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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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타 고이치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였다. 효고 현립 효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릿쿄 대학을 중퇴한 후, 1960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1967년까지 활동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는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주무기는 떨어지는 슈트와 커브였다. 1962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1969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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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고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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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수명 | 오타 고이치 |
원어명 | 太田 紘一 |
로마자 표기 | Koichi Ota |
국적 | 일본 |
출신지 | 효고현고베시히가시나다구 |
생년월일 | 1940년 12월 23일 |
사망일 | 알 수 없음 |
신장 | 172 |
체중 | 63 |
利き腕 | 왼손 |
打席 | 양 |
수비 위치 | 투수 |
프로 입단 년도 | 1960년 |
드래프트 순위 | 알 수 없음 |
첫 출장 | 1961년 7월 8일 |
마지막 경기 | 1966년 10월 8일 |
연봉 | 알 수 없음 |
경력 | 오사카 타이거스 한신 타이거스(1960 ~ 1967) 한큐 브레이브스(1968 ~ 1969) |
2. 선수 경력
효고고에서는 고시엔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콜드 게임 참고 기록을 포함해 3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졸업 후에는 릿쿄 대학에 진학했지만 중퇴하고, 1960년11월에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1]
다음 해인 1961년에 구원 등판하여, 9월에는 첫 선발 등판을 했다. 1962년에는 중간 계투로 1군에 정착하여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같은 해의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2경기에 등판했다. 그 후에도 매년 20~30경기 정도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도 2점대에서 3점대 초반으로 안정적이었다. 떨어지는 슈트와 커브가 주무기인 투수였다.
1965년 무렵부터 등판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1967년에는 등판 기회도 없이 자유 계약이 되었다.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했지만, 1군 등판 없이 1969년 시즌 후 은퇴했다.[1]
2. 1. 아마추어 시절
효고 현립 효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고시엔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콜드 게임 참고 기록을 포함해 3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졸업 후에는 릿쿄 대학에 진학했지만 중퇴했다.[1]2. 2. 프로 선수 시절
1960년 11월,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1] 1961년 구원 투수로 첫 등판했고, 9월에는 데뷔 첫 선발 투수로도 등판했다. 1962년에는 중간 계투로 1군에 정착하여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같은 해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2경기에 등판했다. 그 후에도 매년 20~30경기 정도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도 2점대에서 3점대 초반으로 안정적인 투구를 보였다. 주무기는 떨어지는 슈트와 커브였다.1965년경부터 등판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1967년에는 단 한 번도 등판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1968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했지만 1군에서의 등판 기회를 갖지 못했고, 1969년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1]
2. 3. 주요 기록
- 첫 등판 : 1961년 7월 8일, 대 다이요 웨일스 11차전(가와사키 구장), 5회말 1사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3이닝 무실점
- 첫 선발 등판 : 1961년 9월 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9차전(주니치 스타디움), 4이닝 무실점으로 승패 없음
- 첫 승리 : 1963년 6월 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0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회초부터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이닝 1실점
3. 상세 정보
3. 1. 연도별 투수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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