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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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타는 퉁구스어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러시아 사할린주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이다. 윌타는 자칭 '울타' 또는 '나니'로 불리며, 2002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서 346명이 확인되었다. 그들은 주로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 노글리키, 발 마을 등지에 거주하며, 홋카이도에도 소수가 거주한다. 윌타족은 퉁구스어족에 속하는 오로크어를 사용하며, 순록 유목, 수렵, 어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왔다. 윌타는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시대를 거치며 역사적, 문화적 변화를 겪었고, 현재는 러시아화가 진행되고 있다. 윌타족은 독특한 문화적 특징과 전통을 유지하며, 특히 가죽 무두질과 자수 기술이 발달했다. 윌타족은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윌타족의 권익 보호와 문화 전승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퉁구스어족의 언어에서 "집에서 기르는 순록"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타칭은 "오로크"이다. 자칭은 "윌타(Ul'ta)"이며, 이 역시 "집에서 기르는 순록"을 의미하는 윌타어 어근 "울라"(Ula)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자칭으로는 "나니"(Nani)가 있다.[2] 오로치족, 우데게족과 함께 오로촌족으로 잘못 불리기도 한다. 일본의 울타 협회는 오로크라는 용어가 경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3][4]
윌타족은 러시아와 일본 홋카이도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이다.
도리이 류조는 과거 『일본서기』에 나오는 "숙신"을 윌타족에 비정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다[22] . 원대 이후 중국의 문헌 자료에 "태인(䚟因)", "역리우(亦里于)", "사록부(使鹿部)" 등으로 보이는 종족에 대해서는 윌타족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26] .
2. 명칭
3. 인구 및 거주 지역
2002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346명의 윌타족이 사할린주를 중심으로 포로나이스크, 노글리키 등지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89년 아바시리시 근처에 약 20명의 윌타족 공동체가 있었으나, 현재 정확한 인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윌타족의 인구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모든 인구 조사가 윌타족을 독립적인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으며,[21] 전쟁, 다른 민족과의 통혼 등으로 인해 자신의 출신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20]
3. 1. 러시아
2002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내 오로크족(윌타)의 총 인구는 346명이다.[5] 이들은 주로 사할린주에 거주하며, 포로나이스크, 노글리키, 노글릭스키 구의 발 마을 등 3개의 정착지에 집중되어 있다. 발 마을에는 총 144명의 오로크족이 거주한다.[6]
오로크족이 거주하는 다른 지역으로는 포로나이스크 구의 가스텔로 마을과 바흐루셰프 마을,[6] 알렉산드로프스크사할린스키 구의 비아흐투 마을, 스미르니흐, 스미르니호프스키 구 마을, 오힌스키 구, 그리고 사할린주의 행정 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가 있다.[7]
2002년 인구 조사에서 윌타족은 사할린 섬 남부 포로나이스크 (구 시키카 군시키카 정)에 119명, 북부 노글리키 지구의 바르 마을에 105명이 거주하여 이 두 곳에 집중되었다. 그 외에 노글리키 지구의 노글리키 마을, 포로나이스크 지구의 가스테로 마을과 바후르셰프 마을, 알렉산드로프스크사할린스키 지구의 비아후투 마을, 스미르니프 지구의 스미르누이크 마을, 오하 지구, 유즈노사할린스크 (도요하라) 등에 흩어져 있다.
모든 인구 조사가 윌타를 독립적인 민족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세한 인구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다.[21] 1926년에는 북부에 162명, 남부를 포함한 총 인구는 약 460명이었다.[21] 1960년에는 남부의 윌타가 160~170명 정도, 1989년에는 전체 약 190명이라는 정보가 있다.[21] 전쟁의 영향과 통혼이 진행되어 자신의 출신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2012년에는 많아야 300명 정도로 추정된다.[20]
3. 2. 일본
일본 홋카이도에도 오로크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1989년에는 아바시리시 근처에 약 20명의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일본 내 오로크족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8][11]
4. 역사
1920년대 소련 집단화 이전 오로크족은 5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각각 자체적인 이동 구역을 가지고 있었다.[11]
4. 1. 기원 및 이주
오로크족의 구전 전통에 따르면, 이들은 울치족과 역사를 공유하며, 아무르강 지역에서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이 이주는 늦어도 17세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11]
4. 2. 러시아 제국 시대
러시아 제국은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오로크족의 땅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얻었다.[9] 1857년부터 1906년까지 사할린에 유형지가 세워졌고, 많은 수의 러시아 범죄자와 정치적 망명자가 유입되었는데, 여기에는 오로크족과 섬의 다른 원주민인 니브흐와 아이누에 대한 초기 민족지학자인 레프 슈테른베르크도 포함되었다.[10]
