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 (8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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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은은 874년 당 희종 재위 기간에 태어났으며, 당나라 말기 청해 지역의 군벌로 활동했다. 그의 아버지 유건은 광주의 하급 관리였고, 어머니는 영남동도 절도사의 조카였다. 유은은 초기에는 봉주 자사, 영남동도 관료 등을 역임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주변 세력과의 암투와 정쟁을 통해 청해군 사령관, 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당나라 멸망 후에는 후량으로부터 명예직을 받았다. 911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아들 유암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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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 (87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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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류은 (劉隱) |
작위 | 청해군 절도사 (清海軍節度使) |
재임 시작 | 905년 |
재임 종료 | 911년 |
대리 재임 시작 | 901년 |
후임 | 유엄 |
정해군 절도사 (靜海軍節度使) | (데 쥬레) |
재임 시작 | 908년 |
재임 종료 | 911년 |
선임 | 곡호 |
후임 | 유엄 |
실질적 통치 | 곡호와 분쟁 |
출생 | 874년 |
사망 | 911년 4월 4일 |
사망 장소 | 광저우 |
묘소 | 덕릉 (德陵, 현대 판위 구, 광저우) |
아버지 | 유지겸 |
어머니 | 위씨 부인 |
2. 생애
건부 원년(874년), 유지겸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건녕 원년(89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봉주 자사가 되었다.[21]
광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천우 2년(905년), 애제로부터 청해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21] 이후 광동과 광서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반독립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후량이 건국되자, 태조 주전충에게 신하로 복종하여 개평 3년(909년) 4월에 남평왕(南平王)에 봉해졌고,[22] 건화 원년(911년)에는 남해왕(南海王)으로 다시 봉해졌다.[23] 그러나 그 직후 병으로 쓰러져 향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1]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유암이 그의 뒤를 이었다. 정명 3년(917년, 건형 원년으로 함)에 유암이 황제로 즉위하자, 유은은 양황제(襄皇帝)라는 시호[21]와 열조(烈祖)라는 묘호로 추존되었으며, 덕릉(德陵)에 안장되었다.[22]
2. 1. 배경
유은은 당 희종 재위 기간인 874년에 태어났다.[3][6] 그의 아버지는 유건[3][6](또는 유지건[7])으로, 당시 청해군 절도사(당시 영남동도)의 수도인 광주(廣州)의 하급 관리였다가 나중에 봉주(封州, 현재 광둥성 자오칭)의 자사가 되었다.[6] 그의 어머니 위씨 부인은 당시 영남동도 절도사였던 위주(韋宙)의 조카였다. 유은은 맏아들이었으며, 동생으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유태(劉台)와 아버지의 후궁 단씨에게서 태어난 유엄이 있었다.[8]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 유건이 총애하던 후궁 단씨가 본부인 위씨의 질투로 살해된 후, 그녀의 무덤에서 '은(隱)', '태(台)', '엄(巖)'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어 세 아들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9]건녕 원년(89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은은 그의 뒤를 이어 봉주 자사직을 계승했다.[21]
2. 2. 봉주 자사 시절
건녕 원년(894년)에 부친 유건(유지겸)이 사망하자, 유은은 그 뒤를 이어 봉주 자사가 되었다.[21] 상을 치르는 동안 약 100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소란을 계획한다는 소문이 돌자 유은은 이들을 처형했다.[10] 이후 당시 영남동도의 절도사였던 유숭귀(劉崇龜)는 그를 영남동도 관료로 임명하고, 부친이 맡았던 하수진(賀水鎮, 현재 중국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시)의 수비를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숭귀는 유은을 풍주(豐州) 자사로 임명했다.[10]896년, 당나라 소종 황제가 임명한 서왕 이지유가 절도사로 부임하여 청해로 향했다. 그러나 청해의 관료인 노거(盧琚)와 담홍기(譚弘玘)는 이지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할 준비를 했다. 담홍기는 단주(端州, 현재 중국 광둥성 자오칭시)를 방어하며 이지유에 맞서기 위해 유은에게 자신의 딸과의 혼인을 제안하며 동맹을 맺으려 했다. 유은은 이를 수락하는 척하며 딸과 결혼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단주로 가 담홍기를 기습하여 살해했다. 이후 광주를 공격하여 노거마저 죽인 뒤, 이지유를 광주로 맞아들여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이지유는 유은을 청해군 사령관(行軍司馬, ''싱쥔 시마'')으로 임명했다.[11]
