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더빗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한 더빗은 도르드레흐트 시장의 아들로,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다. 라이덴 대학교에서 수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앙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653년 홀란트 법률 고문으로 임명되어 네덜란드 공화국을 이끌었으며,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종식을 위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추진하고 해군력 증강을 통해 재정 재건에 힘썼다. 삼국 동맹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팽창을 막으려 했으나,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발발과 정치적 위기로 인해 1672년 암살당했다. 그는 수학적 업적과 재무 수학에도 기여했으며, 정치적 영향력과 더불어 가족 관계를 통해 네덜란드 사회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네덜란드의 암살된 정치인 - 빌럼 1세 판 오라녜
빌럼 1세 판 오라녜는 16세기 네덜란드 독립을 이끈 지도자로서 오라녜 공작으로서 독립 전쟁을 이끌었으며, 정치적 수완과 군사적 전략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건립의 토대를 마련하고 종교적 관용을 옹호하여 네덜란드의 국부로 추앙받는다. - 네덜란드의 암살된 정치인 - 핌 포르타윈
핌 포르타윈은 네덜란드의 정치인이자 사회학자, 작가, 칼럼니스트로, 주류 정치 비판과 이민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자신의 정당을 창당한 후 총선 직전 암살당해 네덜란드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도르드레흐트 출신 - 니콜라스 블룸베르헌
니콜라스 블룸베르헌은 레이저 분광학 발전, 핵자기 공명 분야에서의 초기 업적, 메이저 개발 기여, 비선형 광학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한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로, 아서 숄로, 카이 시그반과 함께 1981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으며 하버드 대학교와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 도르드레흐트 출신 - O'G3NE
리사 볼, 에이미 볼, 셸리 볼 세 자매로 구성된 네덜란드 그룹 오지네는 2014년 《더 보이스 오브 홀란드》 우승과 2017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네덜란드 대표 참가로 인기를 얻었으며, 이전에는 Lisa, Amy & Shelley로 활동하며 2007년 주니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했다.
요한 더빗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직책 | 홀란트의 Grand Pensionaris (Grand Pensionary) |
임기 | 1653년 7월 30일 ~ 1672년 8월 4일 |
이전 | 아드리아안 파우 |
계승 | 가스파르 파겔 |
직책 1 | 도르드레흐트의 연금 수령자 |
임기 1 | 1650년 12월 21일 ~ 1653년 7월 30일 |
이전 1 | 니콜라스 루이스 |
계승 1 | 호베르트 반 슬링엘란트 |
출생일 | 1625년 9월 24일 |
출생지 | 도르드레흐트, 네덜란드 공화국 |
사망일 | 1672년 8월 20일 |
사망지 | 헤이그, 네덜란드 공화국 |
정당 | 주(States) 당 |
아버지 | 야코프 더 비트 |
배우자 | 벤델라 비커 (결혼: 1656년) |
자녀 | 요한 더 비트 주니어 |
친척 | 코르넬리스 더 비트 (형제) 얀 비커 (장인) 안드리스 더 비트 (삼촌) 코르넬리스 더 그라프 (삼촌) 안드리스 더 그라프 (삼촌) 카타리나 호프트 (고모) 장 도이츠 (처남) 피터 더 그라프 (처남) |
모교 | 레이던 대학교 |
![]() | |
관련 정보 | |
람프야르 (Rampjaar) | Rampjaar |
2. 가문과 초기 생애
요한 더빗은 네덜란드의 오래된 명문가인 더빗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야코프 더빗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였던 도르드레흐트의 시장을 여러 차례 역임한 유력한 섭정이자 귀족이었다. 어머니 안나 판 덴 코르푸트(Anna van den Corput, 1599–1645)는 네덜란드의 군사 지도자이자 지도 제작자였던 요하네스 코르푸티우스(Johannes Corputius)의 조카였다.[9]
요한에게는 형 코르넬리스 더빗이 있었으며, 삼촌 안드리 더빗(Andries de Witt)은 1619년부터 1621년까지 홀란트의 대연금술사 직책을 맡기도 했다. 또한 혼인 관계를 통해 오라녜-나사우의 윌리엄과 먼 친척 관계였으며[10], 네덜란드의 유명한 해군 제독이었던 마르텐 트롬프 및 그의 아들 코르넬리스 트롬프와도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11] 이러한 가문 배경 덕분에 요한 더빗은 특권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2. 1. 교육
요한 더빗은 아버지 야코프 더빗 덕분에 교육 면에서 특권을 누리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작 베크만, 야코프 카츠, 헤라르두스 포시우스, 안드레아스 콜비우스와 같은 당대의 중요한 학자 및 과학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9] 요한은 형 코르넬리스 더빗과 함께 도르드레흐트의 라틴 학교에 다녔으며, 이곳에서 로마 공화국의 가치를 배웠다.라틴 학교 졸업 후, 그는 라이덴 대학교에 진학하여 수학과 법학을 전공하며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보였다. 1645년에는 형 코르넬리스와 함께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견문을 넓혔다. 같은 해, 프랑스의 앙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는 헤이그에서 프란스 판 스호텐의 법률 회사 소속 변호사로 활동했다.
