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웨인 요새 조약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웨인 요새 조약은 1809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미국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뜻과 달리 분열과 정복 전략을 사용하여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포타와토미족, 델라웨어족 등에게 보조금과 직접적인 지급을 약속하며 토지 매각에 동의를 얻어, 미국이 300만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확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약 체결 이후 테쿰세는 조약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저항했고, 이는 테쿰세의 전쟁과 티페카누 전투로 이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09년 9월 - 프레드릭스함 조약
    프레드릭스함 조약은 1809년 스웨덴과 러시아 간에 체결되어 스웨덴이 핀란드 전역과 올란드 제도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핀란드는 자치권을 부여받는 핀란드 대공국으로 구성되었다.
웨인 요새 조약
조약 정보
이름웨인 요새 조약
다른 이름1809년 웨인 요새 조약
종류토지 구매
조약 체결 정보
초안 작성일해당사항 없음
서명일1809년 9월 30일
서명 장소인디애나 웨인 요새
발효일원주민에게 돈과 물품 이전; 원주민이 구매한 땅에 미국인의 정착을 허용; 킥카푸족과 위아족의 추후 수락에 따라 결정됨.
만료일해당사항 없음
서명 당사자
서명 당사자윌리엄 헨리 해리슨
원주민 지도자들
참여 국가
델라웨어족
포타와토미족
마이애미족
마이애미의 이리 강 밴드
위아족 (1809년 11월 서명)
킥카푸족 (1810년 3월 서명)
보관 기관해당사항 없음
언어영어
웹사이트해당사항 없음
위키소스해당사항 없음
지도
인디애나 인디언 조약
조약선은 대략적인 것임.

2. 협상 과정

윌리엄 헨리 해리슨


1809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백인 정착민들을 위해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하고자 웨인 요새 조약을 추진했다. 마이애미족, 위아족, 킥푸족은 와바시 강 주변의 토지 매각에 강력히 반대했다.[1] 해리슨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의사와는 달리, 먼저 토지 매각에 동의하는 부족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반대하는 부족들에게 영향을 주는 전략을 택했다.

1809년 9월, 해리슨은 포타와토미족, 델라웨어족, 일 리버스족, 마이애미족을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 회담에 초대했다. 그는 다른 토지를 양도할 경우 부족들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직접 지급을 약속하며 협상을 진행했다.[2]

마이애미족은 그린빌 조약을 근거로 와바시 강 주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조약에 반대했다. 그들은 위아족 지도자들이 협상에 불참한 것과, 토지 가격이 에이커 단위가 아닌 구획 단위로 지불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해리슨은 위아족과 다른 부족들의 승인을 조건으로 조약을 수락하겠다고 했지만, 에이커 단위 구매는 거부했다. 그는 부족들이 구획 단위로 판매하는 것이 더 유리하며, 이는 미국인들이 좋은 토지만 구매하고 부족들에게는 살기 어려운 땅만 남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1]

2주간의 협상 끝에 포타와토미족 지도자들은 마이애미족에게 조약 수락을 설득했다. 결국 1809년 9월 29일, 웨인 요새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은 빈센스 북쪽 와바시 강을 따라 12000km2 이상의 토지를 확보했다.[1] 이후 해리슨은 마이애미족 추장 파칸의 도움과 위아족에 대한 대규모 보조금 제공을 통해 위아족의 동의를 얻었다. 또한 킥푸족에게도 보조금을 제안하여 위아족이 킥푸족 지도자들을 압박하게 만들어 결국 조약을 수락하게 했다. 1810년 봄, 해리슨은 모든 협상을 완료하고 조약을 최종 체결했다.[3]

2. 1. 해리슨의 술 제공 논란

해리슨은 인디언에게 술을 판매하거나 유통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1809년 8월 23일, 그는 인디애나주 빈센스에서 약 48.28km 이내의 인디언들에게 술을 유통하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4] 그러나 조약 협상 과정에서 포타와토미족, 델라웨어족, 마이애미족 협상가들에게 대규모로 위스키를 제공하여 이러한 원칙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았다.[4] 역사학자 로버트 M. 오웬스에 따르면, 포트 웨인에서 협상을 위해 모인 1390명의 인디언들은 1809년 9월과 10월 동안 218갤런의 위스키를 소비했다.[4]

3. 조약 내용

이 조약은 미국 대중문화에서 "1809년 10시 선 조약"과 "12마일 선 조약"이라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 "1809년 10시 선 조약"이라는 별명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측량 장비를 신뢰하지 않아 오전 10시에 창을 던져 그림자가 드리운 곳을 조약선으로 정했다는 전통에서 유래되었다. "12마일 선 조약"은 그린빌 조약을 기준으로, 이 조약과 평행하게 서쪽으로 12마일 더 떨어진 곳에 새로운 '선'을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1]

