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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하루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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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스기 하루히로는 요네자와번의 10대 번주로, 1764년에 태어나 1822년에 사망했다. 9대 번주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양자가 되어 1785년 가문을 계승했으며, 하루노리의 후견을 받아 번정을 운영했다. 재정 재건과 개혁을 추진하여 영내 인구를 증가시켰으며, 용수로 공사 등 번 사업을 진행했다. 1812년에 은거한 후 182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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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하루히로
기본 정보
우에스기 하루히로의 초상 (우에스기 가문 역대 번주 초상화 중, [[우에스기 박물관]] 소장)
우에스기 하루히로 초상 (우에스기 가문 역대 번주 초상화 중, 우에스기 박물관 소장)
씨명우에스기 씨
이름우에스기 하루히로
이명증지 조노스케 (増之助)
보지 조노스케 (保之助) (유명)
가쓰무네 (勝意) (초명)
하루히로
통칭기헤이지 (喜平次)
시호교토쿠인덴 호인 곤다이소즈 교신 (享徳院殿法印権大僧都恭心)
묘소야마가타현요네자와시 고묘의 우에스기 가문 묘소
관위종4위하
중무대보
탄정대필
시종
좌근위권소장
효고노카미 (은거 후)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하루
이에나리
데와요네자와번 번주
출생메이와 원년 7월 11일 (1764년8월 8일)
사망분세이 5년 9월 11일 (1822년10월 25일)
가계
부모아버지: 우에스기 시게사다
어머니: 오세이の方(御家人 御馬乗 小川嘉内娘)
양아버지: 우에스기 하루노리
형제자매여자
사치히메 (우에스기 하루노리 정실)
가쓰히로
하루히로
가쓰사다
나이토 노부마사
배우자정실: 도쿠가와 무네치카 양녀・순히메 (마쓰다이라 요시토시 장녀)
측실: 후세야 씨
자녀미히메 (우에스기 나리사다 정실)
이타쿠라 가쓰토시 정실
엔히메 (이케다 나리오키 정실)
기시 (하타케야마 요시노부 정실)
마스코 (하타케야마 요시노부 계실)
히사치요
양자: 아키타다
양자: 나리사다

2. 생애

메이와 원년 7월 11일 (1764년 8월 8일)에 태어난 우에스기 하루히로는 텐메이 5년 (1785년)에 가문을 계승한 뒤, 양부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와 친부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후견을 받으며 번정을 이끌었다. 하루히로는 하루노리에게서 번주로서 지켜야 할 훈계 (전국의 사)를 받았다.

하루히로는 텐메이 연간 시가 유치카의 재정 재건 시도가 실패한 후, 간세이 연간에는 코리도 요시마사·마사모리 부자를 중심으로 재정 재건과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영내 인구가 증가하고, 쿄와 원년 (1801년)에는 상호 부조 체제인 고슈 조합이 조직되었다. 또한 쿠로이 타다요리에 의해 용수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분카 9년 (1812년) 9월 7일, 하루히로는 나리사다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분세이 2년 (1819년) 중풍 증세가 재발하여 아카유 온천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분세이 5년 3월 11일 (1822년 4월 2일) 양부 요잔이 사망하고 반년 후인 9월 11일 (10월 25일)에 하루히로도 59세로 사망했다.[1]

2. 1. 출생과 성장

메이와 원년 7월 11일 (1764년 8월 8일), 요네자와번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차남으로 요네자와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9대 번주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의 측근 중 한 명인 키무라 죠하치 타카히로가 교육을 담당했다. 텐메이 2년 (1782년)에 같은 어머니의 형 카츠히로를 제쳐두고 하루노리의 양자가 되었다. 텐메이 5년 (1785년), 양부의 은거로 인해 가문을 계승했다. 이때 하루노리가 어린 하루히로에게 가문을 양도한 것은 개혁 저항 세력의 반발과 피로, 막부 푸신의 회피,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형 요리시게의 아들 츠나요시를 후계자로 삼은 예에 따라, 선대 시게사다가 생존한 상태에서 선대 실자에게 계승되기를 희망하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문을 계승할 때 하루노리는 하루히로에게 다음과 같은 훈계 (전국의 사)를 보냈다.

  • 국(번)은 선조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지는 것이며, 번주의 사유물이 아니다.
  • 영민은 국(번)에 속하는 것이며, 번주의 사유물이 아니다.
  • 국(번)·국민(영민)을 위해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이 군주(번주)이며, "군주를 위해 존재하고 행동하는 국·국민"은 아니다.


가문을 계승한 하루히로는 친부 시게사다와 함께 은거한 하루노리에게 자신의 번정 후견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정무에 관해서는 하루히로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루히로의 치적은 하루노리의 후견에 의존하는 바가 컸으며, 하루히로가 독자적인 정책을 제안할 기회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2. 2. 번주 취임과 개혁

메이와 원년(1764년) 7월 11일, 요네자와번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차남으로 요네자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9대 번주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의 측근 키무라 죠하치 타카히로가 교육을 담당했다. 텐메이 2년(1782년)에 친형 카츠히로를 제치고 하루노리의 양자가 되었다. 텐메이 5년(1785년), 양부의 은거로 가문을 계승했다. 하루노리가 어린 하루히로에게 가문을 물려준 이유는 개혁 저항 세력의 반발과 피로, 막부의 의심을 피하고,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형 요리시게의 아들 츠나요시를 후계자로 삼은 예를 따른 것이었다. 또한 선대 시게사다가 생존한 상태에서 선대 아들에게 계승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가문을 계승할 때 하루노리는 하루히로에게 다음과 같은 훈계(전국의 사)를 보냈다.