2. 2. 유학과 초기 경력
도르드레흐트 시장을 6번 역임한 야코프 더빗(Jacob de Witt)의 아들로, 도르드레흐트의 명문가인 데 비트 가문에서 태어났다. 레이던 대학교에서 수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1645년에는 형 코르넬리스 더빗(Cornelis de Witt)과 함께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유학했다. 귀국 후 헤이그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1650년 25세의 나이로 고향인 도르드레흐트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3. 정치 활동
1650년 오라녜 공 빌럼 2세가 사망한 후, 더빗은 도르드레흐트 대표단의 지도자로 홀란트 및 서프리슬란트 의회에 파견되었고, 같은 해 도르드레흐트의 페르소넬러가 되었다.
1653년 7월, 28세의 나이로 홀란트주의 홀란트 법률 고문( raadpensionarisnl )으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는 암스테르담 시장이자 그의 삼촌인 코르넬리스 데 그라프의 지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14][3] 홀란트 법률 고문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주인 홀란트를 대표하며, 제1 무총독 시대(1650-1672) 동안 사실상 공화국 전체의 정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더빗은 홀란트 주의 해운 및 무역 이익을 대변하며 경제적 번영을 중시했다.
그는 친(親)국가파(공화파)의 지도자로서 상인 계층의 이익을 추구했으며, 그의 주요 정책 목표는 평화 유지, 홀란트 자치 강화, 그리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 견제였다.[16] 더빗의 정치는 암스테르담과의 협력, 특히 삼촌 코르넬리스 데 그라프와의 긴밀한 관계에 기반했다.[19][20][14] 데 그라프는 더빗에게 중요한 정치적 조언자이자 동반자였다.[22]
법률 고문 재임 기간 동안 더빗은 제1차 영란 전쟁을 종결시킨 웨스트민스터 조약 체결을 이끌었고, 오라녜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는 배제령을 관철시켰다. 또한 재정 안정과 해군력 증강에 힘썼으나, 그의 정책과 태도는 해군 내부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프랑스의 팽창을 막기 위해 삼국 동맹을 체결했으나,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672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침공으로 시작된 '재앙의 해'( Rampjaarnl )는 그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왔다. 육군 경시 정책과 외교 실패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었고,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법률 고문직에서 사임했다. 1672년 8월 20일, 투옥된 형 코르넬리스 데 비트를 면회하러 갔다가 성난 군중에게 형과 함께 살해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그의 사후 오라녜 공 빌럼 3세가 정권을 장악하여 네덜란드를 위기에서 구했다.
3. 1. 홀란트 법률 고문 시기
1653년 7월 23일, 28세의 나이로 홀란트주의 법률 고문(raadpensionaris van Hollandnl)으로 선출되어 이후 1668년까지 5년마다 재선되었다. 홀란트주 법률 고문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무총독 시대에 사실상 정부의 최고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자리였다.법률 고문으로서 데 비트는 먼저 제1차 영란 전쟁의 종결을 추진했다. 1654년 4월 5일 체결된 웨스트민스터 조약 비준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호국경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 공화국의 항해법을 인정하는 등 상당 부분을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이 조약에는 오라녜-나사우 가문 출신 인물을 총독으로 선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배제 조항'(Act of Seclusion)이 비밀리에 포함되었다. 이는 장차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될 오라녜 공 빌럼 3세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데 비트는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제1차 영란 전쟁의 패배를 거울삼아 해군력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그는 다소 오만한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해군 장병들을 낮춰보는 태도를 보여 해군 내부에서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또한, 해군 지휘관으로 육군 출신 인사를 고집하여 내부적인 반감을 사기도 했다.
1668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일으킨 네덜란드 계승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데 비트는 헤이그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템플과 협력하여 잉글랜드, 네덜란드, 스웨덴 간의 삼국 동맹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 이 동맹의 결과로 아헨 조약이 맺어져 전쟁은 일단락되었으나, 루이 14세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1670년 루이 14세는 잉글랜드의 찰스 2세와 비밀리에 도버 밀약을 맺었고, 1672년에는 스웨덴과도 불-스웨덴 동맹을 체결하면서 삼국 동맹은 와해되었고 네덜란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1672년은 네덜란드 역사에서 '재앙의 해'(Rampjaarnl)로 기록된다. 3월에 잉글랜드가 제3차 영란 전쟁을 일으키며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했고, 뒤이어 4월 6일에는 프랑스마저 네덜란드 침략 전쟁을 시작하며 선전 포고했다. 네덜란드는 해상과 육지 양면에서 공격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그동안 육군을 소홀히 했던 데 비트의 국방 정책은 거센 비판에 직면했고, 주변의 경고를 무시하고 추진했던 친프랑스 외교 노선 역시 실패로 돌아가면서 국민적 반감을 샀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가 제시한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데 비트가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하자, 그를 지지했던 세력마저 등을 돌렸다.
