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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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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치 마쓰다이라가는 에도 시대에 다이묘 가문으로 시작하여 메이지 시대에 자작 작위를 받은 일본의 화족 가문이다. 가문의 시조는 마쓰다이라 기요타케로, 고후번의 번주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차남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여러 번을 거치며 다이묘로 존속하다가, 메이지 시대에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에 속해 패배했지만, 가신의 할복과 정부의 관용으로 번의 존속이 허가되었다. 이후 쓰루타 번 지사를 거쳐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역대 당주로는 마쓰다이라 기요타케, 마쓰다이라 다케마사, 마쓰다이라 다케모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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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 마쓰다이라가
가문 정보
가문 이름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가문 문양미쓰바아오이
구요
본성・청화 겐지닛타 씨 지류
가문의 시조마쓰다이라 기요타케
가문의 종류무가
화족 (자작)
출신지가이국
근거지고즈케국다테바야시 번
이와미국하마다 번
미마사카국쓰루타 번
도쿄시나카노구
주요 인물마쓰다이라 다케모토
고라쿠 류단

2. 역사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은 에도 시대 중기에 시작된 다이묘 가문이다. 시조는 고후번주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아들로 태어나 오치 가문의 양자가 되었던 마쓰다이라 기요타케이다. 그는 형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제6대 쇼군이 되면서 하타모토로 등용되었고, 이후 영지를 거듭 받아 다테바야시번의 번주가 되었다.

에도 시대 동안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은 여러 차례 영지를 옮겨 다녔다. 마쓰다이라 다케모토 대에는 다나구라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다테바야시번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마쓰다이라 나리아쓰 대에는 하마다번으로 이전되었다.

에도 막부 말기, 제2차 조슈 정벌에 참전했다가 패배하여 하마다성을 스스로 불태우고 쓰루타로 거점을 옮겨 쓰루타번을 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 측에 섰다가 패배했으나, 가로의 할복으로 가문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작위를 받았다.

2. 1. 가문의 기원과 초기 (에도 시대)

가문의 시조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는 고후번의 번주 도쿠가와 쓰나시게(고후 도쿠가와 가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처음에는 고후번사 오치 요시키요/노부키요의 양자로 입적되어 성장했다. 양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후번사로서 활동하며 친형인 번주 도쿠가와 이에노부를 섬겼다. 호에이 원년(1704년), 이에노부가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양자가 되면서 기요타케도 하타모토 신분으로 등용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가증(加増, 영지 추가)을 거듭하여, 호에이 4년(1707년)에는 마쓰다이라(松平) 성씨를 하사받음과 동시에 가미쓰케노쿠니 다테바야시번의 2만 4천 석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이에노부가 제6대 쇼군으로 취임한 후인 호에이 7년(1710년)에는 1만 석이 추가로 주어졌고, 쇼토쿠 2년(1712년)에는 이에노부의 유언에 따라 다시 2만 석이 더해져 총 5만 4천 석의 영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기요타케의 뒤를 이은 마쓰다이라 다케모토 시대에는 교호 13년(1728년)에 무쓰노쿠니 다나구라번으로 영지가 옮겨졌으나, 엔쿄 3년(1746년)에는 다시 다테바야시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메이와 6년(1769년)에는 7천 석이 추가되어 총 6만 1천 석으로 늘어났다.

그 후 마쓰다이라 나리아쓰 시대인 덴포 7년(1836년)에는 이와미노쿠니 하마다번으로 다시 영지가 이전되었다.

2. 2. 여러 번으로의 이동 (에도 시대)

다케모토 시대인 교호 13년 (1728년)에는 무쓰노쿠니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다. 이후 엔쿄 3년 (1746년)에는 다시 다테바야시로 돌아왔다. 메이와 6년 (1769년)에는 7천 석이 추가되어 총 6만 1천 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나리아쓰 시대인 덴포 7년 (1836년)에는 이와미노쿠니 하마다번으로 이봉되었다.

