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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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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병오는 일제강점기 한국 유일의 조류연구가 원홍구의 아들로,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다 한국 전쟁 중 월남하여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이후 경희대학교 생물학과를 거쳐 일본 홋카이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50여 종의 새로운 조류 종을 발견하고 100여 종의 조류 이동 실태를 밝히는 등 조류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아버지와 한국 전쟁으로 헤어졌으나, 조류 연구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2002년에 아버지의 묘를 방문했다.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조수보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20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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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홍구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며 조류 연구에 몰두하여 《조선조류원색도설》을 저술하고 북한 조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김일성과 사냥 여행을 함께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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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원병오
한자 이름元炳旿
로마자 표기Won Byeong-o
출생일1929년 5월 19일
사망일2020년 4월 9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
국적대한민국
학력
출신 대학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 축산학과

경희대학교 생물학과
홋카이도 대학
학위박사(농학)
경력
연구 분야조류학
연구 기관경희대학교
국제환경과학연구소
가족

2. 생애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현 개성특별시)에서 한국 유일의 조류연구가였던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6]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닌 경험으로 조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6]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하였고, 단과대학으로 분리된 원산농업대학을 다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하였다.[6] 1950년 개성시에서 태어난 원병오는 북한에서 대학 교육을 시작하여, 원산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축산학 학위를 취득한 후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었다.[2] 그 해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형제와 함께 남쪽으로 탈출했으며, 그의 부모와 다른 형제는 북쪽에 남겨졌다.[2]

전쟁 기간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중위 때 당시 3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후에 대통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6] 원병오는 전선에서 수의 중위로 복무했으며, 1956년 대위로 전역한 후 대한민국 농림부에 합류했다.[2] 전역 후 경희대학교 생물학과를 거쳐 1961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6] 1959년 경희대학교에서 생물학으로 두 번째 학위를 취득했고, 홋카이도로 건너가 삿포로 대학에서 1961년에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한 논문을 썼다.[3]

부친 원홍구와는 한국전쟁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가, 1965년 자신이 인식표를 달은 북방쇠찌르레기를 북쪽의 아버지가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일본 조류학자를 통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12][11][7] 1965년, 원병오가 서울에서 검은별찌에 조류 고리표를 부착한 것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 발견되어 보고되었다.[3] 이것은 전쟁으로 헤어진 두 사람의 첫 번째 연락이었다.[3] 이듬해인 1966년 원병오는 옥스퍼드에서 열린 14회 국제 조류학회(XIV International Ornithological Congress)에서 폴란드의 조류학자 얀 피노프스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직접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16년만에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12] 그는 소련의 조류학자 레오니드 포르텐코/Портенко Леонід Олександровичuk의 도움으로 우편 검열을 피해 인편으로 부친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12][3] 하지만 분단 때문에 둘이 직접 만나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고, 원홍구는 1970년에 사망했다. 2002년에야 그는 개성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할 수 있었다.[13][9] 2002년, 원병오는 비록 부모와 형제가 이미 사망했지만, 마침내 북한 방문 허가를 받았다.[3] 이 부자의 이야기는 1984년 엔도 기미오/遠藤公男일본어의 책 《아리랑의 파랑새(アリランの青い鳥일본어)》로 출판되었고, 1993년에는 북일합작영화 《새(バード일본어)》로 영화화되었다.[14][8]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원병오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현 개성특별시)에서 한국 유일의 조류연구가였던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6]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닌 경험으로 조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6]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하였고, 단과대학으로 분리된 원산농업대학을 다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하였다.[6] 1950년 개성시에서 태어난 원병오는 북한에서 대학 교육을 시작하여, 원산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축산학 학위를 취득한 후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었다.[2] 그 해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형제와 함께 남쪽으로 탈출했으며, 그의 부모와 다른 형제는 북쪽에 남겨졌다.[2]

전쟁 기간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중위 때 당시 3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후에 대통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6] 원병오는 전선에서 수의 중위로 복무했으며, 1956년 대위로 전역한 후 대한민국 농림부에 합류했다.[2] 전역 후 경희대학교 생물학과를 거쳐 1961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6] 1959년 경희대학교에서 생물학으로 두 번째 학위를 취득했고, 홋카이도로 건너가 삿포로 대학에서 1961년에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한 논문을 썼다.[3]