1672년 6월, 데 비트는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7월 24일에는 그의 형 코르넬리스 데 비트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헤이그의 헤반겐폴트 감옥(현 헤이그 감옥 박물관)에 수감되었다. 요한 데 비트 또한 총독 시대의 실정과 공금 횡령 의혹 등으로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빌럼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당시 빌럼 3세는 최전선에서 프랑스 대군과 맞서 싸우며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데 비트의 변명 섞인 편지는 외면받았다.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8월에는 자연 발생적인 봉기 양상으로 번져 데 비트는 결국 법률 고문직에서 사임했다. 민중의 요구에 따라 당시 22세였던 오라녜 공 빌럼 3세는 과거 총독직에 오르지 않겠다는 선서를 철회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으로 취임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672년 8월 20일, 요한 데 비트는 고문 후유증으로 쇠약해져 추방 판결을 받은 형 코르넬리스의 요청으로 헤반겐폴트 감옥을 방문했다. 데 비트 형제가 감옥 안에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성난 군중이 감옥으로 몰려와 문을 부수고 난입했다. 군중은 요한과 코르넬리스 형제를 밖으로 끌어내어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 끔찍한 사건은 동시대 철학자 스피노자를 격분하게 했으며, 훗날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소설 『검은 튤립』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데 비트 형제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새롭게 지도자가 된 빌럼 3세는 유럽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 각지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빌럼 3세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군은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네덜란드는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 2. 웨스트민스터 조약과 배제령
1653년 7월, 더 윗은 홀란트주의 대판무관으로 선출되었다.[14][3]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은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이었으며, 우세한 영국 해군에 의해 항구가 봉쇄되어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따라서 더 윗의 최우선 과제는 영국과의 신속한 평화 협정 체결이었다.
영국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평화 조건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내에서 오렌지 가문이 권력을 잡는 것을 영구적으로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오렌지 가문이 크롬웰의 정적인 스튜어트 왕가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더 윗은 다른 6개 주가 이러한 요구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나, 그의 정치적 동맹이자 삼촌인 코르넬리스 데 그라프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14][3] 1654년 5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의 평화를 이끌어냈다.[23] 이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는 영국의 항해법을 승인하는 등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조약에는 중요한 비밀 부속 조항인 배제령(Act of Seclusion)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홀란트주가 주도하여 포함시킨 것으로, 당시 어린 빌럼 3세(훗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를 미래의 총독 직위에서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24] 이 결의안은 데 그라프가 더 윗 및 외교관 헤로니무스 판 베버니흐와 협력하여 작성한 것이었다.[14] 더 윗, 데 그라프, 육군 사령관 요한 볼파르트 판 브레데로데, 부제독 야코프 판 바세나르 오브담 등 네덜란드 지도부는 네덜란드 연방 의회가 이 배제령을 지지하도록 촉구했다.[24]
3. 3. 삼국 동맹과 프랑스와의 갈등
1667년 브레다 조약으로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마무리된 후, 요한 더빗은 가스파르 파겔, 길리스 발케니에르, 그리고 그의 삼촌 안드리스 더 흐라프 등의 지원을 받아 영구 칙령을 발표했다.[29][30] 이 칙령은 총독직을 폐지하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졌으며,[31] 총독직과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의 국방사령관직 겸임을 금지했다.한편, 네덜란드 연방 의회는 영국과의 상업적 우위를 다투는 데 집중하면서 네덜란드 육군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가 루이 14세 치하에서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팽창주의는 강력한 경제적 경쟁 상대인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요한 더빗은 친(親)프랑스 정책을 통해 공화국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루이 14세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차지하려는 계획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와 직접 국경을 맞대는 것보다 스페인이 통치하는 남부의 완충 지대를 선호했다.
