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코 가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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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코 가즈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하여 선수 생활을 했다. 시오가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 센다이 철도국에서 투수로 활동했으며, 릿쇼 고세이카이 소속으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1967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1968년에 프로 데뷔, 1972년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여 1973년 은퇴했다. 통산 5시즌 동안 90경기에 등판하여 5승 9패, 평균자책점 4.86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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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코 가즈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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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선수명 | 와코 가즈야 |
원어명 | 若生 和也 |
로마자 표기 | Kazuya Wako |
출생지 | 미야기현 시오가마시 |
생년월일 | 1944년 11월 16일 |
신장 | 174 |
체중 | 70 |
수비 위치 | 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정보 | |
프로 입단 연도 | 1967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3순위 |
첫 출장 | 1968년 |
마지막 경기 | 1973년 |
소속 구단 | 센다이 철도국 이와사키 전기 입정교성회 주니치 드래건스(1968 ~ 1972) 롯데 오리온스(1973) |
2. 선수 경력
시오가마 고등학교에서는 강견을 자랑하는 포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의 센다이 철도국에 입단하여 투수로 전향했다. 그 후, 이와사키 전기를 거쳐 릿쇼 고세이카이로 이적. 1965년의 도시 대항 야구에 처음 출장. 대회 사상에 남을 대규모 응원단 앞에서 1회전에서 고토 히로시를 구원 등판하여 호투, 미에 교통을 꺾고 팀의 첫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2회전에서는 마쓰시타 전기에 난타당해 패퇴[1]。 이 당시 팀 동료로 다나카 다쓰지 (사기노미야 제작소에서 보강)가 있었다.
1967년에는 에이스로서 도시 대항에 다시 출장. 1회전에서는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에 완투승, 2회전에서도 일본 악기를 상대로 호투했지만, 9회 말에 끝내기 홈런을 맞아 아깝게 패배[1]。 이 당시 팀 동료로 이와사키 요시오, 감독 겸임의 김박소가 있었다.
릿쇼 고세이카이 야구부의 해산 결정에 따라, 196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건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아, 김과 함께 입단. 드래프트 전부터 팀의 OB인 오가와 겐타로에게 주니치 입단을 원한다고 전했다고 한다. 1년차인 1968년부터 1군에 올라, 8월 15일에 첫 선발 등판. 8월 22일 3번째 선발 등판에서 히로시마의 오바 스스무와 맞대결하여, 6회를 5안타 2실점으로 막아 첫 승을 장식한다. 1970년에는 9선발을 포함한 35경기에 등판했지만, 1승 7패로 좋지 않은 결과를 남겼다.
1972년 오프에 제3회 선발 회의(트레이드 회의)의 대상이 되어,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 1973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빠른 공과 슬라이더, 커브, 슈트가 주무기인 정통파 투수였다.
2. 1. 아마추어 시절
와코 가즈야는 시오가마 고등학교에서 강한 어깨를 가진 포수로 활약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 팀인 센다이 철도국에 입단하여 투수로 전향했다. 이후 이와사키 전기를 거쳐 릿쇼 고세이카이로 이적했다.1965년 도시 대항 야구에 처음 출전하여, 1회전에서 고토 히로시를 구원 등판하여 미에 교통을 꺾고 팀의 첫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2회전에서는 마쓰시타 전기에 패했다.[1] 당시 팀 동료는 다나카 다쓰지였다.
1967년에는 에이스로서 도시 대항 야구에 다시 출전, 1회전에서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에 완투승을 거두었으나, 2회전에서 일본 악기에 끝내기 홈런을 맞아 패했다.[1] 이 당시 팀 동료로 이와사키 요시오, 감독 겸임으로 김박소가 있었다.
2. 2. 프로 야구 시절
시오가마 고등학교에서는 강견을 자랑하는 포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의 센다이 철도국에 입단하여 투수로 전향했다. 그 후, 이와사키 전기를 거쳐 릿쇼 고세이카이로 이적했다. 도시 대항 야구에 처음 출장하여 1회전에서 미에 교통을 꺾고 팀의 첫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2회전에서는 마쓰시타 전기에 난타당해 패했다[1]。에는 에이스로서 도시 대항에 다시 출장했다. 1회전에서는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에 완투승, 2회전에서도 일본 악기를 상대로 호투했지만, 9회 말에 끝내기 홈런을 맞아 아깝게 패했다[1]。
릿쇼 고세이카이 야구부의 해산 결정에 따라, 196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건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년차인 8월 15일에 첫 선발 등판했고, 8월 22일 3번째 선발 등판에서 히로시마를 상대로 첫 승을 장식했다. 에는 9선발을 포함한 35경기에 등판했지만, 1승 7패로 좋지 않은 결과를 남겼다.
오프에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했으며, 을 끝으로 은퇴했다. 빠른 공과 슬라이더, 커브, 슈트가 주무기인 정통파 투수였다.
3. 상세 정보
3. 1. 출신 학교
미야기현 시오가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3. 2. 선수 경력
이와사키 전기를 거쳐 입정교성회에서 활동했다. 1968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1972년까지 소속 선수로 뛰었다. 1973년에는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했다.3. 3. 등번호
와코 가즈야의 등번호는 1968년에 59번, 1969년부터 1972년까지 32번, 1973년에는 26번이었다.4. 연도별 투수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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