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나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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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아나 (1909-2004)는 네덜란드의 여왕으로, 빌헬미나 여왕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헨드릭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다. 1948년 어머니의 퇴위 후 여왕으로 즉위하여 사회 복지에 힘쓰고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를 자치령으로 삼는 등 통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캐나다로 망명하여 생활하기도 했으며, 1980년 퇴위 후에는 장녀 베아트릭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율리아나는 1937년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와 결혼하여 네 명의 딸을 두었으며, 2004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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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나 (네덜란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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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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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율리아나 루이제 에마 마리 빌헬미나 판 오라녜나사우 |
출생일 | 1909년 4월 30일 |
출생지 | 노르데인데 궁전, 덴하흐, 네덜란드 |
사망일 | 2004년 3월 20일 (향년 94세) |
사망지 | 쇠스트데이크 궁전, 바른, 네덜란드 |
매장일 | 2004년 3월 30일 |
매장지 | 델프트 신교회, 네덜란드 |
종교 | 개혁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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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정보 | |
군주 | 네덜란드 여왕 |
재위 기간 | 1948년 9월 4일 ~ 1980년 4월 30일 |
즉위식 | 1948년 9월 6일 |
즉위식 장소 | 암스테르담 신교회 |
이전 군주 | 빌헬미나 |
다음 군주 | 베아트릭스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베른하르트 판 리페비스터펠트 (1937년 1월 7일 결혼) |
자녀 | 베아트릭스 이레네 마르흐리트 크리스티나 |
왕가 | 오라녜나사우 가문 |
아버지 | 하인리히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어머니 | 빌헬미나 |
2. 생애
1909년 4월 30일 헤이그의 노르데인데 궁전에서 빌헬미나 여왕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헨드릭 공작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았으며, 라이덴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고 18세가 되던 해 국무원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과 결혼하여 베아트릭스, 이레네, 마르흐리트, 크리스티나 등 네 명의 딸을 낳았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율리아나는 딸들과 함께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캐나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 1948년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이 건강 악화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재위 기간 동안 국내적으로는 사회복지 증진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하고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와 수리남 등 식민지의 지위를 재정립하는 탈식민화 과정을 진행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들과 소통하려는 소탈한 모습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80년 4월 30일, 71세 생일에 큰딸 베아트릭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퇴위 후에도 공적인 활동을 이어가다가 2004년 3월 20일 바른의 수스트데이크 궁전에서 향년 94세로 서거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율리아나는 1909년 4월 30일 헤이그의 노르데인데 궁전에서 네덜란드 군주 빌헬미나 여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헨리였다.[1] 율리아나는 1880년 빌헬미나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태어난 네덜란드 왕족 아기였다. 빌헬미나는 두 번의 유산과 한 번의 사산을 겪었으며, 왕위 계승 위기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로이스-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32세 공자였는데, 그는 독일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인기가 없었다. 따라서 율리아나의 출생은 왕실의 생존을 보장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율리아나가 태어난 후 두 번 더 유산을 겪었고, 율리아나는 왕실 부부의 외동딸로 남았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율리아나는 외동딸이어서 관심을 덜 받기 때문에 행복했다고 한다.[2]
율리아나는 어린 시절을 아펠도른의 헤트 로 궁전과 헤이그의 노르데인데 궁전, 호이스 텐 보쉬 궁전에서 보냈다. 교육자 얀 리트하르트의 조언에 따라 여섯 살부터 공주가 또래 아이들과 함께 초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르데인데 궁전에 작은 학교 수업이 편성되었다. 이 아이들은 엘리제 벤팅크 남작 부인, 엘리자베트 판 하르덴브로크 남작 부인, 용프라우 미에크 (메리) 드 용에였다.

