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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이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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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나이 내각은 1940년 1월 16일부터 1940년 7월 22일까지 189일 동안 존속했다. 요나이 미쓰마사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친영미 노선을 추구하며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에 반대했다. 그러나 육군의 압력으로 인해 붕괴되었으며, 붕괴 이후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의 붕괴를 안타까워하며 대미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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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이 내각
기본 정보
총리 관저에서 기념 촬영하는 각료들
내각 정보
내각 명칭요나이 내각
원어 명칭米内内閣
대수37대
존속 기간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정치 체제거국일치내각
참여 정당릿켄 민세이토
릿켄 세이유카이
무소속
군부
내각 형태다수 (연립)
역대 내각아베 노부유키 내각
후임 내각제2차 고노에 내각
주요 인물
천황쇼와
총리요나이 미쓰마사
전직군사 참의관, 예비역해군대장
의회 정보
의회 회기제75회 제국의회
선거해당 사항 없음
해산해당 사항 없음
관련 링크
관저 링크총리대신 관저 - 역대 내각 각료 명단

2. 재직 기간

1940년 1월 16일부터 1940년 7월 22일까지 총리직을 역임했다.[1] 재직 일수는 189일이다.[1]

3. 내각 구성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은 1940년 1월 16일에 성립되어 7월 22일까지 존속했으며,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2]

직책이름정당임기 시작임기 종료
내각총리대신요나이 미쓰마사군 (해군)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외무대신아리타 하치로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내무대신고다마 히데오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대장대신사쿠라우치 유키오입헌민정당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육군대신하타 슌로쿠군 (육군)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해군대신요시다 젠고군 (해군)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사법대신기무라 쇼타쓰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문부대신마쓰우라 시게지로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농림대신시마다 도시오입헌정우회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상공대신후지와라 긴지로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체신대신가쓰 마사노리입헌민정당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철도대신마쓰노 쓰루에이입헌정우회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탁무대신고이소 구니아키군 (육군)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후생대신요시다 시게루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내각관방장관이시와타 소타로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내각법제국 장관히로세 히사타다무소속1940년 1월 16일1940년 7월 22일

[1]

정무차관과 참여관은 1940년 1월 24일에 임명되었다.[4]

3. 1. 국무대신

직책대수성명주요 경력재직 기간비고
내각총리대신37요나이 미쓰마사
예비역 해군대장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외무대신55아리타 하치로
외무대신, 귀족원 의원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내무대신53고다마 히데오
척무대신, 체신대신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대장대신41사쿠라우치 유키오
상공대신, 농림대신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육군대신28하타 슌로쿠
교육총감, 육군대장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해군대신20요시다 젠고--연합함대총사령관, 해군 중장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사법대신40기무라 쇼타쓰
검사총장, 귀족원 의원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문부대신51마쓰우라 시게지로
문부차관, 경성제국대학 총장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농림대신16시마다 도시오
법제국장관, 전 농림대신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상공대신19후지와라 긴지로
전기화학공업(現 덴카 주식회사) 회장, 귀족원 의원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체신대신46가쓰 마사노리
상공정무차관, 입헌민정당 간사장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철도대신19마쓰노 쓰루헤이
내무정무차관, 입헌정우회 간사장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척무대신17고이소 구니아키
조선군 사령관, 관동군 참모장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후생대신5요시다 시게루
내각서기관장, 귀족원 의원1940년 1월 16일 ~ 1940년 7월 22일

[1][2]

3. 2. 내각관방장관 · 법제국 장관

요나이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은 이시와타 소타로이며, 법제국 장관은 히로세 히사타다였다.[2] 두 사람 모두 1940년 1월 16일에 임명되어 1940년 7월 22일까지 재임하였다.[1]

직책성명사진출신 등
내각관방장관이시와타 소타로
(대장성→)
귀족원[3]
법제국 장관히로세 히사타다
(대장성→)
귀족원[3]


3. 3. 정무차관 · 참여관

직명성명출신 등비고
외무 정무차관고야나기 조조중의원/ 입헌민정당
내무 정무차관쓰루미 유스케중의원/ 입헌민정당
대장 정무차관기무라 마사요시중의원/ 입헌정우회 (나카지마 파)
육군 정무차관미요시 히데유키중의원/ 입헌민정당
해군 정무차관마쓰야마 쓰네지로중의원/ 입헌정우회 (나카지마 파)
사법 정무차관호시지마 지로중의원/ 입헌정우회 (나카지마 파)
문부 정무차관후나하시 키요카타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자작
농림 정무차관오카다 기쿠지중의원/ 입헌민정당
상공 정무차관가토 료고로중의원/ 입헌정우회 (나카지마 파)
체신 정무차관다케치 유키중의원/ 입헌민정당
철도 정무차관미야자와 유타카중의원/ 입헌정우회 (나카지마 파)
탁무 정무차관마쓰오카 도시조중의원/ 입헌정우회 (구하라 파)
후생 정무차관이치마쓰 사다키치중의원/ 입헌민정당



