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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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강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여러 군의 태수를 역임했다. 그는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쳤으며, 황제의 부당한 징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원술의 침략에 맞서 항전하다가 결국 함락되어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육준은 낭중이 되었다. 육강은 육손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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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년 출생 - 페르티낙스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 암살 후 로마 황제가 되었으나, 재정 개혁과 군 기강 확립 시도 중 프라이토리아니의 반발로 87일 만에 암살당한 인물이다. - 오군 육씨 - 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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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항은 오나라의 장군으로, 육손의 아들이자 손책의 외손자이며,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고 형주 방어에 힘썼으며, 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하다가 274년에 사망했다. - 195년 사망 - 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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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 동탁을 섬긴 무장 이몽은 반동탁 연합군 토벌에 가담하고 동탁 사후 이각, 곽사와 함께 장안을 공격하여 왕윤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195년 무군중랑장 재직 중 이각에게 살해당했다.
육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육강 |
원어 이름 | 陸康 |
자 | 계녕 (季寧) |
출생 | 126년 |
출생지 | 쑤저우, 장쑤성 |
사망 | 195년 (향년 69세) |
사망 장소 | 루안, 안후이성 |
아버지 | 육표 |
자녀 | 육준 육기 고옹의 아내 |
친척 | 육손 (종손) 육모 (종손) 고승의 어머니 (종손녀) |
관직 정보 |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195년 |
후임 | 유훈 |
군주 | 헌제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영제 / 헌제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영제 |
임기 시작 | 178년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영제 |
2. 생애
젊어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했으며 품행도 부지런히 닦았다.[21] 오군 태수 이숙에게 효렴으로 뽑혀 군에서 근무했다. 이후 이숙이 죄를 받아 처형당하자 그 시체를 영천군까지 운구해 장사지냈다.[4][21] 그 의열함이 알려져 양주 자사 장민으로부터 무재(茂才)로 천거되고 발해군 고성현령(高成―)에 임명되었다.[4] 변방의 현이었기에 관습상 각 호(戶)마다 한 사람은 궁노를 갖추고 불의의 사태를 대비하면서 왕래도 하지 못했다. 지방관이라도 새로 부임하면 번번이 징발되어 성곽을 보수하기 일쑤였다. 육강이 이르러 이를 모조리 철폐하니 백성들이 기뻐했다. 은혜와 신의로써 다스리자 도적도 잠잠해지고 주군에서는 그 공적을 상표하였다.[5] 178년(광화 원년)에 무릉태수로 옮겼으며 이후 계양군과 낙안군의 태수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칭송받았다.[5]
180년경, 여강군에서는 황양 등이 강하만(강하군 일대의 만인)과 연계해 10여만 명을 일으켜서는 네 개 현을 침탈하고 수 년간 준동하였다.[23] 육강이 여강태수가 되어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손자 육상이 낭중(郎中) 벼슬을 받았다.[7] 시간이 흘러 헌제가 즉위한 이래 천하가 매우 혼란한데도 육강은 위험을 무릅써 효렴과 계리(計吏)를 조정에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충의장군(忠義將軍)이 더해져 관질이 중이천석(中二千石)에 이르렀다.[8]
185년(중평 2년),[22] 영제가 동상을 만드려는데 비용이 부족해 농토 한 무(畝, 묘)당 10전(錢)을 징수하고자 했다. 백성들은 수해와 한해(旱害)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차였다. 육강이 상소를 올려 간했다가 황제의 총명을 망국에 빗대 불경을 저질렀단 명목으로 모함을 받고는 함거(檻車)에 실려 잡혀갔다. 시어사(侍御史) 유대가 이 건을 맡아 살핀 덕분에 면직으로 그쳤다. 이후 의랑(議郞)으로 복귀하였다.[6]