부친 원홍구와는 한국전쟁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가, 1965년 자신이 인식표를 달은 북방쇠찌르레기를 북쪽의 아버지가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일본 조류학자를 통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12][11][7] 1965년, 원병오가 서울에서 검은별찌에 조류 고리표를 부착한 것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 발견되어 보고되었다.[3] 이것은 전쟁으로 헤어진 두 사람의 첫 번째 연락이었다.[3] 이듬해인 1966년 원병오는 옥스퍼드에서 열린 14회 국제 조류학회(XIV International Ornithological Congress)에서 폴란드의 조류학자 얀 피노프스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직접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16년만에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12] 그는 소련의 조류학자 레오니드 포르텐코/Портенко Леонід Олександровичuk의 도움으로 우편 검열을 피해 인편으로 부친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12][3] 하지만 분단 때문에 둘이 직접 만나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고, 원홍구는 1970년에 사망했다. 2002년에야 그는 개성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할 수 있었다.[13][9] 2002년, 원병오는 비록 부모와 형제가 이미 사망했지만, 마침내 북한 방문 허가를 받았다.[3] 이 부자의 이야기는 1984년 엔도 기미오/遠藤公男일본어의 책 《아리랑의 파랑새(アリランの青い鳥일본어)》로 출판되었고, 1993년에는 북일합작영화 《새(バード일본어)》로 영화화되었다.[14][8]

2. 2. 한국전쟁 참전과 군 복무

원병오는 경기도 개성에서 한국 유일의 조류연구가였던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12][11] 1948년 김일성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하였고, 원산농업대학을 다니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하였다.[12][11]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원병오는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중위 때 당시 3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후에 대통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12][11] 1956년 대위로 전역한 후 대한민국 농림부에 합류했다.[3]

2. 3. 학문적 경력

원병오는 경기도 개성에서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조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12][11] 1948년 김일성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하였고, 원산농업대학을 다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하였다. 전쟁 기간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하였으며, 박정희의 전속부관을 지냈다.[6] 전역 후 경희대학교 생물학과를 거쳐 1961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6]

1965년 자신이 인식표를 달은 북방쇠찌르레기를 북쪽의 아버지가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일본 조류학자를 통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12][11] 1966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14회 국제 조류학회(XIV International Ornithological Congress)에서 폴란드의 조류학자 얀 피노프스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12] 소련의 조류학자 레오니드 포르텐코/Портенко Леонід Олександровичuk의 도움으로 부친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12][3] 하지만 분단 때문에 둘이 직접 만나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고, 2002년에야 그는 개성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할 수 있었다.[13][9] 이 부자의 이야기는 1984년 엔도 기미오/遠藤公男일본어의 책 《아리랑의 파랑새/アリランの青い鳥일본어》로 출판되었고, 1992년에는 북일합작영화 《バード|새일본어》로 영화화되었다.[14][8]

미국 예일대학 대학원의 특별연구원, 경희대 문리대학장 및 교육대학원장, 경희대 부설 한국조류연구소장 및 자연사박물관장, 산림청 임업연구원,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국제조류보호회의 본부 간사 및 한국본부장을 거쳐 아시아지역 회장, 국제자연보호연맹(IUCN) 종족보존위원회(SSC) 위원 및 생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94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학술논문 150여 편과 학술서 18권을 냈다. 50여 종의 새로운 조류종을 발견했고, 이동실태나 계절적 분포를 새로 밝혀낸 것이 100여 종이나 된다.

1950년 개성시에서 태어난 원병오는 북한에서 대학 교육을 시작하여, 원산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축산학 학위를 취득한 후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었다.[2] 1959년 경희대학교에서 생물학으로 두 번째 학위를 취득했고, 홋카이도로 건너가 삿포로 대학에서 1961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에는 시드니 딜론 립리 밑에서 연구하기 위해 예일로 갔다. 1969년 5월에는 동물학 정교수가 되었다. 1978년 경희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을 설립했다.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조수보호협회 회장, 국제환경과학연구소 이사장, 국제조류학회(IOC) 이사를 역임했다. 2006년 기준으로, 원병오는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였다. 그는 2020년 4월 9일에 사망했다.[4][10]