프랑스의 병합 전쟁을 막기 위해, 더빗은 영국의 헤이그 대사 윌리엄 템플과 협력하여 1668년 1월 23일 영국, 스웨덴과 삼국 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세 나라 중 하나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을 경우 서로 군사적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32] 하지만 더빗은 루이 14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를 원치 않았기에, 스페인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일부 도시를 프랑스에 양도하도록 설득하는 데 동의했다. 루이 14세가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하여 전체 지역을 장악하려 할 경우에만 군사력을 사용하기로 합의했으며, 프랑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 조항은 더빗의 요청에 따라 비밀 조항으로 포함되었다. 그 결과 아헨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더빗이 알지 못했던 것은, 영국 찰스 2세가 네덜란드와 프랑스 간의 관계를 완전히 파탄시키기 위해 이 조약에 참여했다는 사실이었다. 조약 체결 한 달 후, 찰스 2세는 비밀 조항의 내용을 복수심에 불타는 루이 14세에게 누설했다.[33] 결국 1670년 루이 14세는 찰스 2세와 비밀리에 도버 밀약을 맺어 네덜란드 공화국을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1672년에는 스웨덴마저 프랑스와 불-스웨덴 동맹을 맺으면서 삼국 동맹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네덜란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1672년 3월 영국이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를 하고, 이어 프랑스도 4월 6일 선전 포고를 하면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네덜란드 침략 전쟁)이 발발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공격받는 국가적 위기, 이른바 '재앙의 해(Rampjaar)'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그동안 육군을 경시했던 더빗의 정책은 큰 비판에 직면했으며, 주변의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추진했던 친프랑스 외교 정책의 실패 또한 거센 반발을 샀다. 심지어 프랑스가 제시한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다.
4. 몰락과 암살
1672년, 네덜란드 역사에서 '재앙의 해(Rampjaar)'로 기록된 해는 요한 더빗에게 몰락의 시작이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침공으로 시작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은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고, 더빗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지지 기반마저 흔들리는 가운데, 6월 21일에는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결국 그는 8월 4일 홀란트주의 대연금술사 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그의 사임은 정적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의 형 코르넬리스는 날조된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결국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8월 20일, 요한 더빗은 추방될 형을 돕기 위해 헤이그의 헤반겐폴트 감옥을 찾았다. 이 소식이 퍼지자 성난 군중과 헤이그 시민 민병대가 감옥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감옥에 난입하여 더빗 형제를 끌어내 살해했다. 살해된 형제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공공 교수대에 매달리는 등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으로 약 20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던 요한 더빗의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그의 죽음 이후 네덜란드 정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4. 1. 정치적 위기와 국민들의 불만
1672년은 네덜란드에서 '재앙의 해(Rampjaar)'로 불렸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국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동안 육군을 경시했던 요한 더빗의 정책은 큰 비판에 직면했고, 주변의 반대와 경고를 무시하고 추진했던 친프랑스 외교 정책 또한 실패로 돌아가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심지어 프랑스가 제시한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하자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6월 21일, 요한 더빗은 칼을 든 암살자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정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자, 그는 8월 4일 홀란트주 법률 고문(대연금술사)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그의 정적들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형 코르넬리스 더빗은 오라녜파에게 특히 미움을 받아 날조된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코르넬리스는 로마-네덜란드 법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기 위해 자백이 필요했기 때문에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자백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8월 20일, 요한 더빗은 추방될 형 코르넬리스를 돕기 위해 헤이그의 헤반겐폴트 감옥(현 헤이그 감옥 박물관)을 방문했다. 데 비트 형제가 감옥에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성난 군중과 헤이그의 시민 민병대가 감옥을 둘러쌌다. 군중은 감옥 안으로 난입하여 형제를 끌어내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 살해된 형제의 시신은 군중에게 넘겨져 발가벗겨지고 심하게 훼손된 채 근처의 공공 교수대에 매달렸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오라니스트 폭도들은 광란 속에서 형제의 간 등을 구워 먹는 식인 행위까지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 끔찍한 학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는 기록은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폭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남긴다. 이 사건은 훗날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소설 『검은 튤립』의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철학자 스피노자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20년간 공화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요한 더빗의 정권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다. 데 비트 형제의 린치 사건 이후 폭력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자, 홀란트주 의회는 8월 27일 빌럼 3세에게 질서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방식으로 시의회를 숙청할 권한을 부여했다. 9월 초에는 정치적 성격을 띤 대규모 오라니스트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길드와 시민 민병대의 "옛 특권"을 회복하여 섭정의 권력을 제한하고, 칼뱅주의 설교자들이 정부 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가톨릭 등 다른 종파에 대한 관용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시 정부 숙청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빌럼 3세 중심의 새로운 오라니스트 정권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빌럼 3세가 데 비트 형제의 살해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가 린치를 막을 수도 있었던 연방 기병대의 철수를 명령했다는 점은 계속해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요한 반 반켐, 코르넬리스 트롬프, 요한 키비트 등 학살의 주요 선동자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경력을 도왔다.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네덜란드 방어선에 막혔다. 네덜란드 연방 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브란덴부르크와 동맹을 맺어 동쪽에서 프랑스의 압력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정권을 잡은 빌럼 3세는 유럽 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네덜란드 각지에서 분전하여 결국 프랑스군을 네덜란드에서 몰아내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다.
