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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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인천은 대한민국 야구 선수 및 감독으로, 중화민국 장쑤성 우시에서 태어나 일본과 한국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했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포수와 외야수로 뛰며 1975년 수위 타자를 차지했고, KBO 리그에서는 MBC 청룡 감독 겸 선수로 1982년 4할 1푼 2리의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역임하며 1990년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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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엽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 방송인으로 활동했으며, 롯데 자이언츠 감독 등을 역임하고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1997년 사망했다. - MBC 청룡 감독 - 어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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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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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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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백인천 |
한자 | 白仁天 |
로마자 표기 | Baek Incheon |
본명 | 백인천 |
영어 표기 | In-Chun Baek |
선수 정보 |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중화민국(1940년) 장쑤성 우시 현 |
생년월일 | 1943년 11월 27일 |
사망일 | 알 수 없음 |
신장 | 174cm |
체중 | 77kg |
포지션 | 포수, 외야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 1962년 (NPB) |
드래프트 순위 | 원년 멤버 |
첫 출장 (NPB) | 1963년 6월 26일 |
첫 출장 (KBO) | 1982년 3월 27일 |
마지막 출장 (NPB) | 1981년 10월 4일 |
마지막 출장 (KBO) | 1984년 |
선수 경력 | 경동고등학교 한국농업은행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2년 ~ 1972년)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1973년) 닛폰햄 파이터스 (1974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1975년 ~ 1976년) 롯데 오리온스(1977년 ~ 1980년) 긴테쓰 버펄로스(1981년) MBC 청룡(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1983년 ~ 1984년) |
수상 내역 | NPB 퍼시픽 리그 타격왕 (1975년) KBO 타격왕 (1982년): KBO 단일 시즌 최고 타율(.412) 기록 KBO 원년 최다 안타, 득점왕, 타율왕, 최고 출루율, 최고 장타율 NPB 베스트 나인 외야수 부문 |
지도자 경력 | |
코치 경력 | 삼미 슈퍼스타즈 플레잉 코치 (1983년 ~ 1984년) 연세대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1998년)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1999년) SK 와이번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2년) |
감독 경력 | MBC 청룡 플레잉 감독 (1982년 ~ 1983년) LG 트윈스 감독 (1990년 ~ 1991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6년 ~ 1997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2년 ~ 2003년) |
NPB 통산 기록 | |
타율 | 0.278 |
홈런 | 209 |
타점 | 776 |
안타 | 1831 |
KBO 통산 기록 | |
타율 | 0.335 |
홈런 | 23 |
타점 | 91 |
안타 | 135 |
2. 생애
백인천은 중화민국 장쑤성 우시에서 한국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현역 야구 선수 시절 포지션은 포수 겸 외야수였으며, 일본에서는 '하쿠진텐'으로 불렸다.
2. 1. 유년 시절과 아마추어 경력
백인천은 중화민국 장쑤성 우시에서 태어나 쑤저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7남매 중 셋째로, 형의 영향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6]경동고등학교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2학년 때인 1960년 6월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고등학생 최초로 홈런을 기록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 원정 경기 때 진구에서도 홈런을 쳤는데, 이는 전후 고등학생이 진구에서 기록한 두 번째 홈런이었다. 3학년 때는 포수를 맡았으며,[6]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도 활동하여 동계 체육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7]
경동고 졸업 후 한국 농업 은행에 입사했다. 1962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한국 대표팀 포수로 출전,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대회 유일의 홈런을 기록하며 대만과 공동 2위를 차지했다.[9] 이 대회에서 백인천은 타이베이 쑹산 구장 개장 이후 외국인 최초로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2. 2.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62년 ~ 1981년)
1962년, 19세의 백인천은 일본 프로 야구(NPB)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포수로 입단했다. 백인천은 장훈과 함께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 중 한 명이었다.[2] 도에이 플라이어스는 백인천의 입단 첫 해에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구단 창단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백인천은 이후 13년 동안 이 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팀은 여러 스폰서와 이름 변경을 거쳐 닛타쿠 홈 플라이어스와 닛폰햄 파이터스가 되었다. 처음에는 포수로 시작했지만, 몇 년 후 장타력과 빠른 발을 갖춘 외야수로 변신했다.1963년 6월 26일 주전 포수의 잇따른 부상으로 1군에 콜업되었고,[10] 같은 날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7회에 대타로 출전하며 일본 프로 야구 데뷔를 했다.[10] 1964년 후반에는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고, 1965년에는 116안타, 14홈런을 기록했다. 타격 능력을 인정받아 클린업 타자로 기용되었지만, 같은 해 외야수로 전향했다.[6]
1967년에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고(타율 .280, 11위),[6] 1968년에는 팀의 3번 타자를 맡을 정도로 성장했다. 1970년 5월 23일 킨테츠 버팔로스전에서 심판과 난투극을 벌여 퇴장당했고, 이후 형사 고발을 당했지만 3일 뒤 화해했다.
