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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후시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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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바·후시미 전투는 1868년 1월 27일부터 30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보신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왕정복고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교토 봉쇄를 목적으로 출병하자,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전투는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났고, 요시노부의 퇴각으로 구 막부군은 오사카를 포기했다. 이 전투는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조정의 권위를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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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후시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도바-후시미 전투
일본어 이름鳥羽・伏見の戦い (Toba-Fushimi no Tatakai)
일부보신 전쟁
날짜1868년 1월 27일 – 1868년 1월 31일
장소교토오사카 사이 지역
좌표34.985833, 135.759444
결과신정부군 승리, 보신 전쟁 발발
교전 세력
교전 1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쓰 번
교전 2도쿠가와 막부
아이즈 번
다카마쓰 번
오타키 번
지휘관 및 지도자
신정부군 총사령관닌나지노미야 친왕
사쓰마-조슈 연합군사이고 다카모리
기리노 도시야키
이지치 마사하루
무라타 쓰네요시
야마지 모토하루
막부군 총독오코치 마사타다
막부군다케나카 시게카타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신센구미히지카타 도시조
나가쿠라 신파치
유격대다카하시 데이슈
병력 규모
신정부군5,000명
막부군15,000명
피해 규모
신정부군326명 사상
막부군895명 사상
기타 정보
신정부군 앞에서 퇴각하는 막부군. 배경에는 요도 번의 요도 성이 보인다.
신정부군 앞에서 퇴각하는 막부군. 배경에는 요도 번의 요도 성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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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게이오 3년(1867년) 말, 사쓰마번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공경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주도한 왕정복고 대호령에 의해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토지 반납이 명해졌다. 이로 인해 도쿠가와 막부는 구 막부군이 되었으며, 도쿠가와 가 친족이자 신정부 의정마쓰다이라 슌가쿠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사자로 요시노부에게 파견되어 이 결정을 통고했다. 요시노부는 정중히 받으면서 자신의 부하들이 진정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실제로 이 통고를 받은 구 막부의 하타모토아이즈번 과격파가 폭주하려 하자, 요시노부는 그들에게 경거망동을 조심하도록 명하면서 12월 13일 정부에 순순히 복종할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교토 니조성에서 오사카성으로 퇴거했다. 슌가쿠는 이를 보고 ‘천지에 맹세하고’ 요시노부는 관직과 영지 반납을 실행하려 한다는 의견을 총재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보고했지만, 오사카 성에 들어간 뒤 요시노부에게서 연락이 두절되었다.

12월 23일과 24일에 걸쳐 정부는 이 건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요시노부의 배신이라 주장하며 즉시 ‘영지반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슌가쿠는 구 막부 내부 과격파가 요시노부를 방해하고 있다고 짐작하여 지금은 ‘도쿠가와 가의 영지를 조사하여 정부에서 회의한 후 확정한다’는 애매한 명령을 내렸다. 이와쿠라도 슌가쿠의 생각에 찬성하여 다른 정부 멤버도 이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여 이 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다시 마쓰다이라 슌가쿠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사자로 가서 요시노부에게 정부 결정을 통고했고, 요시노부도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쓰마 번이 에도 시중에서 도발적인 파괴 공작(쇼나이번의 에도 사쓰마번 저택의 소토 사건)을 벌이자, 요시노부 주위에서는 더욱더 ‘사쓰마 토벌’을 바라는 소리가 높아졌고, 요시노부는 사쓰마 정벌을 명목으로 사실상 교토 봉쇄를 목적으로 한 출병을 개시한다. 구 막부군 주력인 막부보병대는 도바 가도로, 아이즈 번, 구와나번 병사, 신센구미 등은 후시미 가도로 진격했다.

요시노부 출병 정보를 받은 정부는 긴장하여 1868년 1월 27일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정부 산요(参与) 오쿠보 도시미치는 구 막부군의 교토 진입은 정부 붕괴이며, 천황의 깃발과 도쿠가와 정벌 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정부 의정(議定)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사쓰마 번과 구 막부 세력의 사(私)투이며 정부는 관계없다며 반대했다. 회의는 분규(紛糾)했지만, 정부 의정 이와쿠라 도모미가 도쿠가와 정벌에 찬성하면서 회의 대세가 결정되었다.

1868년 1월 4일, 왕정 복고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1]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앞서 천황에게 권력을 사임하고 천황의 명령을 "집행하는 도구가 되겠다"고 동의했다.[1] 도쿠가와 막부는 막을 내렸다.[1] 그러나 요시노부의 사임은 정부 최고위직에 명목상 공백을 만들었을 뿐, 그의 국가 기구는 계속 존재했다.[2] 게다가 도쿠가와 가문은 진화하는 정치 질서에서 여전히 중요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2] 사쓰마와 조슈의 강경파는 이를 견딜 수 없다고 여겼다.

열다섯 살 메이지 천황의 자문회의 대다수는 궁정의 직접 통치 선언에 만족하고 도쿠가와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지지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문회의 의원들을 물리적으로 위협하여 요시노부의 토지를 몰수하도록 명령했다. 요시노부는 처음에는 궁정의 요구에 동의했지만, 1868년 1월 17일 "복고 선언에 구애받지 않겠으며, 궁정에 선언 철회를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1월 24일, 사쓰마의 낭인들이 에도에서 상당한 도발을 한 후,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을 근거지로 교토 공격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명목상으로는 궁정을 장악하고 있는 사쓰마와 조슈 세력을 축출하고 젊은 메이지 천황을 그들의 영향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 1.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대두

2. 2.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입장 변화

도쿠가와 이에모치 붕어 이후, 로쥬 이타쿠라 카츠시즈와 막신 나가이 히사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도쿠가와 종가의 쇼군직 상속을 권유했다.[311] 요시노부는 쇼군 계승 문제로 중상을 당한 경험을 들어 거절했지만, 이타쿠라 등은 "지금의 정세는 국난의 때이며, 귀공이 아니고서는 이 정국에 적합한 사람이 없다"며 설득했다.[311] 요시노부는 미토번 측근 하라 이치노신에게 "도쿠가와 가문을 지금까지처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왕정의 시대로 돌리고 충의를 다하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311] 하라는 전국 혼란을 우려하며 반대했고, 요시노부는 대정봉환 실행을 미루고 "도쿠가와 종가 계승만으로, 쇼군직은 맡지 않아도 된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승낙했다.[311]

그러나 로쥬들은 다시 쇼군직을 강요했고, 대외 관계에서 천황이 아닌 정이대장군이 일본의 주권을 가진 대표자라는 점[311] 등, 결국 요시노부는 쇼군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의 뜻을 품고 "나는 일본국을 위해 막부를 멸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311] 12월 5일, 요시노부는 니조 성에서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에도 막부 제15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

2. 3. 왕정복고 선언과 갈등 심화

게이오 3년(1867년) 말, 사쓰마번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공경가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주도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선포되어,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토지 반납이 명해졌다.[50][51] 이로 인해 도쿠가와 막부는 구 막부군이 되었으며, 도쿠가와 가 친족이자 신정부 의정마쓰다이라 슌가쿠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사자로 요시노부에게 파견되어 이 결정을 통고했다. 요시노부는 정중히 받으면서 자신의 부하들이 진정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이 통고를 받은 구 막부의 하타모토아이즈번의 과격파가 폭주하려고 하였고, 요시노부는 그들에게 경거망동을 조심하도록 명하면서 12월 13일, 정부에 순순히 복종할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교토의 니조성을 나와 오사카성으로 퇴거하였다. 슌가쿠는 이를 보고 ‘천지에 맹세하고’ 요시노부는 관직과 영지 반납을 실행하려 한다는 의견을 총재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오사카 성에 들어간 뒤 요시노부에게서의 연락이 두절되었다.[71][72][73][74][75][76][77][78]

