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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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페티는 1623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의학, 경제학, 통계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아일랜드에서 토지 측량을 수행하며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페티는 경제학에 통계적 방법을 도입하고 분업, 조세, 화폐 등의 개념을 제시하며, 국민 소득과 부에 대한 최초의 엄밀한 평가를 시도했다. 그는 또한 왕립 학회의 창립 멤버로, 통계 분석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애덤 스미스, 칼 마르크스 등 후대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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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페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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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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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존칭 | 경 (Sir) |
이름 | 윌리엄 페티 |
존칭 접미사 | FRS (왕립 학회 회원) |
출생일 | 1623년 5월 26일 |
출생지 | 롬지, 햄프셔, 잉글랜드 |
사망일 | 1687년 12월 16일 (64세) |
사망지 | 런던, 잉글랜드 |
학문 분야 및 경력 | |
학파 | 고전 경제학 |
주요 관심사 | 정치 철학 윤리학 경제학 의학 |
주요 사상 | 분업 재정 이론 화폐 이론 국민 소득 회계 경제 통계 |
2. 생애
2. 1. 초기 생애 (1623-1640)
윌리엄 페티는 1623년 햄프셔 럼지에서 직조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에 형과 누나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장남으로 자랐다.[26] 어릴적부터 조숙하여 문법 학교에 다니면서 라틴어·그리스어를 배웠다.[26]1637년, 14세 때 잉글랜드 상선의 수부가 되었지만, 항해 중 다리 부상으로 프랑스의 노르망디 캉에 남겨졌다.[26][27] 캉에 있는 예수회 칼리지에서 교양을 배웠으며, 1640년경 잉글랜드로 귀국했다.[27] 캉에서 공부할때 라틴어로 지원하여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1년후 영국으로 돌아왔을때,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수학 및 천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4]
2. 2. 네덜란드 유학 (1643-1646)
1643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위트레흐트, 레이덴,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27][28][29][30] 1644년 레이덴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여 프란시스쿠스 실비우스 교수에게 해부학과 의화학을 배웠다.[31]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존 펠 교수에게 대수학을 배우고 그의 조수로 일하며, 롱고몬타누스와 펠이 논쟁을 벌였던 원적 문제에 대해 펠의 반론을 르네 데카르트 등 유럽 각지의 학자들에게 보냈다.[31]1645년 11월경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펠의 소개로 토머스 홉스와 친분을 맺고, 마랭 메르센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과학 연구 서클에 참가했다. 메르센, 홉스, 데카르트, 질 드 로베르발, 클로드 미들주 등과 교류했으며, 홉스와는 광학 및 해부학 분야에서 협력했고, 수학적 논증을 중시하는 자세에 큰 영향을 받았다.[32][33]
2. 3. 잉글랜드 귀국 및 옥스퍼드 시절 (1646-1652)