1971년, 병역 문제로 한국에 일시 귀국했다가 5월 1일에 복귀했다.[11] 1972년에는 리그 3위 타율 .315, 19홈런을 기록했지만, 1975년 히가시다 마사요시와의 트레이드로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같은 해 타율 .319로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1977년 야스기 쇼지와 함께 하세가와 가즈오, 구라모치 아키라와의 트레이드로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 1979년에는 타율 .340, 18홈런, 71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6] 1981년에는 킨테쓰 버펄로스로 이적했고,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백인천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통산 209홈런과 212도루를 기록했다.[1]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록 종류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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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첫 출장 | 1963년 6월 26일, 대 난카이 호크스 1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7회 초에 포수로 출장 |
NPB 첫 선발 출장 | 1963년 6월 27일, 대 난카이 호크스 1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8번 타자·포수로 선발 출장 |
NPB 첫 안타 | 1963년 6월 27일, 대 난카이 호크스 1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 말에 미우라 키요히로로부터 내야 안타 |
NPB 첫 도루 | 1964년 3월 28일, 대 도쿄 오리온즈 1차전 (고라쿠엔 구장), 8회 말에 2루 도루 (투수: 나카니시 카츠미, 포수: 다이고 타케오) |
NPB 첫 타점 | 1964년 3월 31일, 대 난카이 호크스 4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8회 초에 타카하시 에이이치로로부터 적시타 |
NPB 첫 홈런 | 1964년 8월 2일, 대 난카이 호크스 21차전 (고라쿠엔 구장), 2회 말에 타카하시 에이이치로로부터 좌월 2점 홈런 |
NPB 1000경기 출장 | 1972년 6월 30일, 대 롯데 오리온즈 11차전 (고라쿠엔 구장), 1번 타자·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159번째 |
NPB 100홈런 | 1972년 7월 2일, 대 롯데 오리온즈 14차전 (고라쿠엔 구장), 8회 말에 키다루 마사아키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67번째 |
NPB 1000안타 | 1972년 10월 10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26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2회 초에 이시이 시게오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81번째 |
NPB 150홈런 | 1976년 5월 29일, 대 긴테츠 버팔로즈 전기 10차전 (후지이데라 구장), 1회 말에 이모토 타카시로부터 선제 솔로 홈런 ※역대 43번째 |
NPB 1500경기 출장 | 1976년 10월 6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13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5번 타자·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52번째 |
NPB 1500안타 | 1977년 7월 13일, 대 닛폰햄 파이터즈 후기 2차전 (가와사키 구장), 6회 초에 노무라 오사무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32번째 |
NPB 200홈런 | 1979년 10월 4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0차전 (니시쿄고쿠 구장), 3회 초에 사토 요시노리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32번째 |
NPB 올스타전 출장 | 4회 (1967년, 1970년, 1972년, 1979년) |
2. 3. KBO 리그 선수 겸 감독 시절 (1982년 ~ 1984년)
1982년 40세의 나이로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80경기에서 타율 0.412를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고 타율 기록이다.[3][1] 3월 개막 초반에는 5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4월부터 4번 타자를 맡아 4할 타율을 유지하며 시즌을 마쳤다.[13] 프로 원년 개막전인 3월 27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동대문 야구장)에서는 6회말 솔로 홈런을 쳤고, 연장 10회말에는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 때 홈을 밟았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백인천은 일본 시절의 멸시와 슬픔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는 한국 야구계의 명 인터뷰로 널리 알려져 있다.1983년 간통죄로 체포되어 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해임되고 선수로서도 방출되었으나,[15] 석방 후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 겸 타격 코치로 이적했다. 1984년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2. 4. KBO 리그 감독 시절 (1989년 ~ 2003년)
백인천은 1982년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으로 KBO 리그에 합류하여, 타율 0.412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을 역임했다.- MBC 청룡 감독 (1989년)
