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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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양선은 낯선 배를 지칭하는 용어로,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조선에 출현한 다양한 형태의 외국 선박을 의미한다. 1540년 처음 등장한 '황당선'은 이양선의 초기 형태였으며, 이후 청나라 어선, 서양 세력의 상선 등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19세기에는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와 이로 인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분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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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 | |
---|---|
기본 정보 | |
언어별 명칭 | |
표어 | God's Will First (하느님의 뜻이 먼저다) |
정치 | |
정치 체제 | 의회 공화국 |
국가 원수 | 데이비드 아데앙 |
정부 수반 | 데이비드 아데앙 |
의회 | 나우루 의회 |
역사 | |
독립 | 1968년 1월 31일 (영국령에서) |
인구 통계 | |
인구 | 10,876명 (2019년) |
경제 | |
통화 | 오스트레일리아 달러 (AUD) |
GDP (명목) | 1억 1800만 달러 (2018년) |
기타 정보 | |
국가 코드 | NRU |
ISO 3166-1 | NR |
인터넷 최상위 도메인 | .nr |
국제 전화 코드 | +674 |
2. 유래
조선 시대에는 낯선 외국 배를 '황당선'(荒唐船)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용어는 중종 35년(1540년) 1월 19일 기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황해도 관찰사 공서린의 보고에 따르면 풍천부 침방포에 정박한 황당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중국 옷을 입고 있었고, 말은 잘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3]
이후 '황당선'이라는 용어는 점차 '이양선'(異樣船)이라는 말과 함께 쓰였다. 정조 18년(1794년) "호서 마량진에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라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데, 이때의 배는 서양 배가 아니라 중국 남부나 류큐의 배였다.[6]
2. 1. 황당선
조선왕조실록에서 낯선 배를 가리키는 황당선이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35년(1540년) 1월 19일의 기사이다.[3]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차례 황당선이 등장한다. 18세기에 들어 청나라 어선이 조선 북쪽 연해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어로 행위를 하였다. 1738년에는 불법으로 어로 작업을 하다 조선이 퇴거 명령을 내렸으나 이에 불응하고 4백여 명이 육지까지 올라와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4] 이에 조선은 추포선을 마련하고 청나라의 황당선을 막으려 하였다. 정조 7년(1783년) 비변사에서는 해서어사(海西御史)의 업무 목록에 황당선을 추포하기 위한 연군(烟軍)의 조성과 관리를 명시하였다.[5]황당선이란 용어는 점차 이양선이라는 이름과 함께 쓰였다. 정조 18년(1794년)에 "호서 마량진에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라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의 배는 서양 세력의 배가 아니라 중국 남부나 류큐의 배였다.
2. 2. 이양선
조선왕조실록에서 낯선 배를 가리키는 황당선이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35년(1540년) 1월 19일의 기사이다.[3]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차례 황당선이 등장한다. 18세기에 들어 청나라 어선이 조선 북쪽 연해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어로 행위를 하였다. 1738년에는 불법으로 어로 작업을 하다 조선이 퇴거 명령을 내렸으나 이에 불응하고 4백여 명이 육지까지 올라와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4] 이에 조선은 추포선을 마련하고 청나라의 황당선을 막으려 하였다. 정조 7년(1783년) 비변사에서는 해서어사(海西御史)의 업무 목록에 황당선을 추포하기 위한 연군(烟軍)의 조성과 관리를 명시하였다.[5]황당선이란 용어는 점차 이양선이라는 이름과 함께 쓰였다. 정조 18년(1794년)에 "호서 마량진에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라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의 배는 서양 세력의 배가 아니라 중국 남부나 류큐의 배였다.[6] 당시 표류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등주 황현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나섰다가 표류하였다고 하였으며 육로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다.[6]
3. 서양의 이양선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와 같은 서양 세력들이 기독교 전파, 무역, 식민지 건설 등의 목적을 가지고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상선이 일본으로 향하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면서 조선에 이전의 황당선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이양선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인조 6년(1628년) 네덜란드 선원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nl) 외 두 명이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벨테브레는 박연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무관이 되어 총포 제작 업무를 하였다. 병자호란 때 동료들은 전쟁 중에 죽고 박연만이 남았다.[10] 효종 4년(1653년)에는 헨드릭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하멜은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1666년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하멜은 밀린 임금과 보상금 수령을 위해 자신이 타의에 의해 조선에 억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멜표류기》를 저술하였다.[11]
18세기까지 간간히 나타나던 이양선은 19세기에 들어 자주 출몰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패권 경쟁을 벌이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 접근했다.[12]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홍콩을 할양받은 후 청나라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13] 조선에서도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졌는데, 1801년부터 1860년까지 보고된 27건 중 1849년 이후에만 20건이 발생했다.[14]
19세기 조선에 접근한 이양선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함선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통상 등 여러 요구를 해왔다. 프랑스는 천주교의 자유로운 전파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순조 1년(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천주교를 엄금하고 있었다.[7] 헌종 13년(1847년) 프랑스 이양선이 답신을 받으러 고군산군도에 왔다가 풍랑으로 좌초되자, 조선은 이들을 상하이로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서신을 거부하여 프랑스 측이 검을 뽑는 일도 있었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15] 고종 3년(1866년)에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다 거부되자 행패를 부려 상선이 전소된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고[16], 고종 5년(1868년)에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상선을 빌려 밀입국하여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17]