네덜란드 헌법에 율리아나 공주가 18세가 되면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교육은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5년간의 초등 교육을 받은 후, 공주는 사립 가정교사로부터 중등 교육(대학교 예비 과정)을 받았다.
1927년 4월 30일, 율리아나 공주는 18번째 생일을 맞았다. 헌법에 따라 그녀는 공식적으로 성년이 되었고, 필요한 경우 왕실의 대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었다. 이틀 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라드 반 스테이트"("국무원")에 임명했다.
같은 해, 공주는 라이덴 대학교에 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녀는 사회학, 법학, 경제학, 종교사, 의회 역사, 헌법 강의를 들었다. 또한 그녀는 수리남과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의 문화, 국제 문제, 국제법, 역사, 유럽법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그녀는 대학교 최초의 여성 교수인 소피아 안토니아디스로부터 그리스 문학을 배웠다. 그녀는 1930년 국제법 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를 졸업했다.[14]
2. 2. 결혼과 가족
1937년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와 결혼하여 네 명의 딸을 낳았다.1930년대에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은 율리아나에게 적합한 남편감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매우 엄격한 종교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개신교 신자인 왕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영국과 스웨덴의 왕자들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여러 이유로 성사되지 못했다.
1936년 동계 올림픽에서 율리아나는 7촌 관계인 젊은 독일 왕자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을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안할트-체이츠-호임의 레브레히트 공의 후손이었다.[14] 베른하르트 공의 신분과 종교가 조건에 맞았기에, 빌헬미나 여왕은 둘의 약혼을 추진했다. 율리아나 공주는 베른하르트와 깊은 사랑에 빠졌으며, 이 감정은 이후 전쟁으로 인한 이별이나 베른하르트의 혼외 관계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평생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빌헬미나 여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변호사를 통해 독일 출신인 베른하르트 공의 권한과 왕실 재산에서의 지원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혼전 계약을 준비했다. 두 사람의 약혼은 1936년 9월 8일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네덜란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독일 왕자와의 결혼 발표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혼을 앞둔 1936년 11월 24일, 베른하르트 공은 네덜란드 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이름 표기도 독일식에서 네덜란드식으로 변경했다.
두 사람은 1937년 1월 7일 헤이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날은 율리아나의 조부모인 빌렘 3세 국왕과 발데크-피르몬트의 엠마 왕비가 결혼한 지 5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시민 결혼식은 헤이그 시청에서, 종교 예식은 헤이그의 대교회(성 야콥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율리아나와 베른하르트 사이에서는 네 명의 딸이 태어났다.
- 베아트릭스 공주: 1938년 1월 31일 출생. 훗날 어머니의 뒤를 이어 여왕이 된다.
- 이레네 공주: 1939년 8월 5일 출생.
- 마르흐리트 공주: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1월 19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출생.[21]
- 크리스티나 공주: 1947년 2월 18일 출생.
1940년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왕실 가족은 망명길에 올랐다. 율리아나는 처음에는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과 함께 영국으로 피신했으나, 이후 여왕의 배려로 딸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다시 망명했다. 당시 캐나다 총독 부인이었던 앨리스 공주는 빌헬미나 여왕의 사촌으로, 율리아나와 아이들은 그녀에게 의지하며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캐나다에서 지냈다.[21] 셋째 딸 마르흐리트 공주는 이 망명 시기에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2. 3. 캐나다 망명
1940년 5월 12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 당시, 율리아나 공주와 남편 베른하르트 공은 영국으로 먼저 대피했다. 다음 날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과 네덜란드 정부가 뒤따라와 런던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율리아나 공주는 딸 베아트릭스, 이레네와 함께 영국에 한 달간 머물다가, 더 안전한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로 이동하여 록클리프 공원 교외의 스토노웨이 저택에 거주했다. 이는 빌헬미나 여왕의 사촌이자 당시 캐나다 총독 애슬론 경의 부인인 앨리스 오브 올버니 공주의 배려 덕분이었다[21].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과 남편 베른하르트 공은 네덜란드 망명 정부와 함께 영국에 남았다.[4]
1943년 1월 19일, 셋째 딸 마르흐리트 공주가 오타와 시민 병원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총독 애슬론 경은 왕실 재가를 받아 특별법을 공포하여, 율리아나 공주가 머물던 병실을 일시적으로 치외 법권 지역으로 선포했다. 이 조치 덕분에 마르흐리트 공주는 이중 국적 문제가 아닌 순수한 네덜란드 국적만을 가질 수 있었고, 네덜란드 왕위 계승 서열에 오를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5] 캐나다 정부는 마르흐리트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며 의회 평화의 탑에 네덜란드 삼색기를 게양했고, 캐릴론으로 네덜란드 음악을 연주했다. 영국에 있던 베른하르트 공도 캐나다를 방문하여 딸의 탄생을 함께했다.

