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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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홍구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조류학자이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후, 농업시험장 기사,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등을 거치며 식물과 조류 연구에 몰두했다. 1929년부터 1941년까지 한국 전역을 돌며 조류를 채집,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했으며, 함흥의학전문학교 생물학교수와 강서농업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부교수로 재직하며 북한 조류학 발전에 기여했고, 김일성과 사냥 여행을 함께하며 조류를 식별하기도 했다. 저서로 《조선조류원색도설》 등이 있으며, 한국어로 조류 이름을 정립하고 조류 보존에도 기여했다. 한국 전쟁으로 헤어진 아들 원병오와 1965년 북방쇠찌르레기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재회의 기회를 가졌다. 사후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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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류학의 선구자 원홍구의 아들이자 경희대학교 교수 및 자연사박물관장을 역임한 원병오는 50여 종의 새로운 조류 종을 발견하고 100여 종의 조류 이동 실태를 밝히는 등 한국 조류학 발전에 기여한 조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다. - 일제강점기의 생물학자 - 우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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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홍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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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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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Won Honggu |
한글 표기 | 원홍구 |
출생 | 1888년 4월 8일 |
출생지 | 부산, 조선 |
사망 | 1970년 10월 3일 |
묘지 | 애국열사릉 |
국적 | 북한 |
직업 | |
직업 | 조류학자 |
경력 |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학력 | 수원고등농림학교 졸업 |
모교 | 가고시마 농업대학 |
직책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2. 생애
원홍구는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났다. 1910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11년 鹿児島高等農林学校|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일본어에 입학하였다. 귀국 후 수원농업시험장 기사를 지내고, 1920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박물학·생물학을 가르쳤다. 1931년 평남 안주공립농업학교로 전근, 1934년 수원고등농림학교 25주년 기념논문에 조선조류목록을 발표하였다. 1940년 함남 영생여자고등학교 교장, 함흥의학전문학교 생물학교수를 역임하고, 1945년 평남 덕천공립농업학교 교장, 강서농업학교 교장을 지냈다.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부교수로 취임하였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1910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으로 유학, 1911년 鹿児島高等農林学校|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일본어에 입학하였다. 귀국 후 수원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농업시험장 기사를 지냈다. 그 뒤 교육계에 투신, 1920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박물학·생물학을 가르치는 한편 식물학에 뜻을 두어 국내는 물론 타이완에까지 원정하여 식물채집을 하였다. 그 후 조류채집 및 분류에 전념하였다. 1931년 평안남도 안주공립농업학교로 전근갔으며 이무렵부터 자신이 채집, 분류한 조류의 목록을 학술지에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1934년 수원고등농림학교 25주년 기념논문에 조선조류목록을 발표하였다.1929년부터 1941년까지 한국 전국을 채집여행하여 한국산 미기록 조류를 발굴, 연구, 포함하여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0년에 함경남도 영생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고, 함흥의학전문학교 생물학교수가 되어 생물학을 강의하였다.
2. 2. 광복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1945년 8·15 광복 이후, 원홍구는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부교수로 취임하여 북한의 조류학 분야에서 활동하였다.[4]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부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북한 조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고 과학원 생물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였다.[4]196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이 설립되자, 원홍구는 과학원 동물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2] 그는 자신의 개인 소장 표본을 연구소에 이전했지만, 많은 표본이 손상되었다.[2]
그는 《조선조류원색도설》(1958), 《조선조류지 1~3》(1963~65), 《조선짐승류지》(1968) 등과 30여 편의 학술 논문을 저술하였다.[4] 특히, 1960년대에는 3권으로 된 한국 조류에 관한 저서와 포유류에 관한 단행본을 출판하여 한국 조류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2]
원홍구는 한국어로 조류 이름을 처음으로 정립하였으며, 조류 보존 조치의 선구자였다.[2] 이전의 조류 사냥꾼들을 훈련시키는 등 조류 보호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전쟁이 1953년 7월에 종전되면서, 원홍구는 최고인민회의의 상임 구성원이 되었다.[2] 그는 김일성 주석과 함께 사냥 여행에 동행하며 조류를 식별해 주었고, 김일성은 그에게 사냥용 소총을 선물하고 동독에서 조류 표본을 보내주기도 했다.[2] 또한, 연구소를 위해 특별히 수입된 폴란드산 FSC Żuk 차량을 제공받는 등 특전을 누렸다.[2]
막내아들 원병오는 한국 전쟁 때 헤어져 남쪽에서 조류학자가 되었는데, 1965년 원병오가 인식표를 묶은 북방쇠찌르레기가 북쪽으로 건너온 것을 계기로 원홍구는 아들의 생존을 확인하게 되었다.[4] 이후 소련의 조류학자 레오니드 포르텐코|Леонід Олександрович Портенкоuk의 도움으로 아들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5]
사후, 원홍구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6]
3. 남북 분단과 가족의 이산
