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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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담은 조선 세종, 문종, 세조 시대를 거친 문신이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월력 연구가로, 예안 김씨이며 자는 거원, 호는 무송헌이다. 이순지 등과 함께 칠정산외편을 저술하여 조선의 달력 역법 발전에 기여했으며, 세종의 명으로 간의규표, 앙부일철 등 천문 관측 기구 개발에도 참여했다. 1435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집현전 정자를 거쳐 안동부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사후 문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광해군 때 향현사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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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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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김담 |
한자 이름 | 金淡 |
호 | 무송헌(撫松軒) |
자 | 거원(巨源)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416년 12월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영주 |
사망일 | 1464년 7월 10일(49세)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영주 |
거주지 | |
거주지 | 조선 경상도 영주 조선 경기도 파주 조선 한성부 조선 경상도 경주 |
신상 정보 | |
본관 | 예안 |
배우자 | 문씨 부인 |
자녀 | 김사문(장남), 김사명(차남) |
부모 | 김소량(부), 평해 황씨 부인(모) |
친인척 | 조부 김로, 숙부 김숙량, 사촌 김지, 외조부 황유정, 사위 이수형, 조카 김수손 |
학력 및 관직 | |
학력 | 1435년(세종 17) 정시문과 병과 급제 |
직책 | 조선의 사헌부 장령 |
재임 기간 | 1451년~1451년 |
임금 | 조선 문종 |
직책 2 | 조선의 이조 판서 |
재임 기간 2 | 1463년~1464년 |
임금 2 | 조선 세조 |
직책 3 | 조선의 중추원 예하 중추원사 |
재임 기간 3 | 1464년~1464년 |
임금 3 | 조선 세조 |
정치 성향 및 관심 분야 | |
정당 | 무소속 |
분야 | 성리학 수학 천문학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나우루 공식 홈페이지 |
2. 주요 이력
예안 김씨로,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다. 세종, 문종, 세조 때의 문신이자 천문학자, 지리학자이자 월력 연구가이다.[1] 이순지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월력과 천문을 연구하였다. 세종대왕의 왕명으로 이순지와 함께 《회회력(回回曆)》을 참고하여 칠정산외편을 저술했으며, 이것은 조선을 기준으로 하는 최초의 달력 역법(曆法)이다.
김담의 조부 김로(金輅)는 고려때 좌우위보승랑장으로 고려 절신이고, 아버지는 영유현령을 지낸 김소량(金小良)이다. 어머니는 평해 황씨(平海 黃氏)로 고려 때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의 딸이다. 세 명의 판서를 배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 저택을 지역 사람들은 '삼판서 댁(三判書宅, 삼판서 옛집)'이라고 불렀다.[1]
1435년(세종 17) 과거에 급제했다.[2] 급제 이후 홍문관정자, 집현전 정자가 되었으며, 1433년 이순지와 함께 조선의 달력인 칠정산내편을 편찬하였다. 이후 1447년 중시(重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다.[3] 이순지와 함께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ㆍ역법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장영실, 이순지, 이위 등과 함께 간의규표, 앙부일철, 자격루 등의 천문 관측 기구의 개발에도 참여하였다. 박팽년, 하위지 등과 친분이 있었으며 이들과 담론하며 시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가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세조 반정 이후 반정에 동조하지는 않았으나 관직에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외직을 자청하여 안동부사, 예조 참의, 경주부윤, 충주목사 등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했고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3. 생애
3. 1. 생애 초반
김담은 1416년(태종 16) 12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김방식은 고려에서 봉선대부 비순위정용호군을 지냈고, 할아버지 김로는 좌우위보승낭장을 역임했다. 아버지 김소량은 선무랑 영유현령이었는데, 김담의 출세로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조부와 증조부 또한 김담의 출세로 각각 가선대부 호조참판,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평해 황씨로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의 딸이다. 정도전은 어머니의 외삼촌으로, 김담에게는 외외종조부가 된다. 형 김증(金曾)은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홍무정운을 번역하고 역대병요를 편찬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영주 삼판서고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8세(1434년)에 한양으로 올라갔다. 1435년(세종 17) 형 김증과 함께 문과에 급제, 형제가 나란히 집현전 정9품 정자에 임명되었다. 집현전 학사 99인 중 형제가 나란히 집현전에 선발된 것은 유일한 사례이다.
