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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쓰쿠시마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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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쓰쿠시마 신사는 일본 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에 위치한 신사로, 바다 위에 세워진 독특한 건축 양식과 붉은색 도리이(鳥居)로 유명하다. 811년에 명신(名神)으로 기록되었으며, 헤이안 시대에 안기국(安芸国)의 일궁(一宮)으로 숭배받았다. 다이라노 키요모리가 1168년 신전을 건립하여 현재와 비슷한 규모의 신사가 완성되었고, 이후 모리 모토나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숭배를 받으며 번영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 정책으로 불교적 요소가 제거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신덴즈쿠리 양식의 건축물과 다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199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주요 관광 명소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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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쓰쿠시마 신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쓰쿠시마 신사 도리이
이쓰쿠시마 신사의 도리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 특징
이쓰쿠시마 신사 경내 전경
대도리이(위)와 사당(아래)
이름이쓰쿠시마 신사
한자 표기厳島神社 (또는 嚴島神社)
일본어 표기いつくしまじんじゃ
로마자 표기Itsukushima-jinja
별칭이쓰키시마 신사
위치일본 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 미야지마초 1-1
좌표34°17′45.68″N 132°19′11.62″E
제신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
타기리히메노미코토
타기쓰히메노미코토
신체미센 산 (신체산)
사격식내사 (명신대사)
아키국 일궁
구 관폐중사
별표신사
창건(전) 스이코 천황 원년 (593년)
본전 양식양류조, 히와다부키
예제음력 6월 17일 (관현제)
웹사이트이쓰쿠시마 신사 공식 웹사이트 (영어)
세계유산 정보
등재 기준문화: (i), (ii), (iv), (vi)
ID776
등재 연도1996년
면적431.2 ha
완충 지역2,634.3 ha
유네스코 웹사이트안내 (유네스코)
신사 정보
신사 종류신사
신사 위치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
추가 정보
람사르 협약 및 세계 유산 협약람사르 및 세계 유산 협약: 성공을 향한 수렴 - 사례 연구: 일본 이쓰쿠시마 신사

2. 역사

이쓰쿠시마 신사는 히로시마만에 떠 있는 이쓰쿠시마(미야지마)의 북동쪽, 미야산(표고 535m)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쓰쿠시마는 일반적으로 「'''아키의 미야지마'''」라고도 불리며 '''일본 3경''' 중 하나로 꼽힌다. 헤이케의 신앙으로 유명하며, 다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현재의 해상에 서 있는 대규모 신사 건물이 정비되었다. 신사 건물은 현재 본전·배전·회랑 등 6동이 국보로, 14동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헤이케가 봉납한 헤이케 납경을 비롯한 국보·중요문화재 공예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평무대(국보: 부속지정)는 일본 3무대 중 하나[15]로 꼽히는 한편, 해상에 서 있는 높이 16m의 오토리이(중요문화재)는 일본 3대 도리이 중 하나[16]이다. 또한, 여름에 거행되는 례제는 「'''관현제'''」로 알려져 있다.

신사측 기록(社伝)에 따르면, 스이코 천황 원년(593년)에 이 지역의 유력 호족인 사에키 쿠라쇼쿠가 신사 건립의 신탁을 받고 칙허를 얻어 미카사하마(御笠浜)에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를 모시는 신사를 창건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이쓰쿠시마(イツクシマ)"라는 신사 이름도 "이치키시마(イチキシマ)"가 변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쓰쿠시마 신사가 자리 잡은 이쓰쿠시마(미야지마)는 "신에게 섬기는(いつく = 仕える) 섬"이라는 어원[19]처럼, 고대부터 섬 자체가 신(神)으로서 숭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쓰쿠시마(미야지마) 중앙의 미야산(높이 535m) 정상에는 거석이 늘어서 있으며, 산악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규슈(九州) 원정 도중에 이쓰쿠시마 신사에 참배하고, 대경당(大経堂)(현재: 센조각(千畳閣))을 건립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엄도 에마이(厳島詣)가 민중에게 널리 퍼지면서 몬젠마치(門前町)와 주변은 많은 참배객으로 북적였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역사는 초기 역사, 다이라노 키요모리와 헤이케, 모리 모토나리, 종교적 의미, 근현대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1. 초기 역사

이쓰쿠시마 신사는 본디 아키 지방에서 으뜸가는 신사로서, 그 하위 신사들을 모두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4] 기록에 의하면 593년에 사에키 구라모토가 스이코 천황의 재위시기에 지었다고 적혀 있지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1168년 경 아키 지방을 통치하던 유력 다이묘였던 다이라노 키요모리(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 초상
)가 지었다고 한다.[6] 신사의 또다른 후원자로는 코슈 지방의 지배자였던 모리 모토나리가 있는데, 그는 1571년에 신사의 본전을 다시 지었다.[2][6] 하지만 그가 이 본전을 다시 지은 이유는, 모리 모토나리가 그의 경쟁자와 전쟁을 벌이면서 이쓰쿠시마 신사가 위치한 섬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하여, 신사의 성스러움을 더럽혔기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그를 순수한 의미의 후원자라고 하기에는 논란이 있다.[2] 안타깝게도, 가마쿠라 시대에서부터 그대로 남아 전해져 내려오는 신사의 건물은 단 한 채밖에 없다.

이쓰쿠시마 신사는 아키국의 이치노미야(一宮)였다.[4] 이 신사는 다케 신사, 하야타니 신사와 함께 아키국의 3대 신사 중 하나이다.[5] 이곳에 처음으로 도리이가 세워진 것은 593년으로, 스이코 천황(592~628년) 재위 시기에 사에키 쿠라모토가 세웠다고 전해진다.[2]

신불습합 시대의 “엄도녀”. 가츠시카 이사이 그림


弘仁 2년(811년)에 명신(名神)에 예속되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平安 시대 중기의 『延喜式神名帳』에는 “안기국 사이키군(佐伯郡) 이즈키시마 신사”로 기록되어 명신대사(名神大社)에 봉해졌을 뿐만 아니라 안기국(安芸国)의 일궁(一宮)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신직(神職)을 사이키씨가 장악하였다.

平安 시대 말기, 신주(神主) 사이키 카게히로와 당시 안기슈 다이라노 키요모리의 관계를 계기로 헤이케 일족으로부터 숭배를 받았다. 닌안 3년(1168년)경, 다이라노 키요모리가 신전을 건립하여 현재와 거의 같은 규모의 대규모 신전이 완성되었다.[20] 헤이케 일문의 번영과 함께 이쓰쿠시마 신사도 번영하여 헤이케의 우지가미(氏神)가 되었다. 헤이케 멸망 후에도 겐지(源氏)를 비롯한 당시 권력자들의 숭배를 받았으나, 켄에이(建永) 2년(1207년)과 정오(貞応) 2년(1223년) 두 차례의 화재로 건물 전체가 소실되었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신전은 닌지(仁治) 연간(1240년-1243년)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엄도(嚴島)는 신이 사는 섬으로 금족지(禁足地)로 여겨졌고, 가마쿠라 시대 무렵까지는 지고젠 신사(地御前神社)(외궁)에서 주요 제사가 행해졌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 이후, 사인(社人)과 승려가 금제를 어기고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21]

2. 2.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헤이케



헤이안 시대 말기, 신주(神主) 사이키 카게히로(佐伯景弘)와 당시 안기슈였던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관계를 계기로 헤이케 일족이 이쓰쿠시마 신사를 숭배하게 되었다. 닌안 3년(1168년)경, 다이라노 키요모리가 신전을 건립하여 현재와 거의 같은 규모의 대규모 신전이 완성되었다.[20] 헤이케 일문의 번영과 함께 이쓰쿠시마 신사도 번영하여 헤이케의 우지가미(氏神)가 되었다.

