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흠 (회양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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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흠(劉欽)은 전한 선제의 아들로, 회양헌왕으로 봉해졌다. 그는 총명하고 경서와 법률을 좋아하여 선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황태자 자리를 놓고 다투기도 했다. 회양왕 시절에는 외척과의 갈등, 경방 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나, 성제 즉위 후에는 총애를 받아 유배된 외척들의 처자들을 풀어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기원전 28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유현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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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8년 사망 - 유강 (두량회후)
유강은 전한 시대에 두량회후에 봉해졌으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백성들의 비판을 받아 폐위되었고 후사가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으며, 두량후 유택의 아들이자 경무후 유창의 형제이다. - 전한 선제의 황자 - 전한 원제
전한의 제11대 황제인 원제는 유교를 숭상했으나 환관의 발호와 파벌 정치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고 흉노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왕소군을 시집보냈으며 아들 유오가 성제로 즉위했다. - 전한 선제의 황자 - 유오 (초효왕)
유오는 전한 선제의 아들로 정도왕에 봉해졌다가 초왕으로 옮겨 봉해졌으며 초효왕이라 불렸고, 성제 시기 입조했다가 병으로 죽어 초회왕 유문 등 여러 아들을 두었다. - 전한의 제후왕 - 전한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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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흠 (회양헌왕) | |
---|---|
지도 정보 | |
인물 정보 | |
이름 | 유흠 |
한자 표기 | 劉欽 |
로마자 표기 | Yu Qin |
작위 | 회양헌왕 |
시호 | 헌왕 (獻王) |
생몰년 | 기원전 1세기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미상 |
아버지 | 유현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유경 |
가계 | |
왕조 | 전한 |
부왕 | 효애왕 유현 |
형제자매 | 미상 |
아들 | 회양왕 유경 |
경력 | |
즉위 | 기원전 27년 |
폐위 | 기원전 2년 |
2. 생애
劉欽|유흠중국어은 전한 선제의 아들로, 기원전 63년인 원강 3년에 회양왕으로 봉해졌다. 어머니는 선제의 총애를 받던 장첩여였다. 유흠은 경서와 법률을 좋아하고 총명하여 선제의 사랑을 받았다.[2]
선제는 유교를 선호하지 않았던 반면, 태자(후의 원제)는 유교를 좋아해 선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선제는 유흠을 태자로 삼을 생각까지 했으나, 자신이 반란으로 죽은 유거의 손자로서 어린 시절 궁궐에서 쫓겨나 외가 허씨 집안에 의지했던 경험과 태자 어머니 허황후가 일찍 살해당한 점을 불쌍히 여겨 태자를 폐하지 못했다.[2] 대신 선제는 위현성을 회양중위로 삼아 유흠에게 경각심을 주었고, 결국 태자 자리는 원제에게 돌아갔다.[2]
선제가 죽고 원제가 즉위하자, 유흠은 봉국인 회양으로 부임했다.[2] 장첩여는 이미 죽었고, 외조모와 세 외숙은 해마다 회양에 와서 외조모를 문안했다. 유흠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외숙들을 회양으로 불렀으나, 외숙 중 장박은 조상 묘를 지키고자 하여 따르지 않았고, 유흠과 장박의 사이는 멀어졌다. 나중에 장박이 큰 빚을 지자 유흠은 도움을 거절했다. 장박은 아우 장광(張光)을 시켜 유흠에게 말하고 또 황제에게 글을 올려 어머니를 위해 사직하려 했다. 그러자 유흠은 급히 금을 내어주었다. 장박은 유흠에게 입조하여 원제를 보좌하도록 제안하고, 장광을 통해 자신의 계책을 따르도록 권했다. 유흠은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으나, 장광이 장안으로 가면서 다시 권하자 입조하겠다는 말을 전했다.[2]
장박은 역경에 능한 경방을 사위로 두고 있었는데, 경방은 원제의 신임을 얻었다가 석현과 오록충종에게 배척받았다. 이에 장박과 경방은 결탁하여 유흠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경방이 위군태수가 되어 외방으로 나간 사이 계획이 석현 일당에게 발각되었다. 석현은 경방은 궁중 일을 누설하고 장박은 제후왕을 그른 길로 인도했다 하여 투옥했다. 유흠도 체포될 뻔했으나 원제는 간대부 왕준을 회양으로 보내 꾸짖었다. 유흠은 사죄했고, 경방과 장박 삼형제는 처형되고 처자들은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건소 2년(기원전 37년) 11월, 유흠이 회양왕으로 재위한 지 27년째 되던 해에 일어났다.[2][3]
