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관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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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관은 위나라의 고위 관리 위기의 아들로, 서진 시대의 중요한 관료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촉나라 정벌에서 등애의 부관으로 활약했고, 종회의 난을 겪으며 등애를 체포, 살해하는 과정에서 논란을 겪었다. 서진 건국 후 사마염의 신임을 받아 여러 직책을 역임하며 청렴한 정치를 펼쳤으나, 혜제 시대에 사마위와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사마량과 함께 살해당했다. 이후 난릉군공으로 추증되었으며, 서예에도 능하여 초서의 대가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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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년 출생 - 서정 (동오)
서정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학자이자 관료로,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태상경을 지냈고, 《예장열사전》, 《효경묵주》, 《모시보》, 《통력》, 《삼오력기》 등의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삼오력기》는 반고의 천지 창조 신화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 서진의 태보 - 왕상 (휴징)
왕상(王祥)은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한 관리로, 계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교육 정책 시행 및 산적 소탕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조위와 서진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다가 85세로 사망하였다. - 하동 위씨 - 위삭
위삭은 중국 서진 시대의 여성 서예가로, 왕희지에게 서예를 가르쳤으며, 자연의 형태를 모방한 서예 스타일을 개발하고 『필진도』를 저술했다.
위관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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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위관 |
한자 표기 | 衛瓘 |
자 | 백옥 (伯玉) |
시호 | 성 (成) |
출생 | 220년 |
사망 | 291년 7월 (71세) |
출생지 | 샤현, 산시 성 |
아버지 | 위기 |
자녀 | 위항 위월 위이 위선 딸 1명 |
관직 경력 | |
관직 | 녹상서사 (錄尚書事) |
임기 | 291년 4월 말 – 291년 7월 25일 |
군주 | 진 혜제 |
관직 (태보) | 태보 (太保) |
임기 (태보) | 290년 2월 5일 – 291년 7월 25일 |
군주 (태보) | 진 무제 / 진 혜제 |
관직 (태자소부) | 태자소부 (太子少傅) |
임기 (태자소부) | ?– 290년 |
관직 (사공) | 사공 (司空) |
임기 (사공) | 283년– 290년 2월 5일 |
관직 (시중) | 시중 (侍中) |
임기 (시중) | 278년–290년 |
관직 (상서령) | 상서령 (尚書令) |
임기 (상서령) | 278년–290년 |
관직 (오환교위) | 오환교위 (烏桓校尉) |
임기 (오환교위) | 271년–278년 |
관직 (유주자사) | 유주자사 (幽州刺史) |
임기 (유주자사) | 271년–278년 |
관직 (정북대장군) | 정북대장군 (征北大將軍) |
임기 (정북대장군) | 271년–278년 |
관직 (청주목) | 청주목 (青州牧) |
임기 (청주목) | 269년–271년 |
관직 (정동대장군) | 정동대장군 (征東大將軍) |
임기 (정동대장군) | 269년–271년 |
관직 (정동장군) | 정동장군 (征東將軍) |
임기 (정동장군) | 266년 2월–269년 |
군주 (정동장군) | 진 무제 |
기타 정보 | |
작위 | 난릉공 (蘭陵公) |
관계 | 위삭 (손녀) |
2. 생애
위관(衛瓘)은 하동군 안읍현(安邑縣) 출신으로, 아버지 위기(衛覬)는 위나라의 고위 관리였다. 위관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관직에 나아갔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정위경(廷尉卿)까지 승진했다. 그는 논리적 사고에 뛰어나 명성을 얻었다.
263년, 위나라 섭정 사마소는 종회와 등애에게 촉한을 공격하게 하였고, 위관은 등애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위나라의 촉 정복 이후, 종회는 종회의 난을 계획하며 등애를 모함했고, 사마소의 명령으로 위관은 등애를 체포했다. 이후 종회가 반란을 일으키자, 위관은 병을 핑계로 경계를 늦춘 뒤 병사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등애가 보복할 것을 두려워하여 등애를 추적하여 살해했고,[1] 두예가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사과했다.[1]
265년, 사마소 사후 사마염(무제)이 섭정 자리를 계승했다. 266년, 사마염은 조위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건국했다. 무제 재위 기간 위관은 여러 요직을 거치며 중요한 관료이자 장군으로 활동했다. 그는 문관 채용 시스템 개혁을 시도했지만, 무제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2]
위관은 무제의 태자 지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몇 안 되는 관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발달 장애가 있던 사마충을 태자로 삼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사마충의 아내 가남풍의 계략으로 무제는 사마충을 태자로 확정했다.
