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보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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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보는 촉한의 인물로, 광한군 기현 출신이다. 유장 휘하에서 서좌로 시작하여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후 면죽현령, 형주의 의조종사를 지냈다. 이릉 전투에서 촉군이 패배할 때 전사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훌륭한 풍격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아들 왕우는 상서우선랑까지 올랐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를 보좌하는 인물로 등장하며, 형주 수비를 우려하여 경고했으나 관우가 이를 무시한 탓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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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은 촉한의 관료이자 유비의 측근으로, 형주에서 등용되어 종사, 시중을 지냈으며 이릉 전투에서 전사했고, 뛰어난 재능을 칭송하는 '백미'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왕보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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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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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왕보 |
원어 이름 | 王甫 |
자 | 국산 (國山) |
출생지 | 쓰촨성 싼타이현 |
사망지 | 후베이성 쯔구이현 |
사망 연도 | 222년 |
관직 | |
초기 관직 (유장 휘하) | 서좌 (書佐) |
유비 귀순 후 | 면죽령 (綿竹令) |
최종 관직 | 의조종사 (議曹從事) |
가족 관계 | |
친척 | 왕사 (王士) (사촌) 왕상 (王祥) (사촌) |
자녀 | 왕유 (王佑) |
기타 정보 | |
섬긴 군주 | 유장 유비 |
2. 생애
왕보(王甫)는 광한군(廣漢郡) 기현(郪縣) 출신으로, 지금의 쓰촨성 싼타이현 사람이다. 유장 밑에서 서좌(書佐)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후 면죽현(현재 몐주 남동쪽)의 현령(縣令)이 되었다가, 형주에서 의조종사(議曹從事)로 일했다. 221년 형주 정벌군에 참전했으나, 이듬해 6월(윤달) 이릉 대전에서 촉군이 육손에게 크게 패하면서 자귀에서 전사했다.
진수의 삼국지 양희전의 「계한보신찬」에 왕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양희는 왕보를 "훌륭한 풍격을 가지고 있었고, 마음 씀씀이가 좋았으며, 촉한의 명예가 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화양국지·선현지에서는 광한군의 우수한 인재로서, 종형인 왕사, 그리고 이씨 삼룡으로 불린 이조·이소 등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아들 왕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벼슬이 상서우선랑까지 올랐다.
2. 1. 유장 휘하
왕보는 광한군(廣漢郡) 기현(郪縣) 출신으로, 현재의 쓰촨성 싼타이현에 해당한다. 그는 익주(현재의 쓰촨성 및 충칭시)의 주지사였던 유장 휘하에서 서좌(書佐: 서기의 사무를 담당하는 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는 풍모가 늠름하고, 인물 평가와 정치 수완이 뛰어났다.2. 2. 유비 휘하
왕보는 원래 유장의 부하였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후 면죽현(綿竹縣; 현재 몐주의 남동쪽)의 현령(令)이 되었으며, 나중에 형주에서 의조종사(議曹從事)로 일했다. 221년 형주 정벌군에 참전했으나 이듬해 6월(윤달) 이릉 대전에서 촉군이 육손에게 대패할 때 자귀에서의 패배로 전사했다.214년,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장악한 후 형주로 전임되어 의조종사(議曹從事)를 지냈다.
222년, 유비를 따라 손권을 상대로 한 원정에 참여했다. 이릉 전투에서 패배한 후, 유비가 퇴각하는 동안 유비를 보호하다가 적군에게 살해당했다.
풍모가 늠름하고, 인물 평가와 정치 수완이 뛰어났다. 처음에는 유장을 섬겨 익주 서좌(서기의 사무를 담당하는 자)로 일했다. 후에 유비가 익주를 빼앗자, 면죽현령이 되었고, 이어서 형주 의조종사로 이동했다. 장무 2년(222년), 유비의 오 토벌에 종군했지만, 군대가 남군자귀현에서 패배했을 때 전사했다(이릉 전투).