직책성명출신 등비고
외무 참여관고다카 초사부로중의원/ 입헌정우회(나카지마 파)
내무 참여관아오야마 겐조중의원/ 입헌정우회(나카지마 파)
대장 참여관마쓰다 쇼이치중의원/ 입헌민정당
육군 참여관미야자키 하지메중의원/ 입헌정우회(나카지마 파)
해군 참여관고야마 구니타로중의원/ 입헌민정당
사법 참여관다카기 마사토쿠귀족원/ 무소속(연구회)/ 자작
문부 참여관나카이마 소이치중의원/ 입헌민정당
농림 참여관마쓰키 히로시중의원/ 입헌정우회(구하라 파)
상공 참여관기타 소이치로중의원/ 입헌민정당
체신 참여관후지오 야스타로중의원/ 입헌정우회(구하라 파)
철도 참여관오시마 도라키치중의원/ 입헌민정당
척무 참여관가토 나리유키귀족원/ 무소속/ 남작
후생 참여관이이무라 고로중의원/ 입헌정우회(나카지마 파)



위의 정무차관 및 참여관은 1940년(쇼와 15년) 1월 24일에 임명되었다.[4]

4. 내각의 성향과 활동

아베 내각 붕괴 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독일폴란드 침공 성공으로 일본 내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40년 1월 미일 통상 항해 조약이 실효되어 미일 관계가 악화되자, 쇼와 천황은 육군 출신 수반을 기피하고 해군 출신인 요나이 미쓰마사를 후임으로 추천하였다.[5]

요나이 미쓰마사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예비역이 되었는데, 이는 현역 대장이 총리가 된 사례 중 유일한 경우였다. 요나이는 친영미 노선과 삼국 동맹 반대 입장을 견지하여 육군과 친군 여론의 반발을 샀다. 육군은 요나이 내각 타도 운동을 전개했고, 입헌민정당 소속 사이토 다카오 의원의 반군 연설에 대한 과잉 반응과 의원 제명 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고 독일이 프랑스를 항복시키자, 육군은 삼국 군사 동맹 체결을 목표로 요나이 내각을 압박했다. 요나이 내각은 삼국 동맹이 대영미 개전을 불가피하게 한다고 반대했지만, 하타 슌로쿠 육군 대신이 육군 수뇌부의 압력으로 사임하면서 요나이 내각은 총사직했다.

요나이는 퇴진 성명에서 육군에 의한 타도임을 명확히 밝혔다.[6]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요나이는 하타가 압력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그를 감쌌다.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이 계속되었다면 대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9]

4. 1. 친영미 노선과 삼국 동맹 반대

쇼와 천황은 미일 통상 항해 조약이 실효되어 미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에 대항하기 위해 해군 출신 수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5] 아베 내각이 붕괴된 후, 천황은 해군 대장 요나이 미쓰마사를 후임 수반으로 추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5]

요나이는 친영미파로,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6] 이러한 점 때문에 육군과 친군적인 여론으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았다. 육군 내부는 요나이 수반에 격렬하게 반발하며, 이를 "중신 블록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요나이 내각 발족 직후 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 의원이 "반군 연설"을 한 것에 과잉 반응하여 사이토 의원을 제명한 사건은 이러한 반발의 시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이 승리하자 육군은 삼국 군사 동맹 체결을 목표로 외교 일신을 내걸고 요나이 내각에 대한 타도 의도를 명확히 드러냈다. 요나이 내각은 삼국 군사 동맹이 대영미 개전을 불가피하게 만든다고 반대했지만, 육군은 참모 총장 간인노미야 코토히토 친왕을 통해 하타 슌로쿠 육군 대신에게 사임을 권고했고, 결국 요나이 내각은 총사직하게 되었다.

요나이는 퇴진 성명에서 육군에 의한 타도임을 명확히 밝혔지만, 하타 육군 대신의 단독 사임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고 보았다.[6]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요나이는 하타가 압력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그를 감쌌다.[6]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이 계속되었다면 대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9]

4. 2. 미일통상항해조약 실효

1940년 1월, 미일통상항해조약이 실효되면서 미일 관계는 양국 개국 이래 무조약 시대에 돌입했다.[5] 이는 쇼와 천황이 깊이 우려한 상황이었다.