290년 무제 사후, 양준이 섭정을 맡았다가 291년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이후 위관은 사마량과 함께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5] 가후의 간섭과 사마위의 난폭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가후와 사마위의 모함으로 위관과 사마량은 체포되어 살해되었고,[5] 위관은 아홉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4]
가후는 사마위의 권력을 우려하여 그를 처형한 후, 위관을 사후 복권시키고 공작 지위를 복귀시켰다.[4] 위관은 초서에 뛰어난 당대 유명한 서예가로, 삭정과 함께 "일대이절(一臺二絶)"로 불렸다.[6]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위관(衛瓘)은 산시성 샤현 서쪽에 위치한 하동군 안읍현(安邑縣)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위기(衛覬, 168년 ~ 229년)는 위나라의 고위 관리이자 후작이었다. 위관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성장한 후 관리가 되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계속 승진했다. 조환이 황제가 된 후에는 정위경(廷尉卿)이 되었으며, 논리적 사고의 강점으로 명성을 얻었다.10세 때 아버지 위개(衛覬)를 여의고 어머니 진씨에게 지극히 효성을 다했다. 후에 아버지의 작위인 문향후(閿郷侯)를 계승했고, 상서랑에 임명되었다. 당시 위나라는 법이 엄하고 가혹했기에, 진씨는 위관(衛瓘)의 신변을 걱정했다. 그래서 위관은 스스로 청하여 통사랑으로 옮겼고, 중서랑으로 옮겼다. 당시 조상을 비롯한 권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위관은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기에 부하로부터 크게 존경받았으며, 춘추 시대 위나라의 경(卿)이었던 녕유(녕무자)에 비유되었다. 10년 동안 중서랑의 직무를 수행하여 그 솜씨를 칭찬받았다. 그 후, 산기상시로 승진했다.[2]
경원 원년(260년), 조환이 즉위하자, 위관은 시중을 제수받고, 지절을 받아 하북의 위로에 나섰다. 그 공적으로 식읍이 증가했다. 수년 후에는 정위경으로 옮겼다. 위관은 법리에 밝았고, 소송의 재결을 할 때 사소한 안건도 중대한 사안도 정으로써 대응했다.[2]
2. 2. 촉한 정벌
사마소가 촉한 정벌군을 일으킬 때, 위나라 정위(廷尉)였던 위관은 종회를 보좌하는 행진서군사(行鎭西軍司)가 되어 종회의 병사들을 감독하였다.[1]263년, 등애의 활약으로 촉나라가 멸망한 후, 위관은 종회 등과 함께 사마소에게 등애를 모함하였다.[1] 사마소가 종회에게 등애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종회는 위관에게 등애를 체포하게 하였다.[1] 이는 위관이 실패하고 등애에게 죽임을 당하여 등애에 대한 자신의 고소를 더욱 확정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2]
위관은 성도로 가서 등애의 부하 장수들에게 조서를 받들어 등애를 체포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밝혔다.[1] 이를 본 장수들은 모두 등애를 떠나 위관에게 왔고, 등애는 아들 등충과 함께 새벽녘에 위관에게 붙잡혔다.[1]
등애를 내심 두려워하던 종회는 강유와 함께 익주에서 모반하려 했다.[1] 그러나 호열의 아들 호연의 공격을 받고 종회와 강유 모두 죽임을 당했다.[1]
위관은 자신이 등애를 모함한 것이 밝혀지면 해를 당할 것을 우려해 전속을 부추겨 등애 부자를 죽이게 했다.[1] 당시 동료였던 두예는 위관의 행동을 비판했으며, 위관은 직접 두예를 찾아가 사과하였다.[1]
2. 3. 서진 건국 후
촉나라 멸망 후, 위관은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임명되었다.[5] 271년, 사마염은 위관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으나, 가충의 아내 곽괴(郭槐)가 양황후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어 가남풍을 태자비로 만들었다.276년, 정북장군(征北將軍) 겸 유주자사였던 위관은 선비족 탁발사막한(拓拔沙漠汗)이 진나라에 왔다가 돌아갈 때, 조정에 그를 붙들어 놓게 하고 선비족 유력 인사들에게 금품을 주어 이간질했다. 탁발사막한은 다음 해가 되어서야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미 내분이 일어난 상태였고 선비족 대인(大人)들에게 모함을 받아 죽었다. 이후에도 정쟁이 계속되어 선비족은 한동안 쇠퇴했다.
278년, 위관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사마염이 베푼 잔치에서 앞으로 나아가 옥좌를 어루만지면서 이 자리가 애석해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사마염은 뜻을 알아차렸으나 모른 척했다. 훗날 이 일은 가충 부녀에게 알려져 미움을 사게 되었다.
282년, 위관은 사공(司空)으로 승진했다. 284년에는 구품 제도의 폐해가 문제가 되자, 여남왕(汝南王) 사마량과 함께 상소를 올려 제도 폐지를 주장하였다.