3. 2. 관료 생활 초반
1435년(세종 17) 문과 정시(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사랑 집현전(후에 홍문관) 정자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임명되었다. 형 김증도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이순지(李純之)가 간의대(簡儀臺)에서 천문학을 관측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자 그 일을 대신 맡았다.
집현전학사로 있으면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특히 천문과 관측 분야에 뛰어나 간의대(簡儀臺)로 발령받아 이후 간의대에서 활약, 1433년(세종 15년)에는 17세에 세종의 명으로 이순지와 함께 달력 연구에 참여하였다. 이순지와 함께 해와 달의 기울음을 연구한 뒤 원나라의 접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종합하여 조선편 달력 칠정산내편을 간행하였다. 세종대왕의 신뢰를 얻어 이순지, 이위, 장영실 등과 함께 간의규표, 앙부일철, 자격루 등의 천문 관측 기구를 개발하였다. 김담은 천문·지리·풍수 등에 두루 박식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성삼문, 신숙주, 장영실, 정인지 등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 1437년 여름 통사랑 집현전저작랑(通仕郞集賢殿著作郞)이 되었다.
그 뒤 다시 중시(重試)에 제 2등으로 합격하였다.[4]
3. 3. 양전 시행과 지방관 시절
김담은 25세에 전료(殿僚)와 더불어 국어와 음의(音義)를 보정해 올렸다.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가 되었고, 이듬해 정인지, 이순지, 박윤장 등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양전을 시행했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1434년(세종 16년) 이조정랑이 되고, 그해 제언종사관(堤堰從事官)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 참여하여 계산을 맡았다. 1437년 승문원부교리가 되었다. 승문원부교리로 있을 때, 명을 받아 토지를 측정 연구하여 토지분할 정책인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찬정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다.
1437년 집현전저작랑을 거쳐 1439년 무공랑 집현전박사(務功郞集賢殿博士)가 되었다. 그해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을 교정해서 올렸다. 그 뒤 세종대왕의 명으로 정인지(鄭麟趾), 정흠지(鄭欽之), 정초(鄭招) 등과 함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대통력태양태음통궤(大統曆太陽太陰通軌) 등에 대하여 그 계산법을 밝히고,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을 만들었는데, 《칠정산내편》과 《태양통궤》·《태음통궤》 등이 모두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편찬본의 규장각판 사본만이 현재 전한다. 이후 수찬과 교리를 역임하였다.
1441년 여름 선교랑 집현전부수찬 지제교(宣敎郞集賢殿副修撰知製敎)를 거쳐 그해 가을 사헌부감찰이 되고 1442년 통례문봉례랑, 그해 겨울 승훈랑 사재감주부를 거쳐 봉상시주부로 옮겼다가 1444년 호조좌랑, 이조좌랑, 1445년 봄 승의랑, 이듬해 훈련원주부, 승문원부교리 등을 지냈다. 1447년 봉훈랑(奉訓郞)에 임명되었다. 1448년(세종 30)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 1월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던 중 세종이 출사의 명과 함께 쌀 10석, 옷, 신발, 버선 등을 하사하였으나 고사하였지만 세종이 허락하지 않자 그 해 7월까지 여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승진 벼슬을 내리며 복귀하도록 명하였고, 이에 사간원에서 반대하였으나 세자(문종)가 김담의 재주를 귀하게 여겨 기복(起復)을 명하니, 결국 출사하여 역법과 측후의 일을 하였다. 1448년 전라도 관찰사, 1450년 호군(護軍)으로 전직되었다가 친상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3. 4. 천문학과 월력 연구, 서적 간행
김담은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인지, 정초, 정흠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칠정산외편》, 《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 《대통력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교식통궤》, 《오성통궤》, 《사여전도통궤》, 《중수대명력》, 《경오원력》, 《선덕십년월오성릉범》 등 명나라나 외국의 천문역서를 조선식으로 수정 편집하거나 교정, 편찬하였다.
역법에 재능이 있어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칠정산은 조선의 환경 기준으로 만든 첫 월력이기도 하다. 칠정산의 ‘칠정’은 7개의 움직이는 별(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뜻하고 ‘산’은 ‘계산한다’는 의미다. ‘칠정산내편’은 중국 역법에 기반을 두었지만 수시력(授時曆)과 대통력(大統曆)을 한양 위도에 맞추어 교정한 것이다. 천문상수는 물론, 동지와 하지 전후의 해 뜨는 시각과 지는 시각, 밤낮의 길이를 다루고 있어 단순한 달력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천체력의 구실을 겸하고 있다. 책의 일행제율의 항에서 보면, 세주(歲周, 1년의 길이)=365일 2,425분으로 되어 있고, 1일=10,000분(分)=100각(刻), 1각(刻)=100분(分)의 십진법(十進法)이 쓰였는데 이로 미루어 1년의 길이가 현재 실시하고 있는 그레고리 태양력과 같은 365.2425일이고, 1분은 현행 8.64초와 같았음을 알 수가 있다.