4. 3. 반군 연설 사건

입헌민정당 소속 사이토 다카오 의원이 했던 "반군 연설"에 대해 과잉 반응하여 사이토 의원을 제명한 사건은, 요나이 내각에 대한 공격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5]

5. 내각의 붕괴

아베 내각이 붕괴된 후, 1940년 1월 요나이 미쓰마사가 내각을 조직했지만, 육군의 압력으로 인해 6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하타 슌로쿠 육군 대신이 후임 총리로 거론되었으나, 쇼와 천황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독일폴란드 분할 점령, 미일 통상 항해 조약 실효로 인한 미일 관계 악화 등을 우려하여 육군 출신 수상을 기피하고, 해군 출신이며 온후한 인품으로 인망이 두터웠던 요나이를 직접 추천했다.[5]

요나이는 조각과 동시에 예비역이 되었는데, 이는 현역 육해군 대장이 내각 총리대신을 맡으면서 예비역이 된 유일한 사례였다. 요나이는 친영미파로서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에 반대하고 고노에 후미마로 등의 신체제 운동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육군과 친군적인 여론으로부터 반감을 샀다. 육군은 요나이 수반을 "중신 블록의 음모"라고 비난하며 내각 타도 운동을 벌였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약 반 년간 "이상한 전쟁" 기간이 요나이 내각의 존속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5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고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육군은 삼국 군사 동맹 체결을 목표로 외교 일신을 요구하며 내각 타도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요나이 내각은 삼국 동맹이 대영미 개전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5. 1. 육군의 삼국 동맹 추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폴란드를 쉽게 점령하자, 일본 내에서는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40년 1월, 미일 통상 항해 조약이 만료되면서 미일 관계가 악화되자, 쇼와 천황육군 출신 수상을 기피하고 해군 출신인 요나이 미쓰마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5]

요나이는 친영미파로서 삼국 동맹에 반대했기 때문에 육군과 친군적인 여론의 반발을 샀다. 육군은 요나이 내각을 "중신 블록의 음모"라고 비난하며 타도 운동을 시작했다. 입헌민정당 소속 사이토 다카오 의원의 반군 연설에 대한 과잉 반응과 제명은 그 시작이었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이후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육군은 독-이와의 군사 동맹 체결을 위해 외교 일신을 요구하며 요나이 내각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요나이 내각은 삼국 동맹이 대영미 개전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1940년 7월 4일, 육군 수뇌부는 참모 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통해 하타 슌로쿠 육군 대신에게 사임을 권고했다. 하타는 7월 16일에 유악 상주 후 단독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요나이는 후임 육군 대신을 찾지 못했고, 육군 삼 장관 회의는 후임자 추천을 거부하여 요나이 내각은 총사직하게 되었다.[6]

요나이는 퇴진 성명에서 육군 대신의 사임이 육군에 의한 내각 타도임을 분명히 밝혔다.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 붕괴를 안타까워하며 "만약 요나이 내각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전쟁(대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후회했다.[8][9]

5. 2. 하타 슌로쿠 육군대신의 사임

1940년 7월 4일, 나치 독일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를 점령하자, 육군은 독일과의 군사 동맹 체결을 강하게 주장하며 요나이 내각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육군은 참모 총장 간인노미야 코토히토 친왕을 통해 하타 슌로쿠 육군대신에게 사임을 권고했다.[6]

하타 슌로쿠는 육군의 압력에 굴복하여 7월 16일에 단독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요나이 미쓰마사는 후임 육군대신을 찾으려 했으나, 육군 삼 장관 회의는 이를 거부했다. 이는 사실상 요나이 내각에 대한 불신임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군부의 정치 개입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요나이 내각은 총사직하게 되었다.[6]

요나이는 퇴진 성명에서 육군대신의 사임이 육군에 의한 내각 타도임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요나이는 개인적으로 하타의 사임이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도 하타가 압력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그를 옹호했다.[6]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을 신임했으며, 내각 붕괴 후에도 "만약 요나이 내각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전쟁(대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후회했다고 알려져 있다.[8][9]

5. 3. 총사직

하타 슌로쿠 육군 대신의 사임으로 후임 육군대신을 찾지 못하면서 요나이 내각이 총사직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어 독일이 파죽지세로 진격, 프랑스를 항복시키자, 독-이와의 접근을 꾀하는 육군은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 체결을 목표로 외교 일신을 내걸고 내각 타도 의도를 명확히 드러냈다. 요나이 내각은 삼국 군사 동맹을 체결하면 영국, 미국과의 개전이 불가피해진다고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1940년 7월 4일, 육군 수뇌부는 "육군의 총의"로서 참모 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통해 하타에게 육군 대신 사임을 권고했고, 하타는 7월 16일에 유악 상주 후 단독으로 사표를 제출했다.[6] 요나이는 후임 육군 대신을 구했지만 육군 삼 장관 회의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요나이 내각은 총사직했다.

