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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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보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원산원흥일어학교를 졸업하고, 경찰, 관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했다. 그는 경찰로 근무하며 한국병합기념장 등을 받았고, 이후 경기도 진위군수, 경성부 부이사관 등을 거쳐 평안북도 참여관, 전라남도 참여관, 전라북도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기독교 학교 폐쇄, 군수물자 공출, 징병 및 징용 선전 등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구형받았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및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004년에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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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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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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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이원보 |
한자 이름 | 李源甫 |
로마자 표기 | I Won-bo |
출생 | |
출생일 | 1901년 |
사망일 | 1984년 |
학력 | |
최종 학력 | 니혼 대학 법과 졸업 |
경력 | |
직업 | 기업인, 정치인 |
주요 경력 | 민의원 의원 상공부 차관 대한석탄공사 사장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취석 |
2. 생애
이원보는 188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1908년 사립 원산원흥일어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모교에서 교원으로 잠시 재직하다가, 1908년 3월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영흥분서 통역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09년 4월에는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도번역관 보로 근무했다.[1]
이후 경찰 경력을 이어가 1910년 7월 경상남도 창녕경찰서에서 통감부 경찰서 통역생으로 근무했으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0년 10월부터 1912년 6월까지 같은 곳에서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1912년부터는 경상남도 진주경찰서,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함경남도 원산경찰서,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등에서 경부로 근무하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9년에는 경성부 종로경찰서 도경부, 1920년 평안남도 도경시, 1921년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25년 경기도 도경시 및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순사교습소 교관 등을 역임하며 경찰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1928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과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종로경찰서 재직 시절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의 특명을 받고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의 동태를 파악하기도 했다.
1930년 경기도 진위군수로 임명되면서 행정 관료로 전직했고, 1932년 경성부 부이사관, 1935년 평안북도 참여관, 1937년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 1938년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1933년)을 받았고, 만주사변에 기여한 공로로 하사금(1934년)을 받기도 했다. 1935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를 받았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하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겸 간사, 국민총력전라북도연맹 회장 등을 겸임했다. 1939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전라남도 참여관 시절에는 기독교계 학교를 강제 폐쇄하고, 군수물자 공출, 헌금 및 위문금품 모집, 국방사상 보급 등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으며, 1942년에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41년 잡지 《조광》 기고문과 1942년 《매일신보》 신년사를 통해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국민총력운동 강화 등을 주장하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1943년부터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대화동맹 심의원, 대의당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중추원 참의 재직 중에는 임시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하고, 조선인 학병의 일본 현지 부대를 방문하여 학병, 징병, 징용을 선전, 선동했다.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구형받았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1] 이후 이원보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경찰 경력
188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1]. 1908년 사립 원산원흥일어학교(元山源興日語學校)를 졸업하고 모교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바로 퇴직했다. 1908년 3월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영흥분서 통역, 1909년 4월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도번역관 보(道飜譯官補)로 근무했고,[1] 1910년 7월 경상남도 창녕경찰서에서 통감부 경찰서 통역생으로 근무했다.[1]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0년 10월부터 1912년 6월까지 경상남도 창녕경찰서에서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1912년 6월 경상남도 진주경찰서, 1912년 12월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1914년 4월 18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1916년 4월 7일 함경남도 원산경찰서, 1918년 9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경찰서에서 경부로 근무했다.[1]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2. 2. 고위 관료 경력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부터 1912년 6월까지 경상남도 창녕경찰서에서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이후 경상남도 진주경찰서(1912년 6월 임명), 평안남도 평양경찰서(1912년 12월 임명), 함경남도 홍원경찰서(1914년 4월 18일 임명), 함경남도 원산경찰서(1916년 4월 7일 임명), 함경남도 영흥경찰서(1918년 9월 17일 임명)에서 경부로 근무했고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1]1919년 7월 경성부 종로경찰서 도경부, 1920년 8월 12일 평안남도 도경시, 1921년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25년 1월 15일 경기도 도경시, 1925년 2월 5일부터 1929년까지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1925년 7월 4일부터 1929년까지 경기도 도경시 겸 순사교습소 교관으로 근무한 뒤 경찰직에서 퇴직했다.[1] 1928년 1월 20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 1928년 11월 16일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1] 경성부 종로경찰서 재직 시절 미즈노 렌타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특명을 받은 뒤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의 동태를 파악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0년 2월 28일 경기도 진위군수로 임명되었고[1] 1932년 1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부이사관 겸 서무과장, 1932년 6월 6일 경성부 부이사관 겸 사회과장으로 각각 임명되었다.[1] 1933년 1월 19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34년 4월 29일 만주사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하사금을 받았다.[1] 1935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고[1]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1937년 2월 20일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임명된 뒤[1] 전라남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1937년 2월 ~ 1938년 6월), 전라남도 도농회장(1937년 3월 ~ 1938년 6월),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1937년 4월 ~ 1938년), 전라남도방공위원회 위원(1938년 3월 ~ 1938년 7월) 등을 역임했으며 1938년 1월 3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과 국운의 융성을 기원하고 총후의 책무 완수를 강조했다.
