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윤계 (1583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계는 1583년(선조 16년)에 태어나 병자호란 때 순절한 조선의 문신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척화와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같은 해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이조 좌랑 등을 거쳐 1636년 남양부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주장하며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청나라 군에게 붙잡혀 귀순 권유를 거부하고 저항하다 순절했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신 정문이 세워졌으며, 시호는 충간이다. 경기도 용인에 묘소가 있으며, 1668년(현종 9) 경기도 화성 남양읍에 윤계 선생 순절비가 건립되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동생 윤집은 삼학사 중 한 명이다.

2. 생애

윤계는 1583년(선조 16년)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 윤섬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동생 윤집삼학사 중 한 명으로 순절하는 등 충절로 이름 높았다. 윤계는 162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척화와 항전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636년 남양 부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척화론을 굳게 지키며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혔다. 그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가 순절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신으로 기려져 정려문과 순절비가 세워졌다.

2. 1. 생애 초반

1583년(선조 16년) 현감을 지낸 아버지 윤형갑(尹衡甲)과 관찰사 황치경(黃致敬)의 딸인 창원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지중추부사를 지낸 윤우신(尹又新)이며, 할아버지는 교리를 지낸 윤섬이다.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 중 한 명인 윤집은 그의 동생이었다. 부인은 박정원(朴鼎元)의 딸이다.

1624년(인조 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상소하여 척화와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를 거쳐 홍문관 교리, 성균관 전적,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1629년에는 이조 좌랑이 되었고, 1636년에는 남양 부사가 되었다.

2. 2. 병자호란과 순절

1636년 겨울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자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혔다. 그는 귀순을 권유하는 청나라 군사에게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몸에 난도질을 당하여 순절하였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그의 친동생 윤집 역시 청나라와의 화의를 강경하게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옥사하여 삼학사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다.

2. 3. 사후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청덕리(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에 안장되었으며, 묘소 근처에 충신정려문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할아버지 윤섬, 삼학사 중 한 명인 윤집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하다 순절한 윤계를 '한 집안 세 충신'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기렸다.

1668년(현종 9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화성시 남양읍)에 윤계선생 순절비가 세워졌다. 당시 의정부우의정이었던 송시열이 비문의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석 앞면의 이름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썼다. 윤계선생 순절비는 후에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3. 가계


  • 증조부 : 윤우신(尹又新) - 지중추부사

할아버지** : 윤섬(尹暹) - 용성부원군, 임진왜란 때 순절
* 아버지** : 윤형갑(尹衡甲) - 현감
* 어머니** : 창원 황씨(昌原 黃氏) - 관찰사 황치경(黃致敬)의 딸
동생 : 윤집(尹集) - 삼학사 중 한 명으로, 병자호란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하였다.
동생 : 윤유(尹柔)
부인 : 동래 정씨(東萊 鄭氏) - 정세미(鄭世美)의 딸
* 아들 : 윤이흠(尹以欽)
* 아들 : 윤이명(尹以明) - 현감
부인 : 반남 박씨(潘南 朴氏) - 박정원(朴鼎元)의 딸
부인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김덕민(金德民)의 딸

4. 평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남한산성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인조를 구원하러 가던 중 청군에게 붙잡혔다. 청군이 회유하며 귀순을 권했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항거하다가 참혹하게 살해당하며 순절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려 사후 즉시 이조참판추증되었고, 충신임을 나타내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으로 내려졌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윤계의 충절은 개인에 그치지 않고 가문의 영광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할아버지 윤섬,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삼학사 중 한 명인 동생 윤집과 더불어, 윤계는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가문의 일원으로 후대에까지 널리 추앙받았다.

1668년(현종 9년)에는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윤계선생 순절비가 세워졌다. 이 비석의 비문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우암 송시열이 짓고, 명필로 이름 높던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석 앞면의 제자(題字)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썼다. 이 순절비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5. 기념물

윤계의 시신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청덕리(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에 안장되었고, 충신정려문은 묘소 근처에 세워졌다.

1668년(현종 9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화성시 남양동)에 윤계선생 순절비가 세워졌다. 당시 의정부 우의정이었던 송시열이 비문의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석의 앞면 이름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썼다. 윤계선생 순절비는 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