력 수출품을 영내에서 확보하고자 애썼다. 광물은 이와미의 오모리 긴잔·사토 긴잔 등의 은광과 나가즈미 도잔 등의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 데라오(寺尾) 광산 등에 남은 옛 정련소 터에서 정제 기술을 개발해 산출을 늘리려 애쓴 모습을 엿볼 수 있다.[22]또한 칠기, 벼루, 쓰바(鍔) 등의 기술자를 보호하고 장려하며 문화인을 불러 비호한 것은 보다 질 높은 수출품을 산출하여 많은 수입품을 손에 넣는 것으로 이어졌다.
3. 4. 견직물 국내 생산
오우치 씨는 1346년경부터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던 견직물의 국내 생산에 힘을 쏟았다. 이는 비단 보급과 훗날 니시진 직(사이진시키), 하카타 직(하카타시키) 같은 견직물 생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22]4. 오우치 문화의 특징
남조에서 북조로 전향하여 스오, 나가토 두 구니를 통일한 오우치 히로요는 1363년 제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알현하고자 교토를 방문했다. 이때 교토와 야마구치가 서로 지형이 흡사한 점에 착안하여 야마구치를 '서쪽의 교토(西の京)'로 만들기 위해 교토풍의 조방제를 도입, 대로(大路)와 소로(小路)를 갖춘 시가지를 정비하도록 명하고 여러 곳에서 문화인들을 불러 모았다.[17]
무로마치 중기 이래 오우치 씨는 일본 제일의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재력에 의지한 문화인이나 구게(公家)가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를 떠나 대거 야마구치로 이동하면서 야마구치는 교토 못지않은 번영을 누렸다. 또한 오우치는 명나라,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 각국과 교역 및 교류가 활발했기에 이들 나라의 문화를 가미한 독자적인 오우치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18]
이처럼 외국의 문화를 수입해 한층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오우치 문화의 특징에 대해 일본 현지의 야마구치 시에서는 '선진성·선견성·관용성·독자성·국제성'을 볼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19]
당시 야마구치의 번영한 모습은 일본에 온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20]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21]의 기술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오우치 문화 유산들은 대부분 무로마치 말기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루리코지 5중탑이나 상영사(常栄寺) 설주정(雪舟庭) 등의 건축물들이 오우치 문화의 상징으로서 남아있다.
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체류와 기독교 포교를 허락했기 때문에, 오우치 씨 시대의 야마구치에는 일본 최초의 교회 다이도지(大道寺)에서 크리스마스 행사가 이루어지는 등 서양 문화도 유입되고 있었다.
5. 종교와 사상
오우치 씨 시대에 야마구치 지역은 종교와 사상 면에서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기독교 전래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5. 1. 기독교
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체류와 기독교 포교를 허가하면서, 오우치 씨 시대의 야마구치에는 서양 문화가 유입되었다. 일본 최초의 남만사(다이도지)에서 크리스마스 행사(일본의 크리스마스는 야마구치에서)가 열리기도 하였다.6. 출판
야마구치에서는 오우치판[25]이라 불리는 출판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교토의 전란을 피해 가도, 유소쿠(有職), 관현, 영곡, 장속, 유학 등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승려, 학자, 공가가 많았다.
그러나 번역본 출판이나 명과 조선에서 수입한 책을 파는 가라혼야(唐本屋) 같은 책방도 존재하고 있던 것, 또 명으로 가는 견명선이나 사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해외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도 많았고, 국제색도 풍부하여 교토풍 문화와는 다른 면도 볼 수 있다. 오우치씨의 저택이었던 오우치지노타테에는 야마구치도노 중문고(山口殿中文庫), 오우치 문고라고도 불리는 서고가 있어 국내외의 서적이 모였다.[22][26]
7. 주요 유적
- 루리코지 5층탑 - 일본 국보이자 3대 명탑 중 하나이다.
- 고구마 신사 본전 - 일본 국가중요문화재이다.
- 야마구치 야사카 신사 본전 - 일본 국가중요문화재이다.
- 조에이지 셋슈테이 - 일본 국가사적 및 명승이다.
- 료후쿠지 - 다이네이지의 난으로 소실되었으며, 현재 료후쿠지는 다른 장소에 복원된 것이다.
- 하나오카 하치만구 아카이보 다보탑 - 일본 국가중요문화재이다.
- 료운지 터 - 국가사적
- 오우치 씨 관 - 오우치 히로요의 거점이다. 다이네이지의 난으로 소실되었고, 관 터의 일부는 현재 료후쿠지 부지에 포함되었다.
- 쓰키야마 관 - 오우치 히로요 이후의 거점. 다이네이지의 난으로 소실되었고, 관 터의 일부는 야사카 신사와 쓰키야마 신사 부지가 되었다.
- 다이도지 - 일본 최초의 기독교 교회로, 현재 세인트 자비엘 기념 공원 자리이다.
- 야마구치 대신궁 - 오우치 요시오키가 이세 신궁에서 권청하여 분령된 신을 모신 신궁이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 이세 신궁에서 직접 분령된 유일한 신궁).
- 하코자키 궁 본전 - 야마구치는 아니지만 오우치 요시타카에 의해 재건되어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일본 중요문화재).
- 우사 신궁 - 오우치 모리하루가 세웠으나 오토모 소린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 다테코지 - 도시 구획 흔적이 남아있다.
- 후도인 금당 - 국보. 야마구치 고쇼지에서 이축된 것이다.
8. 주요 방문자
- 셋슈(雪舟) - 수묵화가
- 소기(宗祇) - 렌카(連歌) 시인
- 사쿠겐 슈료(策彦周良) - 승려
- 자오즈(趙秩) - 명나라 사람
- 곤파루 젠치쿠(金春禅竹)[27] - 노(能) 작가
- 이나와시로 겐사이(猪苗代兼載) - 렌카 시인
- 소소(宗碩) - 렌카 시인
- 우에스기 노리자네(上杉憲実)[28] - 간토 간레이(關東管領)
-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 - 제10대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
- 산조 기미아쓰(三条公敦) - 구게, 사다이진(右大臣)
- 아스카이 마사토시(飛鳥井雅俊) - 구게,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us Xaveriusla) - 예수회 출신 기독교 선교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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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口の歴史と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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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文化の遺産:山口と大内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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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文化の遺産:大内文化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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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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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文化コラム:書物収集家・大内政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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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文化コラム:金春禅竹、山口で舞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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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文化コラム:大内教弘と交流・上杉憲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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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氏概略:大内氏の滅亡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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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우치 문화 칼럼:오오우치교홍과 교류·우에스기 노리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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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씨 개략:오우치씨의 멸망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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