1646년 세 번째 옥스퍼드 공방전에서 수비대가 의회군에 항복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윌리엄 페티는 런던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적 실험 방법에 영향을 받은 과학 협회(왕립 학회의 전신)에 참여했다.[34] 롬지에 돌아와서는 아버지가 사망하여(1644년) 직조업을 계승했지만, 발명품(복사기) 판매를 위해 런던으로 옮겼다. 판매는 실패했지만, 하트립을 중심으로 하는 런던 과학 협회에서 활동했다.[34]1648년부터 1649년에 걸쳐 과학 협회의 일부 사람들이 옥스퍼드 대학교로 옮겨가자, 페티도 의학 박사 학위를 얻기 위해 대학으로 옮겼다.[35] 옥스퍼드 대학교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왕당파의 거점이었지만, 내전이 끝난 후 토머스 페어팩스가 이끄는 의회파 뉴 모델 군이 1647년부터 1651년까지 대학 개편을 단행했다. 페티는 종교에 관대했고, 그란트와 옥스퍼드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그란트의 매형 토머스 켈시 등과 친밀했기 때문에 켈시의 추천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 받아들여졌다.[35]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페티는 브래스노스 칼리지의 펠로우십을 제안받고 의학을 공부했다.[5] 그는 보일과 친분을 맺고, 옥스퍼드 철학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 1649년 3월에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36] 1651년 1월에는 브레이즈노즈 칼리지의 해부학 강좌 교수가 되었다.[5][6] 또한 브레이즈노즈 칼리지 부학장이 되었고,[36] 그란트의 주선으로 그레샴 칼리지의 음악 교수가 되었다.[8]

토머스 윌리스와 함께 교수형에서 살아남은 앤 그린을 치료하여 명성을 얻었다.[7] 그녀의 생존은 신의 개입으로 여겨져 사면되었으며, 이 사건은 페티의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7] 옥스퍼드에서의 과학 협회 모임은 처음에는 페티의 숙소에서 열렸다.[36][37]
2. 4. 아일랜드 활동 (1652-1685)
1651년까지 페티는 브래스노즈 칼리지의 해부학 강사였다.[5][6] 1652년 9월, 잉글랜드 공화국의 아일랜드 파견군 군의총감으로 도해하여 이후 7년간 아일랜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38] 전년 가을에 아일랜드 총독 헨리 아이어턴의 시의로 임명되었으나, 아이어턴이 급사하고 후임 아일랜드 총독 찰스 플리트우드 장군의 시의가 되었고, 12월 군의총감 임명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교를 떠나 크롬웰의 아일랜드 침략으로 아일랜드 동맹 전쟁영어이 진압되어 소란스러웠던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아일랜드 군대와 함께 군의관으로 여행했으며, 크롬웰의 사위인 찰스 플리트우드에게 책임을 졌다.1653년 8월부터 실시되고 있던 측량총감 벤자민 워즐리의 측량 실시 방법을 비판하고, 1654년 9월에 자신의 지휘 하에 측량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채택되어 1655년 2월부터 페티에 의한 과학적인 측량(Down Survey영어)이 실시되었다[38]。 페티가 아일랜드로 건너간 이유는, 후에 본인이 회상록에서 아일랜드의 토지 측량과 관련하여 저술했으며, 그것들을 종합하면 사회적 명성과 학문적인 동기, 즉 토지 측량이라는 어려움에 도전함으로써 자연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실험 방법을 사회 문제적 영역으로 확대하고 지식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다고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아일랜드의 지배 체제를 둘러싼 대립이 존재하여, 군의 장교가 신자가 되어 있던 침례교 등 급진파와 지방의 협력을 구하는 온건파의 대립이 측량에도 미치고, 워즐리는 전자를, 페티는 후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측량의 교체는 온건파의 의향이 있었다[39][40]。
몰수된 반역자의 토지는 측량 결과에 따라 파견군에 출자·참가한 각 계층에 분배되었고, 페티는 1656년 5월에 몰수지 분배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아일랜드의 온건파와 결탁한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의향으로 플리트우드는 잉글랜드로 소환되었고, 크롬웰의 아들 헨리 크롬웰이 온건파와 협력하여 침례교 등 급진파도 배제해 나가는 가운데, 페티는 병사에게 주어진 급여 채무 증서를 사들여 케리주 및 기타 지역에서 광대한 토지의 영주가 된다.
1657년에 플리트우드와 아일랜드 총독을 교체한 헨리의 비서가 되어, 크롬웰 부자와 친한 아일랜드 귀족이자 보일의 형이기도 한 블로그힐 남작 로저 보일, 아일랜드 성직자 에드워드 워스/에드워드 워스 (주교)영어와 함께 헨리를 지원하는 역할도 맡게 되었으며, 크롬웰 가문의 비호 아래 잉글랜드 서부 콘월의 웨스트 루 선거구영어 선출 하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가 1656년에 완료한 이 엄청난 작업은 다운 설베이로 알려지게 되었고, 나중에 (1685년) ''Hiberniae Delineatio''로 출판되었다. 그의 보상으로 그는 아일랜드 남서부 켄메어에서 약 30000 에이커와 9,000파운드를 획득했다.