4. 2. 암살
1668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계승 전쟁을 막기 위해 영국의 주 헤이그 대사 윌리엄 템플과 협력하여 잉글랜드, 네덜란드, 스웨덴과 삼국 동맹을 체결했다. 그 결과 아헨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670년 루이 14세는 찰스 2세와 도버 밀약을 맺고, 스웨덴과도 1672년에 불-스웨덴 동맹을 체결하여 삼국 동맹은 붕괴되었고 네덜란드는 고립되었다.
1672년, 네덜란드에서 ''재앙의 해(Rampjaar)''라고 불리는 이 해에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바다와 육지 양면에서 공격받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 위기 속에서, 그동안 육군을 경시했던 데 비트의 정책은 크게 비판받았고, 주위의 반대와 경고를 무시하고 행했던 친불 외교 정책 또한 반발을 샀다. 심지어 프랑스가 제시한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하자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6월 21일, 요한 더빗은 칼을 든 암살자에게 공격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8월 4일, 그는 결국 대연금술사직에서 사임했지만, 정적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7월 24일, 그의 형 코르넬리스 더빗(메드웨이 습격 당시 더 라위터르의 부관)은 오라녜파에게 특히 미움을 받아 날조된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로마-네덜란드 법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기 위해 자백이 필요했기 때문에 고문을 당했지만, 자백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8월 20일, 요한 더빗은 추방 길에 오르는 형을 돕기 위해 형이 수감된 헤이그의 헤반겐폴트 감옥(그의 집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을 방문했다. 데 비트 형제가 함께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헤이그 시민 민병대 구성원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감옥을 둘러싸고 안으로 난입했다. 형제는 총에 맞아 살해당했고, 분노한 군중에게 넘겨졌다. 그들의 벌거벗고 훼손된 시신은 근처의 공공 교수대에 매달렸고, 일부 오라녜파 폭도들은 그들의 간을 구워 먹는 식인 행위까지 벌였다. 당시 목격자들은 이 끔찍한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고 기록하며,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폭동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 학살 소식에 스피노자가 격노했으며,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검은 튤립』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요한 더빗은 거의 20년 동안 공화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지만, 그의 정권은 그가 죽은 지 불과 며칠 만에 무너졌다. 데 비트 형제의 린치는 폭도들의 공격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했고, 혼란 속에서 홀란트주 의회는 8월 27일, 당시 22세였던 오라녜 공 빌럼 3세에게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시의회를 숙청할 권한을 부여했다. 빌럼 3세는 총독으로 취임하지 않겠다는 이전의 선서를 철회하고 네덜란드의 정권을 장악했다. 9월 초에는 대규모의 평화적인 오라녜파 시위와 함께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다.
빌럼 3세가 데 비트 형제의 살해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글렌코 학살에서의 그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가 린치를 막을 수도 있었을 연방 기병대의 철수를 명령했다는 점은 계속해서 의혹을 낳고 있다. 또한, 요한 반 반켐, 코르넬리스 트롬프, 요한 키비트와 같은 암살의 주요 선동자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경력을 도왔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효과적으로 방어선에 막혔다. 겨울 동안 범람지가 얼어붙자 룩셈부르크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잠시 침입을 시도했지만, 매복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네덜란드 연방 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브란덴부르크와 동맹을 맺어 동쪽에서 프랑스의 압력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빌럼 3세는 유럽 각국과의 동맹 및 네덜란드 각지에서의 분전을 통해 프랑스군을 네덜란드에서 철수시켰고, 네덜란드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4. 3. 암살 배후 논란과 빌럼 3세
1672년, 네덜란드에서 ''재앙의 해(Rampjaar)''로 불리는 해에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요한 더빗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6월 21일, 그는 칼을 든 암살자의 공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8월 4일 대연금술사 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정적들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형 코르넬리스는 오라니스트들에게 특히 미움을 받아 날조된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로마-네덜란드 법에 따라 유죄 판결을 위해 자백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견디며 자백을 거부했지만, 결국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8월 20일, 요한 더빗이 형의 추방 준비를 돕기 위해 헤이그의 헤반겐폴트 감옥을 방문했을 때, 두 형제는 그곳을 둘러싼 시민 민병대와 오라니스트 폭도들에게 공격받았다. 형제는 총에 맞아 살해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군중에게 넘겨졌다. 벌거벗겨지고 심하게 훼손된 시신은 근처 공공 교수대에 매달렸으며, 흥분한 오라니스트 폭도들은 형제의 간을 구워 먹는 식인 행위까지 벌였다. 