1989년, 백인천은 친정팀 MBC 청룡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 LG 트윈스 감독 (1990년 ~ 1991년)
1990년, 팀명이 LG 트윈스로 바뀐 후에도 감독직을 유지하며, 그 해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LG 트윈스의 첫 번째 우승이었으며, 백인천은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991년 시즌을 끝으로 LG 트윈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5년 ~ 1997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을 맡았다. 이승엽을 발굴하고, 훗날 삼성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20]
-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2년 ~ 2003년)
2002년 시즌 중반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3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롯데 감독 시절에는 성적 부진과 의욕 없는 인터뷰 등으로 이미지가 나빠졌다.[20]
2. 5. 해설위원 및 기타 활동
1999년부터 2000년과 2006년에는 각각 SBS와 tvN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였다.[20] 1999년 시즌 후 서정환 감독이 물러날 당시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됐으나,[20] 당시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SBS와의 전속계약 문제 때문에 좌절됐다. 2007년에는 건강 악화로 해설을 잠시 중단했으나, 2008년부터 이광권 해설자의 후임으로 SBS 스포츠채널에서 3년 계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관한 일본 프로 야구 중계를 맡았었다. 또 본인의 수제자 이승엽을 시찰하기 위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춘계 캠프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2010년 6월부터 KBO 리그 은퇴선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SBS Sports에서 해설자로 근무하던 시절, 2008년 7월 27일 NPB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에서 이승엽이 첫 홈런을 쳐냈을 때 외쳤던 멘트가 '하나 둘 셋이야!'인지 '요시, 그란도 시즌!'인지에 대한 몬더그린 논란이 인터넷에서 일었던 적이 있다.[30]
3. 논란 및 사건사고
백인천은 1961년 동계체육대회 스피드스케이팅 1500m 부문에서 2분 49초 18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한 경험이 있다.[22] 그는 불교에서 개신교(장로교)로 개종하였는데, 초등학교 때 친구 따라 교회를 다녔고[23] 미국에 사는 남동생이 목회자이기도 하다.
3. 1. 이대호와의 갈등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유망주였던 이대호에게 다이어트를 지시하고 오리걸음을 걷게 했다. 이로 인해 이대호는 무릎 연골에 부상을 입어 2군으로 내려갔다. 이후 이대호가 다이어트에 실패하자, 백인천은 트레이드를 시도했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추진하지 않았다.[24]3. 2. 손민한 포수 전향 시도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롯데에 쓸 만한 포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에이스 투수였던 손민한을 포수로 전향시키려 했으나 손민한의 거부로 좌절되었다.[25] 이에 백인천은 '이기적인 선수'라며 한화 이글스의 백업 포수였던 채상병과의 1:1 트레이드를 시도했지만, 롯데 자이언츠 이근수 사장과 이상구 단장의 반대로 실패했다.[25]3. 3. 강기웅과의 불화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훈련 태도가 부실하다고 눈 밖에 난 2루수 강기웅과 심한 불화를 일으켰고, 결국 강기웅을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했다.[26] 이 트레이드는 강기웅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꺾는 사건이 되었다.[26] 강기웅은 트레이드를 거부함과 동시에,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 합류를 전격 거부하였다.[26] 결국 1997년 2월 17일 현대 유니콘스가 임의탈퇴 공시하여 강기웅은 현역에서 은퇴했다.[26]3. 4. 간통죄 구속
1983년 다른 여성과 불륜 관계를 맺어 아내가 고소하면서 간통죄로 구속되었다.[27] 얼마 뒤 이혼을 하고 고소는 취하되어 선수로 복귀했지만, 감각이 저하되어 이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백인천은 1984년에 현역에서 은퇴했으며,[27] 이후 재혼했지만[28] 몇 년 후[29] 다시 이혼했다.3. 5. 몬더그린 논란
SBS 스포츠에서 해설자로 근무하던 시절, 2008년 7월 27일 NPB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에서 이승엽이 첫 홈런을 쳐냈을 때 외쳤던 멘트가 '하나 둘 셋이야!'인지 '요시, 그란도 시즌!'인지에 대한 몬더그린 논란이 인터넷에서 일었던 적이 있다.[30]4. 수상 및 기록
연도 | 소속팀 |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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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 경동고등학교 | 이영민 타격상 |
1962년 | 대한체육회 | 대한민국 최우수선수상 |
1975년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수위 타자, 베스트나인 |
1967년, 1970년, 1972년, 1979년 |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 출장 | |
1990년 | LG 트윈스 | KBO 리그 최우수 감독상 |
4. 1. 수상
- 1959년 이영민 타격상