194년(흥평 원년),[24] 구강군 수춘현(壽春縣)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원술은 서주를 치고 싶어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육강에게 3만 곡(斛)의 원조를 청했다. 원술은 반역자였으므로 육강은 통하지 않고 그 침략에 대비했다. 원술이 대노하여 부하 손책을 보내 여강을 수 겹으로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손책은 일찍이 육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육강이 아닌 주부(主簿)가 접대했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어오던 터였다.[25] 성밖의 휴가자들은 일단 숨었다가 야밤을 이용해 귀환하였다. 195년, 2년의 항전 끝에 결국 함락당했으며 한 달 정도 지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 70세였다.[9][10] 집안사람 100여 명은 고생하다 거의 절반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절개를 지키다 사망한 것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 육준을 낭중으로 삼았다.[17]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젊어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했으며 품행도 부지런히 닦았다.[21] 오군태수 이숙(李肅)에게 효렴으로 뽑혀 군에서 근무했다. 이후 이숙이 죄를 받아 처형당하자 그 시체를 영천군까지 운구해 장사지냈다.[4] 그 의열함이 알려져 양주자사 장민(臧旻)으로부터 무재(茂才)로 천거되고 발해군 고성현령(高成―)에 임명되었다.[4] 변방의 현이었기에 관습상 각 호(戶)마다 한 사람은 궁노를 갖추고 불의의 사태를 대비하면서 왕래도 하지 못했다. 지방관이라도 새로 부임하면 번번이 징발되어 성곽을 보수하기 일쑤였다. 육강이 이르러 이를 모조리 철폐하니 백성들이 기뻐했다. 은혜와 신의로써 다스리자 도적도 잠잠해지고 주군에서는 그 공적을 상표하였다.[5] 178년(광화 원년)에 무릉태수로 옮겼으며 이후 계양군과 낙안군(樂安郡)의 태수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칭송받았다.[5]185년(중평 2년),[22] 영제가 동상을 만드려는데 비용이 부족해 농토 한 무(畝, 묘)당 10전(錢)을 징수하고자 했다. 백성들은 수해와 한해(旱害)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차였다. 육강이 상소를 올려 간했다가 황제의 총명을 망국에 빗대 불경을 저질렀단 명목으로 모함을 받고는 함거(檻車)에 실려 잡혀갔다. 시어사(侍御史) 유대가 이 건을 맡아 살핀 덕분에 면직으로 그쳤다. 이후 의랑(議郞)으로 복귀하였다.[6]
한편 여강군에서는 180년에 황양(黃穰) 등이 강하만(江夏蠻, 강하군 일대의 만인)과 연계해 10여만 명을 일으켜서는 네 개 현을 침탈하고 수 년간 준동하였다.[23] 육강이 여강태수가 되어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손자 육상(陸尙)이 낭중(郎中) 벼슬을 받았다.[7] 시간이 흘러 헌제가 즉위한 이래 천하가 매우 혼란한데도 육강은 위험을 무릅써 효렴과 계리(計吏)를 조정에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충의장군(忠義將軍)이 더해져 관질이 중이천석(中二千石)에 이르렀다.[8]
194년(흥평 원년),[24] 구강군 수춘현(壽春縣)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원술은 서주를 치고 싶어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육강에게 3만 곡(斛)의 원조를 청했다. 원술은 반역자였으므로 육강은 통하지 않고 그 침략에 대비했다. 원술이 대노하여 부하 손책을 보내 여강을 수 겹으로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손책은 일찍이 육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육강이 아닌 주부(主簿)가 접대했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어오던 터였다.[25] 성밖의 휴가자들은 일단 숨었다가 야밤을 이용해 귀환하였다. 195년, 2년의 항전 끝에 결국 함락당했으며 한 달 정도 지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 70세였다.[9][10] 집안사람 100여 명은 고생하다 거의 절반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절개를 지키다 사망한 것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 육준(陸儁)을 낭중으로 삼았다.[17]
2. 2. 영제에게 올린 상소
육강은 영제에게 청동 조상 제작을 위한 세금 징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6] 육강은 백성들이 이미 자연재해로 고통받고 있으므로, 부역과 부세를 줄이고 번잡한 규율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6] 그는 노 선공이 세무(稅畝)를 실시하여 메뚜기 유충 떼를 당했고, 노 애공 때의 증세는 공자에게 지탄받았다는 역사적 사례를 들며,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쓸모없는 동상을 제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26] 또한, 《춘추좌씨전》의 구절을 인용하며 군주의 거동은 반드시 기록되므로, 법도에 맞지 않는 행동은 후세에 본받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26]당시 영제는 청동 조상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황실 재무부가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6] 이에 세금을 인상하고 민간에서 노동력을 징발하는 조서를 내렸다.[6] 육강의 상소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환관들은 육강이 황제를 비방하고 불경죄를 범했다고 고발하여, 육강은 체포되어 정위 관청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6] 그러나 시어사 유대가 육강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6]
