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하키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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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드 하키 협회(WHA)는 1971년 설립된 북미의 프로 아이스하키 리그로,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NHL)와 경쟁하며 선수 영입, 재정 문제, NHL과의 합병 등 다양한 사건을 겪었다. WHA는 NHL의 보류 조항을 활용하지 않고 높은 연봉을 제시하여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유럽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 재정난으로 여러 팀이 해체되거나 연고지를 이전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9년 NHL과의 합병을 통해 에드먼턴 오일러스, 퀘벡 노르딕스, 위니펙 제츠, 뉴잉글랜드 웨일러스가 NHL에 합류했다. WHA는 NHL에 선수들의 급여를 높이고, 유럽 선수 영입을 활성화하는 등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트로피와 상을 수여하고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선수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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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하키 협회 | |
---|---|
일반 정보 | |
![]() | |
스포츠 | 아이스하키 |
창립일 | 1971년 9월 13일 |
해체일 | 1979년 6월 22일 |
국가 | 미국 캐나다 |
최다 우승팀 | 위니페그 제츠 (3회) |
프랑스어 명칭 | |
명칭 | Association mondiale de hockey (아소시아시옹 몽디알 드 오케) |
2. 역사적 배경
월드 하키 협회(WHA)는 미국인 프로모터 데니스 머피와 개리 데이비드슨이 설립했다. 이들은 아메리칸 농구 협회(ABA) 창립 및 초대 회장 경험이 있었다. 머피와 데이비드슨은 캐나다 투자자 빌 헌터를 영입했고, 헌터는 북미 하키 리그(NHL)에 속하지 않은 인물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그의 도움으로 WHA는 캘거리, 에드먼턴, 새스커툰, 위니펙의 지지를 얻어 캐나다 서부 4개 팀으로 구성된 리그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WHA는 NHL 계약 선수들의 이적을 유도했는데, 1972년에 계약 만료를 앞둔 선수들이 많았고, 바비 헐처럼 실제로 WHA에 가입하는 선수도 있었다. NHL은 처음에는 관망했지만, WHA가 궤도에 오르자 1972년에 뉴욕 아이스 랜더스와 애틀랜타 플레임스(캘거리 플레임스 전신)를 설립해 대응했다.
1971년 11월, WHA 가맹 12개 팀이 발표되었다. 마이애미 스크리밍 이글스처럼 NHL 팀이 없는 도시나, 로스앤젤레스 샤크스, 시카고 쿠거스, 뉴욕 레이더스 등 NHL 팀이 있지만 경쟁할 여지가 있는 도시에 팀을 배치했다. 그러나 경기장 설치 문제 등으로 데이턴 에어로스와 샌프란시스코 시호크스는 휴스턴 에어로스와 퀘벡 노르디크로, 캘거리 브론코스와 마이애미 스크리밍 이글스는 클리블랜드 크루세이더스와 필라델피아 블레이저스로 교체되었다.
1972년 1월, WHA는 버니 페어런트 등 몇몇 선수를 포함해 선수단을 구성했지만, 대부분 마이너 리그나 대학 리그 선수였다. 그러나 바비 헐의 이적으로 WHA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헐은 WHA 이적을 시카고 블랙호크스와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했으나, 위니펙 제츠가 5년간 100만 달러에 계약금 100만 달러를 제시하자 이적을 결심했다. 헐의 계약은 제리 치버스, 데릭 샌더슨, J. C. 트렘블레이 등 다른 NHL 선수들의 WHA 이적을 촉발했다.
WHA 첫 경기는 1972년10월 1일 오타와 시빅 센터에서 알버타 오일러스와 오타와 내셔널스 경기였으며, 오일러스가 7 대 4로 승리했다. 첫 시즌 우승은 뉴잉글랜드 웨일러스가 차지했고, 우승컵은 Avco World Trophy로 명명되었다.