2. 4. 아버지와의 재회

원병오는 한국 전쟁 이후 아버지 원홍구와 연락이 끊겼다가, 1965년 자신이 인식표를 달은 북방쇠찌르레기를 북쪽의 아버지가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일본 조류학자를 통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12][11] 1965년, 원병오가 서울에서 검은별찌에 조류 고리표를 부착한 것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 발견되어 보고되었다.[3] 1966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14회 국제 조류학회(XIV International Ornithological Congress)에서 폴란드의 조류학자 얀 피노프스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직접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16년만에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12] 그는 소련의 조류학자 레오니드 포르텐코/Портенко Леонід Олександровичuk의 도움으로 우편 검열을 피해 인편으로 부친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12][3] 하지만 분단 때문에 둘이 직접 만나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고, 원홍구는 1970년에 사망했다. 원병오는 2002년에야 개성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할 수 있었다.[13][9] 이 부자의 이야기는 1984년 엔도 기미오/遠藤公男일본어의 책 《아리랑의 파랑새(アリランの青い鳥일본어)》로 출판되었고, 1992년에는 북일합작영화 《새(バード일본어)》로 영화화되었다.[14][8]

2. 5. 국제 활동 및 사회 활동

원병오는 국제조류보호회의(ICBP) 본부 간사 및 한국본부장을 거쳐 아시아지역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제자연보호연맹(IUCN) 종족보존위원회(SSC) 위원 및 생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12][11] 1965년에는 자신이 인식표를 달았던 북방쇠찌르레기를 북한에 있던 아버지 원홍구가 발견하면서 부자간의 생사를 확인하게 되었다.[12][11] 이듬해인 1966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제14회 국제 조류학회(XIV International Ornithological Congress)에서 폴란드의 조류학자 얀 피노프스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소련 조류학자 레오니드 포르텐코의 도움으로 우편 검열을 피해 아버지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12]

1994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150여 편의 학술논문과 18권의 학술서를 냈고, 50여 종의 새로운 조류종을 발견했으며, 100여 종의 조류 이동실태나 계절적 분포를 새로 밝혀냈다. 한국과 러시아의 철새보호협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3]

원병오는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조수보호협회 회장, 국제환경과학연구소 이사장, 국제조류학회(IOC) 이사를 역임했다. 1978년 경희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을 설립했다.

2. 6. 사망

원병오는 2020년 4월 9일 지병으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10]

3. 가족 관계


  • 아버지 : 원홍구 (1888년 ~ 1970년 10월)
  • 장남 : 원창덕 (1960년 ~ )
  • * 며느리 : 송민영
  • 장녀 : 원영미
  • * 사위 : 최종서
  • 차녀 : 원영선
  • * 사위 : 김동건

4. 업적

5.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새는 오고 간다 - 원병오 박사의 사부곡 https://www.idaegu.c[...]
[2] 웹사이트 Erin erungen an Ornithologen, die ich kannte (4. Teil) http://m.ala-schweiz[...]
[3] 간행물 Erinnerungen an Ornithologen, die ich kannte (4. Teil) http://m.ala-schweiz[...]
[4] 웹사이트 '한국 새의 아버지' 조류학자 원병오 교수 별세 https://news.chosun.[...] 2020-04-10
[5] 웹사이트 (81)원주 원씨(原州元氏)-109,505명 http://www.seoulecon[...] 2014-09-15
[6] 웹사이트 정년퇴임한 경희대/원병오 교수(화요일에 만난 사람) https://www.hani.co.[...] 1994-09-27
[7] 웹사이트 "[구석구석 과학사](31)전쟁 중 헤어진 아들, 새의 인식표로 찾다" http://weekly.khan.c[...] 2018-05-08
[8] 웹사이트 "「새 박사」원병오교수 부자스토리 일서 영화화" https://www.joongang[...] 1993-03-05
[9] 웹사이트 성묘위해 방북하는 '새 박사' 원병오 : 문화생활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http://legacy.www.ha[...]
[10] 웹사이트 '한국 새의 아버지' 조류학자 원병오 교수 별세 https://www.chosun.c[...] 2020-04-10
[11] 뉴스 "[구석구석 과학사](31)전쟁 중 헤어진 아들, 새의 인식표로 찾다" http://weekly.khan.c[...] 2018-05-14
[12] 저널 Erinnerungen an Ornithologen, die ich kannte (4. Teil) https://www.ala-schw[...] 2023-01-27
[13] 뉴스 성묘위해 방북하는 '새 박사' 원병오 http://legacy.www.ha[...] 2002-06-21
[14] 뉴스 "「새 박사」원병오교수 부자스토리 일서 영화화"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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