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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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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민은 1895년 경상북도 안동 출생으로, 백부 이상룡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만주에서 한족노동당 발기인으로 활동하고, 정의부에서 민사부 서무과 주임위원, 재무위원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기여했다. 조선공산당 남만총국 간부,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 대표 등을 지내며 항일운동을 지속하다 광복 후 환국을 준비하던 중 1945년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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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광민
이광민
이름이광민
한자 표기李光民
별칭이문형(李文衡), 이영형(李永衡), 이영(李暎), 이영(李英)
자(字)사익(士翼)
아호(雅號)자화(子華)
국적대한민국
본관고성
종교유교
출생과 사망
출생일1895년
출생지조선 경상도 안동군
사망일1945년 10월 18일
사망지중국 하얼빈
사망 원인병사
직업 및 소속
직업독립운동가
소속정의부
가족 관계
이봉희
친척이상룡(백부), 이상동(백부), 이광국(동생), 이준형(사촌), 이형국(사촌), 이운형(사촌), 이병화(종질), 이승화(종조부)

2. 생애

1895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광복 후 귀국을 준비하던 중 1945년 10월 18일 사망했다.

2. 1.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1911년 ~ 1932년)

1911년 16세 때 백부 이상룡을 따라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의 한민족 자치기구에서 설립한 동화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며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했다. 중국어에 능통해 중국 관청의 직원으로 일하며 독립군을 보호하는 역할도 맡았다.[1][2]

1923년 8월 반석현(磐石縣)에서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24년 11월 창립총회에서 당무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3월에는 전만통일회의준비회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했고 그 해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민사부 서무과 주임위원에 선출되어[3]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의원 선거 및 지방자치 업무 등을 맡았다. 이주 한인의 호적 작성과 독립군요원 징병을 담당하는 한편, 남만지역 한인사회 생활지원을 위해 지방행정 조직망을 구축했다.[4] 1925년 백부인 이상룡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했다가 1926년 만주로 돌아올 때까지 수행비서 역할을 맡기도 했다.[2]

1926년 1월 정의부 중앙총부의 결정에 따라 김세준(金世俊), 김홍식(金鴻植) 등과 함께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에서 군인과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1926년 11월 제3회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직의 살림을 총괄했다.[5] 같은 해 가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남만총국 조직부 간부에 선출됐다.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좌우합작 추진을 위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릴 때, 정의부 중앙위원으로서 김동삼, 오동진, 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참석했다. 같은 해 5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이자 조선공산당 남만도 간부로서 기관지『농보(農報)』를 복간했다.[3]

1927년 9월 조선공산청년회 남만 제1구 선전부 간부에 임명됐고,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促成會派)인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로 선출됐다. 1930년 3월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全滿韓人反帝國主義大同盟創立籌備會) 결성에 참여해 김동삼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3] 정의부 대표로서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1932년 이상룡 서거 후에도 중국에 남아 항일운동을 했다. 만주 서란현에 가매장 상태였던 백부 이상룡의 유해를 하얼빈 취원창으로 이장해 후일 유해의 본국 송환을 가능케 했다.[2]

2. 2. 이상룡 서거 이후와 광복 (1932년 ~ 1945년)

1932년 백부 이상룡이 서거한 후에도 중국에 남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만주 서란현에 가매장되어 있던 백부 이상룡의 유해를 하얼빈 취원창으로 이장하여 후일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될 수 있도록 했다.[2]

1945년 광복 후 환국을 준비하던 중 10월 18일 병사했다.

3. 사후

하얼빈에 묻혀있던 유해는 1990년 이상룡, 이승화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옮겨져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2][3]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2010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4. 가계

참조

[1] 문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2] 서적 군자불기의 임청각, 안동 고성이씨 종가 2016
[3] 문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술정보
[4] 뉴스 만주 독립운동 통합에 앞장 선 정의부 대표 이광민 연합뉴스
[5] 웹사이트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www.mpva.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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