WHA는 선수 부족, 재정 문제, 경기장 문제 등 어려움을 겪었다. 뉴욕의 경우, 아일랜더스가 나소 베테랑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을 사용해 WHA 팀은 열악한 환경에서 경기를 치렀다. 팀 소유주가 자주 바뀌고, 시즌 중 연고지를 옮기는 팀도 있었다. 선수들의 고액 연봉은 팀 재정 악화의 주요 원인이었다. 데릭 샌더슨은 WHA에서 260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스포츠계 최고 연봉이었다.
WHA는 소송으로 NHL 보류 조항을 무력화시키고, 마크 타디프, 고디 하우, 프랭크 마호블리치, 폴 헨더슨 등 선수들을 영입했다. 1974년에는 안데르스 헤드베리, 울프 닐손, 바츨라프 네도만스키 등 유럽 선수들을 영입해 리그 수준을 높였다.
1977년 12월 29일, 30일, 1978년 1월 1일에는 일본에서 위니펙 제츠와 소련 대표팀 경기가 열려 WHA를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 1. 창립
데니스 머피와 게리 데이비슨은 ABA를 설립한 경험을 바탕으로 1971년 월드 하키 협회(WHA)를 창립했다.[2] 이들은 웨스턴 하키 리그 회장인 빌 헌터를 영입하여,[3] 캘거리, 에드먼턴, 새스커툰, 위니펙 등 캐나다 서부 도시들의 지지를 얻어 리그의 기반을 다졌다.WHA는 미국 의회와 대법원에서 선수의 자유로운 이적을 막는다는 비판을 받은 NHL의 보류 조항[7]을 사용하지 않고, NHL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선수들을 영입했다.[8] 특히,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스타 선수였던 바비 헐을 영입하기 위해 10년 270만 달러 계약을 제시했는데,[9] 이는 당시 하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으며 리그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NHL은 보스턴 브루인스 선수들의 이적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시카고 블랙호크스는 바비 헐과 위니펙 제츠를 상대로 가처분 명령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WHA는 법적 조치를 통해 보류 조항의 합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10] 1972년 11월, 필라델피아의 미국 지방 법원 판사 A. 레온 히긴보텀 주니어는 NHL을 상대로 금지 명령을 내려 보류 조항의 시행을 막고 선수들이 WHA에서 뛸 수 있도록 허용했다.[11]
1971년 11월 1일, 12개의 팀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지만, 몇몇 팀은 첫 시즌 시작 전에 연고지를 옮기거나 해체되었다.
2. 2. NHL과의 경쟁
WHA는 NHL의 선수 보유 조항에 대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고, 선수들의 자유로운 이적을 가능하게 했다.[14] 이에 NHL은 WHA의 성장에 대응하여 1972년에 뉴욕 아일랜더스와 애틀랜타 플레임스(캘거리 플레임스의 전신)를 자체 리그 내에 설립했다.[12]WHA는 바비 헐을 비롯하여 제리 치버스, 데릭 샌더슨, J. C. 트렘블레이 등 NHL 스타들을 영입하며 경쟁을 심화시켰다. 특히, 바비 헐의 영입은 당시 NHL 최고 선수 중 하나였던 그의 이적으로 인해 WHA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헐은 5년 100만 달러 계약에 100만 달러의 계약금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위니펙 제츠로 이적했다.
1974-75 WHA 시즌에는 안데르스 헤드베리, 울프 닐손 (이상 스웨덴), 바츨라프 네도만스키 (체코슬로바키아) 등 유럽 선수들을 영입하여 리그 수준을 향상시키고, 북미 아이스하키의 국제화에 기여했다.[15] 특히 위니펙은 스칸디나비아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여 리그 최고의 팀이 되었으며, 헤드베리와 닐손은 바비 헐과 함께 강력한 공격 라인을 구축했다.