12월 23일과 24일에 걸쳐 정부에서는 이 건에 대한 회의가 이뤄졌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건 요시노부의 배신이라 주장, 즉시 ‘영지반환’ 을 요구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슌가쿠는 구 막부 내부의 과격파가 요시노부를 방해하고 있다고 짐작하여, 그렇게 되면 설득이 불가능하므로 지금은‘도쿠가와 가의 영지를 조사하여 정부에서 회의 한 후 확정한다.’라는 애매한 명령을 내렸다. 이와쿠라도 슌가쿠의 생각에 찬성하여 다른 정부의 멤버도 이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여, 이 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마쓰다이라 슌가쿠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사자로 가서 요시노부에게 정부결정을 통고, 요시노부도 이것을 받아들였지만, 그사이 사쓰마번이 에도 시중에서 도발적인 파괴공작을 행하였다. 10월 15일, 사쓰마번(薩摩藩)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는 막부 타도의 명분이 서지 않음을 걱정하여, 백만의 군사를 거느린 도쿠가와 가문을 격분시키려고 꾸몄다.[41] 그 시작으로 사쓰마-토사 막부 타도의 밀약(薩土討幕の密約)에 따라, 토사번으로부터 이관받은 징왕파 낭인(浪士)인 나카무라 유키치(中村勇吉), 소라쿠 소우조(相楽総三)등을 중심으로 막부 타도 세력 확장을 구상하며 낭인을 모집하여 번저(藩邸)에 숨겼다.[42] 그 첫 번째 계책으로 낭인들을 관동(関東) 각지로 보내 개전 시 간사이(関西)·관동 어디에서든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뛰어다니게 만들어 지치게 하려고 생각했다.[42] 그래서 사이고는 사쓰마번의 마스미타 야스노스케(益満休之助)와 동번의 배신(陪臣)(배배신) 이무다 쇼헤이(伊牟田尚平)에게 "에도에 가면 낭인들을 모아 관동 전역에서 소란(騒乱)을 일으켜라. 만약 도쿠가와가(徳川家)가 경비대(경찰(警察))을 보내면 최대한 저항하라"고 명령했고, 이들은 낭인을 모아 에도에서 관동 일대에 풀어 소란 활동을 시켰다.[42][43] 낭인들은 에도에서 거상(豪商)과 민가를 강도하고, 관동 토리시메 데야쿠(関東取締出役) 시부야 와시로(渋谷和四郎)의 부재중 집을 습격하여 가족을 살해했다.[44] 이러한 소란 사건은 10월 하순부터 시작되어 12월이 되자 가장 격렬해졌다.[44]

이러한 일련의 도발적인 사건들은 요시노부의 주위에서 더욱 더 ‘토벌 사쓰마’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지게 만들었고, 요시노부는 사쓰마 정벌을 명목으로 사실상 교토(京都) 봉쇄를 목적으로 한 출병을 개시한다. 구 막부군 주력인 막부보병대는 도바 가도로 진격, 아이즈번, 구와나번의 병사, 신센구미등은 후시미 가도로 진격하였다. 요시노부 출병의 정보를 받은 정부는 긴장하여, 1868년 1월 27일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정부 산요(参与)의 오쿠보 도시미치는 구 막부군의 교토 진입은 정부의 붕괴이며, 천황의 깃발과 도쿠가와 정벌의 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정부 의정(議定)인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사쓰마 번과 구 막부 세력의 사(私)투이며 정부는 관계가 없다며 반대를 주장했다. 회의는 분규(紛糾)하였지만, 정부 의정인 이와쿠라 도모미가 도쿠가와 정벌에 찬성한 것으로 인해 회의의 대세는 정해졌다.

2. 4. 사후회의 (四侯会議)

사쓰마번의 실질적인 번주인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는 외교 국제 문제 및 국사의 중요 안건에 대해서는 칙허를 얻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 안건은 영번(雄藩)에 의한 합의가 형성된 것을 상주하는 제도를 구상하여, 사후회의(四侯会議)를 열고 에도 막부 전제(專制)에 의한 정치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1867년(경응 3년) 5월 열린 사후회의(四侯会議)에서는 시마즈 히사미쓰가 회의를 주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의견에 밀리고, 또 야마우치 요돗도(山内容堂)가 막부 편의 의견을 지지하거나, 병결하는 등 회의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사쓰마번은 막번체제 하에서의 합의 제도를 포기하고, 도쿠가와가(徳川家)를 타파한 신정권 수립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2. 5. 삿토 밀약 (薩土密約)

사쓰마 번과 토사 번은 1867년(게이오 3년) 5월 21일(1867년6월 23일) 저녁, 교토 무로마치 거리 쿠라마구치(鞍馬口) 아래 서쪽 입구 모리노키초(森の木町)의 코노에 가(近衛家) 별저(별저)(사쓰마 번 가로(家老)・고마츠 타이토의 거처[14] 「오하나바타야시키(御花畑屋敷)」)에서 사토 밀약(薩土密約)을 맺었다.[15]

사토 막부 타도의 밀약 기념비

밀약 체결 이전 단계로 교토 「킨안로(近安樓)」에서 회견이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비석
교토시 히가시야마구(東山區)(기온(祇園))]]

5월 18일(양력 6월 20일)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교토에 도착하자, 같은 날 동산(東山)의 킨안로(近安樓)에서 이타가키 타이스케, 중옥 신타로, 후쿠오카 코테이, 히로시마 번의 후네코시 요우노스케 등이 모여 막부 타도의 책략을 꾸몄다.[10][11]

5월 21일(1867년6월 23일)에는 키요노스케는 난슈 선생에게 서신을 보내 오쿠보 선생, 요시이 선생과 함께 의논할 것을 제안하였다.[12][13]

이 밀약에 따라 도사 번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주도로 군제를 근대화하고 무력 척번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23] 5월 22일(양력6월 24일) 이타가키 타이스케는 야마우치 요도에게 밀약을 보고하고 미토 낭사를 숨기고 있던 사실을 고백하며, 토사 번의 기거(起居)를 촉구했다.[16][17][18] 야마우치 요도는 막부 타도 군사 밀약을 승인하고 이타가키 타이스케에게 토사 번의 군제 쇄신을 맡겼다.

5월 25일(양력 6월 27일), 사쓰마 번저에서 중신 회의를 열고 무력 막부 타도로 번론을 통일했다.[19] 5월 26일(양력 6월 28일), 나카오카 신타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사쓰마 번의 정세를 확인하고, 이타가키 타이스케 등의 막부 타도 방책을 보고했다.[20] 5월 27일(양력 6월 29일),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야마우치 요도를 따라 교토를 떠났고, 같은날 나카오카 신타로 등에게 오사카에서 벨기에제 활엄식(活罨式)(Albini-Braendlin_rifle) 300정을 구입하도록 했다.[21]

6월 2일(양력 7월 3일) 이타가키는 토사로 귀국하여, 궁대(弓隊)를 폐지하고 총포대(銃砲隊)를 조직하여 근대식 훈련을 실시했다. 나카오카 신타로는 무력 막부 타도 의지를 담은 서간을 토사 킨오토(土佐勤王黨) 동지들에게 보내 300명이 넘는 킨오토 당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6월 10일(양력 7월 11일), 막부 측은 신선조(新撰組) 대사를 막신(幕臣)으로 채용하여 킨오파(勤皇派)의 단속을 강화했다.[10]

그러나 고토 쇼지로대정봉환론을 제안하자, 번론은 무력 척번론을 배척하고 대정봉환론이 주류가 되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대정봉환론을 「헛된 이름 무실」이라고 비판하며 반대했다.[23] 야마우치 요도는 8월 20일(양력9월 17일) 고토 쇼지로의 제안에 따른 대정봉환을 막부에 상주할 의사를 밝혔다.[10] 8월 21일(양력9월 18일),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토사번 군비 용무와 겸임한 지도관 걸을 해임되었다.[10]

9월 6일(양력 10월 3일) 사쓰마-토사 동맹은 결렬되었고, 양 번은 다시 사쓰마-토사 막부 타도의 비밀 약조에 따라 막부 타도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24]

9월 9일(1867년10월 6일)에는 간 퇴조가 천구당잔당(츠쿠바 낭사)을 은닉하고 있다는 사실이 야마우치 요도에게 보고 되었으나,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처분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대정봉환(大政奉還) 노선을 진행하려던 자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26]

9월 20일(양력 10월 17일),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카츠라 고로(桂小五郎)(키도 다카요시(木戸孝允))에게 보낸 서간에서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막부의 권력을 깎아내리기 위한 큰 연극이라고 하고, 그 후 무력 척박을 해야 하지만,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가 대정봉환(大政奉還)만으로 그치고 척박(討幕) 거병을 주저한다면, 고토를 버리고 건 타이스케에게 접촉한다고 하였다.[28]