- 1962년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최우수선수상
- 1975년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수위 타자, 베스트나인
-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 출장(1967, 1970, 1972, 1979)
- 1990년 KBO 리그 최우수 감독상
4. 2. 주요 기록
- 1959년 이영민 타격상
- 1962년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최우수선수상
- 1975년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수위 타자, 베스트나인
-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 출장(1967, 1970, 1972, 1979)
- 1990년 KBO 리그 최우수 감독상
- 1961년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표팀으로 참가하여 1월 9일 필리핀전에서 4회말 1사 3루 상황에서 좌월 2점 홈런(대회 유일 홈런)을 날렸다. 팀은 5:1로 승리했고, 대만과 공동 2위를 차지했다.[21]
4. 2. 1. 일본 프로 야구 (NPB)
1962년, 19세의 백인천은 일본 프로 야구(NPB)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포수로 입단했다. 백인천은 1959년부터 플라이어스에 입단한 장훈(본명: 장훈)[2]과 함께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 해에 플라이어스는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구단 창단 첫 (그리고 유일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백인천은 이후 13년 동안 이 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팀은 여러 스폰서와 이름 변경을 거쳐 닛타쿠 홈 플라이어스와 닛폰햄 파이터스가 되었다), 처음에는 포수로 시작했지만 몇 년 후에는 장타력과 빠른 발을 갖춘 외야수로 변신했다.1974년 시즌 후 파이터스에서 방출된 백인천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롯데 오리온스, 긴테쓰 버팔로스에서 NPB에서 7시즌을 더 뛰었다. 라이온스 소속으로 1975년 퍼시픽 리그 타율 0.319를 기록하며 타격왕을 차지했고, 같은 해 베스트 나인(Best Nine Award) 외야수로 선정되었다. 1979년에는 35세의 나이로 오리온스에서 타율 0.340, 18홈런, 71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NPB에서 백인천은 통산 209홈런과 212도루를 기록했다.[1]
일본 프로 야구 첫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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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 야구 기록 달성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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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외
- 1967년 7월 19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긴테츠전에서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쳤지만, 앞선 주자를 추월하여 홈런이 취소되었고, 연장전 끝에 팀은 패배했다.
- 하리모토 이사오는 백인천을 매우 귀여워했는데, 수비 연습 중 백인천의 능숙하지 못한 1루 수비를 칭찬하자, 3루수로부터 송구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천은 홱 돌아서서 인사를 하다가 얼굴에 공이 직격으로 맞았다.
- 도에이 시절, 한 경기에서 난카이의 노무라 가쓰야의 속삭임 전술에 대항하기 위해 귀마개를 하고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를 본 노무라 가쓰야는 투수와의 승부는 뒷전이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내야 플라이로 아웃되었다.
- 현역 시절, 선수 생활과 함께 요코하마시 호도가야구 텐노초에서 야키니쿠 가게 "백"을 경영했다.[18]
4. 2. 2. KBO 리그
1982년 대한민국에 KBO 리그가 출범하면서, 백인천은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으로 합류했다. 당시 KBO는 일본 프로 야구 경험자들의 노하우를 배우고자 했다.[3] 38세의 백인천은 1982년 시즌 타율 0.412를 기록하며 리그 타율 1위에 올랐고, 이는 KBO 역사상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3] (다만, 298타석에 불과했다.)[1] 같은 해 백인천은 득점, 안타, 2루타, 장타율 부문에서도 KBO 1위를 차지했다.MBC 청룡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한 시즌을 보낸 백인천은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선수 겸 코치로 합류, 1984년 시즌까지 활동한 뒤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1989년 정식 감독으로 KBO에 복귀한 백인천은 1990년 팀명이 변경된 LG 트윈스(전 MBC 청룡)를 이끌고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으며 팀의 첫 KBO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다. 이 공로로 백인천은 1990년 KBO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백인천은 1991년 시즌까지 3시즌 동안 청룡/트윈스를 감독했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았고, 1999년에는 한화 이글스 코치를 역임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 코치로 시작했으나, 시즌 중반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3년 시즌까지 팀을 이끌었다.
5. 통산 기록
닛타쿠
닛폰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