원홍구는 1888년 북삭수 부산에서 태어나 1910년 수원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11년간 가고시마 농업대학에서 공부했다. 1920년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자연 과학과 생물학 교사가 되었다. 1929년부터 1941년까지 한국 전역에서 조류를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1940년에는 평남 덕천공립농업학교 교장, 이후 강서농업학교 교장을 역임했다.[2]
해방이 시작되자 원홍구는 아내와 함께 피난하기로 결정했다. 딸은 주한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이 통치하는 남쪽에, 세 아들은 막내인 원병오를 포함하여 소련 민정청이 통치하는 북쪽에 거주하며 원병오는 학업을 이어갔다. 1945년 8월, 몽골에서 소형 포유류를 연구하던 둘째 아들 빈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일본 첩자로 오인되어 사살되었다. 1946년 원홍구와 그의 아내는 평양으로 이주하여 새로 설립된 김일성종합대학의 생물학과 학과장이 되었다.[2]
아들들이 남한으로 "피신"했다는 이유로 불리한 대우를 받았으나, 전 제자인 정준택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이 되어 스승의 명성을 보호하고 그의 경력 발전을 도왔다. 196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이 설립되었고, 원홍구는 과학원 동물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개인 소장 표본을 연구소에 이전했지만, 많은 표본이 손상되었다. 한국 전쟁이 1953년 7월에 종전되면서, 최고인민회의의 상임 구성원이 되었다. 김일성 주석과 함께 사냥 여행에 동행하며 그를 위해 조류를 식별했고, 주석으로부터 사냥용 소총을 선물받았다. 동독에서 조류 표본을 보내주거나, 연구소를 위해 특별히 수입된 폴란드산 FSC Żuk 차량을 제공받는 등 특전을 누렸다. 1960년대에는 3권으로 된 한국 조류에 관한 저서와 포유류에 관한 단행본을 출판했다. 원홍구는 한국어로 조류 이름을 처음으로 정립했으며, 조류 보존 조치의 선구자였다.[2]
원홍구가 1970년 10월에 사망했을 때, 평양 애국열사릉에 군사적 예우를 갖춰 안장되었다. 그가 주석으로부터 받은 사냥총은 동물연구소에 전시되었다. 원병오는 1978년 아슈하바트에서 열린 국제 자연 보전 연맹 회의에 참석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2]
3. 1. 아들 원병오와의 극적인 재회
원병오는 부모와 떨어져 대한민국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 원홍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저명한 조류학자가 되었다. 1965년 원홍구는 평양의 한 공원에서 띠를 한 긴꼬리마도요를 발견했다. 그는 조류학 문제에 관해 일본과 연락할 수 있었고, 국제 조류 보존 협의회의 도쿄 사무소에 정보를 요청하여 그 새가 1963년 봄 서울에서 아들에 의해 "C 7655"라는 일본 띠를 하고 띠를 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2] 이 회수 사실은 ICBP를 통해 원병오에게도 전달되었고, 이것이 부자가 전쟁 이후 서로를 알게 된 첫 번째 기회였다.1966년 7월, 원병오는 옥스퍼드에서 열린 제14차 국제 조류학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폴란드 조류학자 얀 피노프스키를 만나 그가 아버지와 함께 북한에서 참새를 연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고, 원병오는 아버지에게 사진과 함께 긴 편지를 썼다.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는 회의의 다른 참석자인 레오니트 포르텐코 교수에 의해 북한으로 밀반입되었고, 그는 북한을 방문한 또 다른 소련 과학자를 통해 편지를 전달했다.[3][2] 원홍구는 북한 선전에 따라 남한이 비참한 가난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편지를 읽고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죽어도 좋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빠르게 퍼져 나가 일본 작가 엔도 기미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는 1984년에 두 교수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1990년 남북 화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북한 이데올로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1992년에 두 원씨를 다룬 컬러 영화 "새들"을 제작했다. 1992년 북한의 우표도 이 사건을 기념했다.[3][2]
4. 평가 및 영향
원홍구는 북한 조류학 분야의 선구자로,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교수, 과학원 생물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의 조류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4] 특히, 한국 전쟁으로 헤어진 아들 원병오와 1965년 북방쇠찌르레기를 통해 재회한 사건은 남북 분단의 아픔과 극적인 만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4]
그는 《조선조류원색도설》(1958), 《조선조류지 1~3》(1963~65), 《조선짐승류지》(1968) 등 다수의 저서와 3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하여 북한의 조류학 연구 기반을 다졌다.[4] 또한, 한국어로 된 조류 이름을 처음으로 정립하고, 조류 사냥꾼들을 훈련시켜 조류 보존에 힘쓰는 등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
김일성 주석과의 인연도 주목할 만하다. 원홍구는 김일성과 함께 사냥을 다니며 조류를 식별해 주었고, 사냥용 소총을 선물 받기도 했다. 또한 동독에서 조류 표본을 보내주는 등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2]
원홍구는 남한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북한의 선전과는 달리, 아들 원병오가 남한에서 성공한 조류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죽어도 좋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열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일화이다.[3]
사후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그가 받은 사냥총은 동물연구소에 전시되었다.[6][2] 그의 업적과 남북 분단 속 부자 상봉 이야기는 1992년 북한에서 영화 "[새들]"로 제작되었고, 같은 해 우표로도 발행되어 널리 알려졌다.[3]
5. 가족 관계
참조
[1]
논문
The Hall collection of birds from Wonsan, central Korea, in spring 1903
http://birdingasia.o[...]
[2]
논문
Erinnerungen an Ornithologen, die ich kannte (4. Teil)
http://m.ala-schweiz[...]
[3]
웹사이트
Korea (North) 1992 Ornithologist Dr. Won Hong Gu - Birds
http://www.stampsoft[...]
2017-01-02
[4]
뉴스
"[구석구석 과학사](31)전쟁 중 헤어진 아들, 새의 인식표로 찾다"
http://weekly.khan.c[...]
2018-05-14
[5]
저널
Erinnerungen an Ornithologen, die ich kannte (4. Teil)
http://m.ala-schweiz[...]
2018-05-11
[6]
뉴스
성묘위해 방북하는 '새 박사' 원병오
http://legacy.www.ha[...]
200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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