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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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읍은 전한 문제의 아들로, 기원전 178년에 양나라의 왕으로 봉해졌다. 문제의 막내 아들로서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기원전 174년에는 가의를 태부로 삼았다. 기원전 169년 낙마 사고로 사망했으며, 양나라는 폐지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가의 또한 슬픔으로 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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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한 문제의 황자 - 전한 경제
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전한의 제6대 황제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겪었으며, 난을 진압한 후 황권 강화를 이루어 아버지 문제의 치세와 함께 '문경지치'로 칭송받으며 전한의 황금기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한 문제의 황자 - 유참
문제 초년에 태원왕에 봉해졌다가 대나라 왕으로 봉호가 변경된 유참은 효왕으로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유등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 기원전 169년 사망 - 양희 (적천장후)
양희는 전한 초 고제 유방을 섬겨 항우를 추격, 그의 시신 일부를 얻은 공로로 적천후에 봉해졌으나 여후 시기에 작위를 박탈당했다가 복권되었고, 사후 장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후손으로 양창과 양진이 있다. - 기원전 169년 사망 - 주발 (전한)
주발은 유방을 따라 초한 전쟁에 참전하고 한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며, 여씨 일족을 몰아내고 문제의 즉위에 기여하여 우승상과 승상을 역임했으나 모반 혐의로 투옥되기도 한 인물이다. - 추락사한 사람 - 장준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인 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 후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 해방 후 김구의 비서를 지냈고, 《사상계》를 창간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의문사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 추락사한 사람 - 김경률 (당구 선수)
김경률은 대한민국의 당구 선수로, SBS 당구 대회 준우승, 도하 아시안 게임 동메달, 터키 당구 월드컵 우승 등을 통해 대한민국 당구계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으며, 한때 세계 랭킹 2위까지 올랐고 '4대 천왕'을 이긴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유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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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휘 | 유읍(劉揖) |
시호 | 효(孝) |
작위 | 평성사왕(평성사왕/平城思王) |
성씨 | 유(劉) |
생몰 기간 | 기원전 187년 ~ 기원전 179년 |
시대 | 전한 |
아버지 | 문제 |
어머니 | 신원평의 여종 |
형제 | 경제 등 |
봉국 | 평성 |
가계 | |
부황 | 문제 |
모후 | 신원평의 여종 |
형제 | 경제 양효왕 유무 양회왕 유참 |
가족 관계 | |
부 | 문제 |
모 | 신원평의 여종 |
형 | 경제 |
2. 생애
기원전 178년, 전한 문제는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면서 유읍을 양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는 전년에 폐지된 양나라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2] 기원전 174년에는 낙양의 수재로 칭송받던 가의를 태부로 삼았다.[4]
문제의 막내 아들이었던 유읍은 다른 아들들보다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기원전 169년 6월에[2] 낙마 사고로 사망했고, 시호는 회왕이었다.
2. 1. 양나라 왕 즉위
기원전 178년, 전한 문제는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면서 유읍을 양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는 전년에 폐지된 양나라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2] 유읍은 문제의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들들보다 특별히 귀여움을 받았다.[4] 기원전 174년에는 낙양의 수재로 칭송받던 가의를 태부로 삼았다.[4]2. 2. 가의의 등용과 양나라 통치
기원전 174년, 문제는 낙양 출신의 명망 높은 학자 가의를 양나라 태부로 임명했다. 가의는 유읍의 스승이자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회남 지역에 대한 방비책으로 양나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읍 사후 양나라를 회양왕 유무나 대왕 유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4]문제의 막내 아들이었던 유읍은 다른 아들들보다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기원전 178년 양왕에 봉해졌고, 기원전 169년 6월에[2]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시호는 회왕이었다. 가의는 유읍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 항상 곡을 하다가 몇 년 못 가 죽었다.[4]
2. 3. 낙마 사고와 죽음
梁懷王|양회왕중국어 劉揖|유읍중국어은 기원전 169년 6월에[2]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양회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양나라는 폐지되었다. 양나라 태부 가의는 회남에 대한 방비책으로 양나라를 양회왕의 형인 회양왕 유무나 대왕 유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제가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에 유무가 대신 봉해졌다.[3][4] 가의는 양회왕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 항상 곡하다가 몇 년 못 가 죽었다.[4]2. 4. 유읍 사후
가의는 유읍의 죽음에 마음이 상해 항상 곡하다가 몇 년 못 가 죽었다.[4] 유읍이 낙마하여 사망하자,[2] 가의는 회남에 대한 방비책으로 양나라를 유읍의 형인 회양왕 유무나 대왕 유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 문제는 가의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듬해에 유무를 양나라 왕으로 봉했다.[4]참조
[1]
서적
史記
[2]
서적
한기
[3]
서적
한서
https://zh.wikisourc[...]
[4]
서적
한서
[5]
문서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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