2. 3. 이릉 대전과 죽음
왕보는 유장의 부하였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후 면죽현령(綿竹縣令)이 되었으며, 나중에 형주에서 의조종사(議曹從事)로 일했다. 221년 형주 정벌군에 참전했으나 이듬해 6월(윤달) 이릉 대전에서 촉군이 육손에게 대패할 때 자귀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222년, 왕보는 유비를 따라 손권을 상대로 한 원정에 참여했다. 유비가 손권의 군대와의 이릉 전투에서 패배한 후, 왕보는 유비가 퇴각하는 동안 유비를 보호하다가 적군에게 살해당했다.
3. 평가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왕보를 "훌륭한 풍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칭하며, "마음 씀씀이가 좋고, 촉한의 명예가 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화양국지·선현지에서는 광한군의 우수한 인재로서, 종형인 왕사, 그리고 이씨 삼룡으로 불린 이조, 이소 등과 함께 거론되고 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왕보
삼국지연의에서 왕보는 수군사마(隨軍司馬)로서 관우를 보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관우가 번성 전투를 준비할 때, 왕보는 손권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관우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관우가 형주를 비운 사이 여몽이 형주를 기습 점령하여 왕보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왕보는 미방, 부사인, 반준을 경계하고 조루를 기용할 것을 건의했지만, 관우는 봉화대 설치만 명령했다. 이후 형주가 함락되자 관우는 왕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관우는 맥성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왕보는 복병을 경계하며 가도로 진격할 것을 간언했다. 그러나 관우는 듣지 않았고, 익주로 향하다 붙잡혀 죽었다. 손권이 관우와 관평의 목을 맥성 앞에 내걸자, 왕보는 낙담하여 성벽 아래로 떨어져 자결했다.
4. 1. 형주 수비에 대한 우려
삼국지연의에서 왕보는 수군사마(隨軍司馬)의 직책으로 관우를 보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번성을 공격할 준비를 할 때, 왕보는 형주의 수비를 우려했다. 그는 봉화대를 설치하고, 반준 대신 조루에게 형주 수비군을 돕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관우는 봉화대 설치 제안만 받아들였다.왕보는 형주를 노리는 손권 군과, 형주 수비를 담당하는 부하 미방, 부사인, 반준을 경계하여 조루를 기용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관우는 특별히 걱정하지 않고, 이러한 말을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봉화대를 만들도록 왕보에게 명령했다.
이후 여몽이 형주를 공격할 때 반준 등이 항복하자, 관우는 왕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위군과 오군에게 쫓겨 맥성(麥城)에서 버티던 관우가 북문의 포위를 뚫고 익주로 가려 하자, 왕보는 오군의 매복을 경계했다. 그러나 관우는 매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보와 주창을 맥성에 남긴 다음 익주로 가다가 붙잡혀 죽었다. 왕보는 맥성에서 탈출하려는 관우에게, 간도에는 복병의 위험이 있으므로, 가도를 따라 진격해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관우는 이를 듣지 않았다.
관우가 번성 전투를 떠나기 전, 왕보는 유비의 껄끄러운 동맹 손권이 침략할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관우는 왕보의 경고를 무시했다. 관우는 번성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관우가 떠나 있는 동안 손권이 그의 장수 여몽을 보내 형주를 기습 점령하면서 왕보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4. 2. 맥성에서의 최후
삼국지연의에서 왕보는 수군사마(隨軍司馬)의 직책으로 관우를 보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번성을 공격할 준비를 할 때, 왕보는 형주의 수비를 우려하여 봉화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고, 반준 대신 조루에게 형주 수비군을 돕게 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관우는 봉화대 설치 제안만 받아들였다.여몽이 형주를 공격하여 반준 등이 항복하자, 관우는 왕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위군과 오군에게 쫓겨 맥성(麥城)에서 버티던 관우가 북문의 포위를 뚫고 익주로 가려 하자, 왕보는 오군의 매복을 경계했다. 그러나 관우는 매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보와 주창을 맥성에 남긴 채 익주로 가다가 붙잡혀 죽었다.
손권은 관우와 관평의 목을 맥성 앞에 내걸었다. 이를 본 왕보는 낙담하여 성벽 아래로 떨어져 자결했다.
5. 가계
아들 왕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벼슬은 상서우선랑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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