1809년, 해리슨은 백인 정착민들을 위해 더 많은 토지를 개방하고자 조약을 추진했다. 와바시 강 주변의 토지 매각에 마이애미족, 위아족, 킥푸족이 "격렬하게" 반대했다.[1] 해리슨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뜻과는 반대로, 먼저 토지 매각에 동의하는 부족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반대하는 부족들에게 영향을 주기로 결정했다. 1809년 9월, 해리슨은 포타와토미족, 델라웨어족, 일 리버스족, 마이애미족을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 회담에 초대하고, 협상 과정에서 부족들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직접적인 지급을 약속했다.[2]

마이애미족은 조약에 반대하며 그린빌 조약 사본을 제시, 와바시 강 주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하는 조항을 강조했다. 또한 위아족 지도자들이 토지 매각의 주요 거주자임에도 협상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우려했다. 마이애미족은 새로운 토지 판매가 에이커 단위가 아닌 구획 단위로 지불되기를 원했다. 해리슨은 조약 수락을 위아족과 다른 부족들의 승인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지만, 에이커 단위 구매는 거부하며, 부족들이 구획 단위로 판매하는 것이 더 낫다고 반박했다. 이는 미국인들이 가장 좋은 토지만 에이커 단위로 구매하여 부족들에게 살기 어려운 빈약한 토지만 남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1]

2주간의 협상 끝에 포타와토미족 지도자들은 마이애미족에게 조약 수락을 설득했다. 결국 1809년 9월 29일, 포트 웨인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은 빈센스 북쪽 와바시 강을 따라 약 12000km2의 토지를 확보했다.[1] 해리슨은 마이애미족 추장 파칸의 도움과 위아족에 대한 대규모 보조금을 통해 그해 겨울 늦게 위아족의 수락을 얻었다. 킥푸족은 프로페타운의 쇼니족과 밀접한 관계여서 설득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해리슨은 킥푸족도 조약을 수락하면 위아족에게 보조금을 인상하겠다고 제안하여, 위아족이 킥푸족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해 결국 수락을 얻어냈다. 1810년 봄, 해리슨은 협상을 완료하고 조약을 최종 체결했다.[3]

해리슨은 인디언에게 술을 판매하거나 유통하는 것을 반대했고,[4] 1809년 8월 23일 인디애나주 빈센스에서 30마일 이내 인디언들에게 술 유통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협상 과정에서 이 원칙을 포기하고 포타와토미족, 델라웨어족, 마이애미족 협상가들에게 대규모로 위스키를 제공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M. 오웬스에 따르면, 포트 웨인에서 협상을 위해 모인 1390명의 인디언들은 1809년 9월과 10월 동안 218gal의 위스키를 소비했다.[4]

4. 조약의 결과

테쿰세는 웨인 요새 조약에 반발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게 항의했다. 그는 조약이 무효화되지 않으면 영국과 동맹을 맺겠다고 경고했다.[8] 결국 상황이 악화되어 테쿰세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티페카누 전투가 발생했다.[9][10] 이 사건은 해리슨이 18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1. 테쿰세의 저항과 전쟁

테쿰세는 웨인 요새 조약에서 다루는 지역 바로 북쪽에 거주하는 분리된 쇼니족 집단의 강력한 지도자였다. 그는 조약에 서명한 원주민 지도자들이 다른 원주민들과 공유하는 땅을 정당하게 판매할 권리가 없다며 조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810년 8월, 그는 400명의 무장한 전사들을 이끌고 여러 부족에서 나와 와바시 강을 따라 내려가 빈센스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만났다. 테쿰세는 포트웨인 조약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해리슨에게 무효화할 것을 요청했고, 미국인들이 조약에서 판매된 땅에 정착하려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테쿰세는 해리슨에게 조약의 조건을 이행할 경우 조약에 서명한 추장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음을 인정했다.[5][6] 해리슨은 테쿰세에게 마이애미족이 땅의 소유자이며 원한다면 판매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해리슨은 또한 모든 인디언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며 각 국가가 미국과 별도의 협상을 할 수 있다는 테쿰세의 주장을 거부했다.[7]

테쿰세는 조약이 무효화되지 않으면 영국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해리슨에게 알렸다.[8]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결국 그해 말 테쿰세의 추종자들과 미국 정착민들 사이에 적대 행위가 발발했다. 긴장은 계속 고조되어 테쿰세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티페카누 전투로 이어졌다.[9][10] 이 사건과 그 여파는 해리슨의 성공적인 18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