당시 목격자들은 이 끔찍한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고 증언하며,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폭동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요한 더빗이 거의 20년간 이끌었던 공화국 정권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다. 더 이상의 살해는 없었지만, 더빗 형제에 대한 린치는 폭도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했다. 공공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홀란트 주 의회는 8월 27일, 오라녜 공 빌럼에게 시의회를 숙청할 전권을 부여했다. 9월 초, 빌럼은 대규모의 평화적인 오라니스트 시위와 함께 정치적 숙청을 단행했다. 시위대는 길드와 시민 민병대의 '옛' 특권을 복원하고, 칼뱅주의자들이 정부 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다른 종파에 대한 관용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등 보수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비록 숙청의 강도는 지역마다 달랐고, 새로운 섭정들 역시 진정한 민주적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빌럼 3세의 오라니스트 정권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훗날 잉글랜드 왕이 되는 빌럼 3세가 더빗 형제의 살해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글렌코 학살에서의 그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가 린치를 막을 수도 있었던 연방 기병대의 철수를 명령했다는 점은 꾸준히 의혹으로 제기되어 왔다. 또한, 그는 요한 반 반켐, 코르넬리스 트롬프, 요한 키비트와 같은 암살의 주요 선동자들을 기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경력을 도왔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은 효과적인 방어선에 막혔고, 겨울에 범람 지역이 얼어붙었을 때 룩셈부르크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잠시 침입했으나 매복 공격으로 격퇴되었다. 한편, 네덜란드 연방 의회는 독일 황제 및 브란덴부르크와 동맹을 맺어 동쪽에서의 프랑스 압력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5. 수학적 업적
타원을 운동학적으로 묘사하는 연구는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와 프로클로스, 그리고 동시대 프랑스 수학자 클로드 미도르그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요한 더 비트는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회전하는 선과 미끄러지는 각도를 이용하여 쌍곡선을 설명하였고, 회전하는 각도와 미끄러지는 선을 이용하여 포물선을 설명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1661년, 더 비트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폰 스코텐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데카르트의 ''라 지오메트리'' 두 번째 권에 ''Elementa Curvarum Linearum''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저서는 해석 기하학 분야 최초의 체계적인 교과서로 평가받는다.[34]
더 비트는 수학적 재능을 재무 수학 분야에도 적용하였다. 그의 저서인 ''생명 연금의 가치와 상환 채권 비교''(Waardije van Lyf-renten naer Proportie van Los-rentennl)는 그가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유능한 정치가였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은 이후 라이프니츠와 베르누이 같은 저명한 수학자들이 확률의 응용에 관해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중세 시대부터 유럽에서는 생명 연금이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는 중요한 금융 수단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국가는 개인으로부터 일시금을 받는 대가로 그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생명 연금 제도를 운영했다. 이와 더불어, 일반적인 국가 채권과 유사한 상환 채권도 발행되었다. 더 비트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 동일한 원금에 대해 연 4%의 이자를 지급하는 상환 채권이 연 6%(1/17의 비율)의 이율을 가진 생명 연금과 동일한 재정적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 정부('Staten')는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높은 연 7% 이상(1/14의 비율)의 이율로 생명 연금을 지급하고 있어 재정적인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더 비트의 이 연구는 경제학 문제 해결에 확률 이론을 최초로 적용한 선구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34]
6. 평가와 유산
제1 무총독 시대 (1650년~1672년) 동안 네덜란드 공화국의 정치는 요한과 코르넬리스 드 비트 형제,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코르넬리스 데 그라프와 안드리 데 그라프 형제가 이끄는 친 국가 성향의 공화주의 세력이 주도했다. 이들은 긴밀한 협력과 친족 관계를 통해 공화주의 파벌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17] 요한 더빗은 특히 그의 외삼촌이자 암스테르담 시장이었던 코르넬리스 데 그라프의 정치적 지원과 조언에 크게 의존했다. 데 그라프는 명석한 판단력과 폭넓은 식견을 갖춘 인물로, 더빗은 그의 정치적 역량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도 높이 평가했다.[18][19][20] 더빗과 데 그라프는 정치적 동반자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더빗은 데 그라프를 "주 드 주이드폴스브로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신뢰했다.[14][21][22]