침례교는 플리트우드의 신임을 배경으로 아일랜드의 가톨릭 주민을 서쪽 코노트로 강제 이주시키고 토지 수탈을 진행하려고 했다. 페티는 이에 반대하여 아일랜드 지주 빈센트 구킨과 공저로 '코노트로의 이주에 반대하는 논고'라는 팸플릿을 썼다. 현재 이 팸플릿은 남아있지 않지만, 구킨이 침례교의 과격한 이데올로기에서 추진하는 이주 정책에 반대하는 주장을 페티는 1672년에 작성한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에 반영했기 때문에, 당시 뉴 잉글리시라고 불리던 프로테스탄트 사람들 중에서도 온건파인 올드 프로테스탄트에 속했다고 생각된다[41][42]。
그러나 크롬웰 사후의 공화국 말기에 아일랜드에서의 부정 행위를 고발당해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어 런던으로 돌아왔다. 1659년 3월에 소환된 제3 의회에서 심문에 대해 변명했지만, 4월 22일에 의회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추궁은 없었다[43][44]。
2. 5. 왕정복고 이후 (1660-1687)
1660년 영국 왕정복고 시기에 페티는 잉글랜드의 찰스 2세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다. 찰스 2세는 페티가 크롬웰을 지지했던 과거에 대해 사과하려 하자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이를 무시하고 대신 선박의 역학에 대한 그의 실험에 대해 논의했다.[13] 1661년 4월, 찰스 2세는 페티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공화정 시대에 얻은 아일랜드 영지도 다시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45] 같은 해, 그는 아일랜드 의회의 이니스티오지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1662년에는 왕립 학회의 창립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45] 그는 왕립 학회에서 활동하며 역학이나 선박 건조 등 폭넓은 분야에서의 보고서를 제출했고,[45] 1673년에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46] 1684년에는 더블린 과학 협회(이후 더블린 왕립 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46] 페티는 새뮤얼 피프스의 친구였으며, 피프스의 일기에는 페티와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왕립 학회에서의 활동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47]
페티는 조선 공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중 선체 보트의 우수성을 확신하여 '익스페리먼트'라는 배를 만들었다. 이 배는 1664년 포르투에 도착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침몰했다.[13] 이후 페티는 쌍동선 재건을 계획했지만, 1684년 12월 16일의 시험 항해 실패로 좌절되었다.[47]
1662년 페티는 경제학에 관한 첫 저서인 ''세금과 기여에 관한 논문''을 익명으로 출판했다. 1665년에는 전시 재정론 ''현자에게는 한 마디면 족하다''를 집필했고, 이 책은 페티 사후 1691년에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의 부록으로 출판되었다.[48] 1670년대 전반, 제3차 영란 전쟁으로 영국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영·불·란의 국력을 수량적으로 비교한 ''정치 산술''과 아일랜드의 정치 구조를 분석한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를 집필했다. 이 책들은 각각 1690년과 1691년에 페티 사후 출판되었다.[49] 1682년에는 화폐의 개주 문제를 다룬 ''화폐 소론''이 출판되었고, 1683년에는 ''더블린 사망표에 관한 여러 관찰'', 1687년에는 ''아일랜드론''이 출판되었다.[49]
1666년부터 페티는 아일랜드 영지 경영을 시작했다. 그는 청교도 잉글랜드인을 아일랜드에 이주시키고, 제철업이나 제재업과 같은 산업을 일으켰으며, 교량 건설이나 사주 화폐 주조 등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정책을 펼쳤다.[50] 페티는 자신의 정치 산술을 자신의 영지에 적용하여 인구와 가축을 조사하여 토지의 잠재력을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10] 케리의 아이버러, 글래나라우트, 덩커론 등 3개 남작령을 소유했던[10] 그는 케리의 광대한 영지에 제철소와 어업을 위한 광범위한 계획을 개발했지만, 이러한 계획에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었다.[11] 제철소는 1660년에 설립되었다.[12]
하지만 잉글랜드의 정책으로 인해 영지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663년 항해 조례 제정과 1667년 축우법 제정으로 아일랜드가 외국 무역이나 축우의 잉글랜드 수출이 금지되면서 아일랜드 경제가 궁지에 몰렸고, 페티는 잉글랜드의 방침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일랜드에 사는 잉글랜드인이 차별받는 것에 분노하여 아일랜드·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합병, 아일랜드 의회와 잉글랜드 의회의 합병, 아일랜드인과 잉글랜드인의 상호 이식을 통한 동화(변종)를 주장했다.[51]
1685년 런던으로 돌아온 페티는 1687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럼지 수도원에 묻혔다.