성제가 즉위하자, 유흠은 황제의 숙부로서 다른 제후왕들보다 더한 총애를 받았다. 유흠은 글을 올려 유배된 외숙들의 처자들을 풀어줄 것을 청했고, 어사대부는 유흠이 아직 반성을 덜 하고 있다며 탄핵했으나, 성제는 이를 허락했다.[2]
회양헌왕은 36년(기원전 28년)에 죽었다.[2]
2. 1. 출생과 성장
劉欽|유흠중국어은 전한 선제의 아들로, 기원전 63년인 원강 3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선제의 총애를 받던 장첩여였다. 유흠은 어려서부터 경서와 법률을 좋아하고 총명하여 선제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2] 선제는 유교를 선호하지 않았던 반면, 태자(후의 원제)는 유교를 좋아하여 선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선제는 유흠을 태자로 삼을 생각까지 했었다.[2]하지만 선제는 자신이 반란으로 죽은 유거의 손자로서, 어린 시절 궁궐에서 쫓겨나 외가인 허씨 집안에 의지하며 자랐던 경험을 떠올렸다. 또한 태자의 어머니 허황후가 일찍 살해당한 점을 불쌍히 여겨 태자를 폐하지 못했다.[2] 대신 선제는 위현성을 회양중위로 삼아 유흠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했고, 결국 태자 자리는 원제에게 돌아갔다.[2]
2. 2. 황태자 책봉 경쟁
선제는 유흠의 어머니 장첩여를 총애했고, 유흠 자신도 경서와 법률을 좋아하며 총명하여 선제의 사랑을 받았다. 태자(후의 원제)는 유교를 중시했기에 유교를 싫어한 선제는 유흠을 "진정한 나의 아들"이라 칭찬하며 태자 대신 유흠을 후계자로 삼을까 고민했다.[1] 그러나 선제는 태자의 어머니 허황후가 독살당한 점과 자신이 민간에서 고생했던 경험을 고려하여 태자를 폐위하지 않았다.[1][2] 선제는 위현성을 회양중위로 삼아 유흠에게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1][2]2. 3. 회양왕 시절
원강 3년(기원전 63년), 유흠은 회양왕으로 봉해졌다. 어머니 장첩여는 선제의 총애를 받았고, 유흠 자신도 경서와 법률을 좋아하며 총명하여 선제의 사랑을 받았다. 선제는 유학을 중시하는 태자(훗날의 원제)보다 유흠을 더 마음에 들어 하여, 그를 태자로 삼을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선제는 태자의 어머니 허황후가 일찍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결국 태자를 바꾸지 않았다. 선제는 위현성을 회양중위로 삼아 유흠에게 간접적으로 뜻을 전했고, 태자 자리는 원제의 것으로 굳어졌다. 선제가 죽고 원제가 즉위하자, 유흠은 봉국인 회양으로 부임했다.[2]장첩여는 이미 죽었고, 외조모와 세 외숙은 해마다 회양에 와서 외조모를 문안했다. 유흠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외숙들을 회양으로 불렀으나, 외숙 중 장박은 조상의 묘를 지키고자 하여 따르지 않았고, 유흠과 장박의 사이는 멀어졌다. 나중에 장박이 큰 빚을 지자 유흠은 도움을 거절했다. 장박은 아우 장광(張光)을 시켜 유흠에게 말하고 또 황제에게 글을 올려 어머니를 위해 사직하려 했다. 그러자 유흠은 급히 금을 내어주었다. 장박은 기뻐하며 유흠에게 입조하여 원제를 보좌하도록 제안하고, 장광을 통해 자신의 계책을 따르도록 권했다. 유흠은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으나, 장광이 장안으로 가면서 다시 권하자 입조하겠다는 말을 전했다.[2]
장박은 역경에 능한 경방을 사위로 두고 있었는데, 경방은 원제의 신임을 얻었다가 석현과 오록충종에게 배척받아 중용되지 못했다. 이에 장박과 경방은 결탁하여 유흠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경방이 위군태수가 되어 외방으로 나간 사이, 이들의 계획은 석현 일당에게 발각되었다. 석현은 경방은 궁중의 일을 누설하고 장박은 제후왕을 그른 길로 인도했다 하여 투옥했다. 유흠도 체포될 뻔했으나 원제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간대부 왕준을 회양으로 보내 꾸짖었다. 유흠은 사죄했고, 경방과 장박 삼형제는 처형되고 처자들은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건소 2년(기원전 37년) 11월, 유흠이 회양왕으로 재위한 지 27년째 되던 해에 일어났다.[2][3]
성제가 즉위하자, 유흠은 황제의 숙부로서 다른 제후왕들보다 더한 총애를 받았다. 유흠은 글을 올려 유배된 외숙들의 처자들을 풀어줄 것을 청했다. 어사대부는 유흠이 아직 반성을 덜 하고 있다며 탄핵했으나, 성제는 이를 허락했다.[2]
2. 4. 성제 즉위 이후
성제가 즉위하자 유흠은 황제의 숙부로서 다른 제후왕들보다 더한 총애를 받았다. 유흠은 글을 올려 유배된 외숙들의 처자들을 풀어줄 것을 청원했다. 어사대부는 회양헌왕이 아직 반성을 덜 하고 있다며 유흠을 탄핵했으나 성제는 이를 허락했다.[2]2. 5. 죽음
회양헌왕은 36년(기원전 28년)에 죽어 아들 회양문왕 유현이 계승했다.[2]3. 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전한 선제 |
어머니 | 장첩여 |