1653년 홀란트주의 법률 고문(raadpensionaris)으로 선출된 더빗은 이후 약 20년간 네덜란드 공화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제1차 영란 전쟁을 종결시킨 웨스트민스터 조약 (1654년) 체결을 주도했는데, 이 조약에는 잉글랜드 공화국의 항해법 인정과 같은 불리한 내용도 있었지만, 오라녜-나사우 가문 인물을 총독에서 배제하는 비밀 조항을 포함시켜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는 훗날 윌리엄 3세가 될 빌럼 3세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더빗은 뛰어난 수학적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해군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성향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거만하다는 평가와 함께 해군을 중시하면서도 정작 해군 장병들을 낮게 보는 태도는 해군 내부의 불만을 샀으며, 육군 출신 인사를 함대 사령관에 기용한 점도 반발을 일으켰다. 또한,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팽창을 막기 위해 1668년 영국, 스웨덴과 삼국 동맹을 맺어 아헨 조약을 이끌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1670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도버 밀약, 1672년 프랑스와 스웨덴 간의 동맹 체결로 삼국 동맹은 와해되었고 네덜란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1672년은 네덜란드 역사에서 '재앙의 해'(Rampjaar)로 불리는데, 영국과의 제3차 영란 전쟁과 프랑스의 침공(네덜란드 침략 전쟁)이 동시에 발발하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 상황에서 더빗의 육군 경시 정책과 친프랑스 외교 노선은 큰 비판을 받았고, 프랑스가 제시한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검토하면서 지지 기반마저 약화되었다. 6월에는 괴한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결국 민중의 불만은 폭발했고, 더빗은 법률 고문직에서 사임했으며, 빌럼 3세가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7월 24일 형 코르넬리스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헤이그의 헤반겐폴트 감옥에 수감되었다. 요한 더빗 역시 실정과 공금 횡령 의혹 등으로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빌럼 3세에게 편지를 보내 중재를 요청했으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변명으로 비친 편지는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샀다. 8월 20일, 고문을 받고 추방 판결을 받은 형을 만나기 위해 감옥을 방문했던 요한 더빗은 격분한 군중에게 형과 함께 끌려나가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은 동시대 철학자 스피노자를 격분하게 했으며, 훗날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소설 『검은 튤립』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더빗 형제의 사후, 빌럼 3세는 네덜란드를 위기에서 구출하고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요한 더빗은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번영을 이끌었지만, 외교 정책의 실패와 국내 정치 운영상의 문제점으로 인해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아들 요한 더빗 2세는 후에 도르드레흐트의 시장 비서를 지냈다.
7. 가족 관계
요한 더빗은 유서 깊은 네덜란드 가문인 더빗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야코프 더빗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였던 도르드레흐트의 유력한 섭정이었으며, 귀족 계층에 속했다. 어머니 안나 판 덴 코르푸트(1599–1645)는 영향력 있는 군사 지도자이자 지도 제작자였던 요하네스 코르푸티우스의 조카였다.[9] 요한에게는 형 코르넬리스 더빗이 있었는데, 그는 동생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서 활동했다. 삼촌 안드리 더빗은 1619년부터 1621년까지 홀란트의 대연금술사를 지냈다. 다른 삼촌이 안나 요한나 폰 나사우-지겐의 딸 마르가레타 폰 나사우와 결혼하여, 요한 더빗은 오라녜-나사우의 윌리엄과 먼 친척 관계이기도 했다.[10] 또한 네덜란드 제독 마르텐 트롬프 및 그의 아들 코르넬리스 트롬프와도 인척 관계였다.[11]
요한과 형 코르넬리스는 아버지 덕분에 아이작 베크만, 야코프 카츠, 헤라르두스 포시우스, 안드레아스 콜비우스와 같은 학자 및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좋은 교육 환경에서 자랐다. 형제는 도르드레흐트의 라틴 학교에서 로마 공화국의 가치를 배웠고, 이후 요한 더빗은 라이덴 대학교에서 수학과 법학을 공부하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645년에는 앙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헤이그에서 프란스 판 스호텐의 법률 회사 소속 변호사로 활동했다.
1655년, 요한 더빗은 암스테르담의 강력한 과두 정치 세력의 중심인물인 얀 비커와 아그네타 더 흐라프 판 폴스브로크의 딸 웬델라 비커와 결혼했다.[12] 이 결혼을 통해 더빗은 비커 가문, 더 흐라프, 호프트 가문, 비첸 가문, 보엘렌스 룬, 레인스트 가문 등 유력 가문들과 친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매형으로는 암스테르담 귀족 피터 더 흐라프(사촌이기도 함), 고위 관리 제라르트 비커 (I) 판 스비텐, 무기 상인 야코프 트립, 은행가 장 도이츠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더빗의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 되었다. 프란스 반닝크 코크(렘브란트의 그림 ''야경''의 대장)는 그의 처남이 되었고, 노르웨이 북부의 광대한 영지 소유주였던 요아힘 이르겐스 폰 베스터비크는 사촌 매형이 되었다.
요한과 웬델라는 슬하에 3녀 1남, 총 4명의 자녀를 두었다.[13]
# 안나 더빗 (1655–1725): 헤르만 판 덴 호네르트와 결혼
# 아그네스 더빗 (1658–1688): 시몬 테레스테인 판 할레윈과 결혼
# 마리아 더빗 (1660–1689): 빌렘 호프트와 결혼
# 요한 더 비트 주니어 (1662–1701): 도르드레흐트 시 비서. 삼촌 코르넬리스 더 비트의 딸 빌헬미나 더빗과 결혼
요한 더빗 사후, 그의 자녀들은 처제 야코바 비커의 남편이자 매형인 피터 더 흐라프의 후견을 받았다.