4. 3. 일본 제국 시대 (남사할린)
러일 전쟁 이후, 사할린 남부는 일본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가라후토 청으로 행정되었다. 윌타족(오로크족)은 "가라후토 토인"(樺太土人)으로 분류되었으며, 본토 일본의 가족 등록부를 가지고 있던 아이누와는 달리, 일본식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다.[13][14] 가라후토 한인과 니브흐족과 마찬가지로, 윌타족은 아이누족과는 달리, 1945년 소련의 침공 이후 일본 국민의 대피에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 제국 육군에서 복무했던 일부 니브흐족과 윌타족은 소련 노동 수용소에 억류되었으며,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의 재판을 거쳐 일본 국민으로 인정받아 일본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은 아바시리시 주변에 정착했다.[15] 1975년 다히니엔 겐다누에 의해 윌타족의 권리와 윌타족 전통 보존을 위해 일본의 윌타 쿄카이가 설립되었다.[16]
4. 4. 소련 시대
1922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 정부는 오로크족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고 공산주의 이념에 따른 집단화를 추진했다.[12] 1932년 북부 오로크족은 집단 농장인 발에 합류하여 순록 사육을 전문으로 했으며, 니브흐, 에벤키족, 러시아인도 함께했다.[11]
러일 전쟁 이후 사할린 남부는 일본 제국에 가라후토 청으로 통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침공으로 사할린 전체가 소련 영토가 되면서,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했던 일부 니브흐족과 윌타족은 소련 노동 수용소에 억류되었다.[15]
4. 5. 현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가라후토 청(사할린 남부)의 윌타족 일부는 일본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이들 중 다히니엔 겐다누(기타가와 겐타로)는 1975년 윌타족의 권리와 전통 보존을 위해 윌타 쿄카이를 설립하고 활동했다.[16] 이들은 대부분 아바시리시 주변에 정착했다.[15]
한편, 러시아에 남은 윌타족은 소비에트 연방 시기 러시아화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2002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내 윌타족 인구는 346명이며, 대부분 사할린에 거주한다. 주요 거주지는 포로나이스크와 노글리키 지구의 바르 마을이다. 윌타어는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되었으며, 윌타족의 문화와 언어 보존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5. 언어 및 문화
오로크어는 퉁구스어족에 속하며, 키릴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자를 사용한다.[17][5] 러시아어도 함께 사용한다.[5] 오로크족은 다른 퉁구스계 민족과 문화 및 언어적으로 관련이 깊다.[11]
순록 사육은 오로크족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었으며, 어업과 수렵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1] 그러나 러시아인의 등장 이후, 오로크족은 대부분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11] 일부는 여전히 순록 사육을 하거나 어업, 산업 노동에 종사하기도 한다.[11]
5. 1. 언어
오로크어는 퉁구스어족의 남부 그룹에 속한다.[17] 현재 사할린 오로크족 중 일부만이 오로크어를 사용하며,[5] 이들은 모두 러시아어를 함께 구사한다. 2007년 키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오로크어 알파벳 문자가 도입되었다. 학습서가 출판되었으며, 사할린의 한 학교에서 오로크어를 가르치고 있다.[18]오로크어는 광의의 퉁구스어족에 분류되며 아무르강 하류의 울치족이 사용하는 울치어, 나나이족이 사용하는 나나이어와 유사하다.[21][22] 에벤키어와 네기달어와도 공통적인 특징을 공유한다.[21] 과거에는 고유 문자가 없었으나,[22] 현재는 키릴 문자로 표기할 수 있다.
윌타족은 소규모 인원으로 순록과 함께 이동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다양한 민족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이들은 문자는 없었지만 어학 능력에 뛰어나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27] 또한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기억하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습관화되어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20][27]
5. 2. 생업
전통적으로 오로크족은 순록 유목, 수렵, 어업을 생업으로 삼았다.[11] 순록은 음식, 의복, 운송 수단을 제공하는 중요한 자원이었다.[11] 특히 사할린 북부의 오로크족에게 순록은 매우 중요했다.[11] 오로크족은 순록을 이동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순록의 먹이가 되는 풀과 이끼, 그리고 물고기를 찾아 이동했다.[26] 순록은 물고기나 짐승 외에도 여러 도구들을 운반하는데 이용되었다.[20][26] 순록이 도망가지 않도록 버드나무 어린 가지로 만든 '카이가리'라는 목걸이를 순록 목에 감고 체인 가이를 매달아 다리를 묶는 방법을 사용했다.[20]19세기에 제작된 오로크족의 붉은 여우 털 장갑은

이누카이 테츠오의 연구에 따르면, 오로크족은 농업을 하지 않고 주로 소규모 순록 목축, 수렵, 어업으로 생활했다.[22][27] 니브흐에 비해 산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어업은 다소 보조적이었다.[45] 봄부터 여름까지는 사할린 동부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어업과 해수 사냥을 하고, 겨울에는 내륙에서 수렵을 하며 이동 생활을 했다.[23][46] 수렵 대상은 늑대, 멧돼지, 여우, 살쾡이 등이었다.[47]
오로크족은 오로치족이나 울치족과 민족지학적으로 가깝지만, 순록 번식을 기반으로 한 경제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21] 순록에 대한 애착은 에벤키족의 지족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21] 어업은 유목 생활에 영향을 주어, 여름에는 어장 부근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이동이 비교적 제한되었다.[21]