12세기 당시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과 화려함을 과시하기 위해 신사를 건립하거나 다른 건축 사업을 벌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7] 다이라 씨(平氏)는 특히 송나라(宋)(960–1279)와의 해상 무역에 참여하고 내해(일본 내륙해)를 따라 해외 무역을 독점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기요모리는 섬에 대한 다이라 가문의 지배를 확립했을 때 그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는 "항해의 수호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해상 활동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 본전의 건립을 명령했다..."[8] 미야지마(宮島)는 곧 다이라 가문의 신사가 되었다.[2] 기요모리는 신토(神道) 순례의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헤이안(平安) 귀족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도 그 장소를 선택했다고 여겨진다.[9] 그는 이쓰쿠시마에 막대한 부를 쏟아 부었고, 그곳을 친구나 동료, 심지어 황족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즐겼다.[10]

또한 기요모리가 미야지마 섬에 신사를 건립하면 일본을 지배할 것이라는 약속을 한 노승의 꿈을 꾸었기 때문에 신사를 재건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인생 성공을 위해 그곳에 모셔진 신(神)에게 경의를 표했다.[6][2] 다이라 가문의 지원 덕분에 이쓰쿠시마는 "중요한 종교 단지로 성장했다."[9]

만조 시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쓰쿠시마 신사

2. 3. 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1571년에 이쓰쿠시마 신사의 본전을 다시 지었다. 그 이유는 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다카후사와 싸우면서 섬의 땅을 더럽혔기 때문이었다.[2][6] 모토나리는 신성한 장소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신사의 순수성을 해치는 엄격한 금기를 위반한 것이라 여겼다.[6]

전국 시대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이쓰쿠시마 신사의 사세(社勢)는 점차 쇠퇴하였다. 하지만 코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승리한 모리 모토나리가 이쓰쿠시마를 포함한 일대를 지배하고 신사를 숭배하면서 다시 번영하였다. 모토나리는 신전 수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2. 4. 종교적 의미

이쓰쿠시마 신사는 다케하야 스사노오노 미코토의 세 딸인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 타고리히메노미코토, 타기츠히메노미코토에게 바쳐진 신사이다. 이들은 '무나카타 3여신'이라고도 불리며, 바다와 태풍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 세 여신을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여겨 이쓰쿠시마 신사를 부처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이쓰쿠시마'는 일본어로 '신들에게 바쳐진'이라는 뜻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쓰쿠시마섬 자체를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쓰쿠시마 신사는 섬 중앙부가 아니라 섬 바깥쪽 해안선에 세워졌다.[2]

이쓰쿠시마 신사에는 다이라 가문이 봉납한 수트라가 보관되어 있다. 총 32개의 두루마리로 이루어진 이 경전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그의 아들들이 직접 필사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직접 두루마리 하나씩을 만들어 금, 은, 진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2]

원래 이쓰쿠시마 신사에서는 그 누구도 태어나거나 죽을 수 없었는데, 이는 신사의 신성함을 깨뜨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오랫동안 이곳에 함부로 출입할 수조차 없었다. 1878년부터는 신사 근처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죽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주해야 한다.[11] 또한 이쓰쿠시마섬에는 시체를 묻을 수 없다.

신사 건물들은 순례자들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해안의 항구처럼 지어졌다. 만조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신사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도리이도 바다 위에 지어졌는데, 원래 순례자들은 배를 타고 이 도리이 아래를 지나 신사로 들어와야 했다.

바다에서 바라본 모습

2. 5. 근현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메이지 신정부가 파견한 다이산지(大参事)에 의해 신전이 “불식(仏式)”으로 판정되어, 신불분리(神仏分離) 원칙에 따라 신전의 소각이 명령되었다(폐불훼석(廃仏毀釈)).[20] 이쓰쿠시마 신사의 다나모리(棚守)(궁사에 해당)가 도쿄(東京)의 메이지 신정부에 직소(直訴)한 덕분에 신전의 소각은 면했으나, 불교(仏教)적이라고 여겨진 신전의 채색이 모두 벗겨져 “백목조(白木造)”로 바뀌고, 천목(千木)과 어소목(鰹木)이 신설되는 등의 “복고(復古)”가 이루어졌다.[20] 또한 대경당(센조각)은 내진(内陣)의 목비(木鼻)를 잘라내고, 불상 등을 철거한 뒤 말사(末社) “호국 신사(豊国神社)”로 개칭하는 등 신전의 손괴와 분리가 이루어졌고, 다이세이인(구 별당사(別当寺)), 다이간지 등의 사찰이 독립하였다.[20]

메이지(明治) 4년(1871년) 근대 사격 제도(近代社格制度)에서 국폐중사(国幣中社)에 봉해지고, 1911년(메이지 44년)에 관폐중사(官幣中社)로 승격되었다.[20] 메이지 말기에 신전이 국보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폐불훼석으로 파괴된 부분이 메이지 말기의 대수리와 다이쇼(大正) 시대의 수리로 복구되었고, 천목과 어소목도 철거되었다(이 때문에 메이지 시대의 이쓰쿠시마 신사 사진에만 천목과 어소목이 찍혀 있다).[20]

아스카 시대에 이쓰쿠시마 신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에키 쿠라쇼쿠를 시작으로,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기간을 거쳐 헤이안 시대 이후로는 대대로 사에키씨가 신주가를 세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사에키 카게히로가 헤이케 일문과 결탁하여 번영을 누렸다.[20]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 죠큐의 난에서는 고토바 상황 측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사에키씨는 신주가 당주 자리를 내려놓고 후지와라 치카자네가 새로운 이쓰쿠시마 신주가가 되었다.[20] 그 후 사에키씨는 이쓰쿠시마 신사의 신관으로 활동한다.[20] 즈이케이 슈호의 『와운닛켄록』1465년(관정 6년) 6월 18일 조에 "'''일본 소위 삼대궁사'''는, 덮어 이쓰쿠시마・아쓰타・후지 세 곳이다"라고 적혀 있으며, 이쓰쿠시마 신사의 대궁사는 아쓰타 대궁사・후지 대궁사와 함께 일본 삼대 궁사로 여겨진다.[22]

이후 후지와라씨가 전국 시대에 멸망할 때까지 신주가를 지냈다.[20] 후지와라씨 멸망 후에는 사에키씨가 복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20]

신사는 바다 위에 지어져 있기 때문에 태풍과 폭풍 해일의 영향과 피해를 받는 것은 필연적이며, 바닥의 목재 사이에 틈을 두는 등의 대책을 취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형 태풍이 직접 타격하면 붕괴 등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20] 그러나 매번 대규모 수리를 하고 있으며, 수리를 전제로 지어진 신사라고 할 수 있다.[20]

연도사건
1991년(헤이세이 3년)헤이세이 3년 태풍 제19호로 중요문화재인 "능(能)무대"가 붕괴되고 檜皮葺(히와다부키) 지붕도 큰 피해를 입음.
1999년(헤이세이 11년)헤이세이 11년 태풍 제18호로 국보인 "신사" 및 "신전(社殿)"이 큰 피해를 입음.
2004년(헤이세이 16년)헤이세이 16년 태풍 제18호로 국보 부속 지정인 "좌악방(左楽房)"이 붕괴되고 檜皮葺(히와다부키) 지붕도 피해를 입음.
2012년(헤이세이 24년) 4월 3일강풍으로 대토리이(大鳥居)의 檜皮葺(히와다부키) 지붕을 덮는 동판이 피해를 입음.


3. 건축

이쓰쿠시마 신사는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인 신덴즈쿠리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본전, 배전, 회랑 등 주요 건물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신불습합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신사의 주요 건물들은 히로시마만에 떠 있는 이쓰쿠시마(미야지마) 북동쪽, 미야산 북쪽 기슭의 만 안쪽에 위치한다. 만조 시에는 건물들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독특한 경관을 연출한다.
주요 건물 (국보):


  • 본사: 소조쿠 삼신녀를 모시는 곳으로, 본전, 배전, 헤이덴, 하라이덴으로 구성된다.
  • 본전: 양류조 지붕 형태, 정면 8칸, 배면 9칸, 세로 4칸 구조이다. 내진에는 6기의 보전이 안치되어 있다.
  • 배전: 맞팔지붕, 가로 10칸, 세로 3칸 구조로, 좌우 비대칭이 특징이다.
  • 헤이덴: 본전과 배전을 연결하는 복도 형태의 건물이다.
  • 하라이덴: 배전 앞에 위치하며, 전면이 개방된 건물이다.
  • 세키샤 쿄쿠신사: 본사와 유사한 구조이나 규모가 작다. 본전, 헤이덴, 배전, 하라이덴으로 구성된다.
  • 동·서 회랑: 해상의 각 건물과 육지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바닥 널은 폭풍 해일 시 수압을 빼기 위해 틈을 띄워 설치했다.

부속 건물 (중요문화재):

  • 해상: 섭사 다이코쿠신사 본전, 섭사 덴진사 본전, 아사자야, 노가부대, 아게미즈바시, 긴 다리, 반다리, 큰 도리이
  • 육지: 보물창고, 말사 풍국신사 본전(천겹집), 오층탑, 말사 아라후시신사 본전, 다보탑, 섭사 오오모토신사 본전

기타:

  • 평무대: 얕은 해저에 세운 돌기둥 위에 설치된 무대로, 중앙에 난간이 있는 고무대가 있다.
  • 문객신사, 악방: 평무대 좌우에 위치한 작은 건물이다.
  • 불명문: 본전 뒤쪽 금족지에 있는 문으로, 제신이 미야마에서 사전으로 내려올 때 통과하는 문으로 여겨진다.


