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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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리역 폭발 사고는 1977년 11월 10일, 한국화약 소속 화물 열차가 다이너마이트 등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발차 대기 중 발생한 대형 폭발 사고이다. 사고 원인은 호송 담당 직원의 부주의와 안전 수칙 무시로, 촛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옮겨 붙어 폭발이 일어났다. 이 사고로 59명이 사망하고 18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3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이리역 주변 9,500여 채의 건물이 파괴되는 등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사고 수습을 위해 정부 지원과 이재민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관련자 처벌과 정치적, 사회적 여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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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 사고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사고 명칭 | 이리역 폭발 사고 |
발생 날짜 | 1977년 11월 11일 |
발생 시간 | 21시 15분 (KST) |
발생 위치 | 전라북도 이리시 이리역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역) |
사고 상세 | |
노선 | 전라선, 호남선 |
운영 주체 | 대한민국 철도청 |
사고 유형 | 폭발 |
사고 원인 | 급행료 갈취 문제로 인한 통행 중단 |
관련 열차 수 | 9 |
승객 수 | 0 |
피해 규모 | |
사망자 수 | 59 |
부상자 수 | 1343 |
재산 피해 | 23억원 (1977년 기준) |
피해 건물 | 9500여채 파손 |
추가 정보 | |
관련 보도 | 로이터 통신 기사 동아일보 기사 (1) 동아일보 기사 (2) |
2. 사고 원인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현 한화의 전신) 소속 화물 열차 제1605열차가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발차를 대기하던 중 폭발사고를 일으켰다.[10]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화약 호송 담당 직원은 이리역에서 급행료 문제로 열차가 묶이자 역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화물열차로 돌아와 잠을 잤다. 이때 추위를 막기 위해 켜놓은 촛불이 화약 상자로 넘어져 폭발이 발생했다. 또한, 화약류와 같은 위험물은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한다는 안전 수칙을 무시한 것도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9]
2. 1. 호송 담당 직원의 부주의
한화의 전신인 한국화약 호송 담당 직원 신무일은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광주로 가던 중 이리역에서 발차 대기 중이었다.[10]당시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신무일은 이리역에서 급행료 문제로 발이 묶였다. 당시 열차 관행은 '급행료'라 하여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바로 통과하려면 역에 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신무일은 돈이 없었고, 이 때문에 이리역에 발이 묶였다. 그날 밤 신무일은 술을 마시고 잠든 뒤, 추위를 막기 위해 촛불을 켰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쪽으로 넘어져 사고가 발생했다.[11]
2. 2. 안전 수칙 무시
당시 열차 운행 관행상 폭발물 및 화학 화물 화차는 여객 열차보다 우선 순위로 운행되어야 했으며, 위험물은 모든 철도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안전 수칙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화약(현 한화) 호송 담당 직원 신무일은 이리역에서 발차를 대기하던 중 이러한 안전 수칙을 무시하였다.[11]광주로 가던 한국화약 소속의 화물 열차 제1605열차는 당시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있었다.[10]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신무일은 이리역에서 정차하지 않고 계속 달리려 했으나, 이리역 직원들이 급행료를 요구하며 막아섰다. 당시 열차 관행상 '급행료'를 지불해야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지만, 신무일은 돈이 없어 이리역에 발이 묶였다.[11]
이러한 안전의식 부재는 결국 큰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로 이어졌다.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통과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한 것이 인재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았다.[9]
3. 폭발 규모와 피해 상황
당시 폭발로 이리역에는 지름 30m, 깊이 10m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으며, 파편이 이리시청 앞까지 날아갔다. 이리역 주변 반경 500m 이내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 사고로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 중 철도원 16명이 순직하였다. 1,647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12]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 및 김제군 백구면 등에서도 진동이 느껴졌고, 약 30km 떨어진 군산시에서도 폭발음 신고가 들어왔다.[12]
3. 1. 인명 피해
폭발로 59명이 사망하고 18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2] 당시 이리시(현 익산시)의 인구는 약 13만 명이었다.[6] 이 중 철도원은 16명이 순직하였다.3. 2. 재산 피해
이리역에는 강력한 폭발로 폭발 지점 아래에 지름 30m, 깊이 10m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으며, 파편이 이리시청 앞까지 날아갔다. 이리역 주변 반경 500m 이내 건물 9,500여 채가 대부분 파괴되어 9,973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1,647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도 발생하였다.[12]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도시 최초의 주거용 아파트 건물들이 건설되었다.[6]철도 시설 피해도 커 이리역사를 비롯한 구내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등 건물이 심각한 균열 또는 붕괴 피해를 입었고, 기관차 5량, 동차 4량, 화차 74량, 객차 21량, 기중기 1량이 크게 파손되었다. 이리역을 통과하는 호남선 구간 130m와 전라선 구간 240m가 파괴되어 총 23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12]
당시 이리시 창인동(현. 익산시 창인동)에 있던 익산군청 건물이 진동으로 심각한 균열이 발생해 1979년 익산군청이 익산군 함열읍(현. 익산시 함열읍)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남성고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현재 익산시 신동으로 이전하고 본래 위치한 자리에 남성맨션 아파트를 지었다.
3. 3. 주변 지역 피해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 및 김제군 백구면 등에서도 진동이 느껴졌고, 약 30km 떨어진 군산시에서도 폭발음 신고가 들어왔다.[12]4. 사고 수습 및 복구
이리역 폭발 사고는 막대한 재산 및 인명 피해를 낳았지만, 정부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수습되었다.