에도 시대 중기, 오로크족은 홋카이도 - 사할린 - 아무르강 유역을 무대로 한 산단 무역에 참여했다.[28] 아이누, 니브흐, 울치와 함께 무역에 참여했으며,[28] 남사할린의 아이누는 담비, 수달, 여우 모피, 일본제 철 냄비와 칼을, 울치는 청나라제 견직물 관복("에조 비단"), 청옥, 독수리 깃털 등을 가져왔다.[28] 타라이카(시스카군시스카정)의 윌타족은 울치로부터 얻은 중국 제품을 가지고 남하하여, 구슌코탄(오오토마리군오오토마리정)의 마츠마에 번회소에서 무역을 했다.[26]
러시아인의 등장은 오로크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대부분은 정착 생활을 한다.[11] 일부 북부 오로크족은 여전히 반유목 순록 사육과 채소 농업, 축산업을 병행하며, 남부에서는 주요 직업이 어업과 산업 노동이다.[11]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는 채소 재배와 젖소 사육이 새로운 생업으로 추가되었지만, 어업과 해수 사냥은 여전히 약간의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다.[21]
5. 3. 문화적 특징
오로크족은 에벤키족 등 다른 퉁구스계 민족과 문화적, 언어적 연관성을 공유한다.[11] 이들은 "일가"라고 불리는 독특한 연속 문양을 의복, 천 제품, 소품, 식기 등에 사용했다.[48] --샤머니즘이 신앙의 기반이었다.[22][47] 샤먼(사마)은 초자연적인 능력과 투시력을 가진 자로 존경받았다.[50] 샤먼은 보오(하늘, 윌타의 신)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예언이나 병자의 치료를 담당했고,[27] 사냥과 어로의 성공을 기원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타계로 보내는 의례를 행했다.[50] 사람들은 자신의 수호신으로 목우 "세와"를 만들었으며,[43] 샤먼은 북 "다리"와 북채 "기시프"를 사용하여 의례를 진행했다.[20]
5. 4. 통과 의례
윌타족 소년들은 시기가 되면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로 철갑상어 사냥에 참여했다.[1] 주로 칼루가나 벨루가를 사냥했다.[1] 이 과정은 소년이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약간의 식량과 특별한 종류의 창을 가지고 혼자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1] 철갑상어 사냥에 성공하면, 소년은 철갑상어 이빨 중 하나를 가져다가 자신의 이마나 팔에 표시를 새겼다.[1] 이는 사냥, 즉 어로 활동의 성공을 나타내는 증표였다.[1] 하지만 철갑상어는 크고, 힘이 세고, 사나운 물고기였기 때문에,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많은 사냥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1]6. 한일 관계 속의 윌타족
에도 시대 마미야 린조를 비롯한 일본인 탐험가들은 윌타족과 접촉하여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26] 1808년 (분카 5년) 마미야 린조는 사할린을 탐험하며 타라이카의 윌타족과 만나 『북에조 도설』 등에 "오롯코 오랑캐"로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인이 윌타족을 처음 소개한 사례였다.[26] 1856년 사할린을 답사한 마쓰우라 다케시로는 『북에조 여지』에서 윌타족의 어휘를 가나로 기록하고, 그들의 기질을 "유약하고 돈후하다"고 평가했다.[26]
러일전쟁 이후 1905년 (메이지 38년) 남사할린이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윌타족은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윌타족은 아이누와 달리 "가라후토 토인"(樺太土人)으로 분류되어 호적이 부여되지 않았고, "토인" 취급을 받았다.[13][14][28] 1933년 이후 일본은 아이누에게 호적을 부여하고 "내지인"으로 취급했지만, 윌타족과 니브흐에게는 호적을 부여하지 않았다.[28]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부 윌타족은 일본군에 징집되어 첩보 활동에 동원되기도 했다.[27][40][39] 1942년 일본 육군 특무 기관은 시스카정에 거주하는 윌타족 22명에게 일본 이름을 부여하고 첩보 부대에 배치했다.[27][39] 이들 중 상당수는 전후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했다.[27]
전후 다히니엔 겐다누를 중심으로 윌타족의 권익 보호와 문화 전승을 위한 노력이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다히니엔 겐다누는 시베리아 억류를 겪은 후 아바시리시에 정착하여, 1975년 윌타족의 인권과 전후 보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윌타 쿄카이를 설립했다.[16][20][27] 1978년에는 아바시리에 윌타족 자료관 "자카 도후니"를 설립하여 윌타족 문화를 보존하려 했다.[42] "자카 도후니"는 2010년 폐관되었고, 소장품은 홋카이도립 북방 민족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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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ご案内】アシルートイタによる心と体に響く新しい食の価値 共創拠点 第2回ワークショッ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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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越宗一さん「熱源」インタビュー 「文明」の理不尽さにさらされる若者たち、生きる源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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嫁に隠れて本を買う!: 第162回直木賞直前予想② 『熱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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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木賞『熱源』は“調べ癖”から誕生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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