형 | 전한 원제[1] |
자녀 | 이름 |
아들 | 회양문왕 유현 |
아들 | 악평후 → 공악후 유흔[4] |
3. 1. 부모
劉欽|유흠중국어의 아버지는 전한 선제이고, 어머니는 선제에게 총애받은 장첩여이다.[4] 선제는 곽황후가 폐위된 후, 장첩여를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던 곽씨 일족 때문에 자식을 낳지 않은 왕첩여를 황후로 선택했다.3. 2. 형제
- 전한 원제[1]
3. 3. 자녀
- 회양문왕 유현
- 악평후 → 공악후 유흔: 양삭 2년 윤6월 임오일에 봉해졌으나, 정신병에 걸려 작위가 박탈되었다가 원수 2년에 복권되었다.[4]
4. 평가
유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선제는 유흠이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경서와 법률에 능통하다고 평가했다.[2]
반면 유흠은 권력욕이 강하고, 외척 세력과 결탁하여 왕위를 노렸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2] 그는 외숙 장박 및 역경에 능한 경방과 모종의 계획을 세웠으나, 석현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2]
유흠의 생애는 개인의 능력과 야망이 권력 구조와 충돌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어머니와 자신의 능력으로 선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태자 교체에는 실패했다. 이후 외척 세력과 결탁하여 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이 역시 환관 세력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당시 정치 상황의 불안정성과 권력 투쟁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성제 즉위 후 유흠은 황제의 숙부로서 특별 대우를 받았고, 유배되었던 외숙들의 가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2]
4. 1. 긍정적 평가
선제는 유흠이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경서와 법률에 능통하여 그를 총애하였다.[2]4. 2. 부정적 평가
유흠은 권력욕이 강하고, 외척 세력과 결탁하여 왕위를 노렸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 그는 외숙 장박 및 당대 유명한 음양가이자 역경에 능한 경방과 결탁하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2]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석현 일당에게 발각되었고, 경방과 장박 3형제는 처형되고 그 처자들은 유배되었다.[2] 경방과의 모의는 정치적 음모로 비춰질 수 있다.[2]4. 3. 중도진보적 관점
유흠의 생애는 개인의 능력과 야망이 권력 구조와 충돌하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는 어머니 장첩여가 선제의 총애를 받았고, 본인도 경서와 법률에 능통하여 선제의 사랑을 받았다. 선제는 유교를 선호하는 태자(후의 원제) 대신 유흠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태자의 어머니 허황후에 대한 의리와 태자에 대한 연민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2]유흠은 외척 세력과 결탁하여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어머니 장첩여 사후, 외숙인 장박(張博) 등과 교류하며 원제에게 입조하여 보좌할 것을 제안받았다. 장박은 역경에 능한 경방과 결탁하여 유흠의 입조를 추진했으나, 환관 석현 등의 방해로 실패하고 경방, 장박 등은 처형되었다. 유흠은 연좌될 위기에 처했으나 원제의 배려로 무사했다.[2][3]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정치 상황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외척, 환관, 유학자 등 다양한 세력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암투를 벌였으며, 유흠 역시 이러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의 행동은 권력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제 즉위 후 유흠은 황제의 숙부로서 특별 대우를 받았고, 유배되었던 외숙들의 가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2]
5. 관련 인물
참조
[1]
문서
韋玄成は父の韋賢死後、爵位を継承するところを兄に譲ろうとした。
[2]
문헌
한서 권80 선원육왕전제80
https://zh.wikisourc[...]
[3]
문헌
한서 권9 원제기제9
https://zh.wikisourc[...]
[4]
문헌
한서 권15하 왕자후표제3하
[5]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이 봉해진 진류군과는 연관이 없다.
[6]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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