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니 사네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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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니 사네요리는 1562년 히구치 카네토요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우에스기 가문에 속해 오타테의 난에 참전했다. 1582년 오구니 시게요리의 양자가 되어 오구니 씨의 가독을 상속했고, 1586년 니이보리 시게이에 토벌전에 참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라쿠다이 신축을 축하하는 사절로 참여하여 종5위하 탄바노카미에 임명됨과 동시에 오쿠니로 성을 개명했다. 이후 연가 활동을 하였으며, 1594년 무라카미 성주로서 9,041석을 지행했다. 1598년 아이즈 이봉에 따라 미나미야마 성 대리로서 2만 1,000석을 받았고, 1600년 진사 성 축성 부역 봉행을 담당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데와 국 다카하타 성 7,000석의 성대가 되었으나, 1604년 혼다 마사시게와의 갈등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고야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가 1622년 또는 1605년에 사망했다. 오쿠니 가문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으나, 우에스기 사다카쓰 대에 재흥되었고, 딸 아호는 혼다 마사시게에게 시집갔다. 2009년 NHK 대하드라마 '천지인'에서 고이즈미 고타로가 오쿠니 사네요리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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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니 사네요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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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오쿠니 사네요리 |
원어 이름 | 大国 実頼 |
시대 | 안도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에이로쿠 5년 (1562년) |
사망 | 겐나 8년 2월 9일 (1622년3월 20일) |
개명 | 히구치 요시치 (유명) → 오구니 사네요리 → 오쿠니 사네요리 |
계명 | 쓰칸소다쓰코지, 기잔린코젠조몬 |
묘소 | 야마가타현요네자와시의 간코안 |
관위 | 종5위하·다지마노카미, 제대부 (제설 있음) |
주군 | 우에스기 가게카쓰 |
번 | 데와요네자와번사 |
씨족 | 히구치 씨→오쿠니 씨 (오구니 씨) |
부모 | 아버지: 히구치 가네토요 어머니: 오자키 시게토시 딸·란코, 양아버지: 오구니 시게요리 |
형제 | 나오에 가네쓰구, 사네요리, 히구치 히데카네, 기타 (장녀, 스다 미쓰타네 실), 차녀 (이로베 미쓰나가 정실), 시노이 야스노부 실 |
배우자 | 불명 |
자녀 | 아호 (나오에 가네쓰구 양녀, 혼다 마사시게 계실), 양자: 미쓰요리 (히구치 히데카네 자) |
2. 생애
에이로쿠 5년(1562년) 히구치 카네토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우에스기 겐신 사후 벌어진 오타테의 난에서는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지지했으며, 이후 카게카츠의 명으로 오구니 씨 가문을 상속받았다. 텐쇼 14년(158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라쿠다이 신축 축하 사절로 파견되었고, 이때 성을 '''오쿠니'''(大國)로 바꾸었다. 그는 무장으로서 활동하는 한편, 연가에도 능하여 "능서, 연가의 명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분로쿠 3년(1594년)에는 무라카미 성주로서 9,041석을 다스렸다. 게이초 3년(1598년) 우에스기 가문의 아이즈 이봉에 따라 미나미야마 성 대리로서 2만 1,000석을 받았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데와 국 다카하타 성의 성대가 되었으나, 후시미에 머물렀다.
게이초 9년(1604년), 형인 카네츠구와 혼다 마사시게의 양자 결연에 반대하여 마사시게를 맞이하러 온 사자를 살해하고 고야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고야산에 은둔하다가 카네츠구가 사망한 뒤 몰래 요네자와로 돌아와 겐나 8년(1622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게이초 10년(1605년)경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에이로쿠 5년(1562년), 히구치 카네토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우에스기 겐신 사후 벌어진 오타테의 난에서는 우에스기 카게카츠 측에 가담하여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인 텐쇼 10년(1582년), 카게카츠의 명령에 따라 텐진야마 성의 성주였던 오구니 시게요리의 양자로 들어가 오구니 씨 가문의 가독을 물려받았다. 고야산에 전해지는 『에치고국 공양장』 기록에 따르면, 사네요리는 텐쇼 13년(1585년) 8월 18일에 사망한 의붓어머니(시게요리의 부인)를 위해 공양을 의뢰하기도 했다.2. 2. 오구니 시게요리 가문 상속 이후
텐쇼 14년(1586년), 니이보리 시게이에 토벌전에 참가하여 니가타 성을 불태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라쿠다이 신축 시에는 축하 사절을 맡았다. 이때 종5위하 탄바노카미에 임명됨과 동시에 성을 '''오쿠니'''로 개명했다. 이후, 빈번하게 상경하여 키도 겐사이와 함께 연가회에 많이 참가했다. 텐쇼 19년(1591년)에는 연가사 사토무라 조하가 주최하는 연가회에 자주 참가했으며, 사네요리는 『마이후 시군 유래』에는 "능서, 연가의 명수"라고 평가받고 있다.분로쿠 3년(1594년), 카게카츠가 상경하여 주라쿠다이를 방문했을 때, 태도 한 자루, 소매 10벌, 은자 50냥을 헌상했다. 같은 해의 『분로쿠 3년 정납원 수목록』에 따르면, 무라카미 성주로서 9,041석을 지행하고, 542명의 군역을 부과받았다. 사네요리 자신은 이 시기에 후시미의 우에스기 저택에 체류했으며, 무라카미 성에는 카스가 모토타다를 성대로 두었다.