10월 8일(양력 11월 3일), 야마우치 요도는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토사번 보병 대대 사령관직에서 해임하였다.[10] 야마우치 요도는 사토 척막의 밀약을 파기하고, 10월 14일(1867년11월 9일)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게 된다.[23]

10월 18일(양력 11월 13일)에는 사쓰마-도사 막부 타도의 비밀 약정에 따라 참전하여 사쓰마번을 지원하라는 비밀 명령을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받았다.[10]

10월 19일(양력 11월 14일)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도사번 처벌 담당관(참정)에서 해임되어 실각했다.[10]

2. 6. 대정봉환 (大政奉還)

토사번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주도로 군제 근대화와 무력 척번론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고토 쇼지로대정봉환을 제안하자, 번론은 과격한 무력 척번론을 배척하고 대정봉환론이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무력 척번 의견을 굽히지 않고, 대정봉환론을 「헛된 이름 무실」이라고 비판하며 정면으로 반대했다.[23] 야마우치 요도고토 쇼지로의 제안에 따른 대정봉환을 막부에 상주할 의사를 밝혔다.[10]

토사번의 무사 고토 쇼지로와 후쿠오카 코테이 등이 번주 야마우치 요도 등에 의한 대정봉환을 권하는 건백서를 보고, 요시노부는 왕정복고에 의해, 이전부터 희망했던 의회주의에 의한 국회를 설치한 이원제 합의 정체로의 이행을 달성하면서[31], 즉시의 攘夷戰은 불가능[32]하다고 조정에 건언하고 정이대장군직을 사퇴하고 에도 막부를 닫는 뜻[311]을 이룰 좋은 기회라고 생각[33]하고, 10월 14일, 대정봉환을 상표했다.

요시노부는 후년 『옛날 꿈 회필기』에서, 대정봉환의 결심과 그 후의 도쿠가와 가의 입장에 대해 "대정을 반상한 이상은, 사실 끊임없이 국가를 위해 尽くそう라는 정신이었다. 그러나 반상한 이상은, 조정의 지시를 받아 국가를 위해 尽くす라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35]

예일대학교 동아시아 연구소 박사 연구원 마이클 손톤은 요시노부가 왕정복고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정치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한다.[36] 실제로, 요시노부는 만년 『옛날 꿈 회필기』 안에서 왕정복고 후의 모습을 아무도 모르는 상황하에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합의 정체하에서 천황가의 일충신으로서 황국을 위해 尽くそう하고 있었다고 말한다.[37]

같은 1867년(게이오 3년) 11월 당시의 요시노부의 브레인 중 한 명이었던 니시 아마네는, 요시노부 측근에게 『의제초안』을 헌상하고, 천황을 상징적 지위에 두는 한편, 대군국가원수로 하고, 삼권 분립을 도입한 근대 의회 제의 정체안을 내놓고 있었다.[38] 이와쿠라 도모미는 나중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에 대해 "요시노부는 유능한 인물로, 천황에 직결된 정부가 절대적으로 불가결하다고 간파할 수 있었다. 이 진심 어린 확신으로, 요시노부는 단순한 선물로서가 아니라 그의 정권을 천황에게 선양했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정치적 곤란의 여러 가지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39]

경응 3년 10월 13일(1867년 11월 8일),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노력으로 막부 타도 및 아이즈번, 구와나번 토벌을 명하는 막부 타도의 밀칙이 사쓰마번에 내려왔다.[40]

이튿날 10월 14일, 같은 밀칙이 조슈번에 내려왔다. 그러나 이튿날 대정봉환이 허락되고 ‘막부 타도 실행 연기의 사태서’가 10월 21일(양력 11월 16일)에 사쓰마번, 조슈번 양 번에 내려오자 막부 타도의 밀칙은 효력을 잃었다.[16]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할 대의명분이 연기된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도 시내를 교란시키고 구 막부를 도발하여 구 막부 측으로부터 전쟁을 시작하게 하려는 전략을 세웠다.[16] 11월(태양력 12월), 사카모토 료마대정봉환 이후 신정권 수립을 위한 정치 강령 『신정부강령팔책』를 제시했다.[48]

3. 경과

1868년 1월 27일(일본력: 正月3日) 저녁, 시모토바(下鳥羽) 부근 가도를 봉쇄하던 사쓰마 번 병사와 오메쓰케(大目付) 다키가와 도모타카(滝川具孝)의 논쟁으로 인해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여 도바(鳥羽)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는 보신 전쟁(戊辰戦争)의 첫 포성이었다.[5]

보신전쟁지 비


이때 신 정부군은 5,000명, 구 막부군은 15,000명이었으나, 구 막부군은 좁은 가도에서 종대(縦隊) 돌파를 시도하여 병력의 우세를 살리지 못하고 신 정부군의 탄막 사격에 전진이 제지당했다. 최고 사령관(육군봉행, ''rikugun bugyō'')은 타케나카 시게카타였으나, 실제 지휘는 다이메쓰케 다키가와 구케가 맡고 있었다.[112]

오쿠보 다다유키(大久保忠益) 부사령관 지휘 아래 쇼군군 2,000~2,500명이 도바(鳥羽) 방향으로 진군했다.[6] 오후 5시경, 미마와리구미(御番衆) 약 400명이 사사키 다다사부로(佐々木忠三郎) 지휘하에 고에다바시(小枝橋)에 있는 사쓰마군(薩摩軍) 방어 초소에 접근했다.[6] 그 뒤를 도쿠야마 고타로 지휘하의 2개 보병대대(歩兵)가 따랐고, 남쪽으로는 구와나 번(桑名藩) 8개 중대가 4문의 대포와 함께 진격했다.[6] 마쓰야마 번(松山藩), 다카마쓰 번(高松藩) 등도 참전했으나, 막부 기병과 포병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 사쓰마군은 4문의 대포를 갖춘 약 900명이 참호에 매복해 있었다.[6]

사쓰마군은 쇼군군의 평화로운 통과 요청을 거부하고 측면에서 사격을 개시했다.[5] 사쓰마군의 포탄 하나가 다키가와 도모타카(滝川具孝)의 말 옆 포차에 폭발하여, 다키가와를 떨어뜨리고 말을 놀라게 했다. 놀란 말은 날뛰었고, 쇼군군은 혼란에 빠졌다.[5] 사쓰마군의 공격은 강력했고, 쇼군군은 곧 혼란에 빠져 후퇴했다.[6]

사사키 다다사부로(佐々木忠三郎)는 부하들에게 사쓰마군 포병 공격을 명령했지만, 미마와리구미는 창과 검만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많은 부하들이 전사했다.[5] 그러나 구와나 번(桑名藩)군과 구보타 시게아키(久保田茂昭) 지휘하의 부대는 방어진을 유지했다.[6] 쇼군군은 후퇴하면서 집에 불을 질렀지만, 그 때문에 사쓰마군 저격수들이 더 쉽게 조준할 수 있었다.[6] 구와나 번(桑名藩)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밤에는 상황이 안정되었다.[6]

도바 전투터는 현재 「도바리큐아토 공원(鳥羽離宮跡公園)」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전투 기념비가 있다. 이 공원은 고에다바시(小枝橋)와 조난궁(城南宮) 사이에 위치해 있다.

1월 28일(일본력 1월 4일), 舊幕府군은 시모도바(下鳥羽)의 진지를 나와 사쓰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舊幕府군은 큰 손해를 입은 제1연대 대신 제11연대와 포 4문을 제1선으로 했다.[126] 사쓰마군은 사령 2번대가 전열에 가세한 것 외에는 전일과 같은 배치였지만, 舊幕府군은 전선의 중앙 돌파를 꾀했기 때문에 포위에 뛰어드는 형태가 되어, 전방과 좌우에서 사격을 받았다.[126] 舊幕府군은 공격을 단념하고 시모도바(下鳥羽) 진지로 후퇴했다.[128] 이 전투에서 막부육군보병봉행 병행 사쿠마 노부히사가 저격당해 전사했다.[129]

오전 8시경, 사쓰마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시모도바(下鳥羽)의 舊幕府군 진지를 공격했다.[129] 舊幕府군은 쌀가마를 가슴벽으로 하면서 격렬한 사격을 퍼부었다.[133] 사쓰마군은 산병으로 사격하고, 소총 6번대는 1인당 100발 이상의 사격을 했다.[131] 사쓰마군은 후퇴하여 탄약을 보충한 후 재차 공격 전진했다. 포병도 전진하여 1번 포대는 4문의 포 중 2문이 파손되었지만, 남은 2문이 舊幕府군 진지 근처까지 진출하여[132] 유탄을 쏘아넣고, 쌀가마 가슴벽을 날려 구멍을 만들고, 舊幕府군 포대를 제압했다.[133] 정오를 넘어 사쓰마군 증원으로 병구방 1번대와 1번 유격대가 도착했다.[133] 후시미에서도 소총 1번대가 전진하여 舊幕府군 우측 측면을 공격했다.[133] 舊幕府군은 오후 2시경, 도미노모리(富の森) 방면으로 후퇴했다.[133] 이 전투에서 막부육군 제12연대장 구보타 시게아키(久保田茂昭) 및 연대 부장 아키야마 테츠타로가 전사했다.[134] 도미노모리(富の森)에는 축조병이 술통에 토사를 채우고 다다미나 문판 등을 쌓아올려 가슴벽으로 한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고,[133] 舊幕府군은 그 진지에 들어갔다.