2. 3. 청해군 관료 시절
894년, 아버지 유지겸이 사망하자 유은은 상을 치렀다. 이때 약 100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소란을 계획한다는 소문이 돌자 유은은 이들을 처형했다.[10] 당시 영남동도 절도사였던 유숭귀(劉崇龜)는 유은을 영남동도 관료로 삼아 아버지 유지겸이 맡았던 하수진(賀水鎮, 현재 중국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시) 수비를 담당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숭귀는 그를 봉주 자사로 임명했다.[10][21]896년, 당나라 소종 황제가 임명한 새로운 절도사 서왕 이지유가 청해군으로 부임하려 했다. 그러나 기존 청해군 관료인 노거(盧琚)와 담홍기(譚弘玘)는 이지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할 준비를 했다. 담홍기는 단주(端州, 현재 중국 광둥성 자오칭시)를 지키며 유은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겠다며 동맹을 제안했다. 유은은 동의하는 척하며 딸과 혼인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단주를 기습하여 담홍기를 살해했다. 이어 광주를 공격해 노거마저 죽인 뒤, 이지유를 광주로 맞아들여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이지유는 유은을 청해군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임명했다.[11]
898년, 소주(邵州, 현재 광둥성 사오관시) 자사 증곤(曾袞)이 광주를 공격했고, 함대를 지휘하던 광주 관료 왕귀(王瓌)도 이에 합류했다. 유은은 이들을 격파했다. 또한 소주 관료 유동(劉潼)이 젠주(湞州)와 한주(浛州, 모두 현재 광둥성 칭위안시)를 공격했을 때도 유은은 그를 격파하고 죽였다.[12]
900년, 당나라 조정은 재상 쉬옌뤄를 청해군 절도사로 임명하여 이지유를 교체하려 했으나, 쉬옌뤄가 도착하기 전에 이지유가 사망했다.[13] 쉬옌뤄는 청해에 도착한 후 유은을 부절도사로 삼고 군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겼다.[8] 901년 쉬옌뤄가 사망하자, 그는 유은을 절도사 대행으로 추천하는 유언을 남겼다.[13] 황제는 이후 최원을 절도사로 임명했지만, 최원은 장링현에 도착했을 때 청해군이 도적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과 유은이 순순히 권력을 넘겨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부임을 포기하고 중앙으로 돌아갔다.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당시 유은을 정식 절도사로 임명하지는 않았다.[14]
902년, 현재의 장시성 간저우시인 천주(虔州) 자사 루광저우가 청해군을 공격하여 소주를 점령하고 조주(潮州, 현재 광둥성 차오저우시)를 포위했다. 유은은 그를 격파하고 소주를 되찾으려 했다. 동생 유암은 루광저우의 군대가 아직 강하니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유은은 듣지 않고 소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강 수위가 높아 군량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루광저우와 그의 부관 탄췐보의 반격에 패배하여 철수해야 했다. 루광저우는 소주를 계속 점령할 수 있었다.[15]
904년, 당시 후량 건국의 기반을 닦고 있던 군벌 주췐중은 당나라 애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당 조정을 장악한 상태였다. 유은은 주췐중에게 뇌물을 보내 자신을 절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고, 주췐중은 이를 받아들여 유은을 절도사로 삼았다.[14] 천우 2년(905년), 애제는 유은을 정식으로 청해군절도사에 임명했다.[21]
2. 4. 청해군 절도사 시절
898년, 소주(광둥성 사오관시) 지사 증곤(曾袞)이 광주(廣州)를 공격하자, 광주 함대를 지휘하던 왕귀(王瓌)도 이에 합류했다. 유은은 이들을 격파했고, 소주 관료 유동(劉潼)이 젠주(湞州)와 한주(浛州, 모두 현재의 광둥성 칭위안시)를 공격했을 때도 그를 격파하고 죽였다.[12]900년, 당나라 조정은 재상 쉬옌뤄를 청해군(清海軍) 절도사로 임명하여 당시 절도사였던 이지유(李知柔)를 교체하려 했다. 그러나 쉬옌뤄가 청해군에 도착하기 전에 이지유가 사망했다.[13] 쉬옌뤄는 청해군에 도착한 후 유은을 부절도사로 삼고 군대의 지휘와 행정 업무를 그에게 위임했다.[8] 쉬옌뤄가 901년에 사망하자, 그는 유은을 절도사 대행으로 추천하는 유언을 남겼다.[13] 황제는 이후 최원을 새로운 절도사로 임명했지만, 최원은 장링현에 도착했을 때 청해군이 도적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유은이 순순히 권한을 넘겨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조정에 복귀를 요청했다. 황제는 이를 허락했고, 유은을 정식 절도사로 임명하지는 않았다.[14]
902년, 노광주는 천주(虔州, 현재의 장시성 간저우시) 지사로서 청해군을 공격하여 소주를 점령하고 조주(潮州, 현재의 광둥성 차오저우시)를 포위했다. 유은은 그를 격파하고 소주를 되찾으려 했다. 동생 유암은 노광주의 군대가 여전히 강하니 공격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유은은 듣지 않고 소주를 공격했다. 당시 강의 수위가 높아 군량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노광주와 그의 부관 탄췐보의 반격에 패배하여 철수했다. 노광주는 소주를 계속 점령할 수 있었다.[15]