게이초 3년(1598년),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아이즈 이봉에 따라 미나미야마 성 대리로서 2만 1,000석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에 고야산을 참배하여, 세이조신인에 역수와 아버지 카네토요의 공양을 의뢰하고 있다. 그리고 게이초 5년(1600년)에 카게카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싸움에 대비하여 아이즈에 진사 성을 축성하려 했을 때, 형인 카네츠구와 함께 부역봉행을 맡아 공을 세웠다. 같은 해의 세키가하라 전투 후, 데와 국 다카하타 성 7,000석의 성대가 되었지만, 성으로 옮기지 않고 상경하여 후시미에 체류했다.
게이초 9년(1604년), 형인 카네츠구와 혼다 마사시게와의 양자 결연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마사시게를 맞이하기 위해 상경한 사자(니시야마 쇼자에몬 무네히데, 이다 지소보 모토사다)를 후시미 숙의 여관으로 유인하여, 장도를 휘둘러 살해한 후 그대로 도주하여 고야산으로 달아났다. 이후, 고야산에 은둔해 있었지만, 카네츠구 사후, 몰래 요네자와 북쪽 교외의 주고마쓰 촌으로 돌아와, 겐나 8년(1622년)에 사망했다. 향년 61세. 또한 일설에는 게이초 10년(1605년), 사네요리의 가신 히우라 요헤에가 사네요리의 공양을 의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사망했다고도 한다.
2. 3. 혼다 마사시게와의 갈등과 몰락
게이초 9년(1604년), 형인 나오에 가네츠구와 혼다 마사시게 사이의 양자 결연 이야기가 나오자 이에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혼다 마사시게를 맞이하기 위해 교토로 올라온 사자(니시야마 쇼자에몬 무네히데, 이다 지소보 모토사다)를 후시미의 한 여관으로 유인하여 칼을 휘둘러 살해했다. 살해 직후 그대로 도주하여 고야산으로 달아나 은둔했다.이후 고야산에서 지내다가 형 가네츠구가 사망한 뒤, 몰래 요네자와 북쪽 교외의 주고마쓰 촌으로 돌아와 겐나 8년(1622년)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설에 따르면, 게이초 10년(1605년)에 사네요리의 가신이었던 히우라 요헤에가 사네요리의 공양을 의뢰한 기록이 있어, 이 무렵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 4. 은둔 생활과 죽음
게이초 9년(1604년), 형인 나오에 카네츠구와 혼다 마사시게의 양자 결연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마사시게를 맞이하기 위해 상경한 사자(니시야마 쇼자에몬 무네히데, 이다 모토사다)를 후시미의 여관으로 유인하여 살해한 후 그대로 도주하여 고야산으로 달아났다. 이후 고야산에 은둔해 있었지만, 카네츠구 사후 몰래 요네자와 북쪽 교외의 주고마쓰 촌으로 돌아와, 겐나 8년(1622년)에 사망했다. 향년 61세. 또한 일설에는 게이초 10년(1605년), 사네요리의 가신 히우라 요헤에가 사네요리의 공양을 의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사망했다고도 한다.3. 사후
오쿠니 사네요리 사후, 오쿠니 가문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으나, 요네자와번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 대에 히구치 히데카네의 아들 오쿠니 미쓰요리를 양자로 맞이하여 가문을 재흥시켰다. 그의 딸인 아호는 오빠 나오에 가네츠구의 양녀가 되어 혼다 마사시게에게 시집갔으며, 이후 남편을 따라 가가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3. 1. 오쿠니 가문의 재흥
사네요리 사후, 오쿠니 가문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나 요네자와번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 시대에, 사다카쓰의 동생인 히구치 히데카네의 아들 오쿠니 미쓰요리를 양자로 맞이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오지 제지 회장을 지낸 오쿠니 마사히코는 미쓰요리의 직계 후손이다.3. 2. 딸 아호와 그 후손
딸인 아호는 아버지 오쿠니 사네요리가 출분(出奔)한 후, 오빠인 나오에 가네츠구가 맡아 길렀다. 게이초 14년 (1609년), 아호는 나오에 가네츠구의 양녀로서 혼다 마사시게에게 시집갔다. 이후 혼다 마사시게가 우에스기 가문을 떠나 마에다 가문으로 돌아가자, 아호 역시 남편을 따라 가가국(현재의 이시카와현 남부)으로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때 혼조 나가후사 등 많은 사람이 아호를 따라 혼다 마사시게를 섬기게 되었다.아호의 아들인 마사쓰구는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사쓰구의 아들인 히구치 아사마사는 자신의 조카인 혼다 마사나가를 섬겼다. 히구치 아사마사의 아들 사다마사는 가가 번의 말회역(末廻役)으로 봉직하며 아오치 가문(1000석)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 후손 중에는 『가칸 소설』(家栞少説)의 저자이자 무로 큐소의 뛰어난 제자였던 유학자 아오치 레이칸이 알려져 있다.
4. 미디어에서의 등장
- 천지인 (2009년, NHK 대하 드라마) - 배역: 고이즈미 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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