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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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토 요시아키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로, 투수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주오 대학을 거쳐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963년 사와무라상을 수상하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1966년 도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 후 1969년 은퇴했으며, 통산 11시즌 동안 71승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스카우트와 코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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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요시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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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수명 | 이토 요시아키 |
로마자 표기 | Ito Yoshiaki |
한자 표기 | 伊藤 芳明 |
가나 표기 | いとう よしあき |
출생지 | 시즈오카현 하마나군 기타하마촌 기부네 (현재: 하마마쓰시 하마나구 기부네) |
생년월일 | 1933년 12월 30일 |
사망일 | 알려지지 않음 |
신장 | 175cm |
체중 | 71kg |
利き腕 | 좌투 |
타석 | 좌타 |
수비 위치 | 투수 |
프로 입단 연도 | 1959년 |
첫 출장 | 1959년 4월 11일 |
마지막 경기 | 1969년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흥성상업고등학교 |
대학교 | 주오대학교 |
실업 야구 | 일본생명 |
프로 구단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9 - 1965)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6 - 1969) |
지도자 경력 | |
코치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0) |
2. 선수 경력
이토 요시아키/伊藤 芳明일본어는 중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하여 투수가 되었고, 고세이 상업고등학교에서는 2학년부터 에이스로 활약했다.[1]
1952년에 주오 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 봄부터 도토 대학 리그에서 등판했다. 1953년 봄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대학 선수권에서는 결승에서 릿쿄대에 패해 준우승했다. 1954년 가을 리그의 도노다이전에서 리그 사상 4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1] 리그 통산 57경기 등판, 21승 13패. 대학 동기로는 스즈키 타카시, 아나부키 요시오가 있다.
졸업 후 일본 생명에 입사했다. 1957년의 도시 대항에 출전. 쿠라시키 레이욘과의 2회전(첫 경기)에서 선발로 나섰지만, 아소 미츠오의 2점 홈런으로 역전을 허용하여, 팀은 연장 10회 끝에 패배했다. 1958년에도 2년 연속으로 도시 대항에 출전[1]했다. 1회전에서, 후에 프로에서 동료가 되는 니혼통운의 호리모토 리츠오와 투구 대결을 벌였으나 아쉽게 패했다.
;프로팀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59년 ~ 1965년)
1959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같은 신인인 오 사다하루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2] 오픈전부터 좋은 컨디션을 보여[3], 전년도 29승을 거두어 최우수 선수가 된 후지타 모토시를 제치고, 신인임에도 개막 투수를 맡는 등, 36경기에 등판하여 7승 9패 방어율 2.98을 기록했다.[1]
1960년 처음으로 두 자릿수인 10승(9패)을 거두어 호리모토 리츠오에 이어, 1961년은 13승(6패)으로 나카무라 미노루에 이어 팀 2위의 승수를 올렸다. 특히, 1961년은 승률 .684로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하는 동시에, 방어율 2.11도 리그 3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어, 가와카미 테츠하루감독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1962년에는 불운한 구원 투수로의 전향으로 인해 겨우 4승에 그쳤다.[3]
1963년에는 다시 선발 투수로 복귀하여 10완봉을 포함한 19승 8패 방어율 1.90(리그 2위)으로 팀의 승리 투수가 되었고, 2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 사와무라상 타이틀도 차지했다.[1] 1964년은 왼쪽 다리의 근육 파열로 인해 투구 폼이 무너져 11승으로 승수를 줄였다.[3]
1965년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2승에 그쳤고[4], 같은 해 오프에 이케자와 요시유키, 쿠보타 오사무, 시마다 유지와의 1대 3 트레이드로 도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
;도에이 플라이어스 /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66년 ~ 1969년)
이케자와 요시유키, 쿠보타 오사무, 시마다 유지와의 1대 3 트레이드로 도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 도에이에서는 종종 선발 투수도 맡았지만, 4시즌 동안 겨우 5승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69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신인 시절을 포함해 개막 투수를 3번, 올스타전에도 3번 출전했다.[1]
2. 1. 학창 시절
이토 요시아키는 주오 대학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투수가 되었고, 고세이 상업고등학교에서는 2학년부터 에이스로 활약했다.[1] 1952년에 주오 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 봄부터 도토 대학 리그에서 등판했다. 1953년 봄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대학 선수권에서는 결승에서 릿쿄대에 패해 준우승했다. 1954년 가을 리그의 도노다이전에서 리그 사상 4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1] 리그 통산 57경기 등판, 21승 13패를 기록했다. 대학 동기로는 스즈키 타카시, 아나부키 요시오가 있다.2. 2. 사회인 야구 시절
이토 요시아키는 주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생명에 입사했다.[1] 1957년 도시 대항에 출전하여 쿠라시키 레이욘과의 2회전에서 선발 등판했지만, 아소 미츠오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며 연장 10회 끝에 패했다. 1958년 도시 대항에도 출전, 1회전에서 니혼통운의 호리모토 리츠오와 투수 대결을 벌였으나 패했다.[1]2.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이토 요시아키/伊藤 芳明일본어는 중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하여 투수가 되었고, 고세이 상업고등학교에서는 2학년부터 에이스로 활약했다.[1]1952년에 주오 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 봄부터 도토 대학 리그에서 등판했다. 1953년 봄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같은 해 대학 선수권에서는 결승에서 릿쿄대에 패해 준우승했다. 1954년 가을 리그의 도노다이전에서 리그 사상 4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1] 리그 통산 57경기 등판, 21승 13패. 대학 동기로는 스즈키 타카시, 아나부키 요시오가 있다.