이쓰쿠시마 신사는 태풍과 폭풍 해일의 피해를 자주 받지만, 지속적인 보수와 관리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본전 내진은 다이라노 기요모리 시대 이후 850년간 한 번도 수몰된 적이 없다고 한다.

좌우문객신사(왼쪽), 좌악방(오른쪽), 배경은 오중탑


오층탑


본사 배전(정면 동쪽)


본사 배전 내부


우락방(왼쪽), 우문객신사(오른쪽)


동회랑(동쪽에서 바라봄)


동회랑(객신사 부근, 북쪽에서 바라봄)


풍국신사 본전


풍국신사 본전(내부)


섭사 다이코쿠신사 본전과 긴 다리(오른쪽은 본사 본전)

3. 1. 신덴즈쿠리 양식

이쓰쿠시마 신사는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인 신덴즈쿠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신덴즈쿠리 양식은 수수한 멋과 백색의 벽, 열린 공간을 중요시하는 건축 양식이다. 이쓰쿠시마 신사는 해안에서 튀어나와 마치 부두처럼 지어져 있어, 만조 때는 섬에서 분리되어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자연과 공간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경향은 당시 헤이안 시대의 특징으로, 자연을 건축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나무, 물, 돌과 같은 자연물을 집이나 건물 장식에 그대로 활용하고, 풍경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중시했다.[6][7]

만조 때의 모습


본전


신토 건축의 여러 독특한 부분 중에서도 신사의 honden(본전)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본전은 "8칸×4칸 구조에 키리즈마 지붕을 하고 있으며 편백나무 껍질로 지붕이 덮여 있다."[2] 벽은 흰색 회반죽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15번이나 흰색 회반죽 작업과 주홍색 목재 작업을 거쳐 건설되었다.[2]

이쓰쿠시마 신사 본전(本殿)


이쓰쿠시마 신사 하이덴(拝殿)


본전 옆에는 1590년에 지어진 노 무대가 있다.[1] 노 연극 공연은 오랫동안 신토 신화의 주요 사건을 의식적으로 재현하여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데 사용되었다.

3. 2. 도리이

이쓰쿠시마 신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특징은 부식에 강한 녹나무로 지어진 높이 15m의 주홍색 오토리이(大鳥居, "큰 문")이다.[2] 각 주요 기둥 앞뒤에 추가적인 다리를 설치한 것은 료부 신토(일본 신토의 한 종파) 양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중세 시대의 밀교 일본 불교와 진언종과 관련이 있다. 이 도리이는 밀물 때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썰물 때는 섬에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다. 썰물 때 문 근처에서 조개류를 채취하는 것이 인기가 많다. 밤에는 해안의 강력한 조명이 이 구조물을 비춘다. 1168년부터 그 자리에 도리이가 있었지만, 현재의 도리이는 1875년에 건설되었다.[2]

신사 경내 바다 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현재의 토리이는 메이지 8년(1875년)에 재건된 것이다. 높이 16.6m, 기둥 사이 간격 10.9m의 대형 목조 양부토리이(각 주주에 2개의 보조 기둥이 있음)이다. 주주는 구스노키(녹나무)의 천연목이며, 보조 기둥은 스기(삼나무) 재목이다. 주주는 한 개는 미야자키현 오카토미무라(현 사이토시) , 또 다른 하나는 가가와현 와다하마(현 칸온지시)에서 베어낸 것이다. 두 기둥 모두 1950년 수리 때 뿌리 부분을 이어 붙였는데, 이음매 부분의 재료는 동쪽 기둥은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서쪽 기둥은 사가현 사가군 가와카미무라 오아자 이케노카미 아자 이케노카미(현재 사가시 야마토정 이케노카미)에서 베어낸 것이다. 각 주주의 기초는 천본규라고 하여, 소나무 재목의 둥근 기둥을 조밀하게 박아 만든 것인데, 현재는 그 위를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덮어 놓았다. 토리이는 이 기초 위에 약 60톤의 자중으로 서 있다. 섬목과 갓목은 상자형 구조이며, 내부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돌 약 7톤이 채워져 있어, 그 무게로 대토리이는 자립하여 바람과 파도에 견딜 수 있도록 되어 있다.[42]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츠루가의 키비징구(気比神宮)의 대토리이와 함께 "일본 3대 토리이"로 꼽힌다. 현재의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가 조영한 이후 8번째라고 한다. 현판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의 글씨이며, 바다 쪽은 "厳嶋神社", 신사 쪽은 "伊都岐島神社"라고 적혀 있다.

균열 부분에 많은 동전이 끼워져 있다.


최근 대토리이에 생긴 균열 부분에 일부 관광객에 의해 동전이 끼워지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43] 신사 측은 "토리이 기둥의 노후화가 진행될 우려가 있으므로 삼가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고 있다.[44]

3. 3. 본전과 회랑



이쓰쿠시마 신사는 신덴즈쿠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신덴즈쿠리 양식이란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방식으로 수수한 멋과 백색의 벽, 열린 공간을 중요시하였다. 이쓰쿠시마 신사는 해안에서 튀어나와 마치 부두처럼 지어져 있기에, 만조 때는 섬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바다 위에 세워진 것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와 같이 자연과 공간의 합일을 중요시하는 기풍은 당시 헤이안 시대의 특징이었는데, 이때에 지어진 건물들은 '자연을 건축물 안으로 들여놓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나무, 물, 돌과 같은 자연물들을 집이나 건물들의 장식에 그대로 활용하였고, 풍경 그대로의 미를 최상의 가치로 평가하였다.

신토 건축에는 여러 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그 대부분은 신사의 (본전)과 특히 긴 (배전), 그리고 길이가 같은 (제전)을 포함한다. 은 "8칸×4칸 구조에 기리즈마 지붕을 하고 있으며 편백나무 껍질로 지붕이 덮여 있다."[2] 벽은 흰색 회반죽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15번의 흰색 회반죽 작업과 주홍색 목재 작업을 거쳐 건설되었다.[2]

본전 옆쪽에는 일본식 전통극인 노(能극)가 상영되는 극장이 있다. '노'는 신토의 신화에서 나온 주요 장면들을 소재로 한 공연으로 보통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춘 연극이라고 한다. 이 연극은 159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4년 7월 5일, 태풍 송다로 인해 신사의 본전과 회랑 일부가 파손되었고, 이로 인해 잠시간의 보수공사를 거쳤다. 현재는 복원 작업이 완료되어 300JPY의 비용을 내면 누구나 갈 수 있다.[2]

히로시마만에 떠 있는 이쓰쿠시마(미야지마)의 북동쪽, 미야산(표고 535m)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쓰쿠시마는 일반적으로 「'''아키의 미야지마'''」라고도 불리며 '''일본 3경''' 중 하나로 꼽힌다. 헤이케의 신앙으로 유명하며, 헤이케이요시토모에 의해 현재의 해상에 서 있는 대규모 신사 건물이 정비되었다. 신사 건물은 현재, 본전·배전·회랑 등 6동이 국보로, 14동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헤이케가 봉납한 헤이케 납경을 비롯한 국보·중요문화재 공예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대토리이와 사전(바다쪽에서)


