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르멘가르트 하스바니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르멘가르트 하스바니아는 778년 또는 780년에 태어나,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황제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첫 번째 부인이자 황후였다. 794년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와 결혼하여 로타르 1세, 피핀 1세, 루트비히 2세 등 4남 2녀를 두었다. 813년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가 샤를마뉴에 의해 공동 황제로 선포된 후 황후가 되었으며, 818년 앙제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19년 사망 - 이사도
    이사도는 당나라 후기 평로치청 번진의 절도사로, 이정기의 손자이자 이납의 아들이며 형 이사고의 뒤를 이었으나 당 헌종의 승인을 받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고 당나라의 토벌 작전으로 몰락했다.
  • 819년 사망 - 유종원
    유종원은 자는 자후이며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개혁 정치 실패 후 유배 생활을 하며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긴 당나라 시대의 문인, 정치가, 사상가였다.
  • 778년 출생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황제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는 '경건왕'이라는 별칭을 가졌으나, 정치적 무능과 상속 분쟁으로 인해 제국 분열을 초래했다.
  • 778년 출생 - 조주종심
    당나라 시대의 선승 조주종심은 남전 보원의 제자로, 조주 관음원에서 독특한 선풍을 펼치며 제자들을 교화했고, 그의 문답은 공안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구자불성 문답은 절대무 사상을 상징한다.
이르멘가르트 하스바니아
기본 정보
배우자루트비히 1세
자녀로타르 1세
피핀 1세
루트비히 2세
가문에스베이 백작 가문
아버지인게르만 에스베이 백작
어머니로트루데
출생일778년경
사망일818년 10월 3일 (40세)
사망 장소앙주, 네우스트리아, 프랑키아
작위
작위카롤링거 황후
통치 기간813년 - 818년
대관식816년 10월 5일 교황 스테파노 4세
랭스 대성당
프랑크 왕비칭호: 프랑크 왕비
통치 기간: 814년 - 818년

2. 생애

카롤루스 제국의 황제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첫 번째 부인이자 황후이다. 778년 또는 780년경 하스바니아(현재 벨기에 히스바예 지역)의 유력 가문인 백작 인그람의 딸로 태어났다.

794년경 당시 아키텐의 왕이었던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와 결혼했다.[2] 루도비쿠스 1세에게는 이미 자녀가 있었기에 이르멘가르트가 처음에는 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813년 남편 루도비쿠스 1세가 아버지 샤를마뉴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면서 그녀 또한 황후가 되었다. 814년 샤를마뉴 사후 루도비쿠스 1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으며, 이르멘가르트는 816년 10월 5일 랭스 대성당에서 교황 스테파노 4세로부터 세례와 축성을 받고 정식으로 황후관을 받았다.

루도비쿠스 1세와의 사이에서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황후로서 궁정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남편의 이복형제들이나 조카들을 성직자로 만들거나 수도원으로 보내는 결정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817년 루도비쿠스 1세의 조카인 이탈리아의 왕 베른하르트 1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을 때, 그를 아헨으로 오도록 유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 베른하르트는 처형되었다.

818년 10월 3일, 남편 루도비쿠스 1세가 프랑크 왕국을 순행하던 중 네우스트리아앙제에서 사망했다.[2]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사후 루도비쿠스 1세는 819년 유디트 폰 아르톨프와 재혼했고, 이후 유디트 소생의 아들 대머리 카를에게 상속령을 분할해주려는 시도는 이르멘가르트의 아들들과의 극심한 갈등을 유발하여 제국 분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1. 가문 배경

고향 하스바니아(현, 벨기에령 히스바예, 우측 상단의 연홍매색 영역)


이르멘가르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778년 혹은 780년에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생일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녀는 리에주 근처 하스바니아(현재 벨기에의 히스바예 또는 히스벤고우 지역)의 백작 인그람(Ingrammus 또는 Ingerman)과 그의 부인 로트루드의 딸로 태어났다. 이르멘가르트의 가문은 하스바니아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실력자 가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인그람은 메츠의 주교이자 성소의 수호자였던 클로도강(Chrudogang, Hruotgang)의 조카이며, 클로도베르트의 손자였다. 증조부인 클로도베르트는 후대의 로베르티엥 가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관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 2. 결혼과 황후 시절