요나이는 퇴진 성명에서 "육군 대신은 최근 정세에 비추어 사표를 제출했기에"라고 밝혀, 육군에 의한 타도임을 명확히 했다. 요나이는 하타 육군 대신의 단독 사임이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고 보았다고 전해지며, 그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6]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을 신임했으며, 기도가이치 내대신에게 "내외의 정세로 인해 경질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기분은 요나이에게 전하도록" 명령했다.[8] 또한, 전후에도 "만약 요나이 내각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대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후회했다고 알려져 있다.[9]

6. 내각 붕괴 이후

1940년 7월, 요나이 미쓰마사는 육군 대신 하타 슌로쿠의 사임과 육군의 후임 대신 추천 거부로 인해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었다. 요나이는 퇴진 성명에서 육군에 의해 내각이 붕괴되었음을 분명히 밝혔다.[6]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다.

6. 1. 요나이의 퇴진 성명

요나이는 퇴진 성명에서 "(전략) 내외 중요 국무의 수행에 전력을 다해 노력해 왔지만, 육군 대신은 최근 정세에 비추어 사표를 제출했기에(후략)"라고 말하며, 이것이 육군에 의한 내각 타도임을 명확히 밝혔다.[6] 그러나 요나이는 개인적으로 하타 육군 대신의 단독 사임이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고 보았고, 그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요나이는 하타가 압력을 받았다고 증언하며[6] 그를 감쌌다. 하지만, 재판장은 요나이의 증언에 신뢰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퇴정을 명령했다.

6. 2. 쇼와 천황의 반응

쇼와 천황요나이 미쓰마사를 깊이 신임하여, 후임 수반으로 직접 추천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5]. 육군의 반발과 삼국 동맹 체결 압력으로 요나이 내각이 붕괴되자, 천황은 기도 고이치 내대신에게 "요나이 내각을 오늘도 여전히 신임"하며, "내외의 정세로 인해 경질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기분은 요나이에게 전하도록" 명령했다[8]. 또한, 전후에도 "만약 요나이 내각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전쟁(대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후회했다[9].

6. 3. 극동 국제 군사 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 피고인이 된 하타 슌로쿠는 육군 대신 단독 사임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이때 증인으로 출석한 요나이 미쓰마사는 하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증언하며,[6] 하타를 철저하게 감싸는 증언을 반복했다. 다만, 재판장의 주의를 무시하고 검사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만 반복하여, 재판장으로부터 신뢰성이 없는 증인으로 퇴정 경고를 받기도 했다. 결국 하타는 대영미전 수행 및 전쟁 공동 모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7] 재판 과정에서 하타의 부하들을 포함한 육군이 삼국 동맹에 열심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출된 신문 기사 등이 재판관들에게 더 신뢰성이 높다는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7. 평가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은 일본 군부의 압력과 팽창주의에 맞서 싸우려 했던 내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쇼와 천황은 미일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친영미파인 요나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해군 출신인 그가 육군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5]

그러나 요나이 내각은 결국 군부, 특히 육군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육군은 독일과의 삼국 군사 동맹 체결을 강하게 추진했고, 이를 반대하는 요나이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육군 대신 하타 슌로쿠의 사임을 압박했다.[6] 후임 육군 대신을 구하지 못해 요나이 내각은 총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과는 일본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쇼와 천황은 요나이 내각이 계속되었다면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9]

요나이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막지 못한 무능한 지도자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나이 내각의 붕괴가 일본의 군국주의 폭주와 태평양 전쟁 발발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참조

[1] 웹사이트 Yonai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40-01-16
[3] 문서 貴族院勅選議員勅任
[4] 간행물 『官報』第3913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NDLDC 1940-01-25
[5] 서적 西園寺公と政局(原田日記)
[6] 웹사이트 A級極東国際軍事裁判速記録(和文)・昭和22.9.11~昭和22.11.20(第269~318号) https://www.digital.[...] 국립공문서관 2023-11-24
[7] 웹사이트 A級極東国際軍事裁判速記録(和文)・昭和23.11.4~昭和23.11.12(判決) https://www.jacar.ar[...] 국립공문서관 2023-11-27
[8] 문서 木戸幸一日記 1940-07-14
[9] 서적 昭和史の軍人たち 文藝春秋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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