이쓰쿠시마 신사의 주요 신전은 이쓰쿠시마의 북부, 오노세토에 면한 아리노우라라고 불리는 만 안쪽에 있다. 만의 가장 안쪽에 소조쿠 삼신녀를 모시는 본사(本社)가 북쪽(엄밀히는 북서쪽)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본사 신전은 안쪽의 본전(本殿)과 앞쪽의 배전(拝殿) 사이를 헤이덴(幣殿)으로 연결하여 전체를 1동으로 하는 형식이며, 배전 앞에는 하라이덴(祓殿)이 있다. 하라이덴 앞(바다 쪽)에는 "고부타이(高舞台)"라고 불리는 난간이 있는 무대가 있으며, 향악(舞楽)을 봉납하는 데 사용된다. 그 주변 지붕이 없는 마루 부분을 "헤이부타이(平舞台)"라고 한다. 헤이부타이에 접하여 좌우의 문객신사(門客神社), 좌우의 가쿠방(楽房) 등의 작은 건물이 있다. 헤이부타이의 가장 바다 쪽은 부두처럼 가늘게 돌출되어 있으며, 이 부분을 "히타사키(火焼先)"라고 한다. "히타사키" 연장선상에는 바다 속에 대토리이(大鳥居)가 있다. 하라이덴 측면에서 좌우로 굴곡지는 카이로(廻廊)(동카이로, 서카이로)가 뻗어 이쓰쿠시마 신사 특유의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동카이로 중간, 만의 동쪽에는 세키샤 쿄쿠신사(摂社客神社)가 서쪽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쿄쿠신사도 본사와 마찬가지로 본전·헤이덴·배전·하라이덴으로 구성되지만, 신전 규모는 본사보다 작다. 이상의 건물 대부분은 해역에 있으며, 만조 시에는 건물이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23] 이러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각 건물에는 특별한 건축 기법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얕은 해저에 지상 건물과 마찬가지로 초석을 놓고, 말뚝(다발)을 세우고, 그 위에 판자 바닥을 깔았다.[24] 목조 말뚝은 만조 시 해수에 잠기기 때문에 부식을 면할 수 없어 정기적으로 점검하여 부식이 확인되면 근접 작업을 하고 있다(헤이부타이처럼 석조 말뚝을 사용하는 부분도 있다).[24] 본사 본전·헤이덴·배전(이상 1동), 본사 하라이덴, 세키샤 쿄쿠신사 본전·헤이덴·배전(이상 1동), 세키샤 쿄쿠신사 하라이덴, 동카이로, 서카이로의 총 6동이 1952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고부타이, 헤이부타이, 좌우 문객신사, 좌우 가쿠방은 국보의 "부(附)" 지정 대상이다. 기록에 따르면, 옛 이쓰쿠시마 신사에는 나츠도, 유루자야, 아사자지야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추가된 건축으로는 텐진샤, 노가부타이 등이 있다.

본사, 객신사, 회랑 등 해역 부분에 세워진 건물의 지붕은 모두 히와다부키이다. 본사의 사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본전·폐전·배전·축전의 순으로 나열된다. 이들 사전의 평면과 배치를 보면 완전한 좌우 대칭형이 아니고, 폐전과 축전은 본전에서 보아 약간 서쪽(정면에서 보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또한 본전과 배전은 기둥의 배치가 좌우 대칭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신사 건축에서는 각 기둥 간격을 등간격으로 하거나 정면 중앙의 기둥 간격을 넓게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쓰쿠시마 신사 본사의 본전·배전에서는 가장 넓은 기둥 간격이 서쪽에 있으며, 사전 전체의 중축선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그 이유는 후술).[30]

'''본사 본전'''의 지붕은, 맞배지붕의 정면·배면 양쪽을 길게 늘여, 그 늘인 부분을 처마 형태로 한 것으로, 이러한 지붕 형식을 「양류조」라고 한다. 본전의 기둥 간격은 가로(桁行)가 정면 8칸·배면 9칸, 세로(梁間)가 4칸이다. 구조적으로는 가로 9칸, 세로 2칸의 신사의 앞뒤 두 방향에 처마를 붙인 형태가 된다. 가로 배면의 기둥 간격이 9칸인 데 반해, 가로 정면의 기둥 간격이 1칸 적은 8칸인 것은, 정면 쪽에서는 기둥을 1개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배면에서는 기둥이 규칙적으로 10개 서 있지만(기둥 간격은 9칸), 정면에서는 오른쪽에서 5번째 기둥을 생략하고, 그 부분의 기둥 간격을 다른 것보다 넓게 하여, 이곳이 사전의 중축부가 된다. 본전의 내진에는 6기의 보전을 안치한다. 6기 중 3기에는 무나카타 산신을 섬기고, 나머지 3기에는 상전신이라고 불리는 신들을 함께 섬긴다. 이 중, 주신인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의 보전을 안치하는 부분만 기둥 간격이 다른 것보다 넓어지고, 이것이 전술한 중축부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본사에서는 사전의 중축이 서쪽(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본전의 구조물은 평삼두이고, 중비는 중축부의 기둥 간격이 개어맡, 그 좌우의 기둥 간격은 간두속으로 한다. 개어맡은 메이지 14년(1881년)의 수리 시 신조이지만, 세샤 객신사 본전의 개어맡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수리 전의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본전 정면의 기둥 간격 장치는, 중앙 6칸을 미닫이 마름모꼴 격자문, 양 끝의 간격을 연자창으로 한다.

'''폐전'''은 본전·배전 사이를 잇는 복도에 지붕을 붙인 형태가 되고, 한 칸, 양하조로 한다. 양하조란, 맞배지붕과 같은 지붕 형태이지만, 양 끝이 다른 건물에 닿아 있기 때문에 처마면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배전'''은 맞팔지붕, 가로 10칸, 세로 3칸이며, 구조물은 배흘림 기둥을 사용한다. 신사의 본전·배전의 정면 기둥 간격은 3칸, 5칸 등의 홀수가 되는 것이 보통이며, 짝수인 10칸으로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배전도 본전과 마찬가지로 좌우 비대칭이며, 오른쪽에서 5칸째 기둥 간격만 특히 넓고, 이 부분에 폐전이 붙는다. 배전 내부는 기둥의 생략이 없고, 1칸마다 규칙적으로 기둥이 선다. 세로 3칸 중, 중앙의 1칸과 안쪽(남쪽)의 1칸은 각각 화장 지붕 밑으로 한다. 화장 지붕 밑이란, 천장을 붙이지 않고, 들보, 서까래 등의 구조재를 그대로 보이는 것으로, 건물 내부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맞배지붕의 건물 2개가 앞뒤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개의 지붕을 덮어 건물 전체의 지붕이 있기 때문에, 전체를 「삼동조」라고 하고, 이 배전을 별명으로 「삼동」이라고도 했다.

'''축전'''은 배전의 앞에 지붕을 직각으로 세워 맞팔지붕, 처마쪽 출입구가 있는 건물로, 가로 6칸, 세로 3칸이다. 전면 개방(기둥 간격에 벽이나 문을 설치하지 않음)의 개방적인 건물이다.

본전 뒤쪽 육지 부분은 후원이라고 불리는 금족지가 되어 있다. 금족지에는 옥토를 두르고, 중앙에 「불명문」이라고 부르는 본와부키의 사각문이 있다. 불명문은 제신이 미야마에서 사전으로 내려올 때 통과하는 문으로 여겨지며, 사람이 통행하는 일은 없다.[31][32]

'''평무대'''는, 얕은 해저에 세운 돌기둥 위에 대들보와 도리들을 걸친 골조 위에 바닥판을 친 것이다. 돌기둥은 적간석제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기증이라고 한다.[33] 바닥판은, 고조 시의 수압을 뺄 수 있도록 틈을 벌려서 쳤지만, 그래도 태풍 등으로 자주 파손되고 있다. 평무대의 중앙 부근을 한 단 높여 난간을 두르고, 이 부분을 '''고무대'''라고 한다. 평무대의 앞쪽은 바깥쪽에 좌우의 '''악방''', 안쪽에 좌우의 '''문객신사'''가 있다. 악방은 맞배지붕의 간소한 건물, 문객신사는 맞배지붕의 덮개 안에 흘림지붕의 사전이 있다. 이들 무대와 건물은 태풍 등의 피해를 가장 받기 쉬운 위치에 있어, 자주 파손과 수리를 반복하고 있으며, 오래된 부재는 남아 있지 않다.[34]

'''동서 회랑'''은 일반적인 신사의 회랑처럼 울타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해상의 각 건물과 육지를 잇는 통로 역할을 한다. 서회랑은 꺾이는 부분을 포함해 62칸으로, 서쪽 끝은 지상에서 시작하여, 해상에 있는 노가쿠 무대를 둘러싸듯 네 번 직각으로 꺾인 후, 본사의 하라이덴 서쪽면에 연결된다. 동회랑은 꺾이는 부분을 포함해 45칸으로, 동북쪽 끝은 지상에서 시작하여, 객신사의 하라이덴과 배전 사이를 지나, 세 번 직각으로 꺾인 후, 본사의 하라이덴 동쪽면에 연결된다. 두 회랑 모두 가구는 주肘木(보)을 사용하고, 평무대와 마찬가지로 바닥널은 폭풍 해일 시 수압을 빼내기 위해 틈을 띄워서 깔았다. 내부 구조는 들보 방향으로 직재의 홍량을 걸쳐 그 위에 우수(さす)를 짜맞추고, 우수 위의 주肘木(보)으로 널을 받치고 있다. 회랑에는 많은 동자(棟札)가 남아 있어, 무로마치 시대 말기부터 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순차적으로 정비된 것임을 알 수 있다.[36] 회랑의 현재 바닥널은 메이지 말기에 교체한 것이며, 마모 방지를 위해 원래 바닥널 위에 보호판을 깔았다.[37]

3. 4. 기타 건축물

이쓰쿠시마 신사의 본전 옆에는 일본 전통극인 '노'를 상연하는 극장이 있다. '노'는 신토 신화의 주요 장면을 소재로 한 공연으로, 신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연극을 한다고 한다.[1] 본전의 하이덴 옆에는 1590년에 지어진 ''노'' 무대가 있다.[1] ''노'' 연극 공연은 오랫동안 신토 신화의 주요 사건을 의식적으로 재현하여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상의 국보 건축물 외에, 섭사, 말사, 부속 건물 등 14동(엄밀하게는 8동과 다리 3기, 탑 2기, 도리이 1기)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본사 주변 해상:
  • '''섭사 다이코쿠신사 본전'''
  • '''섭사 덴진샤 본전'''
  • '''아사자야'''
  • '''노가부대'''
  • '''아게미즈바시'''
  • '''긴 다리'''
  • '''반다리'''
  • '''큰 도리이''' (만 입구 부근)


嚴島神社의 주요 건물은 해역에 있지만, 지상 부분에도 몇몇 건물이 있다.