904년, 당시 강력한 군벌이자 선무군(宣武軍, 본부는 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절도사였던 주전충은 황제를 암살하고 그의 아들 당 애제를 즉위시켜 사실상 조정을 장악했다. 유은은 주전충에게 뇌물을 보내 절도사 직위를 요청했고, 주전충은 이를 받아들여 유은을 정식 청해군 절도사로 임명했다.[14] 이듬해인 905년(천우 2년), 애제는 유은에게 명예 재상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하사했다.[14]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 905년의 청해군 절도사 임명은 광주에서의 반란 진압 공적을 인정받은 결과라고도 한다.[21] 이후 유은은 광둥성과 광서성 일대에 세력을 넓혀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21]
907년, 주전충은 애제에게 선위를 강요하여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여 태조 황제가 되었다. 그는 유은에게 더 높은 명예 재상 직위인 시중(侍中)을 내리고, 대붕군(大鵬郡)왕으로 봉했다.[16]
908년, 초나라의 군주 마은은 장수 여사주(呂師周)를 보내 청해군 북쪽을 공격하게 하여 소주(昭州,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구이린시), 하주(賀州,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허저우시), 오주(梧州,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우저우시), 몽주(蒙州, 현재의 우저우시), 공주(龔州,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구이강시), 부주(富州, 현재의 허저우시) 등 6개 주를 점령했다.[17] 같은 해, 후량 태조는 관료 조광예(趙光裔)와 이은형(李殷衡)을 사신으로 보내 유은을 청해군과 정해군(靜海軍, 본부는 현재 베트남 하노이) 절도사로 임명했다. 유은은 임명은 받아들였으나, 조광예와 이은형을 억류하고 후량 조정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17]
909년(개평 3년) 4월, 태조는 유은을 남평군(南平郡)왕으로 봉했다.[17][22]
910년 또는 그 이전에, 유은은 동생 유암을 보내 영원군(寧遠軍, 본부는 현재 광시 좡족 자치구 위린시)을 공격하게 하여 수도인 융주(容州)와 고주(高州, 현재 광둥성 마오밍시)를 점령하려 했다. 당시 영원군 절도사였던 방거소(龐巨昭)는 유암의 공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방거소는 장기적으로 유은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910년에 영원군을 들어 초나라에 항복했다. 마은은 자신의 장수 요언장(姚彦章)을 융주에 주둔시켰다.[17]
911년(건화 원년), 태조는 유은을 남해군(南海郡)왕으로 다시 봉했다.[23][8] 그러나 그해 유은은 병에 걸렸고, 동생 유암을 후계자로 추천하고 사망했다. 향년 38세였다.[4][21] 이후 유암이 절도사 자리를 계승했다.[4]
3. 사후
유은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유암이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21][4] 정명 3년(917년, 건형 원년으로 개원)에 유암이 황제를 칭하고 남한을 건국하자,[21][22] 유은은 양황제(襄皇帝)라는 시호와[21] 열조(烈祖)라는 묘호로 추존되었다.[22] 능은 덕릉(德陵)이다.[22]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유지겸(劉知謙) | 남한 추존 황제 대조 성무황제. 유겸(劉謙)으로도 불림. |
어머니 | 위씨(韋氏) | 남한 건국 후 무황후로 추존됨. |
동복동생 | 유태(劉台) | |
이복동생 | 유엄(劉龑) | 남한 초대 황제 고조 천황대제. 본명 유척(劉陟), 후에 유암(劉巖). |
부인 | 불명 | |
후궁 | 안씨(燕氏) | 청원공주 유화의 어머니. |
딸 | 증성공주(增城公主) | 대장화의 황제 정인민(鄭仁旻)에게 시집감. |
딸 | 청원공주 유화(劉華) | 어머니는 안씨. 민의 황제 왕연균에게 시집감. 민 강종 왕창의 어머니. |
아들 | 불명 | 최소 1명 이상.[18] |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Historical Records of the Five Dynasties
[3]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4]
서적
Zizhi Tongjian
[5]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6]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7]
서적
New Book of Tang
[8]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https://archive.org/[...]
[9]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https://archive.org/[...]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15]
서적
Zizhi Tongjian
[16]
서적
Zizhi Tongjian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19]
간행물
南漢劉氏の祖先につきて
http://id.nii.ac.jp/[...]
東洋文庫
1916-05
[20]
뉴스
劉復愚遺文中年月及其不祀祖問題
http://www2.ihp.sini[...]
中央研究院歴史語言研究所
1939
[21]
서적
新五代史
[22]
서적
十国春秋
[23]
서적
旧五代史
[24]
서적
신오대사
[25]
서적
자치통감
[26]
웹사이트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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