율리아나 공주의 진심 어린 태도와 캐나다 측의 따뜻한 환대는 네덜란드와 캐나다 사이에 지속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유대감은 1944년과 1945년 사이 수천 명의 캐나다 군인들이 나치로부터 네덜란드를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희생되면서 더욱 깊어졌다.
1945년 5월 2일, 율리아나 공주는 빌헬미나 여왕과 함께 군 수송기를 타고 해방된 네덜란드 남부 지역으로 돌아와 브레다 인근 앤빌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임시 네덜란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귀국 후, 율리아나 공주는 캐나다 국민들의 환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오타와 시에 튤립 구근 10만 개를 보냈다. 1946년에는 20,500개의 구근을 추가로 기증하며, 일부는 마르흐리트 공주가 태어난 오타와 시민 병원 부지에 심어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그녀는 캐나다의 전시 환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평생 동안 매년 오타와에 튤립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선물은 오늘날 매년 오타와에서 열리는 캐나다 튤립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율리아나 공주는 오타와에 거주하는 동안의 환대에 감사하며 세인트 앤드류 장로교회 (오타와)에 나무 강단과 기념 명판을 헌정했다.
귀국 후 율리아나 공주는 1944년~1945년의 기근의 겨울 동안 극심한 굶주림을 겪었던 북부 지역 주민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의 네덜란드 지부 회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국가 재건 노력에 기여했고, 소탈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네덜란드 국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2. 4. 여왕 즉위와 통치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직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율리아나는 1947년 10월 14일부터 12월 1일까지 섭정 역할을 맡았다. 빌헬미나 여왕은 1947년 말 퇴위를 고려했으나, 율리아나는 어머니가 1948년 금혼식을 기념할 수 있도록 왕위에 머물기를 청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빌헬미나 여왕은 1948년 5월 4일 다시 율리아나에게 왕실 업무를 넘겨야 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탈식민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독립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15만 명이 넘는 네덜란드 군대가 주둔해 있던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네덜란드에게 큰 경제적 타격으로 여겨졌다. 결국 식민지를 잃게 될 것이 확실해지자, 빌헬미나 여왕은 퇴위 의사를 밝혔고 1948년 9월 4일 퇴위했다. 이틀 후, 율리아나는 암스테르담의 신교회에서 열린 국회 합동 회의에서 선서하고 즉위하여, 오라녜 가문의 12번째 통치자가 되었다.

1949년 12월 27일, 율리아나 여왕은 암스테르담의 담 궁전에서 이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이로써 그녀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 (1949–1956)의 연합 수장(Hoofd der Unienl)이 되었다. 1954년 12월 15일에는 카리브해의 네덜란드령 안틸레스(현재의 퀴라소 등)와 수리남을 네덜란드 왕국의 구성 국가로 재편하여 본토와 동등한 파트너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복지 증진에 힘썼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셋째 딸 크리스티나 공주의 시력 저하 문제와 관련하여 왕궁에 들어온 종교 치료사 호프만스(Grebbe Hofmans)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국가적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율리아나 여왕은 소탈한 모습으로 국민들과 소통하려 노력하며 논란을 일부 잠재웠다. 평범한 네덜란드 여성처럼 옷을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나거나, 공식 칭호인 "폐하" 대신 "메브라우(Mevrouw, 네덜란드어로 '부인')"로 불리기를 선호했으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이러한 소탈함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 네덜란드 왕실은 여전히 화려한 의전과 행사를 유지했다. 웅장한 제복을 입은 시종, 금박 마차, 호화로운 연회 등이 그것이다. 동시에 여왕은 예고 없이 사회 기관이나 학교를 방문하여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자 노력했다. 국제적으로는 개발도상국의 문제, 난민 문제, 특히 개발도상국 아동 복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53년 1월 31일 밤, 네덜란드는 500년 만의 가장 파괴적인 폭풍에 휩쓸렸다. 30곳 이상의 모래 언덕과 제방이 붕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 3.66m 높이의 폭풍 해일에 휩쓸렸다. 1,800명 이상이 익사하고 수만 명이 홍수에 갇혔다. 율리아나 여왕은 장화와 낡은 코트를 입고 파괴된 지역 곳곳의 물속을 걸어 다니며 깊은 진흙탕을 헤치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을 가져다주었다. 동정심과 관심을 보이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은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영원히 호감을 사게 했다.