3. 주요 저작
윌리엄 페티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저작을 남겼다. 1662년에는 『조세 공납론』을 출판하여 재정, 조세, 공공 지출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오오우치 효우에와 마츠카와 시치로가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이와나미 서점에서 1952년에 출판했다. 1671년에서 1676년 사이에 집필하여 1690년에 출판된 《정치 산술》에서는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여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의 국력을 비교 분석했다. 이 책 또한 오오우치 효우에와 마츠카와 시치로가 한국어로 번역하여 이와나미 서점에서 1955년에 출판했다.
1671년에서 1676년 사이에 집필되어 1692년에 출판된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에서는 아일랜드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 발전 방안을 제시했다. 마츠카와 시치로가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이와나미 서점에서 1951년에 『아이아란드의 정치적 해부』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1682년에 초판이 출판된 『화폐 소론』에서는 화폐의 기능과 개주 문제에 대해 논했다. 이 책은 마츠카와 시치로가 번역하여 1957년 쿠루마 사메조 교수 환갑 기념 논문집 『경제학의 제 문제』에 「페티의 『화폐 소론』 (1695년)」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그 외에도 1647년 ''하트립에게 보내는 조언''(The Advice to Hartlib), 1648년 ''새로 발명된 이중 기록법에 관한 선언''(A Declaration Concerning the newly invented Art of Double Writing), 1659년 ''생키와 페티 간의 소송''(Proceedings between Sankey and Petty), 1660년 ''아일랜드에 대한 고찰''(Reflections upon Ireland)을 저술했다. 1664년에 집필되어 1691년에 출판된 ''베르붐 사피엔티''[22]와 1683년에 초판이 출판된 『더블린의 사망표에 관한 제 관찰』, 1687년 초판이 출판된 『아일랜드론』 등이 있다.
4. 경제 이론
페티는 경제 현상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시도한 초기 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경제학에 통계적 방법을 도입하고, 수량적 분석을 중시했다. 찰스 헨리 헐은 1899년 ''윌리엄 페티 경의 경제 저술''을 통해 페티의 경제 저술을 수집했다. 헐은 자신의 논문 '경제 이론사에서 페티의 위치'(1900)에서 페티의 저술을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 첫 번째 그룹: ''세금과 기여에 관한 논문''(1662년 집필 및 초판 발행)과 ''베르붐 사피엔티''(1665년 집필, 1691년 인쇄). 왕정 복고와 제1차 네덜란드 전쟁 관련 재정 문제를 다룬다.
- 두 번째 그룹: ''아일랜드의 정치 해부학''과 ''정치 산술''. 1669년 출판된 에드워드 체임벌린의 ''영국의 현황''에 영향을 받았다.
- 세 번째 그룹: ''정치 산술 에세이''. 런던과 파리의 크기 논쟁에 대한 기여. 존 그라운트의 ''런던 사망자 보고서에 대한 관찰''과 관련이 깊다.
- 네 번째 그룹: ''화폐에 관한 콴툴룸쿵케''(1682년 집필, 1695년 인쇄).
페티는 국민 소득과 부에 대한 최초의 엄밀한 평가를 도입했다. 1인당 연간 평균 소득을 6파운드 13실링 4펜스로, 인구를 600만 명으로 추정하여 국민 소득을 4천만 파운드로 계산했다. 토지, 선박, 개인 재산, 주택 등을 포함한 국가 부를 6억 6천 7백만 파운드로 추정했다.
