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 (적천장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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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희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유방을 따라 낭중기(郞中騎)로 활동하며 한신 휘하에 속했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하다 항우 사후 시신 일부를 얻은 공으로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졌으며, 작위 박탈과 복권을 거쳐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손으로는 승상 양창과 양진이 있다.
양희(楊喜)는 전한 초기의 군인으로,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하고 그 시신을 얻은 공으로 제후에 봉해진 인물이다.
아들은 양식(楊敷)이고, 손자는 양무해(楊毋害)이다. 양무해는 과실로 인해 작위를 잃었다.[1] 양무해의 손자인 양맹상(楊孟嘗)은 선제의 흥멸계절(興滅繼絶) 은전에 힘입어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졌다.[1] 증손은 안평후(安平侯) 양창(사마천의 딸의 남편, 소제 때의 승상)이며, 그의 현손은 양진이다.[1]
楊喜|양희중국어는 사마천의 《사기》 권7 항우본기,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와 반고의 《한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 권31 진승항적전 중 항적에 기록되어 있다.
[1]
문서
태위양진비의 표기
2. 생애
기원전 205년부터 한 고제를 섬겼으며, 초기에는 한신 휘하에서 활동했다. 해하 전투에서 관영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항우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항우의 위세에 눌려 잠시 후퇴하기도 했으나, 결국 항우가 자결한 후 그의 시신 일부를 얻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기원전 200년에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져 1,900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에 죄를 지어 작위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이듬해 복권되었다.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사망하여 장(莊)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양은이 작위를 이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후한의 양진이 양희의 8세손이라고 한다.
2. 1. 초기 생애와 한신 휘하 활동
기원전 205년, 두현[3]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郞中騎)로 고제를 따랐고, 이후 한신에게 속했다.[4]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한신의 군대를 이끌고 초를 공격한 관영에게 속해, 기장(騎將)으로서 서초패왕 항우를 추격했다. 그러나 항우가 꾸짖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서 몇 리를 도망쳤다. 다시 한나라 군대가 오강에서 항우와 싸우는데, 항우가 옛 자기 사람인 기사마(騎司馬) 여마동을 만나자 여마동에게 덕을 베풀겠다고 자결했다. 그러자 왕예가 항우의 머리를 취하고, 이후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여마동·낭중 여승·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체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적천후(赤泉侯) 1,900호에 봉해졌다.[4]
2. 2. 해하 전투와 항우 추격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양희는 낭중기장으로서 관영의 휘하에서 항우를 추격했다. 추격 중, 눈을 부릅뜬 항우의 꾸짖음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 수 리나 후퇴하기도 했다.[4] 그러나 다시 추격하여 오강에서 자결한 항우의 시신 일부를 얻었다.[4]
이 공으로 기원전 200년 양희는 1900호를 영지로 하는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졌다.[4] 같은 방식으로 항우의 시신 일부를 얻은 왕예는 두연후(杜衍侯)에, 여마동은 중수후(中水侯)에, 여승은 열양후(涅陽侯)에, 양무는 오방후(吳防侯)에 각각 봉해졌다.[4]
2. 3. 적천후 책봉과 박탈, 복권
고제 7년 정월 기유일에 양희는 적천후(赤泉侯) 1,900호에 봉해졌다.[4]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에 죄를 지어 작위를 빼앗겼으나, 이듬해에 다시 봉해졌다.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하였고, 아들 양은이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2. 4. 사망과 시호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했고, 아들 양은이 뒤를 이었다.[4]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3. 가계
4. 출전
참조
[2]
서적
신당서
[3]
문서
위남군(후의 경조윤 관할지.)의 속현
[4]
문서
사마정의 《사기색은》에서는 남양군 단수현이 아닌가 추측했다
[5]
문서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6]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7]
문서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8]
문서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9]
문서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10]
문서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11]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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