‘칠정산외편’은 서역의 역법인 회회력(回回曆, 이슬람력)을 연구하여 조선의 실제 절기에 맞춰 교정한 책이다. 칠정산내편과는 달리 원주를 360도로 한 60진법이 쓰이고 있다. 또 1태양년의 길이는 365일로 하되 128태양년에 31윤일을 두고 있으므로 이 역법에 의해 계산한 1태양년의 길이는 365일 5시 48분 45초로 현대 값 보다 1초 짧을 뿐이다. 세종이 칠정산내외편에 대해 “이리하여 역법이 아쉬움이 없다 할 만큼 되었다”고 서문에 적을정도로 자부심을 가졌다.
1445년에 간행된 《제가역상집》(諸家易象集)도 김담이 이순지와 함께 저술하는 등 당시 천문학에 관한 대부분의 저서는 김담과 이순지가 연구·저술한 것이다. 1447년(세종 29)에는 문과중시(重試 : 과거 급제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에서 을과 1등 3인 중 제2인으로 합격했다. 1인은 성삼문 3인은 이개였다. 이처럼 학자로도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던 김담은 문과급제자로서는 특별하게 천문과 산학(算學)에 정통해 이순지와 함께 조선시대 과학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3. 5. 지방관 생활
1455년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자 신숙주를 통해 이조판서에 특별 제수되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6] 이후 거듭된 출사 요청에 중앙 벼슬을 피하여 자청하여 안동부사, 충주목사 등의 외직으로 나갔다. 1455년 12월에는 좌익원종공신 1등(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6]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고, 1456년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1457년 이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나갔다가 예조 참의를 거쳐 1458년 경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그의 사위 이수형은 단종 양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는데, 그와 긴밀히 교류하였다. 이수형은 장인의 고향인 영주 도촌으로 낙향하였다.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는 김시습과 자주 만나 동병상련의 정을 달래며 신라의 고적을 중수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당시 세조가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리며 두번씩이나 불렀으나 사양, 승정원일기에는 「사판삼신이일」로 기록되어 있다. 서거정과도 교유하였는데,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봉명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거정 등이 오자 감사와 함께 그를 환대하며 고적 정비에 나서는 것으로 시름을 달랜다 하였다.
'자네가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있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重修)하기로 하고, 재목을 축적하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세.'
그는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몇 지방 고을의 수령(守令) 자리를 구하였다. 세조 찬위 이후에도 중앙 벼슬을 피해 지방관 생활을 했다.
3. 6. 생애 후반
김담은 충주목사 재직 시절 관내 도적을 엄단하여 백성들의 두려움을 없앴으며, 장물 증거가 발견되면 엄격하게 처리하여 도적들이 충주목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세조는 그에게 이조판서 직을 제수했으나 사양하였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김담은 성품이 단아하고 행동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고 한다. 1463년(세조 9)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나, 병을 이유로 세 번 사직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1464년(세조 10)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이수형 등이 있었으며, 이수형은 그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그해 7월 10일에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향년 48세였다.
4. 사후
세조 반정에 반발하여 낙향한 사위 이수형,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학자이자 문인인 서거정 등과 교류하였다.[7]
세조 9년 김담이 별세하자 세조는 이틀간 조회(朝會)와 저자(市)를 정지할 것을 명하고, 예관을 보내 조제(弔祭)를 치르게 하고 부의를 후하게 내리며 별세 이튿날 바로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는 조선사를 통틀어 매우 드문 일이었다.[7]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淸廉)하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극기(克己)하는 것을 ‘절(節)’이라고 한다.[7]
영주군 북 15리 순흥부 허빈동(許賓洞) 오향(午向) 언덕에 안장되었다.[7]
광해군 때에 영주 사림에서 향현사(鄕賢祠)와 문계서당(文溪書堂)에 제향되었으나 뒤에 구강서원(龜江書院)과 단계서원(丹溪書院)으로 이축, 개명되었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때에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고, 현재 경상도 순흥의 단계서원과 영주의 귀강서원, 영주 향현사(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7]
5. 저서
5. 1. 공저
6. 연보
- 1416년(태종 16년) 음력 11월 29일 경상도 영천군 (현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출생하였다.