가문을 계승한 하루히로는 친부 시게사다와 함께 은거한 하루노리에게 번정 후견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정무는 하루히로가 전면에 나섰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루노리의 후견에 의존하는 바가 컸고, 하루히로가 독자적인 정책을 제안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텐메이 연간에는 시가 유치카가 재정 재건을 주도했지만 실패했고, 간세이 이후에는 코리도 요시마사·마사모리 부자가 중심이 되어 재정 재건 및 개혁을 진행했다. 양부의 개혁은 하루히로 치세에 그 성과가 나타났는데, 간세이 3년(1791년)에는 영내 인구가 9만 9119명이었으나, 간세이 10년(1798년)에는 10만 3721명이 되었다. 쿄와 원년(1801년)에 마을에 고슈 조합을 조직하여 상호 부조 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치세 중 번 사업으로는 처음으로 쿠로이 타다요리에 의해 호조고 신제 용수로 공사가 이루어졌고, 쿠로이가 발안한 이이토요산 아나제 공사도 착수되었다.

하루노리의 양자가 된 해에 그의 장남 아키타카를 세자로 삼았지만, 아키타카가 요절했기 때문에 조카(카츠히로의 장남)인 나리사다를 세자로 삼았다. 하루노리가 양육하고 가르친 나리사다가 성장하기를 기다려 분카 9년(1812년) 9월 7일에 은거했다. 분세이 2년(1819년)에는 지병인 중풍 증세가 재발하여 하루노리와 함께 아카유 온천에 요양을 간 기록이 있다.

2. 3. 은거와 죽음

분카 9년 (1812년) 9월 7일에 하루노리가 양육·훈도한 조카이자 세자인 나리사다의 성장을 기다려 은거했다.[1] 분세이 2년 (1819년)에는 지병인 중풍 증세가 재발했기 때문에, 하루노리와 함께 아카유 온천에 탕치하러 간 기록이 있다.[1]

분세이 5년 3월 11일 (1822년 4월 2일)에 양부 하루노리가 사망하자, 반년 후 9월 11일 (10월 25일)에 그 뒤를 따르듯 사망했다.[1] 향년 59세였다.[1]

3. 가계

구분내용
아버지우에스기 시게사다
어머니오세노카타 (오가와 요시나카의 딸)
양아버지우에스기 하루노리
정실준히메 (마쓰다이라 요시토시의 장녀, 도쿠가와 무네치카의 양녀)
아들우에스기 히사치요
측실후세야 씨
산히메 (우에스기 나리카타 정실)
사다히메 (이타쿠라 가쓰토시 정실)
엔히메 (이케다 나리아키 정실)
기시 (하타케야마 요시노부 정실)
마시코 (하타케야마 요시노부 계실)
측실혼마 씨
양자우에스기 아키타카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장남)
양자우에스기 나리카타 (우에스기 가쓰히로의 아들)


4. 관력


  • 1782년 9월 19일(덴메이 2년): 하루노리의 양자가 되어 원복. 도쿠가와 이에하루에게 한 글자를 받아 '하루히로'라 칭함. 종4위하, 나카츠카사다이후에 서임.
  • 1785년 2월 7일(덴메이 5년): 가독을 상속받고, 단죠다이히츠로 전임. 같은 해 12월 18일, 지주 겸임.
  • 1810년 12월 16일(분카 7년): 사콘노에 권소장을 겸임. 시종을 사임.
  • 1812년 9월 7일(분카 9년): 은거하고 효고노카미로 천임. 사콘노에 권소장 여전.

5. 가신

문화 3년(1806년)에 간행된 에도 무감에 보이는 하루히로 치세 하의 주요 가신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역직은 『우에스기 요잔』에서 보충한 요네자와 번 내의 역직명이다. 간행상의 사정으로 내용은 문화 3년 이전의 가능성이 높다.[1]

가로, 봉행, 시토혼조 야지로, 나가오 곤시로, 나카조 효시로, 센자카 타로자에몬, 이로베 야사부로, 모리 와카사, 타케마타 오키나스케, 이치카와 분고, 키요노 이세마츠, 시마즈 사쿄, 히라바야시 쿠란도, 타케마타 곤자에몬, 히로이즈 도쇼, 리토 쿠로베 (봉행)
중로오이시 사젠
용인스다 타나카, 스다 카즈마, 타케마타 군타, 진보 요스케 (제학), 마루야마 헤이로쿠 (오메츠케), 시마다 타몬 (나카노마 토시요리), 사토 이치에몬, 핫토리 요에몬 (나카노마 토시요리)
어성사카타야마 쵸자에몬, 토사카 리헤이


6. 인물

하루히로는 지헌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하여 교육 담당이었던 기무라 다카히로(木村高広)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책임을 느낀 다카히로가 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1]

하루히로가 은거한 이유는 중풍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분세이 2년(1819년)에 중풍이 재발했을 때, 요잔(鷹山)이 동행하여 아카유 온천에 온천 치료를 가는 등 몸이 튼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

참조

[1]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1761
[2] 문서 생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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