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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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계는 1587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영주의 학자 권호신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17년 이이첨 탄핵 상소를 올리고 인목대비와 기자헌을 탄핵하는 상소에 참여하는 등 광해군 시대 정치 활동을 했다. 인조반정 이후 1648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허균의 옥사와 관련되어 언급되기도 했으며, 1623년에는 남인 유림에 의해 집이 훼손되는 등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사후에는 그의 증손 이수팽이 노인직에 올라 장악원정에 추증되었다.
이광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587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났으며, 북인 계열의 인물로 광해군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는 성균관 유생 시절 이이첨을 옹호하고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하는 등 북인 정권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4][5][3][8][9][10]
2. 생애
영주의 학자 권호신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응조, 금시해 등과 교류하였다.[2] 1617년에는 이이첨을 탄핵한 귀천군 이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인목대비의 죄를 규탄하고 폐위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연명 상소에도 참여하였다.[4][5][3][8][9][10]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그의 정치적 활동도 막을 내렸다. 반정 직후 영천 지역의 남인 세력에 의해 집이 허물어지고 고향에서 쫓겨나는 '훼가출향(毁家黜鄕)'을 당하는 등 큰 시련을 겪었다.[12] 이후 정치적으로 재기하지 못하였으나, 1648년 식년 사마시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13]
남인과의 당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한 탓에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잊혔으나, 1970년대 이후 조선왕조실록 등 고문헌의 국역 과정에서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사후 증손 이수팽이 노인직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오르면서 증 장악원정에 추증되었다.[14]
2. 1. 출생과 가계
1587년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마방목에는 그가 영천(榮川)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장사랑과 선무랑 벼슬을 지낸 우백(友白)이며, 어머니는 선성김씨(宣城金氏)로 김담의 후손인 참봉 낙선(樂善)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절충장군 겸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유(李庾)이고, 할머니 역시 선성김씨(宣城金氏)로 김담의 후손인 첨추 김대(金<0xE7><0x8E><0x8B>+代)의 딸이다. 그는 도촌 이수형의 6대손이며, 이수형의 차남으로 전설서 별좌를 지낸 양근(養根)의 5대손에 해당한다.
그는 관학 유생 시절 북인 계열의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남인 계열 인사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970년대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연구원 등에서 조선왕조실록,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등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자(字)는 오랫동안 미상이었으나, 2000년 사마방목이 국역되면서 밝혀졌다. 또한 안정구(安廷球)가 쓴 순흥 지역 향토지인 《재향지》에도 그의 자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 역시 2000년대 이후 고문헌의 한글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그의 할머니인 선성김씨는 1612년까지 생존해 있었다. 김택룡이 자신의 일기인 《조성당일기》에 1612년 3월 16일 자로 '첨지 이유(李庾)를 만나 그의 아내 상(喪)에 조문했다. 장자인 희백(希白)은 외출 중이었고, 차자인 우백(友白)이 첨지와 함께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첨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하여[1] 할머니의 사망 시점이 확인되었다.
2. 2. 청년기
영주의 학자 도은 권호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스승 관계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권호신의 아들 동암 권성오의 저서 『동암문집』 권4 잡저편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권호신은 후진을 가르쳤는데, 이광계는 학사 김응조, 아양 금시해, 그리고 스승의 아들인 권성오와 함께 나이도 같고 학문도 같이한 동문이었다.[2]
또한, 이광계의 사촌 형 이광전, 종6대조 이성근(李盛根)의 증손자로 비슷한 또래였던 이여혐(李汝香+兼) 역시 같은 시기 권호신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다. 이 외에도 김경조(金慶祖), 금시조(琴是調), 이성건 등이 나이가 비슷하면서 학문을 같이 했으며, 김연조(金延祖)는 수업은 들었으나 어울리지는 않았고, 김염조(金念祖)는 가장 늦게 문하에 들어왔다. 이들 중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이 열 명이고,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세 명이었다.[2]
권성오의 기록에는 명경과에 합격한 김유, 박사 장준, 남균 등도 동문 후진으로 언급되며, 이희, 이담, 이?(이름 미상) 세 명의 사마시 합격자 역시 이성건의 집안 사람으로 함께 언급된다.[2] 이광계는 스승의 아들 권성오, 사촌 형 이광전, 삼종증조부뻘인 이여혐, 학사 김응조, 아양 금시해, 11촌 아저씨뻘인 이성건 등과 가깝게 지냈다.
한편, 스승 권호신은 이광계와 인척 관계이기도 했는데, 권호신의 동생 권준신이 이광계의 종5대조 이대근(李大根)의 손자 이효량의 사위였다.