  • 본사 뒤편 사무소 근처: 고쿠라조의 '''보물창고'''
  • 만 동쪽 해안 타오카(とうのおか): '''말사 풍국신사 본전'''(원래 대경당, 본와가부키의 대규모 건축물, 별칭 천겹집])과 '''오층탑'''
  • 언덕 기슭: '''말사 아라후시신사 본전'''
  • 만 서쪽 해안(보물관 뒤편 언덕): '''다보탑'''
  • 오오모토우라: '''섭사 오오모토신사 본전'''


오층탑, 다보탑, 풍국신사 본전 등의 불교 건축물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신불습합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 嚴島神社의 특징이다.[35]

  • 섭사 다이코쿠신사 본전: 본사 본전 서쪽. 겹처마지붕, 편백나무 껍질 지붕. 가로 3칸, 세로 4칸(동쪽 1칸은 폭이 넓고, 남쪽 긴 다리로 통하는 통로). 무로마치 시대 건립, 에이겐(永元) 2년(1571년) 모리 모토나리 건립 추정.[38]
  • 섭사 덴진샤 본전: 다이코쿠신사 본전 남서쪽. 맞배지붕, 편백나무 껍질 지붕. 가로 3칸, 세로 3칸. 고지(弘治) 2년(1556년) 건립. 다른 신사 건물과 달리 원목 건물.
  • 아사자야: 본사 본전 동쪽, 동쪽 회랑에 접함. 한쪽 맞배지붕, 한쪽 겹처마지붕, 편백나무 껍질 지붕. 가로 8칸, 세로 4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재건.
  • 노가부대: 본사 배전 서쪽 바다. 북쪽 제외 삼면이 서쪽 회랑에 둘러싸임. 겹처마지붕, 편백나무 껍질 지붕. 가로·세로 1칸. 다리걸이와 노가쿠야 갖춤. 엔포(延宝) 8년(1680년) 히로시마번아사노 쓰나나가 기증. 1991년 태풍으로 붕괴, 기둥 4개 중 3개 교체.[39]
  • 긴 다리: 본사 본전 남서쪽, 다이코쿠신사 본전과 남쪽 육지 연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건립. 다리 기둥은 돌, 다리판·난간 등 목재 부분은 여러 번 수리.[40]
  • 반다리: 긴 다리 서쪽, 서쪽 회랑과 남쪽 육지 연결. 곡선형 다리. 보주고지(弘治) 3년(1557년) 명문. 보주는 오래됨, 다리판·난간 등 목재 부분은 여러 번 수리.[41]
  • 아게미즈바시: 본사 본전 동쪽, 동쪽 회랑과 남쪽 육지 연결. 짧은 다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건립.
  • 말사 풍국신사 본전: 메이지 이후 풍국신사, 원래 대경당. 도요토미 히데요시덴쇼(天正) 15년(1587년) 전몰자 위령 발원. 히데요시가 모리 데루모토에 명, 안코쿠지 에케이 지시. 귀면기와에 덴쇼(天正) 17년(1589년) 명문, 조선 출병으로 공사 중단, 미완성. 맞배지붕, 본와가부키. 가로 13칸(뒷면 15칸), 세로 8칸(실제 길이 가로 39.5m, 세로 21.1m). 외주에 처마 기둥. 「천겹집」 통칭, 다다미 857장 넓이(판자 바닥). 내부 2칸마다 독립 기둥, 중앙 안쪽 수미단.
  • 보물창고: 고쿠라조. 팔작지붕, 편백나무 껍질 지붕. 무로마치 시대 건립.
  • 오층탑: 오에이(応永) 14년(1407년) 건립. 편백나무 껍질 지붕. 와요(和様) 기본, 네 귀퉁이 처마 휨, 기둥 치마키, 처마 끝 삼각형 등 선종(禅宗) 요소.
  • 말사 아라후시신사 본전: 일간사류조, 편백나무 껍질 지붕 작은 신사. 가키쓰(嘉吉) 원년(1441년) 건립.
  • 다보탑: 편백나무 껍질 지붕. 다이에이(大永) 3년(1523년) 건립.
  • 섭사 오오모토신사 본전: 삼간사류조, 흐르는 판자 지붕. 다이에이(大永) 3년(1523년) 건립. 앞쪽 처마 부분 정면 마름모꼴 격자문, 측면 판벽, 전실로 삼는 형식.


4. 문화재

이쓰쿠시마 신사에는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다양한 건축물과 미술 공예품이 소장되어 있다.

'''동서 회랑'''은 일반적인 신사의 회랑과 달리, 해상 건물과 육지를 잇는 통로 역할을 한다. 서회랑은 62칸으로, 노가쿠 무대를 둘러싸듯 네 번 꺾여 본사의 서쪽 면에 연결된다. 동회랑은 45칸으로, 객신사를 지나 세 번 꺾여 본사의 동쪽 면에 연결된다. 두 회랑 모두 보를 사용하고, 바닥 널은 틈을 띄워 깔아 수압을 줄이도록 설계되었다. 회랑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부터 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정비되었다.[36] 현재 바닥 널은 메이지 말기에 교체된 것이다.[37]

국보 건축물 외에도 섭사, 말사, 부속 건물 등 14동(엄밀하게는 8동과 다리 3기, 탑 2기, 토리이 1기)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사 주변 해상에는 '''섭사 다이코쿠신사 본전''', '''섭사 덴진사 본전''', '''아사자야''', '''노가쿠부대''', '''아게미즈바시''', '''긴 다리''', '''반다리'''가 있으며, 만 입구 부근에는 '''대토리이'''가 있다. 지상에는 '''보물창고''', '''말사 풍국신사 본전'''과 '''오층탑''', '''말사 아라후시신사 본전'''이 있다. 만 서쪽 해안에는 '''다보탑'''과 '''섭사 오모토신사 본전'''이 있다. 오층탑, 다보탑, 풍국신사 본전 등 불교 건축물이 남아 있어 신불습합의 흔적을 볼 수 있다.[35]



대토리이


현재의 대토리이는 1875년에 재건된 것으로, 높이 16.6m, 기둥 간격 10.9m의 목조 양부 도리이이다. 녹나무삼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약 60톤의 무게로 자립한다.[42] 가스가타이샤, 게히 신궁과 함께 "일본 3대 토리이"로 꼽힌다.

최근 대토리이 균열에 동전을 끼우는 행위가 발생하여 신사 측에서 자제를 요청하고 있다.[43][44]

4. 1. 국보

이쓰쿠시마 신사의 국보 목록은 다음과 같다.