2. 3. 여강태수 시절과 황양의 난 진압
오군태수 이숙(李肅)에게 효렴으로 뽑혀 군에서 근무했다. 이후 이숙이 죄를 받아 처형당하자 그 시체를 영천군까지 운구해 장사지냈다.[21] 그 의열함이 알려져 양주자사 장민(臧旻)으로부터 무재(茂才)로 천거되고 발해군 고성현령(高成―)에 임명됐다. 고성현은 매우 외진 곳이었고 치안이 좋지 않았다. 현의 모든 가구는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전의 현령들은 부임하면 백성들에게 성벽을 짓고 수리하도록 했다. 육강은 고성현에 도착한 후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고 현을 잘 다스려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으며 심지어 현에서는 범죄 행위가 사라졌다.[5] 178년(광화 원년)에 무릉태수로 옮겼으며 이후 계양군과 낙안군(樂安郡)의 태수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칭송받았다.185년(중평 2년),[22] 영제가 동상을 만드려는데 비용이 부족해 농토 한 무(畝, 묘)당 10전(錢)을 징수하고자 했다. 백성들은 수해와 한해(旱害)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차였다. 육강이 상소를 올려 간했다가 황제의 총명을 망국에 빗대 불경을 저질렀단 명목으로 모함을 받고는 함거(檻車)에 실려 잡혀갔다. 시어사(侍御史) 유대가 이 건을 맡아 살핀 덕분에 면직으로 그쳤다. 이후 의랑(議郞)으로 복귀하였다.[6]
180년경, 여강군에서는 황양(黃穰) 등이 강하만(江夏蠻, 강하군 일대의 만인)과 연계해 10여만 명을 일으켜서는 네 개 현을 침탈하고 수 년간 준동하였다.[23] 육강이 여강태수가 되어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손자 육상(陸尙)이 낭중(郎中) 벼슬을 받았다.[7] 시간이 흘러 헌제가 즉위한 이래 천하가 매우 혼란한데도 육강은 위험을 무릅써 효렴과 계리(計吏)를 조정에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충의장군(忠義將軍)이 더해져 관질이 중이천석(中二千石)에 이르렀다.[8]
194년(흥평 원년),[24] 구강군 수춘현(壽春縣)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원술은 서주를 치고 싶어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육강에게 3만 곡(斛)의 원조를 청했다. 원술은 반역자였으므로 육강은 통하지 않고 그 침략에 대비했다. 원술이 대노하여 부하 손책을 보내 여강을 수 겹으로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손책은 일찍이 육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육강이 아닌 주부(主簿)가 접대했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어오던 터였다.[25] 성밖의 휴가자들은 일단 숨었다가 야밤을 이용해 귀환하였다. 195년, 2년의 항전 끝에 결국 함락당했으며 한 달 정도 지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 70세였다.[9][10] 집안사람 100여 명은 고생하다 거의 절반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절개를 지키다 사망한 것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 육준(陸儁)을 낭중으로 삼았다.[17]
2. 4. 원술과의 대립과 최후
194년(흥평 원년),[24] 구강군 수춘현(壽春縣)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원술은 서주를 치고 싶어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육강에게 3만 곡(斛)의 원조를 청했다.[9] 원술은 반역자였으므로 육강은 통하지 않고 그 침략에 대비했다.[9] 원술이 대노하여 부하 손책을 보내 여강을 수 겹으로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9] 손책은 일찍이 육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육강이 아닌 주부(主簿)가 접대했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어오던 터였다.[25]195년, 2년의 항전 끝에 결국 함락당했으며[9] 한 달 정도 지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 70세였다.[9] 집안사람 100여 명은 고생하다 거의 절반이 죽었다.[9] 조정에서는 절개를 지키다 사망한 것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 육준(陸儁)을 낭중으로 삼았다.[17]
3. 가계
육강은 육속의 손자이자 지조가 있어 여러 번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은 육포의 아들이다.[27] 육강의 가문은 대대로 여강군에서 세력있는 호족이었다. 형제로는 성문교위(城門校尉)를 지낸 육우(陸紆)가 있었다. [27] 육우는 육손의 할아버지이다.