사쓰마군과 조슈번군은 추격으로 옮겨 오후 4시경, 도미노모리(富の森) 진지를 공격했지만, 진지에는 舊幕府군 소규모 일부대밖에 남아 있지 않고, 주력은 요도(淀) 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지는 용이하게 점령되었다.[136]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좁은 진격로를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37] 전방의 나소(納所)에 舊幕府군 진지가 구축되어 있고, 거기서 포격을 받았다. 요코오지누마(鵤鰅沼)를 사이에 둔 남동의 후시미가도(伏見街道), 요도제(淀堤)에도 舊幕府군 포대가 있고, 그 포대에서도 포격을 받고,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십자포화를 받게 되었다.[138] 습지대의 마른 갈대숲에는 아이즈 번(会津藩)이나 오가키 번(大垣藩) 부대가 소수로 나뉘어 매복하고 있어, 창이나 칼로 사쓰마군과 조슈군 부대의 측면에서 찌르는 공격을 했다.[138] 이러한 공격에 의해 사쓰마군과 조슈군 부대는 혼란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舊幕府군은 여세를 몰아 도미노모리(富の森) 진지를 탈환했다.[138] 사쓰마군 소총 3번대와 2번 포대가 증원으로 도착하여 사격을 행하여 퇴각을 원조하면, 舊幕府군은 추격을 멈추고 도미노모리(富の森) 진지에 들어갔다.[138]

1월 30일(일본력 1월 5일) 아침,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재차 공세로 전환했다. 오전 7시경, 소총대가 도미노모리(富の森) 舊幕府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141] 舊幕府군은 전력을 다해 사격하여 저항하고, 사쓰마군과 조슈군에는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다.[142] 사쓰마군 감군 시이하라 코야타, 소총 6번대 대장 이치키 칸베이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143] 오야마 야스케(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2번 포대 포 6문이 제1선에 진출하고 포격을 개시했다.[141] 2번 포대는 舊幕府군 보병이 집결하여 역습에 나서는 징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포(臼砲) 사격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2번 포대도 격렬한 사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엎드려서 전투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舊幕府군은 아이즈 번(会津藩)병이 백병전 돌격을 했지만, 사쓰마군은 검사와 저격병으로 구성된 호위대를 배치하여 격퇴했다.[144] 아이즈병은 포복으로 사쓰마군 전선 후방에 침투하여 2번 포대에 찌르는 공격을 했지만 도창을 잡은 포병의 백병전에 의해 격퇴되었다.[145] 2번 포대는 소총을 잡고 소총병으로서 전진했다.[147] 1번 포대는 구포 2문과 포 5문을 가지고 제1선에 진출하여[148] 유탄이나 산탄을 쏘아넣어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포격과 소총대 돌격에 의해 舊幕府군은 요도(淀) 방면으로 후퇴를 시작하고,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추격했다. 나소(納所) 수비 부대도 철수하고, 오후 2시경,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나소(納所) 진지를 점령했다.[149]

3. 1. 도바(鳥羽) 방면 전투

1868년 1월 27일(일본력: 正月3日) 저녁, 시모토바(下鳥羽) 부근 가도를 봉쇄하던 사쓰마 번 병사와 오메쓰케(大目付) 다키가와 도모타카(滝川具孝)의 논쟁으로 인해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여 도바(鳥羽)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는 보신 전쟁(戊辰戦争)의 첫 포성이었다.[5]

이때 신 정부군은 5,000명, 구 막부군은 15,000명이었으나, 구 막부군은 좁은 가도에서 종대(縦隊) 돌파를 시도하여 병력의 우세를 살리지 못하고 신 정부군의 탄막 사격에 전진이 제지당했다. 최고 사령관(육군봉행, ''rikugun bugyō'')은 타케나카 시게카타였으나, 실제 지휘는 다이메쓰케 다키가와 구케가 맡고 있었다.[112]

오쿠보 다다유키(大久保忠益) 부사령관 지휘 아래 쇼군군 2,000~2,500명이 도바(鳥羽) 방향으로 진군했다.[6] 오후 5시경, 미마와리구미(御番衆) 약 400명이 사사키 다다사부로(佐々木忠三郎) 지휘하에 고에다바시(小枝橋)에 있는 사쓰마군(薩摩軍) 방어 초소에 접근했다.[6] 그 뒤를 도쿠야마 고타로 지휘하의 2개 보병대대(歩兵)가 따랐고, 남쪽으로는 구와나 번(桑名藩) 8개 중대가 4문의 대포와 함께 진격했다.[6] 마쓰야마 번(松山藩), 다카마쓰 번(高松藩) 등도 참전했으나, 막부 기병과 포병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 사쓰마군은 4문의 대포를 갖춘 약 900명이 참호에 매복해 있었다.[6]

사쓰마군은 쇼군군의 평화로운 통과 요청을 거부하고 측면에서 사격을 개시했다.[5] 사쓰마군의 포탄 하나가 다키가와 도모타카(滝川具孝)의 말 옆 포차에 폭발하여, 다키가와를 떨어뜨리고 말을 놀라게 했다. 놀란 말은 날뛰었고, 쇼군군은 혼란에 빠졌다.[5] 사쓰마군의 공격은 강력했고, 쇼군군은 곧 혼란에 빠져 후퇴했다.[6]

사사키 다다사부로(佐々木忠三郎)는 부하들에게 사쓰마군 포병 공격을 명령했지만, 미마와리구미는 창과 검만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많은 부하들이 전사했다.[5] 그러나 구와나 번(桑名藩)군과 구보타 시게아키(久保田茂昭) 지휘하의 부대는 방어진을 유지했다.[6] 쇼군군은 후퇴하면서 집에 불을 질렀지만, 그 때문에 사쓰마군 저격수들이 더 쉽게 조준할 수 있었다.[6] 구와나 번(桑名藩)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밤에는 상황이 안정되었다.[6]

도바 전투터는 현재 「도바리큐아토 공원(鳥羽離宮跡公園)」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전투 기념비가 있다. 이 공원은 고에다바시(小枝橋)와 조난궁(城南宮) 사이에 위치해 있다.