1977년 12월 29일, 30일, 1978년 1월 1일에는 일본에서 위니펙 제츠와 소련 대표팀의 경기가 열렸다. 이를 통해 바비 헐의 슬랩 샷, 안데르스 헤드베리의 플레이를 일본 팬들에게 선보였고, WHA가 북미와 캐나다에 존재한다는 것을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 3. 재정 문제와 합병
WHA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팀들이 많아 팀 이전 및 해체가 빈번했다. 선수 연봉 상승은 WHA 팀들의 재정 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16] 1979년, NHL과의 합병을 통해 에드먼턴 오일러스, 퀘벡 노르디크, 위니펙 제츠, 뉴잉글랜드 웨일러스(현 캐롤라이나 허리케인스)가 NHL에 합류했다. 신시내티 스팅어스와 버밍햄 불스는 해체되었다.[17]1976-77 WHA 시즌까지, WHA의 많은 프랜차이즈가 재정적 파탄 직전에 놓여 있었다. 1977년, NHL과의 합병 논의가 처음 시작되었고, 휴스턴, 신시내티, 위니펙, 뉴잉글랜드, 퀘벡, 에드먼턴이 NHL 가입을 신청했지만, NHL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1978년에 합병 논의가 재개되었지만, 휴스턴은 제외되었다. 최종 협상 과정에서 휴스턴 에어로스 구단주 케네스 슈니처는 NHL에 자신의 팀을 합병과 별개로 확장 팀으로 받아들이거나, 기존 클럽을 인수하여 휴스턴으로 이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어느 쪽도 실현되지 않았고, 에어로스는 1978년 7월 6일에 해산을 결정했다.[16]
WHA의 마지막 두 시즌에는 웨인 그레츠키, 마크 메시어, 마이크 리우트, 마이크 가트너 등 훗날 NHL에서 전설이 된 선수들이 데뷔했다.[16]
마지막 시즌이 끝날 무렵, 6개의 팀만 남았다.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급여를 지급할 수 없게 된 WHA는 1979년 초에 NHL과 합의에 도달했다. 에드먼턴 오일러스, 뉴잉글랜드 웨일러스(하트퍼드 웨일러스로 개명), 퀘벡 노르디크 및 위니펙 제츠 등 4개의 WHA 클럽이 NHL에 합류했고, 신시내티 스팅어스와 버밍햄 불스는 각각 150만달러의 보상금을 받았다. NHL은 새로운 클럽의 도착을 합병이 아닌 확대로 취급했고, WHA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4개 클럽이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로스터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NHL 팀은 WHA로 이적했던 선수들을 다시 데려올 수 있었다.[17]
WHA는 세 가지 주요 양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WHA 팀은 두 명의 골키퍼와 두 명의 스케이터를 보호하여 NHL 팀이 로스터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도록 했다. 둘째, NHL은 모든 WHA의 캐나다 팀이 이 거래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NHL은 원래 오일러스, 웨일러스, 제츠만 데려갈 의향이 있었지만, WHA는 노르디크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NHL은 이 거래를 확대로 취급할 것을 고집했지만, 각 팀의 확장 비용을 600만달러로 동결하는 데 동의했다. 이는 1970년대에 NHL에 합류한 다른 모든 팀이 지불한 수수료와 동일했다.[17]
이 거래는 1979년 3월 8일 플로리다주 키라르고에서 열린 NHL 이사회에서 투표에 부쳐졌으나 통과에 1표가 부족했다.[18] 보스턴 브루인스, 로스앤젤레스 킹스,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및 밴쿠버 커넉스가 반대표를 던졌다. 1979년 3월 22일 시카고에서 두 번째 투표가 열렸을 때, 몬트리올과 밴쿠버가 찬성표로 입장을 바꾸어 이 거래가 진행될 수 있었다. 캐나디언스의 구단주인 몰슨 양조는 에드먼턴, 퀘벡 시티, 위니펙에서 시작하여 캐나다 전역으로 확산된 대규모 보이콧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17] 몰슨의 판매가 보이콧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자, 양조 회사는 3개의 캐나다 WHA 팀의 구단주와 합의하여 몰슨이 경쟁사(및 노르디크 구단주)인 칼링 오키프를 대체하여 오일러스와 제츠의 경기장 전용 맥주 공급업체가 되도록 했다.