졸업 후 일본 생명에 입사했다. 1957년의 도시 대항에 출전. 쿠라시키 레이욘과의 2회전(첫 경기)에서 선발로 나섰지만, 아소 미츠오의 2점 홈런으로 역전을 허용하여, 팀은 연장 10회 끝에 패배했다. 1958년에도 2년 연속으로 도시 대항에 출전[1]했다. 1회전에서, 후에 프로에서 동료가 되는 니혼통운의 호리모토 리츠오와 투구 대결을 벌였으나 아쉽게 패했다.
;프로팀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59년 ~ 1965년)
1959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같은 신인인 오 사다하루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2] 오픈전부터 좋은 컨디션을 보여[3], 전년도 29승을 거두어 최우수 선수가 된 후지타 모토시를 제치고, 신인임에도 개막 투수를 맡는 등, 36경기에 등판하여 7승 9패 방어율 2.98을 기록했다.[1]
1960년 처음으로 두 자릿수인 10승(9패)을 거두어 호리모토 리츠오에 이어, 1961년은 13승(6패)으로 나카무라 미노루에 이어 팀 2위의 승수를 올렸다. 특히, 1961년은 승률 .684로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하는 동시에, 방어율 2.11도 리그 3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어, 가와카미 테츠하루감독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1962년에는 불운한 구원 투수로의 전향으로 인해 겨우 4승에 그쳤다.[3]
1963년에는 다시 선발 투수로 복귀하여 10완봉을 포함한 19승 8패 방어율 1.90(리그 2위)으로 팀의 승리 투수가 되었고, 2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 사와무라상 타이틀도 차지했다.[1] 1964년은 왼쪽 다리의 근육 파열로 인해 투구 폼이 무너져 11승으로 승수를 줄였다.[3]
1965년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2승에 그쳤고[4], 같은 해 오프에 이케자와 요시유키, 쿠보타 오사무, 시마다 유지와의 1대 3 트레이드로 도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
;도에이 플라이어스 /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66년 ~ 1969년)
이케자와 요시유키, 쿠보타 오사무, 시마다 유지와의 1대 3 트레이드로 도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 도에이에서는 종종 선발 투수도 맡았지만, 4시즌 동안 겨우 5승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69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신인 시절을 포함해 개막 투수를 3번, 올스타전에도 3번 출전했다.[1]
2. 3.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59년 ~ 1965년)
1959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같은 신인인 오 사다하루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2] 오픈전부터 좋은 컨디션을 보여[3], 전년도 29승을 거두어 최우수 선수가 된 후지타 모토시를 제치고, 신인임에도 개막 투수를 맡는 등, 36경기에 등판하여 7승 9패 방어율 2.98을 기록했다.[1]1960년 처음으로 두 자릿수인 10승(9패)을 거두어 호리모토 리츠오에 이어, 1961년은 13승(6패)으로 나카무라 미노루에 이어 팀 2위의 승수를 올렸다. 특히, 1961년은 승률 .684로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하는 동시에, 방어율 2.11도 리그 3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어, 가와카미 테츠하루감독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1962년에는 불운한 구원 투수로의 전향으로 인해 겨우 4승에 그쳤다.[3]
1963년에는 다시 선발 투수로 복귀하여 10완봉을 포함한 19승 8패 방어율 1.90(리그 2위)으로 팀의 승리 투수가 되었고, 2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 사와무라상 타이틀도 차지했다.[1] 1964년은 왼쪽 다리의 근육 파열로 인해 투구 폼이 무너져 11승으로 승수를 줄였다.[3]
1965년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2승에 그쳤고[4], 같은 해 오프에 이케자와 요시유키, 쿠보타 오사무, 시마다 유지와의 1대 3 트레이드로 도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
2. 3. 2. 도에이 플라이어스 /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66년 ~ 1969년)
이케자와 요시유키, 쿠보타 오사무, 시마다 유지와의 1대 3 트레이드로 도에이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 도에이에서는 종종 선발 투수도 맡았지만, 4시즌 동안 겨우 5승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69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신인 시절을 포함해 개막 투수를 3번, 올스타전에도 3번 출전했다.[1]3. 은퇴 이후
이토 요시아키는 1970년부터 1979년까지 스카우트를 맡았다.[5] 1980년에는 2군 투수 코치를 맡았으며, 1981년부터 2000년까지 다시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4. 선수로서의 특징
위력 있는 묵직한 공을 던지는 속구와 드롭을 주무기로 삼았다.[4] 투구는 강력했지만, 투구 폼은 뻣뻣하고 리듬감이 부족했다는 평이 있다.[2]
5. 인물
시즈오카현 출신으로 고세이 고등학교를 거쳐 주오 대학에 진학, 도토 대학 리그 통산 57경기에 등판해 21승 13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 후 사회인 야구팀인 닛폰 생명에서 활동한 후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신인으로서는 개막전 투수를 맡는 등 36경기에 등판,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했다.[4] 1961년에는 데뷔 후 첫 타이틀인 6할 8푼 4리의 최고 승률을 기록했고, 2년 후인 1963년에는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신인 시절을 포함한 3차례의 개막전 투수를 맡았고 올스타전에도 세 차례나 출전했다. 1966년에는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이적하여 1969년에는 11년 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고,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의 스카우트를 맡았다. 거인에 입단한 초기부터 신인답지 않은 풍모로,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렸다.[4]。타인의 험담을 결코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성실한 인품이었다.[3]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6. 1. 타이틀
이토 요시아키는 1961년에 최고 승률 타이틀을 1회 획득했다.6. 2. 수상
이토 요시아키는 1963년에 제1회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7. 개인 기록
이토 요시아키는 1961년, 1963년, 1964년에 올스타전에 3회 출장했다.
8. 연도별 투수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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