사고 직후, 정부는 중앙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이재민 구호와 피해 복구를 위한 긴급 지원에 나섰다. 피해 지역 주민들에게는 임시 주거 시설과 생필품이 제공되었고, 의료 지원도 이루어졌다.
4. 1. 정부 지원
정부는 복구 노력에 130억원을 배정했다.[4][5]5. 사건의 여파
이리역 폭발 사고는 정치, 사회적으로 여러 여파를 낳았다.
정치적으로는 최경록 건설교통부 장관이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6]
사회적으로는 무명 희극인 이주일이 가수 하춘화를 구출한 사건으로 유명해졌다.[13] 하춘화는 이리역 인근 극장에서 공연하던 중 사고를 당했는데, 이주일이 하춘화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 구했다. 하춘화는 찰과상에 그쳤으나 이주일은 두개골 함몰 중상을 입고 장기간 입원했다.
사고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이리역 북서쪽 모현동에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가 건설되었다. 이 아파트는 2010년 재개발을 위해 철거되었고, 대림산업이 이 자리에 e-편한세상 아파트를 재건축하여 2012년 12월 입주하였다.[15][16]
사고 당시 대한민국과 이란의 1978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2-2 무승부로 끝나 대한민국은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사고는 1950년 7월 11일 미군 전투기 오폭으로 인한 이리역 폭격 사건(400~600여 명 사망 추정) 이후 이리 지역에서 발생한 최대 인명 피해 사고였다.
5. 1. 관련자 처벌
법원은 신무일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시하여 1978년 2월 징역 10년을 선고했다.[1] 당시 36세의 한국화약 직원 신무일은 해당 열차의 화약 호송을 담당했는데, 당일 술을 마시고 잠든 뒤 추위를 막기 위하여 촛불을 켰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쪽으로 넘어진 것을 감안한 결과였다.[1]신무일에게 급행료를 요구해서 사고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된 이리역 역무원 2명은 징역 10개월의 처벌을 받았다.[1]
5. 2. 정치적 여파
이후 건설교통부 장관 최경록()이 사임했다.[6]5. 3. 사회적 영향
이 사건 당시 무명이었던 희극인 이주일이 가수 하춘화를 구출하여 유명세를 탔다.[13] 이리역에서 멀지 않은 극장에서 하춘화가 공연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으며, 이 사고로 극장이 무너졌다. 이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하춘화는 찰과상에 그친 반면 이주일은 두개골 함몰이라는 중상을 입어 병원에 오래 입원했다.이 사고로 집이 크게 파손된 사람들을 위해 이리역 북서쪽 모현동에 모현주공아파트를 건설하였다. 이 아파트는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이며, 2010년에 재개발을 위해 철거되었고, 대림산업이 이 자리에 e-편한세상 아파트로 재건축하여 2012년 12월에 입주하였다.[15][16]
사고 발생 시각, 대한민국과 이란의 1978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 7차전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경기 결과는 2-2 무승부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홍콩과의 최종전 결과와 관계없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이란이 본선에 진출했다.
1950년 7월 11일 발생한 미군 전투기 오폭에 의한 이리역 폭격 사건 (2차례에 걸쳐 400~600여 명의 시민 사망 인명 피해 추정) 이래 이리 지역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고였다.
6. 기타
이 사고 당시 무명이었던 희극인 故 이주일이 가수 하춘화를 구출하여 유명세를 탔다.[13] 이리역에서 멀지 않은 극장에서 하춘화가 공연을 하고 있다가 사고를 당했으며, 이 사고로 인해 극장이 무너졌다. 이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하춘화는 찰과상에 그친 반면, 이주일은 두개골 함몰이라는 중상을 입어 병원에 오래 입원했다.
소설 <기찻길 옆동네 1>에 이리역 폭발사고가 기재되어 있다.[14]
이 사고로 인해 집이 크게 파손된 사람들을 위해 이리역 북서쪽 모현동에 모현주공아파트를 건설하였다. 이 아파트는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이며, 2010년에 재개발을 위하여 철거되었으며, 대림산업이 이 자리에 e-편한세상 아파트로 재건축하여 2012년 12월에 입주하였다.[15][16]
이 사고가 난 그 시각 대한민국과 이란의 1978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 7차전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경기 결과는 2-2 무승부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홍콩과의 최종전 결과에 관계없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이란이 본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란은 페루와 네덜란드에 밀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페루는 2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에 0-6으로 크게 졌으며, 네덜란드는 결승에 진출하여 아르헨티나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 7월 11일 발생한 미국 공군의 인민군 남하 저지 작전 중 미군 전투기 오폭에 의한 이리역 폭격 사건 (2차례에 걸쳐 400~600여명의 시민 사망 인명 피해 추정) 이래 이리 지역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고였다.
참조
[1]
웹사이트
Huge Explosion Reportedly Kills Scores in N. Korea Border Town
https://www.latimes.[...]
2019-07-06
[2]
웹사이트
Emergency Management in Korea: Just Started, but Rapidly Evolving
https://web.archive.[...]
2011-07-12
[3]
서적
철도주요연표
Korail
[4]
기타
[5]
웹사이트
The Iri Yeok Explosion, and the Iksan Landfill Crisis
http://www.gordsella[...]
2008-07-17
[6]
논문
South Korea 1977: Preparing for Self-Reliance
1978-0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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