3. 1. 초기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 진출
16세기 아시아 지역에 처음 나타난 서양 세력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전파와 무역 거래, 식민지 건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중국과 일본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서로 경쟁 상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독교 선교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고,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이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7] 그 뒤로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동아시아를 오가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유럽의 해상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1602년 그 동안 난립하였던 여러 무역 회사를 통폐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였다.[8] 1604년 네덜란드는 명나라와 무역을 희망하였으나 명나라는 오랑캐와는 조공만이 가능하다며 거절하였다. 이때문에 네덜란드는 무역 상대를 류큐와 일본으로 변경하였다.[7] 일본은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를 난학(蘭學)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난학은 한 동안 서양 문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었다.[9]3. 2. 네덜란드의 동아시아 무역 독점
16세기 아시아 지역에 처음 나타난 서양 세력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전파와 무역 거래, 식민지 건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중국과 일본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서로 경쟁 상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독교 선교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고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이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7] 그 뒤로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동아시아를 오가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유럽의 해상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1602년 그 동안 난립하였던 여러 무역 회사를 통폐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였다.[8] 1604년 네덜란드는 명나라와 무역을 희망하였으나 명나라는 오랑캐와는 조공만이 가능하다며 거절하였다. 이때문에 네덜란드는 무역 상대를 류큐와 일본으로 변경하였다.[7] 일본은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를 난학(蘭學)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난학은 한 동안 서양 문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었다.[9]
3. 3. 네덜란드 선박의 표류와 조선과의 만남
16세기 아시아 지역에 처음 나타난 서양 세력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전파와 무역 거래, 식민지 건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중국과 일본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독교 선교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고,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이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7] 그 뒤,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동아시아를 오가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유럽의 해상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1602년 여러 무역 회사를 통폐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였다.[8] 1604년 네덜란드는 명나라와 무역을 희망하였으나 명나라는 오랑캐와는 조공만이 가능하다며 거절하였다. 이때문에 네덜란드는 무역 상대를 류큐와 일본으로 변경하였다.[7] 일본은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를 난학(蘭學)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난학은 한 동안 서양 문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었다.[9]
네덜란드 상선이 일본으로 향하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렇게 표류하던 배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이전의 황당선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이양선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인조 6년(1628년) 네덜란드 선원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nl) 외 두 명이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벨테브레는 박연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무관이 되어 총포 제작 업무를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동료들은 전쟁 중에 죽고 박연만이 남았다.[10] 효종 4년(1653년) 헨드릭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그는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1666년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하멜은 밀린 임금과 보상금 수령을 위해 자신이 타의에 의해 조선에 억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하였고, 이를 위해 《하멜표류기》를 저술하였다.[11]
4. 19세기 이양선의 출몰과 조선의 대응
18세기까지 간간히 등장하던 이양선은 19세기에 들어 부쩍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은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앞다투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접근해 왔다.[12]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홍콩을 할양받은 이후 청나라는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13] 조선에서도 이양선의 출몰이 늘어 1801년에서 1860년까지 보고된 이양선의 출몰 건수는 27회였고, 그 가운데 1849년 이후 건수가 20회로 후기로 갈수록 이양선의 접근이 더 잦았다.[14]
4. 1.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