이 합의는 1979년 6월 22일(결정 투표 후 3개월)에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다. 그날, WHA는 해산되었고 NHL은 에드먼턴, 하트퍼드, 퀘벡 시티, 위니펙에 공식적으로 확장 프랜차이즈를 부여했다.
3. 주요 특징
월드 하키 협회(WHA)는 NHL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였다. WHA는 NHL의 보류 조항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NHL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하여 많은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NHL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유럽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WHA는 경기에서 무승부를 없애기 위해 10분간의 서든 데스 연장전을 도입했고, 파란색 퍽을 시험 사용하기도 했다.
3. 1. 선수 영입 및 경쟁
WHA는 NHL의 보류 조항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수들을 영입했다.[7] NHL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하여 바비 헐, 버니 페런트, 게리 치버스, 데릭 샌더슨, J. C. 트렘블레이, 테드 그린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8] 특히, 바비 헐은 위니펙 제츠와 10년 270만 달러 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당시 하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9]WHA는 1974-75 WHA 시즌에 NHL이 거의 무시했던 유럽 선수들을 본격적으로 영입하기 시작했는데, 스웨덴의 안데르스 헤드베리와 울프 닐손,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남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에서 막 망명한 체코 센터 바츨라프 네도만스키와 같은 스타들이 포함되었다.[15] 특히 위니펙은 스칸디나비아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여 리그 최고의 팀이 되었으며, 헤드베리와 닐손은 바비 헐과 함께 아이스하키에서 가장 강력한 포워드 라인 중 하나를 구성했다.
1972년 서미트 시리즈는 NHL 선수들로 구성된 팀 캐나다와 소련의 대결이었는데, WHA 선수들은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15] WHA는 이에 맞서 1974년 서미트 시리즈를 개최하여 바비 헐과 고디 하우에게 소련 대표팀과 경기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 시리즈는 소련이 4승 1무 3패로 승리했다.[15]
3. 2. 혁신적인 시도
WHA는 정규 시즌 경기의 무승부를 없애기 위해 10분간의 서든 데스 연장전을 도입했다. 이 연장전에서 어느 팀도 득점하지 못하면 경기는 무승부로 처리되었다. 훗날 1983-84 NHL 시즌에 NHL은 정규 시즌 무승부를 없애기 위해 5분 서든 데스 연장전을 도입했다.[20]WHA는 팬들이 퍽을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파란색 퍽을 시험 사용했다. NHL은 이 파란색 퍽을 채택하지 않았지만, 남아있는 파란색 WHA 퍽은 매우 인기 있는 수집가 아이템이 되었다.