; 건축물

  • 嚴島神社(1건 6동)
  • * 본전(本殿), 幣殿(へいでん), 배전(拝殿)(1동)(부속: 옥가(玉垣)(불명문(不明門) 포함), 좌우 내시교(左右内侍橋))
  • * 본사(本社) 팔전(祓殿)
  • * 섭사(摂社) 객(客)(마로도(まろうど)) 신사 본전, 幣殿, 배전(1동)(부속: 옥가(玉垣))
  • * 섭사 객신사 팔전(祓殿)
  • * 회랑 동회랑(廻廊東廻廊)
  • * 회랑 서회랑(廻廊西廻廊)
  • ** (본사 부속) 고무대(高舞台), 평무대(平舞台), 좌우 악방(左右楽房), 좌우 문객신사 본전(左右門客神社本殿), 동찰(棟札) 4매
  • ** (회랑 부속) 동찰(棟札) 19매


; 미술 공예품

효고(兵庫) 사슬太刀(太刀)(5자루 중)

  • 헤이케(平家) 나경(納経)
  • * 법화경(法華經)(개결(開結) 공(共)) 30권, 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반야심경(般若心經) 1권, 조관 2년(長寛二年) 평청성(平清盛) 원문(願文) 1권
  • * 금은장운룡문동제경상(金銀荘雲龍文銅製経箱) 1구
  • * 덩굴나무 칠기 당궤(蔦蒔絵唐櫃) 1합
  • 금동밀교법구(金銅密教法具) 1구(금강반(金剛盤) 1구, 오고령(五鈷鈴) 1구, 독고저(独鈷杵) 1구, 삼고저(三鈷杵) 1구, 오고저(五鈷杵) 1구)
  • 嚴島神社 고신보류(古神寶類) 일괄
  • * 보상화문라전평진식태도(寶相華文螺鈿平塵飾太刀) 1자루
  • * 쌍봉문라전평진식태도초(雙鳳文螺鈿平塵飾太刀鞘) 1자루
  • * 반비(半臂) 1장(부속: 홍지행령문릉잔편(紅地幸菱文綾残片))
  • * 내의( 内衣) 1장
  • * 석대(石帶) 1조
  • * 평오(平緒) 1조
  • * 목괄(木笏) 1움큼
  • * 편백 부채(檜扇) 3움큼
  • * 장식태도(飾太刀) 1자루
  • * 평고록(平胡籙) 1자루
  • * 화살(箭) 11개
  • * 주칠 장식태도상자(朱塗飾太刀箱) 1합
  • * 주칠 장식태도상자(朱塗飾太刀箱) 1합
  • * 송식학소당궤(松食鶴小唐櫃) 1합
  • * 송식학소당궤(松食鶴小唐櫃) 1합
  • 감사위갑(紺絲威鎧) 투구(兜), 대소부(大袖付)
  • 소앵위황반위갑(小桜韋黄返威鎧) 투구(兜), 대소부(大袖付)
  • 천황릉위갑(浅黄綾威鎧) 투구(兜), 대소부(大袖付)
  • 흑위위동환(黒韋威胴丸) 투구(兜), 대소부(大袖付)
  • 태도(太刀) 명(銘)우성(友成) 작
  • 이자지동문라전요도(梨子地桐文螺鈿腰刀) 안에 우성(友成) 작이라고 명(銘)이 있다.(부속: 칠기상자(蒔絵箱))
  • 채색 편백 부채(彩絵檜扇)
  • 감지금자법화경(紺紙金字法華經) 7권・관보현경(觀普賢經) 1권(평청성(平清盛)・라이성(頼盛) 합필)(부속: 금동경상(金銅経箱))

4. 2. 중요문화재

이쓰쿠시마 신사의 건물과 소장품 중 일부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섭사 다이코쿠신사 본전 - 본사 본전 서쪽에 위치한다. 겹처마 지붕에 측백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가로 3칸, 세로 4칸 크기이며, 가로 3칸 중 동쪽 1칸은 폭이 넓어 남쪽에 있는 긴 다리로 연결된다. 무로마치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본사 본전과 마찬가지로 1571년에 모리 모토나리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38]
  • 섭사 덴진사 본전 - 다이코쿠신사 본전 남서쪽에 위치한다. 맞배지붕에 측백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가로 3칸, 세로 3칸 크기이다. 1556년에 건립되었다. 다른 신사 건물들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것과 달리, 이 건물은 나무색 그대로이다.
  • 아사자야 - 본사 본전 동쪽, 동쪽 회랑에 접해 있다. 한쪽은 맞배지붕, 다른 한쪽은 겹처마 지붕이며, 측백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가로 8칸, 세로 4칸 크기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재건되었다.
  • 노가쿠 무대 - 본사 배전 서쪽 바다에 세워져 있으며, 북쪽을 제외한 세 면이 서쪽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겹처마 지붕에 측백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가로와 세로 모두 1칸 크기이다. 다리와 노가쿠야(能楽屋)를 갖추고 있다. 1680년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쓰나나가가 기증하여 건립되었다. 1991년 태풍으로 붕괴되어 기둥 4개 중 3개가 교체되었다.[39]
  • 긴 다리 - 본사 본전 남서쪽, 다이코쿠신사 본전과 남쪽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건립되었다. 다리 기둥은 돌로 만들어졌지만, 다리판, 난간 등 나무 부분은 여러 번 수리되어 새로운 재료로 바뀌었다.[40]
  • 반다리 - 긴 다리 서쪽, 서쪽 회랑과 남쪽 육지를 연결하는 곡선형 다리이다. 1557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보주(宝珠)에 남아 있다. 보주는 오래되었지만, 다리판, 난간 등 나무 부분은 여러 번 수리되어 새로운 재료로 바뀌었다.[41]
  • 아게미즈바시 - 본사 본전 동쪽, 동쪽 회랑과 남쪽 육지를 연결하는 짧은 다리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건립되었다.
  • 말사 풍국신사 본전 - 메이지 시대 이후 풍국신사가 되었지만, 원래는 대경당(大経堂)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에 전몰자 위령을 위해 건립을 시작한 건물이다. 히데요시가 모리 데루모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였고, 실제 건축 지시는 안코쿠지 에케이가 담당하였다. 이 건물의 귀면 기와에는 1589년의 기록이 있어, 이 무렵 건물의 형태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결정하면서 건축 공사가 중단되어, 세부적인 부분은 미완성 상태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기둥 간격은 가로 13칸(뒷면은 15칸), 세로 8칸이며, 실제 길이는 가로 39.5미터, 세로 21.1미터이다. 외주에는 처마를 지탱하기 위한 기둥이 둘러져 있다. 이 건물은 규모가 커서 '센조카쿠'라고 불리며, 다다미 857장에 해당하는 넓이지만 바닥은 다다미가 아닌 나무판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2칸마다 기둥이 있고, 중앙 안쪽에 수미단(須弥壇)이 설치되어 있다.
  • 보물창고 - 고쿠라조.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측백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무로마치 시대에 건립되었다.
  • 오층탑 - 1407년에 건립되었다. 측백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일본의 다른 불탑과 마찬가지로 건축 양식은 와요(和様)를 기본으로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선종(禅宗) 양식의 요소가 보인다.
  • 말사 아라후시신사 본전 - 작은 신사 건물로 1441년에 건립되었다.
  • 다보탑 - 측백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1523년에 건립되었다.
  • 섭사 오모토신사 본전 - 1523년에 건립되었다. 앞쪽 처마 부분을 마름모꼴 격자문(정면)과 판벽(측면)으로 둘러싸 전실(前室)로 사용하는 드문 형식이다.


신사 경내에서 바다 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대토리이가 있다.

현재의 토리이는 1875년에 재건된 것이다. 높이 16.6미터, 기둥 사이 간격 10.9미터의 대형 목조 양부 도리이(각 주 기둥에 2개의 보조 기둥이 있다)이다. 주 기둥은 녹나무 천연목이며, 보조 기둥은 삼나무이다. 주 기둥은 각각 미야자키현과 가가와현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기둥 모두 1950년 수리 때 뿌리 부분을 이어 붙였는데, 이음매 부분의 재료는 각각 후쿠오카현과 사가현에서 가져왔다. 각 주 기둥의 기초는 소나무 기둥을 촘촘하게 박아 만들었으며, 현재는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덮여 있다. 토리이는 이 기초 위에 약 60톤의 무게로 서 있다. 섬목과 갓목은 상자형 구조이며, 내부에 주먹만 한 크기의 돌 약 7톤이 채워져 있어, 그 무게로 대토리이는 바람과 파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42]

나라현가스가타이샤, 후쿠이현 쓰루가시의 게히 신궁의 대토리이와 함께 "일본 3대 토리이"로 꼽힌다. 현재의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조영한 이후 8번째라고 한다. 현판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의 글씨이며, 바다 쪽은 "厳嶋神社", 신사 쪽은 "伊都岐島神社"라고 적혀 있다.