1월 28일(일본력 1월 4일), 舊幕府군은 시모도바(下鳥羽)의 진지를 나와 사쓰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舊幕府군은 큰 손해를 입은 제1연대 대신 제11연대와 포 4문을 제1선으로 했다.[126] 사쓰마군은 사령 2번대가 전열에 가세한 것 외에는 전일과 같은 배치였지만, 舊幕府군은 전선의 중앙 돌파를 꾀했기 때문에 포위에 뛰어드는 형태가 되어, 전방과 좌우에서 사격을 받았다.[126] 舊幕府군은 공격을 단념하고 시모도바(下鳥羽) 진지로 후퇴했다.[128] 이 전투에서 막부육군보병봉행 병행 사쿠마 노부히사가 저격당해 전사했다.[129]

오전 8시경, 사쓰마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시모도바(下鳥羽)의 舊幕府군 진지를 공격했다.[129] 舊幕府군은 쌀가마를 가슴벽으로 하면서 격렬한 사격을 퍼부었다.[133] 사쓰마군은 산병으로 사격하고, 소총 6번대는 1인당 100발 이상의 사격을 했다.[131] 사쓰마군은 후퇴하여 탄약을 보충한 후 재차 공격 전진했다. 포병도 전진하여 1번 포대는 4문의 포 중 2문이 파손되었지만, 남은 2문이 舊幕府군 진지 근처까지 진출하여[132] 유탄을 쏘아넣고, 쌀가마 가슴벽을 날려 구멍을 만들고, 舊幕府군 포대를 제압했다.[133] 정오를 넘어 사쓰마군 증원으로 병구방 1번대와 1번 유격대가 도착했다.[133] 후시미에서도 소총 1번대가 전진하여 舊幕府군 우측 측면을 공격했다.[133] 舊幕府군은 오후 2시경, 도미노모리(富の森) 방면으로 후퇴했다.[133] 이 전투에서 막부육군 제12연대장 구보타 시게아키(久保田茂昭) 및 연대 부장 아키야마 테츠타로가 전사했다.[134] 도미노모리(富の森)에는 축조병이 술통에 토사를 채우고 다다미나 문판 등을 쌓아올려 가슴벽으로 한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고,[133] 舊幕府군은 그 진지에 들어갔다.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추격으로 옮겨 오후 4시경, 도미노모리(富の森) 진지를 공격했지만, 진지에는 舊幕府군 소규모 일부대밖에 남아 있지 않고, 주력은 요도(淀) 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지는 용이하게 점령되었다.[136]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좁은 진격로를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37] 전방의 나소(納所)에 舊幕府군 진지가 구축되어 있고, 거기서 포격을 받았다. 요코오지누마(鵤鰅沼)를 사이에 둔 남동의 후시미가도(伏見街道), 요도제(淀堤)에도 舊幕府군 포대가 있고, 그 포대에서도 포격을 받고,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십자포화를 받게 되었다.[138] 습지대의 마른 갈대숲에는 아이즈 번(会津藩)이나 오가키 번(大垣藩) 부대가 소수로 나뉘어 매복하고 있어, 창이나 칼로 사쓰마군과 조슈군 부대의 측면에서 찌르는 공격을 했다.[138] 이러한 공격에 의해 사쓰마군과 조슈군 부대는 혼란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舊幕府군은 여세를 몰아 도미노모리(富の森) 진지를 탈환했다.[138] 사쓰마군 소총 3번대와 2번 포대가 증원으로 도착하여 사격을 행하여 퇴각을 원조하면, 舊幕府군은 추격을 멈추고 도미노모리(富の森) 진지에 들어갔다.[138]

1월 30일(일본력 1월 5일) 아침,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재차 공세로 전환했다. 오전 7시경, 소총대가 도미노모리(富の森) 舊幕府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141] 舊幕府군은 전력을 다해 사격하여 저항하고, 사쓰마군과 조슈군에는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다.[142] 사쓰마군 감군 시이하라 코야타, 소총 6번대 대장 이치키 칸베이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143] 오야마 야스케(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2번 포대 포 6문이 제1선에 진출하고 포격을 개시했다.[141] 2번 포대는 舊幕府군 보병이 집결하여 역습에 나서는 징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포(臼砲) 사격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2번 포대도 격렬한 사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엎드려서 전투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舊幕府군은 아이즈 번(会津藩)병이 백병전 돌격을 했지만, 사쓰마군은 검사와 저격병으로 구성된 호위대를 배치하여 격퇴했다.[144] 아이즈병은 포복으로 사쓰마군 전선 후방에 침투하여 2번 포대에 찌르는 공격을 했지만 도창을 잡은 포병의 백병전에 의해 격퇴되었다.[145] 2번 포대는 소총을 잡고 소총병으로서 전진했다.[147] 1번 포대는 구포 2문과 포 5문을 가지고 제1선에 진출하여[148] 유탄이나 산탄을 쏘아넣어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포격과 소총대 돌격에 의해 舊幕府군은 요도(淀) 방면으로 후퇴를 시작하고,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추격했다. 나소(納所) 수비 부대도 철수하고, 오후 2시경, 사쓰마군과 조슈군은 나소(納所) 진지를 점령했다.[149]

3. 2. 후시미(伏見) 방면 전투

후시미(伏見)의 붕고바시(豊後橋)에서의 접전. 우측이 조정군, 좌측이 막부군


1868년 1월 27일[7], 후시미에서는 사쓰마 번-조슈 번 연합군이 막부군과 교전했으나, 결정적인 승패는 가리지 못했다. 사쓰마-조슈 연합군은 도바(鳥羽) 방면에서 포격 소리가 들리자 막부군에 사격을 개시했다. 막부군은 막부 보병대, 신센구미(新選組), 아이즈(会津) 번대 병력으로 구성되었다.[7] 특히 붕고바시(豊後橋) 장악권을 놓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1월 2일, 구 막부군은 오사카를 출발, 교토로 북상했다. 아이즈 번 병사들은 배를 타고 요도가와를 거슬러 후시미에 상륙했고, 다른 부대는 육로로 북상, 다음 날 3일에 도바 가도 방면과 후시미 방면으로 나뉘어 행군했다. 후시미 봉행소에는 이미 신센구미와 일부 보병 부대가 주둔, 이들과 합류했다.[107]

1월 3일, 육군봉행(陸軍奉行) 다케나카 시게타다(竹中重固)가 후시미로 이동, 지휘를 맡았다. 그는 후시미 봉행소(伏見奉行所)를 본진으로, 아이즈 번 병사들은 봉행소 북서쪽 동본원사 후시미 별원(東本願寺伏見別院)에 주둔했다. 구막부군 부대는 이 두 곳을 중심으로 시가지에 배치되었다. 구막부군의 병력은 약 4,000명으로,[150] 막부 육군 보병대 2개 대대 및 전습대(伝習隊) 1개 대대, 포병 약간, 신센구미 150명, 유격대(遊撃隊) 50명, 아이즈 번 1진(4개 대)과 포 8문 및 벳센구미(別撰組) 1개 대였다.[151][152] 다카마쓰 번(高松藩), 도바 번(鳥羽藩), 하마다 번(浜田藩) 부대가 후방에서 지원했다.[151][152]

같은 날, 조정으로부터 후시미 방어를 명령받은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토사(土佐) 부대가 후시미에 배치되었다. 사쓰마·조슈·토사 연합군은 오테스지(大手筋)를 경계로 구막부군과 대치했다. 최우익에 토사군 4개 소대, 그 왼쪽(동쪽)에 조슈군 2개 중대, 그 왼쪽에 사쓰마군 외성 4번대의 반대, 소총 2번대, 소총 3번대가 배치되었다. 고쿄구(御香宮)를 모서리로 하여 직각으로 꺾어 남쪽으로 사쓰마군 소총 4번대, 소총 1번대, 외성 4번대의 나머지 반대가 전개되었다. 포병은 포 5문이 봉행소보다 고지대에 있는 고쿄구에 배치, 남쪽 봉행소 방향을 노렸고, 사쓰마군 좌익 진지에서는 포 2문 및 유탄포(臼砲) 2문 총 4문이 구릉에 배치, 서쪽을 노려 고지대에서 구막부군에게 십자포화를 퍼부을 수 있었다.[153][154] 후시미에 있던 사쓰마·조슈·토사 연합군의 총병력은 약 1,200명이었다.[150]

오후 2시경부터 통행을 둘러싼 질문과 답변이 반복되다, 오후 5시경 도바 방면에서 총성이 들리자 후시미에서도 전투가 시작되었다. 즉시 사쓰마군의 포 9문이 봉행소에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사쓰마군 포병의 포격과 거의 동시에 구막부군은 봉행소 북쪽 문을 열었고, 아이즈 번 포병이 고쿄구의 사쓰마군 포병에 응사하였다.[155]

아이즈 번 병사와 신센구미를 선두로 구막부군 수백 명이 돌격했지만, 사쓰마군은 포병의 유탄, 산탄 포격과 소총대의 4열 횡대 사격으로 격퇴했다.[156][157] 구막부군은 다다미를 이용, 임시 방벽을 만들어 사격했고, 양군 간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157] 백병전 돌격은 모두 사쓰마군의 사격에 의해 실패했다.[156][158] 구막부군은 봉행소 남동쪽 포병 진지에서 반격했지만, 곧 제압되었다.[159]