4. WHA 팀 목록 (1972년-1979년)
팀 | 연고지 | 경기장 | 수용인원 | 리그 참가기간 | 비고 |
---|---|---|---|---|---|
앨버타 오일러스 에드먼턴 오일러스 | 앨버타주 에드먼턴 | 에드먼턴 가든 노스랜즈 콜리시엄 | 5,200명 16,839명 | 1972년~1973년 1973년~1979년 | 1979년 NHL에 가입함. |
시카고 쿠거스 | 일리노이주 시카고 | 인터내셔널 엠피시어터 랜드허스트 아이스 아레나 | 9,000명 2,000명 | 1972년~1975년 | |
신시내티 스팅거스 |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 리버프론트 콜리시엄 | 14,453명 | 1975년~1979년 | |
캘거리 브롱코스 | 앨버타주 캘거리 | 1972년 | WHA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72년에 창단이 취소되었던 팀. | ||
클리블랜드 크루세이더스 |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 클리블랜드 아레나 콜리시엄 앳 리치필드 | 9,900명 18,544명 | 1972년~1976년 | |
미네소타 파이팅 세인츠 |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 세인트폴 오디토리움 세인트폴 시빅 센터 | 5,000명 16,000명 | 1972년~1976년 1976년~1977년 | 클리블랜드 크루세이더스의 후신 |
덴버 스퍼스 오타와 시빅스 | 콜로라도주 덴버 온타리오주 오타와 | 맥니콜스 스포츠 아레나 오타와 시빅 센터 | 15,900명 9,500명 | 1975년~1976년 1976년 | |
데이턴 애로우스 | 오하이오주 데이턴 | 1972년 | WHA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72년에 창단이 취소되었던 팀. | ||
휴스턴 에어로스 | 텍사스주 휴스턴 | 샘 휴스턴 콜리시엄 더 슈미트 | 9,200명 15,242명 | 1972년~1978년 | |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 |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 마켓 스퀘어 아레나 | 15,993명 | 1974년~1978년 | |
로스앤젤레스 샤크스 미시간 스택스 볼티모어 블레이즈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스포츠 아레나 롱비치 스포츠 아레나 코보 아레나 볼티모어 시빅 센터 | 14,546명 11,200명 12,000명 14,000명 | 1972년~1974년 1974년~1975년 1975년 | |
뉴잉글랜드 훼일러스 | 뉴잉글랜드 | 보스턴 아레나 보스턴 가든 더 빅 E 콜리시엄 하트포드 시빅 센터 스프링필드 시빅 센터 | 4,666명 14,448명 6,000명 15,635명 6,866명 | 1972년~1979년 | 1979년 NHL에 가입함. 현 캐롤라이나 허리케인스의 전신 |
뉴욕 레이더스 뉴욕 골든 블레이즈 저지 나이츠 | 뉴욕주 뉴욕 뉴저지주 체리 힐 | 매디슨 스퀘어 가든 체리 힐 아레나 | 18,006명 4,416명 | 1972년~1973년 1973년~1974년 | |
샌디에이고 매리너스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 샌디에이고 스포츠 아레나 | 12,920명 | 1974년~1977년 | |
오타와 내셔널스 토론토 토로스 버밍햄 불스 | 온타리오주 오타와 온타리오주 토론토 앨라배마주 버밍햄 | 오타와 시빅 센터 메이플 리프 가든 바시티 아레나 버밍햄-제퍼슨 컨벤션 콤플렉스 | 9,500명 16,316명 4,116명 19,000명 | 1972년~1973년 1973년~1976년 1976년~1979년 | |
마이애미 스크리밍 이글스 |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 1972년 | WHA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72년에 창단이 취소되었던 팀. | ||
필라델피아 블레이저스 벤쿠버 블레이저스 캘거리 카보이스 |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 앨버타주 캘거리 | 필라델피아 시빅 센터 퍼시픽 콜리시엄 스템피드 코랄 | 9,600명 15,570명 6,450명 | 1972년~1973년 1973년~1975년 1975년~1977년 | |
피닉스 로드러너스 | 애리조나주 피닉스 | 애리조나 베터런스 메모리얼 콜리시엄 | 13,730명 | 1974년~1977년 | |
샌프란시스코 샤크스 |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1972년 | WHA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72년에 창단이 취소되었던 팀. | ||
퀘벡 노르딕스 | 퀘벡주 퀘벡 | 콜로세 데 퀘벡 | 15,176명 | 1972년~1979년 | 1979년 NHL에 가입함. 현 콜로라도 애벌랜치의 전신 |
위니펙 제츠 | 매니토바주 위니펙 | 위니펙 아레나 | 13,985명 | 1972년~1979년 | 1979년 NHL에 가입함. 현 애리조나 카이오츠의 전신 |
4. 1. WHA 올스타전
올스타 4, 디나모 모스크바 2올스타 4, 디나모 모스크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