2. 3. 활동
유학(儒學)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관학 유생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년) 1월 7일, 종실인 귀천군 이수(龜川君 李晬) 등이 이이첨을 탄핵하자, 이광계는 귀천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귀천군 이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이이첨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귀천군과 임해군의 친분, 윤선도와의 친인척 관계, 심우영(沈友英)이 역적이 아니라고 발언한 점 등을 지적하며 역공격을 펼쳤다.[4][5][3] 이 상소로 인해 1월 16일 병조 참판 이병(李覮)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직을 요청하기도 했다.[6][7]
같은 해 11월 25일, 이광계는 관학 유생 김상하(金尙夏), 신경함(申景涵), 이영구(李榮久), 최흘(崔屹), 금대아(琴大雅), 남길(南佶), 금대진(琴大進) 등 110여 명과 함께 인목대비의 죄상 9가지와 기자헌을 탄핵하는 상소에 서명하였다.[8][9] 이어 12월 13일에는 강원도 생원 박홍익(朴弘益), 진사 최광필(崔光弼), 유학 김상건(金尙鍵), 송석명(宋錫命), 원급(元汲), 이극성(李克誠), 최광달(崔光達) 등과 연명 상소를 올려, 인목대비를 여태후, 측천무후와 같은 악인으로 규탄하고 기자헌, 이항복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
1618년에는 허균의 옥사와 관련하여, 이강(李茳)의 공초(供招, 죄인이 죄상을 진술하는 것)에서 이광계가 이강의 부탁을 받고 황적(黃賊)을 유적(儒籍, 유생 명부)에서 삭제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11]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이후 3월 28일, 영천 지역의 일부 남인계 유림들이 수백 명을 동원하여 이강(李茳), 이장(李藏), 이영구(李榮久), 금대아(琴大雅), 이잠(李土+岑), 이광계(李光啓), 이광렬(李光烈) 등 북인계 인사들의 집을 허무는 훼가출향(毁家黜鄕,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쫓아냄) 조치를 단행했다.[12] 이때 이광계의 집도 훼손되었으며, 남인계 인사들은 향회(鄕會, 향촌 자치 회의)를 열어 북인계 인사들을 추방하였다.
1648년(인조 26년)에는 식년 사마시 생원시에 3등 8위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13] 그가 무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사실은 안정복의 저서 《재향지(梓鄕誌)》에 기록되어 있었으며, 이는 2000년대 이후 사마방목(司馬榜目, 생원·진사시 합격자 명단)이 발견되고 번역, 정리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2. 4. 인조반정 이후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3월 28일 영천 지역의 일부 남인 계열 유림들이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이강(李茳), 이장(李藏), 이영구(李榮久), 금대아(琴大雅), 이잠(李土+岑), 이광계(李光啓), 이광렬(李光烈) 등 북인계 인사들의 집을 허물고 고향에서 쫓아내는 '훼가출향(毁家黜鄕)' 조치를 단행했다.[12] 이 사건으로 그의 집도 파괴되었으며, 남인들은 향회를 열어 북인들을 추방했다.
이후 1648년(인조 26년)에는 식년사마시 생원시에 3등 8위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13] 그가 무자년(1648년) 생원시에 합격한 사실은 안정구의 재향지에 기록되어 있었으며, 이는 2000년대 이후 사마방목이 번역, 정리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2. 5. 사후
그의 장지와 묘소는 미상이다. 남인과의 당쟁에서 패하고 몰락한 연유로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 1970년대 이후 고전 문헌이 한글화되면서 그의 행적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고, 일부 문헌의 공개로 그의 사승관계, 자호 등이 드러나게 되었다.
후일 증손 이수팽(李壽彭)이 노인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로 재직하게 되면서, 그는 증 장악원정에 추증되었다. 증손 이수팽이 노인직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재직한 사실은 각사등록 동영장계등록편 1758년 1월 24일조에 실려 있다. 영조가 정조(正朝)에 세찬(歲饌)을 내려줄 당시 원주에 살던 그의 증손 이수팽(李壽彭)은 96세였으며[14], 영조는 이수팽에게 쌀 4두 5도, 대구 2마리, 소금 2두를 하사했다. 이수팽의 묘소는 원주 사자동 자좌, 현재의 영월군 수주면 시자산에 있다.
참조
[1]
서적
선조조성당일록 일(先祖操省堂日錄 一)권
1612-03-16
[2]
서적
도촌견문록(陶村聞見錄)
[3]
서적
국조편년 (國朝編年)
null
[4]
역사기록
이광계가 귀천군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1617-01-07
[5]
역사기록
이광계가 귀천군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1617-01-07
[6]
역사기록
이병이 역적과 같은 무리라는 상소로 인해 사직하기를 상소하다
1617-01-16
[7]
역사기록
이병이 역적과 같은 무리라는 상소로 인해 사직하기를 상소하다
1617-01-16
[8]
역사기록
관학 유생들의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
1617-11-25
[9]
역사기록
관학 유생들의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
1617-11-25
[10]
역사기록
기자헌 이항복의 참형을 청하는 생원 진사 유학들의 상소
1617-12-13
[11]
역사기록
정국하여 한천정을 신문하자 불복하고 죽다
1618-11-12
[12]
논문
17세기 지방 儒生들의 士林儒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8
[13]
서적
무자식년사마방목(戊子式年司馬榜目), 이광계 편
[14]
역사기록
동영장계등록(東營狀啓謄錄)
175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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