신센구미는 토가미 켄사쿠(土方歳三) 명령에 따라 2번대 대장 에나쿠라 신파치(永倉新八)가 부대를 이끌고 진출했지만, 사쓰마 병사의 총격에 사상자가 발생, 공격을 단념하고 봉행소로 돌아왔다.[160] 사쓰마군은 구막부군 공격을 격퇴했지만, 구막부군 보병대와 전습대의 사격에 고전했다.[161] 조슈군은 아이즈 번군과 대치, 다다미를 방벽으로 삼아 사격했다.[162]

오후 8시경, 사쓰마 번 포병의 포탄이 후시미 봉행소 내 탄약고에 명중, 대폭발을 일으켜 구막부군이 동요했다.[163] 구막부군은 전투를 재개, 오후 11시경까지 저항했다.[163] 사쓰마군은 봉행소 문 오른쪽 옆 마을집에 방화, 봉행소를 불태웠다. 조슈군의 정진대도 봉행소에 돌입, 방화했다. 봉행소는 화재로 밝게 비춰졌고, 구막부군 병사들은 저격당했다. 사쓰마군 유탄포가 봉행소에 접근, 포탄을 발사했고, 사쓰마·조슈 소총대도 봉행소를 포위, 사격했다.[159][163] 구막부군은 후퇴를 시작했지만, 각 부대 판단에 따라 후퇴했다.[164][165] 자정경, 사쓰마·조슈군은 후시미 봉행소에 돌입, 구막부군 부대는 거의 후퇴한 상태였다.[166]

봉행소 안에는 아이즈 번 대포 2문 등 다수 장비가 남아있었다. 구막부군은 사상자를 배에 싣고 오사카로 후송했지만, 옮기지 못한 시체가 야전병원에 쌓여 있었다. 부상병 수십 명은 사쓰마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167] 아이즈 번 병사와 신센구미, 일부 보병은 요도(淀)까지 후퇴, 다른 부대는 호리카와(현재의 도이가와 및 우지가와 파류(宇治川派流)) 우안을 점령, 각 다리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164][168] 다케나카 시게카타는 요도로 후퇴, 지휘관 없는 후시미 방면 구막부군은 통일된 지휘를 상실했다.[169]

후시미 방면 사쓰마·조슈·토사군은 병력이 남아돌아, 사쓰마군 일부와 조슈군 제6중대를 도바로 전진시켰다.[170][171]

1월 4일 아침, 신정부군과 구막부군은 호리카와를 사이에 두고 대치, 오전 8시가 지나자 신정부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조슈군, 토사군은 호리카와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 진격, 일부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다른 부대는 남쪽으로 향해 중쇼지마(中書島)를 방어하는 구막부군을 공격했다. 사쓰마군 2번대는 조슈군 좌익을 진격, 교바시 수로(京橋水路) 동쪽을 돌아 중쇼지마의 구막부군을 격퇴, 동섬에 건너가 점령했다. 사쓰마군 소총 4번대는 호리카와 서쪽으로 향하는 조슈군, 토사군과 함께 반대편 구막부군을 공격했다. 도바 방면으로 전진 중인 소총 3번대, 1번 포대, 2번 포대도 전투에 참가했다. 호리카와를 사이에 둔 포격전에서 사쓰마군 유탄포탄이 민가에 명중, 화재를 발생시켜 구막부군에 타격을 주었다.[172] 교토에서 남하해 온 토사군 야마모토 고타로(山地元治) 지휘하 소대가 호리카와 우안을 남진, 구막부군 좌익을 공격, 구막부군은 후퇴했다.[172] 조슈군 제6중대는 다카세가와(高瀬川) 제방에서 구막부군 부대와 조우, 격전 끝에 격퇴했다.[173] 오전 10시경까지[171] 호리카와 및 다카세가와 우안에서 구막부군이 일소되었지만, 사쓰마·조슈·토사군은 추격하지 않고 후시미에서 정지했다.[174]

1월 5일, 사쓰마·조슈간 협의 후, 신정부군은 조슈군 제5중대, 제1중대를 선두로 후시미가도(淀堤)를 요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후시미 조슈군에는 포대가 없어, 이나바 번(因幡藩) 포 2문이 수행했고, 그 뒤에 사쓰마군 소총대와 포대가 이어졌다. 요도제는 우지가와(宇治川) 우안 제방이며, 남동쪽에 우지가와, 북서쪽은 요코오지누마(横大路沼)에서 이어지는 습지대로, 부대를 넓게 전개할 수 없었다.[175] 구막부군은 요도제 위 센본마쓰(千本松)에 방어 진지를 구축, 아이즈 번 병사(별센구미 포함), 신센구미, 유격대와 막부 육군 소대가 방어했다. 경계 진지에는 정찰병과 포 2문이 배치되었다. 신정부군 선두 조슈군 제5중대가 센본마쓰 부근에 접근하자 구막부군은 포격, 조슈군이 응전했다. 조슈군 제5중대는 구막부군 정찰병과 포병을 격퇴, 포 2문을 탈취했다.[175]

마른 갈대숲에 잠복하던 아이즈 번 창병 20~30명이 조슈군 측면에서 백병전 돌격을 가, 난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제5중대 중대 사령관 이시카와 아쓰사케(石川厚狭介)가 전사했다.[176][177] 조슈군 제5중대는 아이즈 번 병사를 격퇴했지만, 사상자가 많아 후퇴, 조슈군 제1중대와 이나바 번 포대가 최전선에 진출했다.[178] 양군 모두 소총과 대포로 사격,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신센구미도 포 2문으로 사격했지만, 신정부군 사격에 대원이 사상했다. 신센구미와 아이즈 번 병사는 백병전 돌격을 시도했지만, 신정부군 사격에 격퇴되었다.[179] 신정부군도 전진하지 못하고 고전했다. 이나바 번 포병의 포가 손상, 사격 불능이 되었다.[178][180] 사쓰마군 소총 12번대가 조슈군 뒤에서 사격했지만 전진은 어려웠다. 사쓰마군 유탄포가 후방에서 아군 과다 사격을 가했지만, 명중률이 나빴다.[178] 소총 12번대는 전진을 시도, 아이즈 번 창병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사쓰마군은 아이즈 번 병사를 격퇴했지만, 다른 아이즈 번 부대의 사격과 난입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 소총 12번대 대장 이주인 요이치(伊集院与一)도 전사했다.[180] 포 2문 중 1문은 손상, 1문은 탄약이 다 떨어졌다.[180]

후퇴했던 조슈군 제5중대는 다시 전진, 최전선에서 구막부군 진지로 돌진, 적진에 돌입했다.[178] 잠복하던 구막부군 부대가 난입 공격을 시도했지만, 후방 신정부군 부대 사격에 격퇴되었다.[178] 제5중대 적진 돌입에 이어, 조슈군 제1중대, 사쓰마군 소총 12번대도 전진, 신정부군은 대집단이 되어 돌진했다.[178] 전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구막부군은 요도코바시(淀小橋)를 건너 요도 시가지로 후퇴, 신정부군은 오후 2시경 요도코바시에 도착했다.[182]

3일, 조정에서는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도쿠가와 정벌의 포고와 금기를 주장했지만, 마쓰다이라 하루아키(松平春嶽)는 중립을 주장하며 반대했다. 회의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와쿠라(岩倉)가 도쿠가와 정벌에 찬성함으로써 대세가 결정되었다.

야마우치 요도는 재경 토사 번 병사에게 전투 개입 엄금[183]을 알렸지만, 후시미 방면 토사 번사들은 藩命을 기다리지 않고, 사쓰마·토사 비밀 협약(薩土密約)에 따라 전투에 참가, 구막부군에 포격했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 구막부군은 패주했다. 토사 번 병사는 승리했지만, 기타무라 시게요리(北村重頼) 지휘 포병대는 묘호인(妙法院)으로 불려가 질책을 받고 할복을 각오, 금기(錦の御旗)가 휘날리고, 藩命 위반 처분이 유보되었다.

3. 3. 요도 전투 (淀の戦い)

28일, 전선에서 일진일퇴의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조정에서는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에게 금기(錦旗)를 수여하여 신정부군이 관군이 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가 위조했다는 설도 있다.) 29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측근이자 로주였던 요도번이나바 마사쿠니를 믿고 요도 성에 입성하려던 구 막부군은 요도 번이 신정부와 싸울 의사가 없어 성문을 닫자 입성이 거절되었다. 같은 날 요도 센료마쓰(淀千両松)에 포진한 구 막부군은 오전 10시경부터 신정부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정부군이 불리했지만, 격전 끝에 상황이 역전되어 오후 3시경부터 구 막부군이 패주했다. 이 전투에서 신센구미 결성 초기부터 주요 간부였던 이노우에 겐자부로가 전사했다.