1956년, 호프만스가 여왕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란이 다시 불거지면서 헌법적 위기로까지 번졌다. 왕실 내부는 호프만스를 종교적 광신자이자 나토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며 여왕을 견제하려는 남편 베른하르트 공 중심의 파벌과, 여왕의 독실하고 평화주의적인 측근들로 분열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빌럼 드리스가 위기를 해결했다. 그러나 율리아나는 강력한 남편과 그의 친구들에게 졌고, 호프만스는 궁정에서 추방되었으며 율리아나의 지지자들은 해고되거나 연금을 받게 되었다. 베른하르트 공은 아내와 이혼할 계획을 세웠지만, 미국 기자에게 "그 여자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만두기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1963년, 율리아나 여왕은 그녀의 개신교 시민들 사이에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그녀의 둘째 딸 이레네 공주가 비밀리에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고, 1964년 4월 29일 정부의 승인 없이 파르마 공작 카를로스 우고와 결혼했다. 그는 부르봉 가문의 일원이자 스페인 왕위 요구자였으며, 스페인의 칼리스트 당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 스페인으로부터의 네덜란드 독립 투쟁의 역사와 파시스트 독일의 억압이 네덜란드 국민의 마음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결혼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은 모든 신문에 보도되었고, 왕실이 이를 허용한 것에 대한 적대감의 폭풍이 일어났다. 이 문제는 너무 심각해서 여왕의 퇴위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년간 얻어온 변함없는 헌신 덕분에 살아남았다.
1965년 7월, 왕위 계승자인 베아트릭스 공주와 독일 외교관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의 약혼 발표로 인해 또 다른 위기가 발생했다. 미래 여왕의 미래 남편은 나치 국방군과 히틀러 유겐트 운동의 멤버였다. 많은 분노한 네덜란드 시민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고, "반역자" 사건에 반대하는 집회와 행진을 열었다. 이번에는 여왕의 퇴위 요구는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의 진정한 분노의 대상인 베아트릭스 공주가 그 당시 여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예 왕정을 유지하는 것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취소하려 시도한 후, 율리아나 여왕은 동의했고, 결혼은 계속되는 항의의 폭풍 속에서 이루어졌다. 베아트릭스 공주가 오라녜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거의 확실한 분위기가 네덜란드 전역에 만연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율리아나 여왕 개인에 대한 인기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여왕은 예의 바름과 친절함으로 유명했다. 예를 들어, 1959년 5월, 폴란드계 미국인 UFO 연구가 조지 아담스키는 네덜란드 미확인 비행 물체 협회 회장 레이 다킬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율리아나 여왕의 궁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으며 "여왕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6] 아담스키는 런던 신문에 이 초대에 대해 알렸고, 이에 궁정과 내각은 여왕에게 아담스키와의 만남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여왕은 "주인은 손님 앞에서 문을 쾅 닫을 수 없다"고 말하며 만남을 강행했다.[6] 만남 이후, 네덜란드 항공 협회 회장 코르넬리스 콜프는 "여왕은 이 문제 전체에 대해 놀라운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6] 네덜란드 언론은 더 솔직하게 표현했다. 타임지에 따르면, 신문 폴크스크란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네덜란드 언론은 지난주 사실을 은폐했다고 비난받을 수 없었습니다. 율리아나 여왕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약점은 그녀를 다시 헤드라인에 올렸습니다. 그녀는 화성, 금성 및 기타 태양계 교외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친구로 둔 캘리포니아 출신의 괴짜를 궁전에 초대했습니다."[7]
1967년 4월의 한 사건은 네덜란드 경제의 개선에 힘입어 하룻밤 사이에 왕실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바로 네덜란드 왕위의 116년 만의 첫 남성 상속자인 빌럼알렉산더르가 베아트릭스 공주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거리에서의 시위는 사랑과 열정의 시위였다.
1980년, 율리아나 여왕은 71세의 나이로 퇴위하고 장녀인 베아트릭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 5. 퇴위 이후
1980년 4월 30일, 그녀의 71번째 생일에 율리아나 여왕은 퇴위했고 그녀의 장녀인 베아트릭스가 왕위를 계승했다.[10] 퇴위 후에도 율리아나는 80대 초반까지 수많은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율리아나 여왕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몬테 아르젠타리오를 매우 좋아했으며, 이곳은 40년 이상 네덜란드 왕가가 여름 휴가를 보내는 장소였다.[11][12]
2004년 3월 20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바른의 수스트데이크 궁전에서 생애를 마쳤다.
3. 유산 및 평가
율리아나 공주가 태어난 직후, 덴헬더 근처의 작은 마을 주민들은 빌헬미나 여왕에게 공주의 이름을 따 마을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고, 여왕의 허가를 받아 마을 이름을 율리아나도르프로 정했다.[20]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에 있는 율리아나 공원(Princess Juliana Park|영어)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세인트마틴의 프린세스 율리아나 국제공항 역시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또한 빌렘스타트의 율리아나 여왕 다리와 소행성 816 율리아나도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4. 자녀
(2002년 사별)
요한 프리소
콘스탄테인

(1981년 이혼)
마르가리타
하이메
마리아 카롤리나

베른하르트
피터르크리스티안
플로리스

(1996년 이혼)
니콜라스 기예르모
훌리아나 기예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