페티는 잉여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잉여를 경제 성장의 핵심으로 보았다. 생산을 잉여 창출 과정으로, 사회 필요 이상의 산출 및 투입 재구축으로 간주했다. 또한, 재화의 "자연 가격"과 "시장 가격"을 구분했다.
=== 가치론 ===
페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바탕으로 투입 기반 가치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모든 것은 토지와 노동이라는 두 가지 자연적인 명칭으로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캔틸론처럼 토지와 노동의 방정식을 고안하고 가치를 표현하려 했다. 그는 생산성과 개인의 "기술과 산업"을 가치 이론에 포함시키고, 이를 지대에 적용했다. 토지의 자연 지대는 노동자가 1년 동안 토지에서 생산한 것에서 소비하고 필수품을 위해 교환한 것을 뺀 잉여분이었다. 이는 생산 관련 비용을 초과하는 이윤(Profit (economics))이었다.
=== 분업론 ===
페티는 [http://www.marxists.org/reference/subject/economics/petty/index.htm 정치 산술]에서 분업의 유용성을 연구했다.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분업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예시로 들었다. 전통적으로 조선공들은 배를 개별적으로 건조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여러 팀이 동일 작업을 연속 수행했다. 특정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페티는 이 원리를 아일랜드 조사에 적용, 작업을 분할하여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 조세론 ===
페티는 《세금과 기여에 관한 논문》에서 세금 및 공공 지출 원칙을 제시했다.[15] 국방, 통치,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교육, "무능력자" 유지, 인프라 등 여섯 가지 공공 부담을 제시했다. 그는 처음 네 가지는 줄일 여지가 많다고 보았고, 노인, 환자, 고아 등을 위한 간병과 "잉여 인력"의 정부 고용에 대한 지출 증가를 권장했다.
페티는 소비세를 지지했다.[15] 세금은 공공 부담을 충족하기에 충분해야 하며, 수평적으로 공정하고, 규칙적이고 비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두세는 불공정하며, 맥주 소비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준다고 비판했다. 더 나은 통계 정보를 활용하여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할 것을 제안했다.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하되, 국내 생산물과 동등한 경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물교환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화폐 희소성을 인식하고, 금이나 은 이외의 형태로 세금을 납부할 것을 권장했다.
페티는 빈민 구제나 병원 경영 등 사회 정책 경비와 복지비 증액을 제창하며, 빈민 대책으로 공공 토목 사업에 노동자를 투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솔즈베리 평원에 쓸모없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든, 스톤헨지의 돌을 타워 힐로 가져오든" 공공 사업에 노동력을 투입하는 것은 유용하다고 주장했다.[53] 이는 노동 가치설의 초기 사례이며, 마르크스 경제학의 원형을 보여준다.[53]
=== 화폐론 ===
페티는 화폐 유통 속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존 로크가 시작했다고 알려진 화폐 수량설을 예상하며, 경제 생산량(''Y'')과 물가 수준(''p'')의 곱은 통화량(''MS'')과 유통 속도(''v'')의 곱과 같다고 주장했다. 주어진 통화량과 물가 수준에서 경제 생산량을 증가시키려면 유통 속도가 높아져야 하며, 이는 은행 설립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16] 그는 "잘 통치된 국가의 모든 목적에 부응하기 위한 돈이 부족하지 않다"고 명시하며, 더 높은 유통 속도가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16]
페티는 화폐 기능을 금과 은만이 수행하는 것은 아니며,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언급한다. "돈[금과 은] 대신에 (충분하지 않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대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7]
화폐 유출 통제는 헛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소량의 화폐로 국가가 어떤 상품을 구매할지 상인들에게 맡기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화폐에 관한 어떤 문제》에서 금이 풍부한 국가는 화폐 유출 제한 법률이 없다고 언급했다.