794년경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당시 아키텐의 왕이었던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와 결혼했다.[2] 루도비쿠스 1세에게는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두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가 상스의 데오델린트와 동거 중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때문에 이르멘가르트가 처음에는 루도비쿠스 1세의 이었다가 정식 부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데오델린트가 어떤 이유로 물러났는지, 혹은 루도비쿠스 1세가 프랑크 왕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기 전에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813년 샤를마뉴는 루도비쿠스 1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고, 이에 따라 이르멘가르트도 황후가 되었다. 814년 1월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루도비쿠스 1세는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이르멘가르트는 랭스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축성을 받고 황후관을 받았다. 이후 816년 10월 5일에는 랭스 대성당에서 교황 스테파노 4세에게 다시 한번 세례와 축성을 받고 왕관을 받으며 황후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이르멘가르트는 루도비쿠스 1세와의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로타르 1세 (795년–855년)
  • 아키텐의 피핀 1세 (797년–838년)
  • 베르타 (약 799년 출생)
  • 로트루드 (약 800년 출생)
  • 힐데가르트 (약 802년 출생, 후에 의 노트르담 수도원장이 됨)
  • 독일인 루트비히 (약 805년–876년)


황후로서 이르멘가르트는 궁정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남편 루도비쿠스 1세가 그의 이복형제들인 후고, 드로고, 테오도리히 등과 조카들을 성직자로 만들거나 수도원으로 보내도록 유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817년, 루도비쿠스 1세의 조카인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 1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이르멘가르트는 그에게 아헨으로 와도 안전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 1세가 아헨에 도착하자 루도비쿠스 1세는 그의 눈을 멀게 한 뒤 투옥시켰다.

818년 10월 3일, 이르멘가르트는 남편 루도비쿠스 1세가 프랑크 왕국을 순행하던 중 네우스트리아앙제에서 사망했다.[2] 사망 원인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가 사망한 후, 루도비쿠스 1세는 819년 바이에른의 벨프 1세의 딸 유디트 폰 아르톨프와 재혼했다. 유디트가 아들 대머리 카를을 낳자, 루도비쿠스 1세는 카를에게 영토를 상속해주기 위해 기존의 상속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는 이르멘가르트 소생의 세 아들(로타르 1세, 피핀 1세, 루트비히 2세)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제국 분열로 이어지는 내부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2. 3. 베른하르트 1세와의 갈등

817년 남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조카인 이탈리아의 왕 베른하르트 1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였다. 이때 이르멘가르트는 아헨에서 베른하르트 1세에게 편지를 보내 아헨으로 와도 안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 1세가 아헨에 도착하자, 루도비쿠스 1세는 그의 눈을 뽑아 실명시킨 뒤 투옥하였다. 이르멘가르트의 약속은 결과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2. 4. 죽음

남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프랑크 왕국을 순행하던 도중인 818년 10월 3일, 이르멘가르트는 네우스트리아앙제(현, 멘에루아르의 앙제)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르멘가르트가 사망한 후,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819년 바이에른의 벨프 1세의 딸 유디트 폰 아르톨프와 재혼했다. 이후 루도비쿠스 1세가 유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대머리 카를에게 영토를 상속하기 위해 기존의 상속령을 개정하면서, 이르멘가르트가 낳은 세 아들(로타르 1세, 피핀 1세, 루트비히 2세)이 이에 반발하여 왕국 내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3. 자녀

이르멘가르트는 남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와의 사이에서 총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로는 훗날 황제가 되는 로타르 1세, 아키텐의 왕 피핀 1세, 동프랑크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있으며, 딸로는 아델라이드, 로트루데, 힐데가르트가 있다.

3. 1. 아들

이르멘가르트는 남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을 포함하여 총 6명의 자녀를 두었다.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아들로타르 1세795년 ~ 855년서로마 황제, 중프랑크 왕
아들피핀 1세797년 ~ 838년아키텐 왕
아델라이드799년 출생 ~ ?네우스트리아 후작 로베르 르 포르와 결혼. 외손자로 서프랑크 왕국의 왕 외드와 로베르 1세가 있다.
베르타대략 799년 출생 ~ ?
로트루데800년 출생 ~ ?오베르뉴 백작 제라르 1세와 결혼
힐데가르트802년 출생 ~ ?의 노트르담 수도원 원장. 언니 로트루데의 사후 형부 오베르뉴 백작 제라르 1세와 결혼.
아들루트비히 2세804년 ~ 876년동프랑크 왕


3. 2. 딸

세 명의 딸을 두었다.

  • 아델라이드(Adelaidela, 799년 출생) : 네우스트리아후작 로베르 르 포르와 결혼하였다. 아들로는 훗날 서프랑크의 왕이 되는 외드와 로베르 1세가 있다.
  • 로트루데(Rotrudela, 800년 출생) : 오베르뉴 백작 제라르 1세와 결혼하였다.
  • 힐데가르트(Hildegardla, 802년 출생) : 언니 로트루데가 사망한 후, 형부였던 오베르뉴 백작 제라르 1세와 결혼하였다.

참조

[1] 서적 La Préhistoire des Capétiens Patrick van Kerrebrouc 1993
[2] 웹사이트 Charlemagne1 http://genealogy.euw[...]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