최근 대토리이에 생긴 균열 부분에 일부 관광객들이 동전을 끼워 넣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43] 신사 측은 "토리이 기둥의 노후화가 진행될 우려가 있으므로 삼가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고 있다.[44]

; 건축물

  • 조좌옥(朝座屋)
  • 노가쿠 무대(노부타이, 附 하시가카리 및 노가쿠야)(能舞台(附 橋掛及び能楽屋))
  • 양수교(揚水橋)
  • 장교(長橋)
  • 반교(反橋)
  • 대토리이(오토리이, 附 무나후다 2매)(大鳥居(附 棟札2枚))
  • 섭사 대국신사 본전(摂社大国神社本殿)
  • 섭사 천신사 본전(摂社天神社本殿, 附 궁전 1기, 도랑 1동, 동찰 1매)(摂社天神社本殿(附 宮殿1基、渡廊1棟、棟札1枚))
  • 섭사 대원신사 본전(摂社大元神社本殿, 附 궁전 3기, 명찰 2매)(摂社大元神社本殿(附 宮殿3基、銘札2枚))
  • 보장(附 동찰 1매)(宝蔵(附 棟札1枚))
  • 오층탑(五重塔)
  • 다보탑(附 동찰 1매)(多宝塔(附 棟札1枚))
  • 말사 황호자신사 본전(末社荒胡子神社本殿, 附 동찰 1매)(末社荒胡子神社本殿(附 棟札1枚))
  • 말사 풍국신사 본전(센조카쿠, 附 동찰 2매)(末社豊国神社本殿(千畳閣)(附 棟札2枚))


; 미술공예품

미술공예품 종류품목명
그림견본착색 산모도(나가사와 로세쓰 필, 에마)(絹本著色山姥図 長沢芦雪筆(絵馬))
불상석가 및 제존 상자불(釈迦及諸尊箱仏)
가면무악면 2면(귀덕, 산수)(舞楽面 2面(貴徳、散手))
가면무악면 7면(이노마이(2면), 채상로, 나소리, 발두, 환성락, 릉왕)(舞楽面 7面(二ノ舞(2面)、採桑老、納曾利(なそり)、抜頭(ばとう)、還城楽(げんじょうらく)、陵王))
조각목조 고마이누 14구(木造狛犬 14躯)
조각목조 장식마(木造飾馬)
공예품매당초 칠기 문대 연상 1조(梅唐草蒔絵文台硯箱 1組)
공예품감지 금니 법화경 입 연화 칠기 경함(紺紙金泥法華経入蓮花蒔絵経函)
서적지본 묵서 선(전 고쿠라 천황 어물)(紙本墨書扇(伝高倉天皇御物))
악기칠현금(전 다이라노 시게히라 소용)(七絃琴(伝平重衡所用))
금속공예주동 걸 등롱 정평 21년(1366년) 명(鋳銅釣燈籠 正平廿一年(1366年)銘)
악기목제 채색 악기 해로, 부리쓰즈미(부리쓰즈미의 한자는 윗부분이 , 아랫부분이 )(木製彩色楽器 奚婁(けいろう)、鼗(ふりつづみ)(「ふりつづみ」の漢字は上半分が「兆」、下半分が「鼓」))
서예목제 동자 편액 후나라 천황 친필 2면(木製銅字扁額 後奈良天皇宸翰 2面)
도검태도 나카미쿠니쿠니토 명 있음(附 사권 태도 외장)(太刀 中身久国ト銘アリ(附 糸巻太刀拵))
도검단도 명 하세베쿠니노부(附 은상어 자락 로색 각 초 합구 외장)(短刀 銘長谷部国信(附 銀鮫柄蝋色刻鞘合口拵))
도검태도 명 고츄(附 가와가라 로색 초 와키자시 외장)(太刀 銘光忠(附 革柄蝋色鞘脇指拵))
도검태도 명 비슈나가후네주(일자 불명)진(附 가와쓰쓰미 태도 외장)(太刀 銘備州長船住(一字不明)真(附 革包太刀拵))[51]
도검태도 표에 비슈나가후네주(일자 불명)장작, 뒤에 가겐 22년 10월 일 명 있음(사전 즉 장작)(太刀 表ニ備州長船住(一字不明)長作 裏ニ嘉元二二年十月日ノ銘アリ(社伝則長作))
도검태도 명 일(附 사권 태도 외장)(太刀 銘一(附 糸巻太刀拵))
도검태도 명 일(附 구루시 태도 외장)(太刀 銘一(附 黒漆太刀拵))
도검도 무명 전 운지(附 가와가라 로색 초 우치가타나 외장)(刀 無銘伝雲次(附 革柄蝋色鞘打刀拵))
도검태도 명 비츄쿠니주(이하 불명) 엔분 3년 6월 일(太刀 銘備中国住(以下不明) 延文三年六月日)
도검태도 명 호지(附 구루시 반 태도 외장)(太刀 銘包次(附 黒漆半太刀拵))
도검태도 명 세이쓰나(附 야타나 외장)(太刀 銘清綱(附 野太刀拵))
도검태도 명 분에이 2년 3월 세이쓰나(附 가와쓰쓰미 태도 외장)(太刀 銘文永二年三月清綱(附 革包太刀拵))
도검대태도 명 비고쿠니주닌코키치 작(大太刀 銘備後国住人行吉作)
도검도 명 담의소 서련(附 우치가타나 외장)(刀 銘談議所西蓮(附 打刀拵))
도검금포 등권 태도, 금포 등권 요도 도신 결(錦包籐巻太刀、錦包籐巻腰刀 刀身欠)
도검가와쓰쓰미 태도 나카미 세이와 2년 운운이라고 있음[52](革包太刀 中身貞和二年云々トアリ[52])
도검도금 장복륜 태도(鍍金長覆輪太刀)
도검도금 병고쇄 태도 5구(鍍金兵庫鎖太刀 5口)
도검목지 도라전 가자리 태도(木地塗螺鈿飾太刀)
갑주칠 그림 대소 외장(진도)(고가라마에 결)[53](漆絵大小拵(こしらえ)(陣刀)(小柄前欠)[53])
갑주남위(아이카와) 가타 적위 갑주 오우치 요시타카 봉납(藍韋(あいかわ)肩赤威甲冑 大内義隆奉納)
갑주적사 위 동환 도구 근두·소구족 부(赤糸威胴丸具足 筋兜・小具足付)
갑주은소찰(긴코자네) 백사 위 동환 도구 투구·대수·소구족 부(附 요로이비쓰)(銀小札(ぎんこざね)白糸威胴丸具足 兜・大袖・小具足付(附 鎧櫃))
복식노 장속 홍지 봉황 앵설지사스 문당직(能装束 紅地鳳凰桜雪持笹文唐織)
복식노 장속 홍 천총지 국사대내릉 문양 단체 당직(能装束 紅浅葱地菊笹大内菱文様段替唐織)
복식무악 장속(나소리) 덴쇼 17년(1589년) 주서명(舞楽装束(納曾利)天正十七年(1589年)朱書銘)
복식광언 장속(당인용) 수박 봉황 원앙 국문, 수박 봉황 류앵문, 수박 풍국 동두약문, 수박 류수로문(狂言装束(唐人用) 繍箔鳳凰鴛鴦菊文、繍箔鳳凰柳桜文、繍箔楓菊桐杜若文、繍箔柳樹鷺文)
경전감지 금자 화엄경(附 구루시누리쿄바코) 56권(紺紙金字華厳経(附 黒漆塗経箱)56巻)
경전감지 금자 대방등대집경(附 구루시누리쿄바코) 50권(紺紙金字大方等大集経(附 黒漆塗経箱)50巻)
경전감지 금니 금강 수명 다라니경 다이라노 지네무네 필(紺紙金泥金剛寿命陀羅尼経 平親宗筆)
문서지본 묵서 어판물첩 2첩(紙本墨書御判物帖 2帖)


5. 세계유산

이쓰쿠시마 신사는 히로시마만에 떠 있는 이쓰쿠시마(미야지마) 북동쪽, 미야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쓰쿠시마는 '''아키의 미야지마'''라고도 불리며 일본 3경 중 하나로 꼽힌다. 헤이케의 신앙으로 유명하며, 헤이케이요시토모에 의해 현재의 해상에 서 있는 대규모 신사 건물이 정비되었다. 신사 건물은 현재 본전·배전·회랑 등 6동이 국보로, 14동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헤이케가 봉납한 헤이케 납경을 비롯한 국보·중요문화재 공예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평무대(국보: 부속지정)는 일본 3무대 중 하나[15]이며, 해상에 서 있는 높이 16m의 오토리이(중요문화재)는 일본 3대 도리이 중 하나[16]이다. 여름에 거행되는 례제는 「'''관현제'''」로 알려져 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5. 1. 등록 기준

이쓰쿠시마 신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기준 1항, 2항, 4항, 6항에 해당된다. 각 기준은 다음과 같다.

  • (1) 독특한 예술적 혹은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 할 것.
  • (2)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 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
  • (4)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 (6)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것.