=== 기타 ===
페티는 고리대금(이자)을 정당화하고, 이자율에 대한 정부 규제에 반대했다. 이자를 대여자의 자제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하고, 안전이 보장될 경우 이자율은 원금이 살 수 있었던 토지의 임대료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9] 이는 일반 균형 분석 결과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는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시민의 긍정적인 법을 만드는 것은 헛되고 무익하다"고 주장하며 자유 방임주의적 경제 정책을 옹호했다.[19]
정부의 과도한 경제 간섭을 경계하며, 독점, 돈의 수출 통제, 상품 거래 등을 국가에 해로운 것으로 간주했다. 독점의 가격 효과를 인식하고 프랑스 국왕의 소금 독점을 예시로 들었다. 분업 현상을 설명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하면 상품 품질이 좋아지고 가격이 저렴해진다고 주장하며 규모의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19]
런던 시의 성장을 예측하며, 1800년경에는 도시 인구가 현재 인구의 8배인 535만 9000명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인구 증가의 잠재력을 주목했지만, 그러한 사회가 번영하지 못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19]
4. 1. 가치론
페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이어받아 투입 기반 가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모든 것은 토지와 노동이라는 두 가지 자연적인 명칭으로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캔틸론처럼, 그는 산출물의 "어머니와 아버지"인 토지와 노동 사이의 방정식 또는 등식을 고안하고 가치를 표현하려 했다. 그는 일반적인 생산성, 즉 개인의 "기술과 산업"을 가치 이론에 포함시켰으며, 이를 지대에 적용했다. 토지의 자연 지대는 노동자가 1년 동안 토지에서 생산한 것에서 그가 소비하고 필수품을 위해 교환한 것을 뺀 잉여분이었다. 이는 생산에 관련된 다양한 비용을 초과하는 이윤(Profit (economics))이었다.4. 2. 분업론
페티는 [http://www.marxists.org/reference/subject/economics/petty/index.htm 정치 산술]에서 분업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분업의 존재와 유용성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배를 개별적으로 건조하여, 한 척을 완성한 후에 다른 척을 시작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여러 팀이 연속적으로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도록 조직했다.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정치 경제학 저술가들이 관찰하고 정당화한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을 것이다.페티는 또한 이 원리를 아일랜드 조사에 적용했다. 그의 획기적인 발전은 작업을 분할하여 광범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4. 3. 조세론
페티는 당시 영국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세금과 기여에 관한 논문》을 통해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한 세금 및 공공 지출 원칙을 제시하고자 했다.[15] 그는 국방, 통치,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교육, "모든 종류의 무능력자"의 유지, 그리고 인프라 또는 "보편적인 이익을 위한 것들"과 같은 여섯 가지 종류의 공공 부담을 제시하고, 이러한 부담의 변화에 대한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처음 네 가지 공공 부담은 줄일 여지가 많다고 보았으며, 노인, 환자, 고아 등을 위한 간병과 "잉여 인력"의 정부 고용에 대한 지출 증가를 권장했다.페티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졌으며, 소비세를 지지했다.[15] 그는 세금이 공공 부담을 충족하기에 충분해야 하며, 수평적으로 공정하고, 규칙적이고 비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두세가 매우 불공정하며, 특히 맥주에 대한 소비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준다고 비판했다. 그는 세금을 더 공정하게 징수하기 위해 더 높은 품질의 통계 정보를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해야 하지만, 국내 생산물과 동등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으로만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물물교환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화폐의 희소성을 인식하고, 금이나 은 이외의 형태로 세금을 납부할 것을 권장했다.