1938년 6월 23일부터 1939년 3월 14일까지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1940년 9월 2일부터 1942년 1월 23일까지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하는 동안[1]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1939년 3월 15일 ~ 1940년 9월 1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겸 간사(1939년 4월 임명), 국민총력전라북도연맹 회장(1940년 10월 ~ 1942년 1월) 등을 역임했으며[1] 1939년 2월 14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전라남도 참여관 재직 시절 기독교계 학교를 교묘한 방법으로 강제로 폐쇄시키는 한편 군수물자의 공출 및 조달, 각종 헌금 및 위문금품 모집,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 등을 주도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으며[1] 1942년 2월 20일 남작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계급인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41년 3월 잡지 《조광》에 실린 글에서 조선 동포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구현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는 한편 국민총력운동 강화를 통한 고도국방국가체제 확립을 위해 매진할 것을 주장했다. 1942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순국정신을 발휘하고 총후전사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2. 3. 친일 행적
1908년 사립 원산원흥일어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교원으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1908년 3월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영흥분서 통역, 1909년 4월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도번역관 보(道飜譯官補)를 거쳐 1910년 7월 경상남도 창녕경찰서에서 통감부 경찰서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0년 10월부터 1912년 6월까지 경상남도 창녕경찰서에서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 11월 10일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2년 6월 경상남도 진주경찰서, 1912년 12월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1914년 4월 18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1916년 4월 7일 함경남도 원산경찰서, 1918년 9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경찰서에서 경부로 근무했다.1919년 7월 경성부 종로경찰서 도경부, 1920년 8월 12일 평안남도 도경시, 1921년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25년 1월 15일 경기도 도경시, 1925년 2월 5일부터 1929년까지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1925년 7월 4일부터 1929년까지 경기도 도경시 겸 순사교습소 교관으로 근무한 뒤 경찰직에서 퇴직했다. 1928년 1월 20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 1928년 11월 16일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경성부 종로경찰서 재직 시절 미즈노 렌타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특명을 받고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의 동태를 파악했다는 기록이 있다.[1]
전라남도 참여관 재직 시절 기독교계 학교를 교묘한 방법으로 강제로 폐쇄시키는 한편 군수물자의 공출 및 조달, 각종 헌금 및 위문금품 모집,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 등을 주도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1]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다.[1] 1941년 3월 잡지 《조광》에 실린 글에서 조선 동포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구현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는 한편 국민총력운동 강화를 통한 고도국방국가체제 확립을 위해 매진할 것을 주장했다. 1942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순국정신을 발휘하고 총후전사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2. 4. 광복 이후
1949년 1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49년 4월 18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지만 1949년 8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이원보는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지사, 도 참여관, 중추원, 조선총독부 사무관, 애국자 살상자, 경시 부문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친일단체, 경찰,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사후
2004년 대한민국에서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1]
4. 상훈
- 昭和일본어 5년 국세 조사 기념장 (1932년 10월)[1]
- 훈5등 서보장 (1933년 1월)[1]
- 훈4등 서보장 (1939년 2월)[1]
-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일본어 (1940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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