- 1435년(세종 17년) 20세에 형 김증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정 정자에 임명되었다.
- 1436년(세종 18년) 21세에 봉상시 판관 이순지 대신 간의대에서 근무하며 천문 관측을 담당하였다.
- 1437년(세종 19년) 22세에 세종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서 강론을 담당할 문학에 밝은 선비 10인을 선발할 때 형 김증과 함께 선발되었다. 집현전 저작랑이 되고 이듬해인 1439년에 정7품 집현전 박사가 되었다. 이순지와 더불어 칠정산외편 교정에 참여하였다.
- 1442년(세종 24년) 27세에 이순지, 정인지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을 완성하였다.
- 1443년(세종 25년) 28세에 봉상시 주부에 임명되어 양전을 실시하였다.
- 1444년(세종 26년) 29세에 호조 정랑,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 경기도 안산 지방의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제언종사관(堤堰從事官)으로 언제공사(堰堤工事)의 계산을 담당하였다.
- 1447년(세종 29년) 32세에 문과 중시에 1등 제2인으로 급제하고, 승문원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왕명으로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에 관여하였다.
- 1448년(세종 30년) 33세에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에 임명되었다.
- 1451년(문종 1년) 36세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불사 배척에 앞장섰다.
- 1452년(문종 2년) 37세에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충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 1456년(세조 2년) 41세에 안동 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 1458년(세조 4년) 43세에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종2품 경주 부윤에 임명되었다.
- 1461년(세조 7년) 46세에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48세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 1464년(세조 9년) 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 1464년(세조 10년) 음력 7월 9일 졸(卒)하였다. 향년 48세.
7. 가족 관계
김담의 할아버지는 김노(金輅)이고, 아버지는 김소량(金小良, 1384년 11월 ~ 1449년 1월 24일)이다. 어머니는 평해황씨로,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의 딸이다. 형은 김증(金曾 또는 金潧, ? ~ 1456년 12월 7일)이다. 부인은 감천 문씨(1419년 - 1462년 12월 7일)로 문헌(文獻)의 딸이다.
김담은 아들 김만석(金萬石), 김만포(金萬包), 김만칭(金萬秤), 김만인(金萬引)과 사위 이수형(李秀亨), 권우(權瑀), 유대승(柳大承), 김계흔(金啓昕), 금치담(琴致湛)을 두었다. 김만석의 처는 최씨로 녹사 최자명(崔自明)의 딸이며, 김만포의 처는 광주 김씨, 김만칭의 처는 광산김씨, 김만인의 처는 조씨이다.
김만칭의 아들, 즉 김담의 손자 김좌(金佐)는 81세에 노인직으로 어모장군을 받았다. 김좌의 아들, 즉 김담의 증손은 김택민(金澤民)이다. 김우(金佑)는 김담의 또다른 손자이며, 김사문(金士文), 김사명(金士明), 김사호(金士皥)는 김담의 증손들이다.
8. 사상과 치적
8. 1. 도적 엄단
김담은 범죄자에게 매우 엄격했다.[8] 김담이 부임한 경내(境內)에는 도적이 많아 백성들이 괴로워했는데, 김담은 이들을 원수처럼 싫어하여 도적을 잘 다스렸다.[8] 간사한 도적(姦寇)이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내 적발하였고, 장물의 증거가 발견되면 비록 적더라도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처벌하였다.[8] 이로 인해 도적들이 서로 경계하여 경내에 들어오지 않았고, 고을 백성들이 그 덕을 입었다.[8]9. 평가와 비판
김담은 세종 때 정인지, 이순지, 박윤창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9] 또한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로 평가받으며, 세종 대의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9] 성종 때 윤필상은 "조종조(祖宗朝)에는 김담이 역법에 정통하였는데 그 뒤에는 그를 이을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임하필기 제13권 및 성종실록 등에 남아있다.
하지만, 세조 반정 이후 관직에 나아간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참조
[1]
문서
김담의 생애 및 가계
[2]
문서
김담의 을묘 식년시 급제
[3]
문서
김담의 정묘 중시 급제
[4]
실록
중추원 사 김담의 졸기
[5]
실록
김담에게 병요에 주를 넣도록 명하다
[6]
실록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7]
문서
김담의 인격
[8]
실록
중추원 사 김담의 졸기
[9]
웹인용
김담
http://koreandb.nate[...]
201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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