페티는 빈민 구제나 병원 경영 등 사회 정책 경비와 복지비 증액을 제창하며, 빈민 대책으로 공공 토목 사업에 노동자를 투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설령 솔즈베리 평원에 쓸모없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든, 스톤헨지의 돌을 타워 힐로 가져오든, 그 외 이와 유사한 일을 하든" 공공 사업에 노동력을 투입하는 것은 유용하다며 공공 사업의 경제적·사회적 효과를 제창했다.[53] 이는 노동 가치설을 주장한 초기 사례로, 후일 마르크스 경제학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53]
4. 4. 화폐론
페티는 화폐 유통 속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존 로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화폐 수량설을 예상하며, 경제 생산량(''Y'')과 물가 수준(''p'')의 곱은 통화량(''MS'')과 유통 속도(''v'')의 곱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어진 통화량과 물가 수준에서 경제 생산량을 증가시키려면 유통 속도가 더 높아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은행 설립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16] 그는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큰 감소에도 불구하고, 잘 통치된 국가의 모든 목적에 부응하기 위한 돈이 부족하지 않다"고 명시하며, 더 높은 유통 속도가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16]페티는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금과 은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며,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아니라고 언급한다. 그는 "돈[금과 은] 대신에 (충분하지 않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대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7]
화폐 유출에 대해서 페티는 이를 통제하려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량의 화폐로 국가가 어떤 상품을 구매할지 상인들에게 맡기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화폐에 관한 어떤 문제》(Quantulumcunque concerning money)에서 금이 풍부한 국가는 화폐 유출을 제한하는 법률이 없다고 언급했다.
4. 5. 기타
페티는 고리대금(이자)을 정당화하고, 이자율에 대한 정부 규제에 반대했다. 그는 이자를 대여자의 자제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하고, 안전이 보장될 경우 이자율은 원금이 살 수 있었던 토지의 임대료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9] 이는 일반 균형 분석에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선구적인 통찰이었다. 그는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시민의 긍정적인 법을 만드는 것은 헛되고 무익하다"고 주장하며 자유 방임주의적 경제 정책을 옹호했다.[19]페티는 정부가 경제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을 경계하며, 독점, 돈의 수출 통제, 상품 거래 등을 국가에 해로운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독점의 가격 효과를 인식하고 프랑스 국왕의 소금 독점을 예시로 들었다. 또한, 분업 현상을 설명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하면 상품의 품질이 더 좋아지고 가격이 저렴해진다고 주장하며 규모의 경제의 중요성 또한 인식했다.[19]
페티는 런던 시의 성장을 예측하며, 1800년경에는 도시 인구가 현재 인구의 8배인 535만 9000명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인구 증가의 잠재력을 주목했지만, 그러한 사회가 번영하지 못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19]
5. 통계학적 업적
윌리엄 페티는 존 그랜트와 함께 현대 인구 조사 기법의 기초를 마련했다. 페티는 추정 이론을 사용하여 인구를 추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당시에는 수량적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이 통계학자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페티는 통계학자라고 할 수 없다.
아일랜드의 경우, 인구 조사 데이터를 얻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페티는 추정 이론을 사용했다. 런던의 인구를 추정하기 위해 수출 또는 사망자 수를 이용했다. 수출을 사용하는 방법은 수출이 30% 증가하면 인구도 비례적으로 증가한다고 보았다. 사망자 수를 사용하는 방법은 사망자 수에 30을 곱하는 것인데, 이는 30명 중 1명이 매년 사망한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잉글랜드 전체의 인구를 얻기 위해 런던의 인구에 8을 곱했다. 이러한 단순한 추정 방법은 악용될 수 있었고, 페티는 왕실을 위해 수치를 위조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6. 정치, 사회 사상
6. 1. 아일랜드 문제
6. 2. 종교관
7. 평가 및 영향
윌리엄 페티는 경제사와 통계학 저술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애덤 스미스의 저작보다 앞선다. 그는 왕립 학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20] 특히 그의 통계 분석에 대한 탐구는 주목할 만하며, 존 그라운트와 함께 현대 인구 조사 기법의 기초를 마련했다. 조시아 차일드와 같은 작가들에 의해 더욱 확장된 이 통계 분석 연구는 현대 보험의 초기 설명을 제공했다. 버논 루이스 패링턴은 그를 1692년에 『세금론(Treatise of Taxes)』에서 논의된 노동 가치설의 초기 해설자로 꼽는다.[20]
그는 리처드 캔틸론, 애덤 스미스, 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포함한 여러 미래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페티와 애덤 스미스는 조화로운 자연 세계를 믿는 세계관을 공유했다. 그들은 모두 전문화와 분업의 이점을 보았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페티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출판된 저작에는 페티의 귀족 후손 중 한 명인 셸번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된 내용이 있다.[21]
칼 마르크스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총 노력이 당시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기여를 경제에 한다는 페티의 믿음을 모방했다. 페티는 노동이 부의 가장 큰 원천이라고 결론 내렸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잉여 노동이 모든 이윤의 원천이며, 노동자는 자신의 잉여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소외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주요 저작인 『자본론』에서 수많은 인용문을 통해 증명되듯이 페티의 분석에 대한 그의 고려에서도 나타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정부가 17세기에 페티가 더 간단한 예시로 했던 것처럼 산출량과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총수요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페티의 간단한 예시는 케인스에 의해 개선되었고 그의 모델에 통합되었다.