6. 현대적 의의

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의 지고젠 신사는 이쓰쿠시마 신사의 경외섭사이다. 주고 천황 원년(593년)에 창건되었으며,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 타고리히메노미코토, 타다쓰히메노미코토를 모시고 있어 본사와 같다. 경내에는 오야카타구미야가 있는데, 이곳의 제신은 마사야아가쓰가쓰하야히아마테노호히미코토, 아마노호히미코토, 아마쓰히코네노미코토, 이키쓰히코네노미코토, 쿠마노쿠스히노미코토로 본사의 객신사와 같다.[47]

이쓰쿠시마는 예로부터 신이 사는 섬으로 여겨져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맞은편에 지고젠 신사를 세워 멀리서 참배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헤이시 가문의 번성과 함께 지고젠 신사는 외궁으로 발전하였다. 현재는 음력 6월 17일에 열리는 관현제에서 관현선(어좌선)이 본사에서 지고젠 신사로 이동한다.

6. 1. 관광 명소

히로시마만에 떠 있는 이쓰쿠시마(미야지마)는 '''아키의 미야지마'''라고도 불리며, 일본 3경 중 하나이다. 헤이케의 신앙으로 유명하며, 헤이케이요시토모에 의해 현재의 해상 신사 건물이 정비되었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평무대는 일본 3무대 중 하나이며[15], 해상에 있는 높이 16m의 오토리이(중요문화재)는 일본 3대 도리이 중 하나이다.[16] 여름에 거행되는 례제는 관현제로 알려져 있다.

에도 시대에는 엄도 에마이(厳島詣)가 민중에게 널리 퍼져 몬젠마치(門前町)와 주변은 많은 참배객으로 북적였다.

'''위치'''

'''관람 시간'''

  • 오전 6시 30분 - 오후 5시
  • : 보통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단, 오토리이는 오후 5시 이후에도 라이트업되며, 간조라면 가까이 갈 수도 있다.


'''부속 시설'''

  • 보물관 - 이쓰쿠시마 신사가 소유한 국보·중요문화재 지정을 포함한 보물을 전시한다.


'''교통편'''

  • 미야지마구치 선착장에서 미야지마(미야지마 선착장)까지
  • *: 페리 이용. 미야지마 선착장에서 참배 입구까지 도보 약 10분.
  • ** JR서일본 미야지마 페리 미야지마 항로 (승선 시간 약 10분)
  • ** 미야지마마쓰다이 기선 미야지마 항로 (승선 시간 약 10분)
  • 미야지마구치 선착장까지의 접근
  • *: JR서일본 산요 본선 미야지마구치역 (도보 5분)
  • *: 히로시마 전기철도 미야지마선 히로덴 미야지마구치역 (도보 바로)

  • 섬 내 주차장: 없음. 자동차 이용 시 미야지마구치 선착장 근처 주차장에 주차하고 페리로 섬으로 건너간다. 섬 내 숙소에 숙박하는 경우 숙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섬 내 도로는 매우 좁다.
  • 히로시마 항이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출발하는 관광 유람선 노선도 있다(편수가 적고 평일에는 조기 종료).

  • 미야지마 로프웨이 이용
  • *: 로프웨이: 산기슭의 모미지다니 역에서 시시이와 역까지 (한산기 약 15분) - 모미지다니 공원 입구에서 모미지다니 역까지 무료 셔틀버스 운행
  • *: 시시이와 역에서 정상까지는 도보 약 30분
  • 도보(등산) - 미센(히로시마현)#등산경로 참조
  • *: 모미지다니 코스·유히칸논 코스·다이세이인 코스·다이겐 공원 코스가 있으며, 소요 시간은 대략 90분~120분
  • 오쿠미야의 미야마 신사에는 미센 본당에서 갈라져 도보 약 5분
  • 미센은 표고 535m이며, 산기슭과 날씨·기온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주변'''

  • 다이세이인 - 옛 별당사
  • 다이간지
  • 미야오성 터 - 참배길 중간의 요하야마에 남아 있는 성터.
  • 미야지마 역사민속자료관
  • 미야지마 수족관

참조

[1] 서적 Itsukushima-jinja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 서적 Shinto Shrines: A Guide to the Sacred Sites of Japan's Ancient Religi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3
[3] 웹사이트 Ramsar and World Heritage Conventions: Converging towards success - Case study: Itsukushima Shinto Shrine, Japan https://www.ramsar.o[...] 2017-09-15
[4] 웹사이트 Nationwide List of Ichinomiya http://eos.kokugakui[...] 2012-11-20
[5] 서적 Hiroshima https://books.google[...] Hiroshima City 1986
[6] 서적 A Short History of Japanese Architecture https://archive.org/[...] 2009
[7] 서적 Japan Style Phaidon 2002
[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2: Heian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9] 학술지 Rites and Rule: Kiyomori at Itsukushima and Fukuhara 2013
[10]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58
[11] 웹사이트 Itsukushima https://web.archive.[...] 2011-03-17
[12] 서적 The Ritual Process: Structure and Anti-structure https://archive.org/[...] Aldine Pub. 1969
[13] 웹사이트 国宝・世界遺産 嚴島神社 http://www.itsukushi[...]
[14] 웹사이트 世界遺産 「厳島神社」 https://bunka.nii.ac[...] 文化遺産オンライン / 文化庁 2019-12-21
[15] 문서 일본 삼무대
[16] 문서 일본 삼대토리이
[17] 웹사이트 御由緒 拝観 http://www.itsukushi[...]
[18] 문서 일본 삼대변재천
[19] 문서 히로시마현 지명
[20] 문서 히로시마현 지명
[21] 문서 히로시마현 지명
[22] 서적 大日本古記録 臥雲日件録抜尤 岩波書店 1961
[23] 서적 1992
[24] 서적 2012
[25] 서적 1992
[26] 서적 2005
[27] 서적 2011
[28] 서적 1992
[29] 서적 週刊朝日百科 日本の国宝 28
[30] 서적 1992
[31] 서적 1992
[32] 서적 1988
[33] 웹사이트 宮島🦌厳島神社「平舞台」【国宝】 厳島神社-御朱印 https://xn----kx8ayh[...] 2023-03-31
[34] 서적 1992
[35] 서적 1992
[36] 書籍 (不明) 1992
[37] 書籍 (不明) 2011
[38] 書籍 (不明) 1992
[39] 書籍 (不明) 2011
[40] 書籍 (不明) 2011
[41] 書籍 (不明) 2011
[42] 書籍 (不明) 1992
[43] 웹사이트 倒壊の危機、厳島神社大鳥居の大改修開始 https://honichi.com/[...] 訪日ラボ 2020-09-24
[44] 뉴스 大鳥居、亀裂に小銭差し込み 厳島神社「やめて」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13-12-09
[45] 書籍 (不明) 1992
[46] 書籍 (不明) 1988
[47] 서적 広島県の地名 (不明)
[48] 웹사이트 宮島の神社・一覧 http://masuda901.web[...]
[49] 문서 便宜上、拝観の順路途中にあるものを境内社とし、それ以外を境外社とした。
[50] 서적 広島県の地名 (不明)
[51] 서적 厳島神社の刀剣 泉屋博古館 2008
[52] 서적 厳島神社の刀剣 泉屋博古館 2008
[53] 서적 厳島神社の刀剣 泉屋博古館 2008
[54] 서적 世界遺産 日本三景 宮島 (不明)
[55] 디지털자료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一遍聖絵 (추가 정보 필요)
[56] 웹사이트 指定文化財目録 https://www.city.fuj[...] 藤沢市 2019-06-22
[57] 웹사이트 管絃祭 http://www.miyajima.[...] 宮島観光協会 2019-06-21
[58] 웹사이트 厳島神社『管絃祭』|2019 - 34広島県 https://tabi-mag.jp/[...] 一般社団法人プレスマンユニオン 2019-06-21
[59] 뉴스 厳島神社の「管絃祭」106年ぶり中止 日本三大船神事 https://www.asahi.co[...] 朝日新聞社 2019-06-21
[60] 웹사이트 「平山郁夫 歴史遺産を描く」展 8/27~12/3 http://hirayama-muse[...] 平山郁夫美術館 2019-06-26
[61] 웹사이트 新作≪月華厳島≫のご案内 http://bijutsu-shumi[...] 共同印刷株式会社 2019-06-26
[62] 뉴스 【佐藤春佳のシリーズブレーク】「宮島さんの神主」に100年以上の歴史あり https://www.sanspo.c[...] サンケイスポーツ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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