19세기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서양 열강은 함선인 이양선을 통해 조선에 통상 등을 요구하였다. 프랑스는 천주교의 자유로운 전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순조 1년(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천주교를 엄금하고 있었다.[7] 헌종 13년(1847년) 프랑스 이양선이 전년도의 요구에 대한 답신을 받으러 고군산열도에 도착하였다가 풍랑에 좌초되자, 조선은 이들을 상하이로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프랑스의 서신을 거부하여 프랑스 측이 검을 뽑는 사태가 있었으나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15] 고종 3년(1866년)에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다 거부되자 행패를 부려 상선이 전소되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다.[16] 고종 5년(1868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가 상선을 빌려 타고 밀입국하여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17]4. 2. 조선의 대응과 한계
19세기 한국에 접근한 이양선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함선이었다. 이양선은 조선에 통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프랑스는 천주교의 자유로운 전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순조 1년(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7] 헌종 13년(1847년) 전년도의 요구에 대한 답신을 받으러 온 프랑스 이양선이 고군산열도에 도착하였다가 풍랑에 좌초하자 조선은 이들을 상하이로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프랑스의 서신을 거부하여 프랑스 측이 검을 뽑는 사태가 있었으나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15] 고종 3년(1866년)에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다 거부되자 행패를 부려 상선이 전소되는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고,[16] 고종 5년(1868년)에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상선을 빌려 타고 밀입국하여 일으킨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 있기도 하였다.[17]이양선의 통상 요구에 대한 조선의 답변은 한결같았는데, "조선은 청의 속국이기 때문에 외교권이 없다"는 것이었다.[7] 그러나 프랑스는 여전히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미국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이유로 조선에 대한 개항 압력을 가해왔다. 이는 결국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18]
5. 분쟁
조선은 이양선의 통상 요구에 대해 "조선은 청의 속국이기 때문에 외교권이 없다"는 답변을 일관되게 제시하였다.[7] 그러나 프랑스는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사를 이유로 조선에 대한 개항 압력을 지속했다. 이는 결국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18]
참조
[1]
서적
한국의 전통 선박 한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2]
서적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 누추한 골목에서 시대의 큰길을 연 사람들의 곡진한 이야기
렌덤하우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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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황당선 한척이 황해도 부근에 나타나 처리할 것을 예조에 이르다
http://sillok.histor[...]
[4]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 문화군주 정조의 나라만들기
한길사
2013
[5]
웹사이트
비변사에서 올린 제도 어사 사목
http://sillok.histor[...]
정조실록
178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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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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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조선시대사 1 - 국가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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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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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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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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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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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사 이야기 13 - 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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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책 - 지식과 교양을 위한 책의 백과사전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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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환의 세계정치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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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3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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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바로보는 우리 역사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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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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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암행어사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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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개항 전후로부터 현재까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
http://db.history.go[...]
프랑스외무부
1883-08-06
[17]
백과사전
남연군 묘 도굴 사건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18]
서적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 2 - 20세기를 넘어 새로운 미래로
휴머니스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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