2. 3. 제2차 조슈 정벌과 하마다 성 자소 (에도 시대 말기)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사토 시대에 하마다번은 게이오 2년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 막부군으로 참전했으나, 조슈번 군에게 패배하여 하마다성으로 퇴각했다. 이후 조슈번 군의 추격을 받자 다케사토는 하마다성을 스스로 불태우고 이즈모로 도주했다.

이후 하마다 지역은 메이지 시대까지 조슈번 군에게 점령당해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게이오 3년 (1867년), 다케사토는 하마다번의 영지 중 하나였던 미마사카의 쓰루타(鶴田)로 이동하여 그곳에 진야(陣屋, 행정 거점)를 마련했다. 쓰루타의 기존 영지(약 8,000석)에 더해,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로부터 다른 지역의 2만 석 영지를 추가로 받아 총 2만 7,800석의 쓰루타번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막부는 멸망하였다.

2. 4. 메이지 유신과 쓰루타 번 (메이지 시대)

1868년(메이지 유신 원년)에 벌어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은 구 막부군 편에 서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이로 인해 번이 개역될 위기에 처했지만, 가로(家老)였던 오제키 마사유키가 책임을 지고 교토 고조(五条)에서 신정부에 대해 할복으로 사죄하면서 번의 존속이 허가되었다. 이듬해인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쌀 2만 4천 석이 추가로 주어져, 이전의 지행고(知行高)인 6만 1천 석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같은 해 6월 24일 판적봉환이 이루어지자, 당시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다케토시는 쓰루타 번의 번지사(藩知事)로 임명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이 단행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869년(메이지 2년) 6월 17일, 행정관(太政官) 포고령에 따라 공가(公家)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시작되면서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도 다이묘 가문으로서 화족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이 시행되어 화족에게 오작(五爵)의 작위가 주어지게 되자, 다음 날인 7월 8일 마쓰다이라 타케나가는 구 소번(小藩) 지사 자격으로 자작위를 받았다. 쇼와 시대 전기에는 3대 자작인 마쓰다이라 요시나오의 저택이 도쿄시 나카노구 시로야마초(城山町)에 있었다.

2. 5. 화족 시대 (메이지 시대 이후)

1869년(메이지 2년) 6월 17일의 행정관령으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도 다이묘 가문으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이 시행되어 화족이 오작제(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로 재편되자, 같은 달 8일 松平 武修|마쓰다이라 다케나가일본어는 구(舊) 쓰루타 번 지사 자격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당시 쓰루타 번은 현미(玄米) 생산량 2만 660석(표고(表高) 6만 1000석)으로, 현미 5만 석 미만의 소번(小藩)에 해당하여 자작위를 받게 된 것이다。

쇼와 전기에는 3대 자작인 松平 義懷|마쓰다이라 요시나오일본어가 작위를 계승했으며, 당시 오치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나카노구 시로야마정(城山町)에 있었다。

3. 역대 당주

대수당주 이름관계비고
초대(1대)마쓰다이라 기요타케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아들
2대마쓰다이라 다케마사양자다카스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유키의 넷째 아들.
3대마쓰다이라 다케모토양자히타치 후추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아키의 차남.
4대마쓰다이라 다케히로다케모토의 아들
5대타케아쓰(나리아쓰)다케히로의 아들양자 마쓰다이라 나라요시(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스무 번째 아들)를 맞이했을 때, 이에나리로부터 편휘 나라(斉)를 받아 나리아쓰(斉厚)로 개명함.
6대마쓰다이라 타케하루양자사누키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요시의 차남.
7대마쓰다이라 타케나리양자다카스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케의 셋째 아들.
8대마쓰다이라 타케사토양자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열 번째 아들.
9대마쓰다이라 타케슈타케사토의 아들
10대마쓰다이라 타케치카타케슈의 아들
11대마쓰다이라 요시슈양자타케치카의 동생.
12대타케류양자마쓰시마 마사유키와 스즈코(타케치카의 딸) 사이의 아들.
13대마쓰다이라 타케타케시타케류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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