일부는 페티의 업적을 행운의 결과로 여기기도 한다. 페티는 토마스 홉스 밑에서 견습하기 전에 음악 교수였다. 그는 팽창하는 대영 제국에서 큰 기회와 성장의 시기에 경제에 대한 자유 방임적 견해를 갖게 되었다. 자유 방임 정책은 그의 지도교수 홉스의 사회 계약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큰 불황인 일반적 위기 동안 홉스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페티는 고전 경제학의 연구 방법과 핵심적인 많은 개념을 창출했다. 경제학에 처음으로 경험적이고 통계적인 연구 방법을 도입했으며, 경제 활동에 규칙성과 지속성을 부여하는 법칙을 밝히려고 했다. 또한 잉여야말로 경제 성장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페티에게 생산이란 잉여를 창출하기 위한 과정이며,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산출을 내고 투입을 재구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페티는 재화의 "자연 가격"과 "시장 가격"을 구분했다.
페티의 법칙에 관해서는 '''페티-클라크의 법칙'''을 참조한다.
7. 1.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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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ックスフォード大学の解剖水準は低いとされ、ペティの前任の教授は医学の古典の講読しかせず、解剖しない退屈な講義だったという。そんな大学が有名になったのは内部より外部の活動にあり、ロンドン理学協会の流れをくむオックスフォード理学協会のメンバーが自然科学研究に熱中していたからで、ロバート・ボイルを始めとするメンバーは集会を開きつつ実践で理論を検証するベーコンの経験論に基づいて、試行錯誤を繰り返し化学または力学を進めていった。なお、ペティがアイルランドへ行った後はボイルの宿所が理学協会の集会に変更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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医者のペティが何故測量家に転身出来たかについて、既に外国遊学などで測量に基礎的な知識を習得していたからで、地理学・天文学・数学・物理学など幅広い学問を修めていた。また社会経済に関する本を公刊し経済学者としても知られていたので、測量家になれる素質は十分に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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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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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ングランドからアイルランドへの移民は3つに区別され、16世紀の[[宗教改革]]以前に入植した人々はオールド・イングリッシュ(カトリック)、以後の入植者はニュー・イングリッシュ(プロテスタント)と呼ばれた。ニュー・イングリッシュを時代区分でさらに細かく分ける場合もあり、宗教改革からイングランド内戦までの入植者はオールド・プロテスタント、内戦以後はニュー・プロテスタントと呼ばれる。ペティはニュー・プロテスタントに属するが、オールド・プロテスタントのグッキンとの結び付きが強いことからオールド・プロテスタントに肩入れするよう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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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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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ペティを告発したのはヒエロム・サンキーというバプテスト将校で、ウォースリーの友人で1656年に彼と共に没収地分配委員会から追放されていた。サンキーにとってニュー・プロテスタントでありながらオールド・プロテスタントの味方をしてウォースリーに代わったペティは許せない存在となり、ペティは自分が告発された背景にはウォースリーらバプテストの政府転覆計画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指摘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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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ty; Sir; William (1623 - 1687)
201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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岩波文庫版では、その財政論的な内容から『アイァランドの政治的解剖』ではなく、『租税貢納論』に付して収録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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図説世界を変えた50の経済 (シリーズ知の図書館)
原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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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経費膨脹の法則」に関する研究について
https://hue.repo.nii[...]
広島経済大学経済学会
198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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