290년, 번창공주(樊昌公主)와 결혼한 아들 위선(衛宣)이 술을 좋아하고 과실이 많아, 양준은 공주를 다시 궐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관은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청했고, 이 때문에 태보(太保)로 옮겨진 채 집에서 머물렀다.
265년 사마소 사후, 아들 사마염이 섭정 자리를 계승했다. 266년 2월, 사마염은 조위 황제 조환에게서 황위를 찬탈, 조위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건국했다. 무제 재위 기간 동안 위관은 여러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며 중요한 관료이자 장군으로 활동, 형제 중 한 명과 아들 중 한 명이 후작 작위를 받았다.
위관은 문관 채용 시스템 개혁을 시도, 문관 시험관(中正중국어)이 관료 평가에 덜 관여하고 실제 업무 수행 능력이 더 중요해지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그러나 무제는 제안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위관은 무제의 태자 지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몇 안 되는 관료 중 한 명이었다. 사마충은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위관이 사마충을 태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로 말하자, 무제는 사마충에게 몇 가지 질문을 보냈다. 사마충의 아내 가남풍이 다른 사람을 시켜 적절히 답변하게 하자, 무제는 기뻐하며 위관에게 답변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었고, 위관은 매우 당황했다.
290년 5월, 무제 사후 양준은 황태후 양씨의 아버지로서 황위에 오른 사마충의 섭정을 맡았다. 291년 4월, 양준은 가후의 쿠데타로 축출, 살해되었다. 위관은 5월에 혜제의 큰아버지 사마량과 섭정으로 임명되었다.[5] 위관과 사마량은 정부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가후는 계속 간섭했다. 혜제의 이복 형제 사마위 (양준 쿠데타에 깊이 관여)의 난폭함을 우려, 군사 지휘권 박탈을 시도했지만, 사마위는 가후를 설득하여 지휘권을 유지했다. 이후 사마위의 보좌관 기성(岐盛중국어)과 공손홍()은 가후에게 사마량과 위관이 황제 폐위를 꾀한다고 거짓 보고했다. 가후는 무제 재위 기간 위관의 태자 교체 제안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정부에 대한 직접 통제를 원해 두 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
291년 여름, 가후는 혜제에게 사마위를 시켜 사마량과 위관을 해임하라는 칙령을 내리게 했다. 군대는 사마량과 위관의 저택을 포위했고, 부하들은 저항을 권했지만 거부하고 체포되었다. 칙령과 달리 사마량은 후계자 사마거()와 함께, 위관은 아들 및 손자 아홉 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가후는 사마위의 권력을 우려, 칙령이 사마위에 의해 위조되었다고 거짓 선언하고 처형한 후, 위관을 사후 복권, 공작 지위를 복귀시켰다.
태시 원년(265년), 조위에서 선양을 받아 서진이 성립되자, 위관은 사마염에게 크게 신임받아 정동장군으로 전임되었고, 재양공으로 진봉되었다. 태시 5년(269년)에는 도독 청주 제군사, 청주자사, 정동대장군, 청주목에 임명되었고, 태시 7년(271년)에는 정북대장군, 도독 유주 제군사, 유주자사, 호오환교위에 임명되었다.
당시 유주 동쪽에는 오환이, 서쪽에는 선비탁발부의 탁발력미가 세력을 떨치며 변방을 약탈했다. 위관은 오환과 탁발력미를 대립시켜 오환을 진에 귀순시켰다. 또한 탁발부 세력 약화를 위해 여러 대인(유력자)에게 뇌물을 보내 이간계를 펼쳤고, 탁발력미의 아들 탁발사막한을 참소하여 함정에 빠뜨렸다. 탁발력미가 이를 믿자, 대인들은 탁발력미의 명이라 속여 사막한을 주살했다.
함녕 3년(277년), 탁발력미가 병을 앓자 오환왕 고현에게 군사를 맡겼는데, 고현 또한 위관에게 뇌물을 받아 탁발부 대인들에게 "가한(탁발력미)께서는 너희들이 자식을 죽인 것을 원망하여 모든 대인의 장남을 죽이라고 명하셨다"라고 말했다. 대인들은 이를 믿고 흩어졌고, 탁발부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함녕 4년(278년) 낙양으로 소환, 상서령, 시중에 임명되었다.