육강은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육준은 육강 사후 낭중이 되었고, 차남 육적은 손권 휘하에서 울림군 태수를 지낸 학자이자 24 효자 중 한 명이었다.[12][13] 육강은 고옹과 결혼한 딸이 있었으며, 고옹의 장남 고사는 어려서부터 외삼촌인 육적과 동등하게 유명했다.[14][28]
육강의 손자 육상(陸尙) 또한 낭중이 되었다.[15] 육강은 육손의 증조부로,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육손을 길렀다. 원술의 군대가 여강을 공격하려 하자 육강은 육손과 그의 가족들을 오현으로 돌려보냈다. 육강 사후, 육손은 육강의 아들 육적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가주가 되었다.[16]
육강의 가족과 친족은 약 100명이었으나, 후한 말 혼란기에 절반 이상이 기아 또는 전쟁으로 사망했다.[11]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참조
[1]
후한서
Houhanshu vol. 31
[2]
후한서
Houhanshu vol. 81
[3]
후한서
Houhanshu vol. 31
[4]
삼국지
Annotation from Xie Cheng's Houhanshu in Sanguozhi vol. 57
[5]
후한서
Houhanshu vol. 31
[6]
후한서
Houhanshu vol. 31
[7]
후한서
Houhanshu vol. 31
[8]
후한서
Houhanshu vol. 31
[9]
후한서
Houhanshu vol. 31
[10]
삼국지
Sanguozhi vol. 46
[11]
후한서
Houhanshu vol. 31
[12]
후한서
Houhanshu vol. 31
[13]
후한서
Houhanshu vol. 31
[14]
삼국지
Sanguozhi vol. 52
[15]
후한서
Houhanshu vol. 31
[16]
삼국지
Sanguozhi vol. 58
[17]
문서
陸康の死亡は興平元年(195年)と考えられる。この年の2月には[[長安]]で[[李傕]]と[[郭汜]]が内紛を始め、7月には献帝が長安を離れており、陸儁を郎中としたのが誰の意思によるものかは分からない。
[18]
삼국지
三国志巻58に「遜少孤,隨従祖廬江太守康在官」とある。
[19]
삼국지
三国志巻57に「瑁従父績」とある。
[20]
삼국지
三国志巻61に「丞相遜族子也」とある。
[21]
삼국지
배송지 주석, 《[[삼국지]]》57권 오서 제12 육적에서 인용
[22]
후한서
《후한서》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
[23]
후한서
《후한서》86권 열전 제76 [[남만]]
[24]
문서
[[#원술에게 공격받은 해]] 참조
[25]
삼국지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책
[26]
문서
비슷한 시기 [[순열 (후한)|순열]]도 《전한기》(前漢紀, 한기)에서 군주를 여섯 유형으로 분류하며 쇠주에 대해 논한 바 있다.
[27]
삼국지
배송지 주석, 《육씨세공》(陸氏世頌) ; 삼국지58권 오서 제13 육손에서 인용
[28]
삼국지
《삼국지》52권 오서 제7 고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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