후시미에 있던 아이즈번 병사, 신센구미, 유게키타이(유게키타이/遊撃隊일본어) 게릴라 부대는 28일 아침 사쓰마번조슈번 군의 공격을 다카세가와( 다카세가와/高瀬川일본어 )와 우지가와( 우지가와/宇治川일본어 )에서 다시 받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요도 성 방향으로 후퇴했다.

1월 5일 오후, 요도 성하에는 도바 가도(街道) 쪽에서 후퇴해 온 구막부군 부대와 후시미 가도 쪽에서 후퇴해 온 구막부군 부대가 합류하여 과밀 상태였다.[184] 구막부군은 요도 성을 거점으로 신정부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요도번에 입성을 요청했고, 타키가와 구케이(滝川具挙)가 대표로 협상을 진행했다.[184] 이나바 마사쿠니는 당시 로주였기 때문에 입성이 허락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번주가 에도에 부재중인 상황에서 가신들은 도쿠가와 요시카쓰의 중립 요구와 신정부군의 압력으로 개문을 거절했다.[182][184] 구막부군은 요도에서 철수하여 요도 고바시(淀小橋), 요도 오하시(淀大橋)를 불태운 후, 하치만, 하시모토 방면으로 후퇴했다. 다리가 불타 무너졌기 때문에 신정부군은 배를 이용하여 우지가와를 건너 요도에 진입했고, 요도번은 신정부군에게 항복했다.[184]

3. 4. 하시모토 전투 (橋本の戦い)

1월 30일, 막부군은 이와시미즈하치만 궁이 있는 오토코 산(男山)의 동서로 나뉘어 포진했다.[187][188] 서쪽의 하시모토는 유곽이 있는 숙소였고,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신센구미를 포함한 막부군 본대가 진을 쳤다.[189][190] 막부군은 동쪽의 오토코 산과 서쪽의 요도강을 낀 하시모토에서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싸우려 했다.[187]

하지만, 오야마자키정을 수비하던 쓰번이 신정부군 측으로 배반하여 막부군을 포격했다.[90][101][103] 5일 밤, 칙사 사조 다카히라(四条隆平)가 야마자키 관문(가지와라 다이바)(山崎関門(梶原台場))로 가서 쓰한(津藩) 병사들을 지휘하는 후지도우 사이메(藤堂采女)를 설득하여 신정부군에 가담시켰다.[186] 예상치 못한 서쪽에서의 포격에 막부군은 전의를 잃고 무너져 오사카로 도망쳤다.[191][192]

이 전투로 교토미마와리구미의 수장이었던 사사키 다다사부로가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신센구미의 야마자키 스스무가 중상을 입었다.[191][192]

4.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퇴각

도쿠가와 요시노부오사카성에서 철저하게 교전할 것을 연설하였으나, 그날 밤 측근 및 로주 이타쿠라 가쓰키요, 사카이 다다토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아이즈 번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구와나 번 번주)와 함께 몰래 성을 탈출, 오사카 만에 정박 중인 막부 군함 가이요마루를 타고 에도로 퇴각했다. 지도자가 도망친 것으로 인해 구 막부군은 전투 의욕을 상실하고 오사카를 포기한 채 각자 에도나 영지로 귀환했다.

요시노부는 가이요 마루가 도착하지 않자 오사카 만에 정박해 있던 미 해군 군함 에 하룻밤 피신했고, 다음 날 도착한 가이요 마루를 타고 에도로 향했다. 그의 잔여 병력은 쇼군이 그들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오사카 성을 떠났고, 그 후 오사카 성은 저항 없이 제국군에 항복했다. 요시노부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행동에 대한 제국의 승인에 불안감을 느꼈고, 금박 깃발이 나타나자 싸울 의지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에도로 떠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배경에는 오사카 성의 화재가 보인다.


요시노부는 애초부터 전의가 없었고, 도바·후시미 전투 발발 소식을 듣자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193] 그는 후쿠이 번 무사 나카네 세츠에에게 편지를 맡겨, 도쿠가와 요시카쓰, 마쓰다이라 하루가쿠, 야마우치 요도 등에게 "천황의 바로 곁에서 무기와 방어구는 움직이지 않도록 이미 병사들에게 지시해 두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발포했으니 앞으로의 전황이 걱정이다"라는 내용으로 천황을 보호해 주기를 부탁했다.[193] 깃발이 게양된 것을 듣자 요시노부는 더욱 놀라며 조정에 대항할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도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며 슬퍼했다.[193]

1월 6일, 요시노부는 진보 수리로부터 동귀하여 향후 대책을 세우자는 건의를 받았고, 나가이 나오시도 이에 동의했다.[76]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종가의 거성인 에도 성으로 돌아가 천황가(조정)에 순종하고 조용히 지내려고 결심했지만, 마음속에 간직하고 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76][242][255] 시험 삼아 여러 관리와 대장들을 소집하여 의견을 묻자 모두 출마를 주장했고, 요시노부는 그들을 좋게 대해준 뒤 로쥬 이타쿠라 카쓰시즈와 나가이 나오시를 별실로 불러 동귀에 대해서만 말했다.[76] 이타쿠라와 나가이가 동귀에 동의하자, 요시노부는 비밀리에 오사카성 뒷문으로 빠져나갔다.[76]

오사카 만 덴포산에서 즉시 승선할 배를 찾았지만, 개양환이 사쓰마 번 군함을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에게 소개를 받아 미국 함정에 동귀를 요청했다.[76][194] 영국 군함이 개양환 주위를 돌며 정찰하는 듯하여 선실에 숨어 있기도 했다.[76]

개양환(開陽丸) 선상에서도 요시노부는 이타쿠라 가쓰시즈(板倉勝静)에게 에도에 도착하면 끝까지 천황가(天皇家)에 공순 겸손하며 조정의 판결을 기다릴 결심이라고 말했다.[76] 1월 8일 밤, 개양환은 오사카 만을 출발, 폭풍우를 만나 하치조섬(八丈島) 북쪽 바다에 표류하기도 했으나, 11일 시나가와 앞바다(品川沖)에 도착했다.[195] 요시노부는 12일 하마고텐(浜御殿)에 상륙, 에도성(江戸城) 서쪽 마루(西丸)에 들어갔다.[195]

막신(幕臣)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일기에는 에도 상륙 당시 요시노부 일행이 매우 침울한 모습이었다고 적혀 있다.[195] 에도에서는 막부 신하들이 요시노부의 귀환과 부상병들의 귀환을 보면서 분노했고, 주전론이 득세했다. 격문과 투서들이 난무했고, 육군·해군 군인 등은 주전론자였다.[203] 로쥬들은 주전론에 동의하여 에도의 사쓰마 번 저택들을 몰수하고, 각 번에 경비를 명령했다.[204]

요시노부가 돌아왔을 때 에도성 내의 혼란은 극심했고, 로쥬 이하 모든 막부 신하들 거의 대부분이 주전론자였다.[214] 쿠와나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라는 매일 에도성에 올라갔고, 관료들은 요시노부를 알현하여 각자의 주장을 건의했다.[214][204] 와카오시요리 호리 나오토라는 자결했고, 요시노부를 파면·금고시켜 도쿠가와 씨의 영속을 도모하려 한다는 풍설도 떠돌았다.[204][205]

1월 20일, 요시노부는 에도 각 번저택의 중역들을 불러 협력을 부탁했고, 21일에는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 등에게 조적의 억울한 누명에 대한 변명과 요시노부의 진의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206] 요시노부는 하타모토 쿠로카와 요헤이에게 공순 외에는 각오가 없다고 말했고,[208] 하타모토들에게는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조명을 따르고 무사와 백성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취해 주기를 바란다고 타이르며,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쿠와나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라 등에게 에도성 출입을 금하고 공순의 뜻을 알리며 에도 밖으로 물러가 금고시켰다.[208][209]

막부 신하 가쓰 가이슈가 요시노부에게 진군과 후퇴 모두 뜻대로 따르겠다고 하자, 요시노부는 일심으로 공순을 결정했다고 대답했고, 가쓰는 크게 감격하여 공순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다.[214][211] 요시노부는 막부 신하 오오쿠보 이치오에게도 같은 뜻을 타일렀다.[214]

5. 영향

도바·후시미 전투는 보신 전쟁 전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오사카성에서 철저 항전을 연설한 후 몰래 성을 탈출하여 에도로 퇴각했다. 지도자가 도망치자 구 막부군은 전투 의욕을 상실하고 오사카를 포기했다.