2. 4. 죽음
291년 위관은 사마량과 함께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가 난폭한 것을 좋지 않게 보고 병권을 빼앗으려 했는데, 이 때문에 사마위는 위관을 원망하게 되었다.[5]결국 사마위의 부하 기성(岐盛)이 위관과 사마량이 사마충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모함했으며, 옛 일 때문에 위관을 미워하던 가남풍은 사마충을 움직여 두 사람을 파면하는 조서를 사마위에게 내리게 했다. 이를 구실삼은 사마위는 군사를 이끌고 위관과 사마량을 죽였으며, 위관의 아들들과 손자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가남풍은 혜제에게 조서를 만들어 사마위에게 "이윤·곽광을 모방하여 황제 폐립을 꾀하고 있다"라고 알렸다. 사마위는 자신이 통솔하는 북군을 움직여, 사마량과 위관 토벌을 내걸고 거병하여, 위관의 저택을 포위했다. 위관의 측근은 조서의 진위를 의심하여, 상소하여 확인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위관은 따르지 않고 체포를 받아들였다. 과거 위관이 사공이 되었을 때, 장하독 영회는 죄를 범하여 벌을 받았고, 사공부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 영회는 이때 사마하 군대에 속해 있었고,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 위해 위관과 그의 아들 위항·위악·위예와 손자 등 9명을 살해했다.
얼마 안 가 가남풍이 사마위마저 제거하자, 위관의 딸은 아버지를 신원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이 청이 받아들여져 죽은 위관을 난릉군공(蘭陵郡公)에 봉하고 '''성'''(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 5. 사후
사마충이 즉위하자, 가남풍은 양준과 그의 딸 양태후를 모두 제거하고 자신이 정사를 농단했다.[4]291년, 사마위가 난폭한 것을 좋지 않게 보고 병권을 빼앗으려 한 것 때문에 사마위는 위관을 원망하게 되었다.[4]
결국 사마위의 부하 기성(岐盛)이 위관과 사마량이 사마충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모함했으며, 옛 일 때문에 위관을 미워하던 가남풍은 사마충을 움직여 두 사람을 파면하는 조서를 사마위에게 내리게 했다.[4] 이를 구실삼은 사마위는 군사를 이끌고 위관과 사마량을 죽였으며, 위관의 아들들과 손자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4]
얼마 안 가 가남풍이 사마위마저 제거하자, 위관의 딸은 아버지를 신원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4] 이 청이 받아들여져 죽은 위관을 난릉군공(蘭陵郡公)에 봉하고 성공(成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4]
3. 평가
등애가 강유로 진격했을 때, 전속이 진격하려 하지 않자 죽이려 했지만, 나중에 용서했다. 위관은 전속을 파견할 때 "강유의 굴욕을 보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 진서장사(鎮西長史) 두예는 등애를 존경했기 때문에, "백옥(위관의 자)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몸은 명사에 속하고, 높은 지위와 인망을 갖추었으면서도,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고, 정의로 부하를 통솔하지도 못한다. 이는 소인(器量이 작은 인간) 주제에 군자의 껍데기를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 책무를 다하려는 것인가"라고 말했다.[1] 위관은 이 발언을 듣고 수레 준비도 기다리지 않고 달려가 사과했다.[1] 《진서》에는 위관이 후에 주살된 것은 두예의 발언대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두예의 발언은 첫 구절이 《좌씨전》과 똑같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좌씨전》을 연상시키는 내용과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1]
4. 서예
위관은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로, 초서의 대가였다. 그는 동료인 삭정과 함께 서예 실력으로 인해 "일대이절(一臺二絶)"로 불렸다.[6] 이 둘은 또한 동한 시대의 서예가 장지에 비유되었으며, 당시에는 "위관은 백영의 근(筋)을 얻고, 삭정은 백영의 살(肉)을 얻었다"는 말이 있었다.[7] 위관의 손녀인 위부인 또한 유명한 서예가로, 왕희지의 스승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5. 가족 관계
위관의 가족으로는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손녀 위부인이 있으며, 왕희지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7]
아들로는 위밀, 위항, 위선, 위악, 위예를 포함하여 최소 6명이 있었고, 딸은 적어도 한 명이 있었다. 손자는 위조, 위개 등이 있었으며, 현손은 위숭이다. 일설에 따르면 서예가 위삭은 위항의 친척인 위전의 딸이라고 한다.
구분 | 내용 |
---|---|
아들 | 위밀, 위항, 위선, 위악, 위예 외 최소 1명 |
딸 | 최소 1명 |
손자 | 위조, 위개 외 수 명 |
현손 | 위숭 |
참조
[1]
서적
Wei Guan's biography in Book of Jin
Book of Jin
[2]
서적
Emperor Wu's biography in Book of Jin
Book of Jin
[3]
서적
Emperor Hui's biography in Book of Jin
Jin Shu
291-07-25
[4]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Sanguozhi
[5]
문서
[6]
서적
Jin Shu
Jin Shu
[7]
서적
Jin Shu
Ji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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