참조
[1]
서적
Life/Death Rhythms of Capitalist Regimes – Debt before Dishonour
https://books.google[...]
2014
[2]
웹사이트
That time the Dutch ate their prime minister
https://dutchreview.[...]
2021-11-27
[3]
서적
The World
https://books.google[...]
2022
[4]
웹사이트
"DeWitt" – an annotation to Thomas Carlyle's "Signs of the Times"
https://victorianweb[...]
2010
[5]
웹사이트
Is it true that an angry mob of Dutchmen killed and ate their own prime minister in 1672?
http://www.historyex[...]
2023-03-10
[6]
서적
Gedenkwaerdige stukken, wegens den moordt der heeren Cornelis en Johan de Witt: Dienende tot opheldering van 't treurspel, genaemt de Haagsche broedermoordt, of dolle blydschap
https://books.google[...]
1676
[7]
서적
Historische verhael en politique bedenckingen aengaende de bestieringe van Staet- en Oorloghs-saken, voor-gevallen onder de bedieningen van de Heeren C. en J. de Witt, beginnende Ao 1653 en eyndigende in het jaer 1672. Met hunne doot
https://books.google[...]
1677
[8]
서적
Armorial général, contenant la description des armoiries des familles nobles et patriciennes de l'Europe: précédé d'un dictionnaire des termes du blason
G.B. van Goor
[9]
서적
Johann de Witt
https://books.google[...]
2012
[10]
간행물
John de Witt. Statesman of the "True Freedom".
1986
[11]
웹사이트
"Met onoprechte deelneming van neef Cornelis Tromp" (Dutch)
https://historiek.ne[...]
[12]
웹사이트
Bicker Wendela Bicker at vrouwenlexicon (dutch)
http://resources.huy[...]
[13]
웹사이트
Anna de Witt at ''Heren van Holland''
http://www.herenvanh[...]
[14]
웹사이트
Biography Cornelis de Graeff at Nieuw Nederlandsch biografisch woordenboek. Deel 2 (Dutch)
http://www.dbnl.org/[...]
[15]
서적
Observations upon the United Provinces of the Netherlands, orig published 1668
https://books.google[...]
Jacob Tonfon within Grays-Inn Gate next Grays-Inn Lane, and Awnfoam and John Churchill at the Black Swan in Tater-No/ler-Row
[16]
간행물
Interest van Holland, ofte gronden van Hollands-Welvaren
Amsterdam
1662
[17]
서적
Die vielen Leben des Jan Six: Geschichte einer Amsterdamer Dynastie
https://books.google[...]
2016
[18]
서적
Johann de Witt
https://books.google[...]
Amsterdam
1918
[19]
간행물
John de Witt – Statesman of the „True Freedom"
1986
[20]
간행물
The Dutch Republic – Its Rise, Greatness, and Fall – 1477–1806
1995
[21]
서적
Geschiedkundige bijdragen ...: aflevering. Willem Frederik, prins van Nassau ...
https://books.google[...]
[22]
서적
'De vroedschap van Amsterdam 1578–1795'
http://www.google.at[...]
[23]
서적
De Salamina a las Malvinas: 25 siglos de guerra naval
https://books.google[...]
2016
[24]
서적
Künker Auktion 232 – Münzkunst des Mittelalters – Die Sammlung Wolfgang Fried
https://books.google[...]
2013
[25]
간행물
Jaarboek van het Genootschap Amstelodamum
1928
[26]
서적
De 500 Rijksten van de Republiek: Rijkdom, geloof, macht en cultuur
https://books.google[...]
2020
[27]
간행물
Geschichte der Niederlande. Von der Seemacht zum Trendland.
2009
[28]
서적
John de Witt, Grand Pensionary of Holland, 1625–1672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29]
웹사이트
Andries de Graeff (1611–1678) 't Gezagh is heerelyk: doch vol bekommeringen
http://www.triomfder[...]
2023-03-27
[30]
서적
De opgang van Mens en Wetenschap
https://books.google[...]
2018
[31]
기타
Andries de Graeff, voorbeeld van culturele elite? Tweede opdrach
https://werkstukkenk[...]
[32]
기타
John de Witt – Statesman of the „True Free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33]
기타
Stadhouder-Koning Willem III, een politieke biografie
2001
[34]
서적
Elementa Curvarum Linearum
Springer books
2000
[35]
문서
『スイス・ベネルクス史』
[36]
서적
『スイス・ベネルクス史』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