1월 7일, 조정은 요시노부 추토령을 내렸고, 구 막부군은 조적(朝敵)이 되었다.[221] 9일에는 신정부군이 오사카 성을 접수하여 교토-오사카 지역을 장악했다.[221] 이후 신정부는 빠른 속도로 서일본 번들을 장악하고, 2월 1일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대총독으로 하는 동정군(東征軍)이 진군을 개시했다.[223]

이러한 신정부군의 승리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구 막부군 내부의 혼란, 신정부군의 신식 무기와 전술, 그리고 조정의 신정부군 지지 선언으로 많은 번이 신정부군에 가담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특히,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퇴각은 구 막부군의 전면 패배를 야기했다.

1월 21일 신정부군은 야마토국(지금의 나라현)에 군사기지겸 관청으로 '''대화진대'''를 설치했다.[222] 1월 25일에는 구주열강의 조약제국이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여[222], 구 막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일본 유일의 정부로써의 지위를 상실했다.

1865년 오사카성 성벽


도바·후시미 전투는 규모에 비해 그 영향이 컸다.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와 사기는 크게 약화되었고, 중립을 유지했던 많은 다이묘들이 천황을 지지하며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요시노부의 잘못된 권력 회복 시도는 궁정 정부 내 평화적 해결을 선호했던 세력들을 침묵시켰다.

서일본에 대한 도쿠가와의 패권을 상징하는 오사카성이 함락된 것은 군사적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양군의 피해는 신정부군 약 110명, 구 막부군 약 280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보신전쟁은 우에노 전쟁, 호쿠리쓰 지방과 도호쿠 지방에서의 호쿠에쓰 전쟁, 아이즈 전쟁, 하코다테 전쟁으로 이어졌다.

4월에 이르러서도 외국 공사들의 중립선언은 해제되지 않았고, 4월 13일, 히가시쿠제 미치토미는 각국 공사에게 서신을 보내 요시노부 정토군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중립령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6. 사적

교토시 후시미구에는 도바·후시미 전투와 관련된 여러 사적지가 남아있다.


  • 후시미 부교소(伏見奉行所) 터: 신센구미를 비롯한 막부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긴키 닛폰 철도 교토 선 모모야마고료 앞 역에서 도보 7분, 게이한 본선 후시미모모야마 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다. 현재는 비석만 남아있다.
  • 고코노미야 신사(御香宮神社): 신정부군이 진영으로 삼아 아래쪽에 있는 후시미 부교소를 공격했던 곳이다. 긴키 닛폰 철도 교토 선 모모야마고료 앞 역에서 도보 4분, 게이한 본선 후시미모모야마 역에서 도보 7분 거리에 있다.
  • 히가시혼간지 후시미 별관(東本願寺伏見別院): 아이즈번의 진영이었다. 게이한 본선 후시미모모야마 역에서 도보 10분, 긴키 닛폰 철도 교토 선 모모야마고료 앞 역에서 도보 13분 거리에 있으며, 현재 비석이 남아있다.
  • 분쇼 사(文相寺): '보신전쟁 동군 전사자 매골지' 비석이 남아있다. 게이한 본선 요도 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있으며, 현재 견학 가능하다.
  • 조엔 사(長円寺): 정문 앞에는 '보신전쟁 동군 전사자의 비', 부지 내에는 '보신전쟁 동군 전사자 매골지'가 남아있다. 게이한 본선 요도 역에서 도보 약 10분 거리이며 현재 견학가능하다. 이곳은 죠슈(戊辰)전쟁 당시 신선조(新選組)를 비롯한 막부군(幕府軍)의 야전병원이었다.
  • 요도 성(淀城): 후다이 다이묘 이나바 씨의 거성이었다. 가쓰라강, 우지강, 기즈강 세 강이 합류하는 수로의 요충지로, 도쿠가와의 신임이 두터운 이나바 가가 진을 쳤다. 도바 후시미 전투 때에는 성주 이나바 마사쿠니가 막부군의 입성 요청을 거절하였다. 게이한 본선 요도 역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있으며, 현재는 성벽, '요도 성지'의 비, '다나베 하루노스케 군 기념비'가 남아있다. 부지 내는 공원이 되었다.
  • 묘쿄지(妙教寺): 요도 성 혼마루가 있던 장소이다. 경내에는 '사적 요도 성 보신 전쟁 포탄 관통 흔적'의 비석과, '보신전쟁 동군 사망자의 비', 본당에는 '동군 전사자의 위패'가 남아있다. 게이한 본선 요도 역에서 도보 20분 거리에 있으며 견학 가능하다.
  • 보신전쟁 동군 서군 격전지 비: 교토 경마장(京都競馬場) 주차장 근처에 위령비가 있다. 비에는 "막말의 전투 정도로 세상에서 슬픈 사건은 없다. 그것이 일본인 동족간의 전쟁이며, 막부군, 관군의 모두가 올바르다고 믿은 채 각각의 길로 자신들의 진실을 다하여 그와 같이 흘러가는 한순간의 시차에 의해 어떤 자는 관군이 되어 또 어떤자는 막부군이 되어 무사도에 목숨을 바쳤다. 이곳에 백년의 세월이 지나 그 인연이 있는 이 땅에 불행히 역적으로 죽은 긍지있는 사람들에 대해 지금 위령비를 세우는 것을 본다. 재천의 혼에 의해 안심하고 죽기를 쇼와44년 나카무라 가쓰고로"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는 구스노하 다이바(楠葉台場) 터가 구스노하 다이바 터 사적 공원(楠葉台場跡史跡公園)으로 정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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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서적 大久保利通日記 1867-12
[62] 서적 史籍雑纂 国書刊行会 1911-1912
[63] 서적 史籍雑纂 国書刊行会 1911-1912
[64] 서적 浅野長勲自叙伝 平野書房 1937
[65] 서적 岩倉公実記
[66] 서적 浅野長勲自叙伝 平野書房 1937
[67] 서적 史籍雑纂 国書刊行会 1911-1912
[68] 서적 徳川慶喜公伝 竜門社 1918
[69] 서적 岩倉公実記
[70] 서적 岩倉公実記
[71] 서적 昔夢会筆記 徳川慶喜公回想談 渋沢栄一
[72]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00-00
[73]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00-00
[74]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00-00
[75]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00-00
[76] 서적 昔夢会筆記 渋沢栄一
[77]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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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00-00
[81] 서적 史談会速記録 合本 五 原書房 1971-12-10
[82]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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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서적 復古記 第1冊 https://dl.ndl.go.jp[...] 内外書籍 193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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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서적 徳川慶喜公傳(4)
[89] 서적 板垣退助君戊辰戦略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
[90] 서적 昔夢会筆記 渋沢栄一
[91] 서적 昔夢会筆記 東洋文庫、平凡社 196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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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백과사전 薩摩藩邸焼打ち事件 https://kotobank.jp/[...] 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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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서적 大日本外交文書 第一巻 https://dl.ndl.go.jp[...] 186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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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서적 復古記 第1冊 https://dl.ndl.go.jp[...] 内外書籍 1930-10-05
[104] 서적 都名所図会 巻4-6 https://dl.ndl.go.jp[...] 葵文會, 吉川弘文館 191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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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八木書店
[107] 서적 戊辰役戦史 上 時事通信社
[108] 문서 慶明雑録
[109] 문서 村摂記
[110] 서적 鳥羽伏見の戦い 中央公論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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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문서 長州軍第三中隊は大山柏『戊辰役戦史 上』には伏見から鳥羽街道方面に転進した事が記されているが、末松謙澄『防長回天史 第6篇上(第10) 修訂再版』には「相国寺駐在ノ第三中隊(整武隊)ヲシテ鳥羽口ニ赴カシム」とある。
[136] 서적 戊辰役戦史 上 時事通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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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학술지 鳥羽伏見の戦い 幕府歩兵隊はなぜ敗れ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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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문서 본문 내용
[186] 웹사이트 여러 출처 여러 url 포함 2018-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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