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당나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하는 당나라 중기의 시인으로, 당 고조 이연의 후손이었다. 그는 14세에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17세에 한유에게 인정받았으나, 과거 시험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발음의 글자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불합격했다. 이후 봉례랑 관직을 얻었지만, 낮은 직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임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는 독특한 색채 감각과 기괴한 소재, 절망적인 분위기로 특징지어진다. 이하의 시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과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17년 사망 - 교황 스테파노 4세
스테파노 4세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레오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어 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1세에게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여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교회 개혁에 힘썼다. - 817년 사망 - 희왕 (발해)
희왕은 발해의 국왕으로, 주작이라는 연호 사용, 당나라와의 외교 강화, 불교 장려, 일본과의 교류 등을 통해 국가 건설과 문화 발전에 힘썼다. - 뤄양시 출신 - 현장
현장은 당나라의 승려이자 불경 번역가, 여행가로서, 17년간 인도를 여행하며 불경을 가져와 중국어로 번역하여 동아시아 불교 사상 발전에 기여했고, 그의 여행기는 『대당서역기』로 남아 소설 『서유기』의 모티브가 되었다. - 뤄양시 출신 - 이보 (가수)
왕이보는 1997년생 중국 배우이자 가수, 댄서, 모터사이클 경주 선수로, 2014년 한중 합작 그룹 유니크(UNIQ)로 데뷔하여 가수 활동을 시작, 이후 배우로서 입지를 굳히고 댄스 경연 프로그램 캡틴으로도 활약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 이하 (당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이 |
| 로마자 표기 | Ri He |
| 자 | 장길 |
| 별칭 | 시귀 (Shigui) 귀재 (Guicai) |
| 직업 | 시인 |
| 출생 | 기원후 790/791년 |
| 출생지 | 뤄양, 허난, 중국 |
| 사망 | 기원후 816/817년 |
| 사망지 | 이양현, 허난, 중국 |
2. 약력
이하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여 14세에 여러 편의 악부(樂府)를 지어 이름을 알렸다. 17세에는 한유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1]
810년, 진사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장안으로 갔으나, 아버지의 이름 '진(晉)'과 진사의 '진(進)'이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시험을 거부당했다. 한유가 '휘변'을 지어 변호했지만 소용없었다.[1]
이후 봉례랑이라는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사임했다. 친구 장철의 도움으로 다른 관직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817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이상은의 기록에 따르면, 이하는 마른 체격에 일자 눈썹, 긴 손톱을 가진 독특한 외모였다고 한다.[1]
2. 1. 가계 및 출생
이하의 조상은 고조 이연의 숙부였던 대정효왕 이량이었다. 이량의 장남인 회안정왕 이수의 열한 번째 아들인 오국공 이효일의 3대 손이 이하의 아버지 이진숙이다. 아버지 이진숙은 두보의 친족으로 섬현 현령 등 지방관을 맡은 중견 관리였는데, 섬현은 당의 수도였던 낙양과 장안을 잇는 길 위에 위치한 요지로서 황실 친족으로만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하는 자신의 계보에 몹시 자부심을 가졌고 자신의 출신지가 당 황실과 같은 농서 성기(지금의 중국 간쑤성 천수시)라며 뽐내고 다녔지만, 정작 이하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집안은 중산층 정도로 몰락해 있었다. 어머니는 정씨로 다른 왕족에게 시집간 누나와 남동생 이유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이하는 790년 또는 791년에 태어났다. 그는 시인으로서 말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23편의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말띠 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창현(현대 이양현 서쪽, 허난성) 출신이다. 7세에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쯤에는 악부의 대가인 이의와 비교되었다.
2. 2. 문학적 재능과 좌절
이하는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 14세에 여러 편의 악부(樂府)를 지어 이름을 떨쳤고, 17세 때 당대 문단의 지도자였던 한유(韓愈)에게 격찬을 받아 그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1] 810년, 진사(進士)가 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아버지의 이름 '진(晉)'과 진사의 '진(進)'이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시험을 거부당했다.[1] 이는 그의 재능을 질투한 경쟁자들의 구실이었다고 추측된다.[1]스승 한유는 '휘변'(諱弁)을 지어 그를 변호하고 시험에 응시하도록 격려했지만, 결국 좌절되었다.[2] 당시 지식인들에게 진사가 되어 과거를 거쳐 관료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기에, 그 길이 막힌 이하는 큰 실의에 빠졌다.[1]
이하는 장안(長安)을 떠나 창곡(昌谷)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종9품상 봉례랑(奉禮郎) 관직을 얻어 다시 장안(長安)으로 오게 되었지만,[1] 제례 때 좌석 배치를 맡아보는 말단 직책에 불과했던 봉례랑(奉禮郎) 직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813년 봄에 사임하고 귀향했다.[1]
2. 3. 짧은 관직 생활과 죽음
이하는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는데, 14세에 여러 악부(樂府)를 지어 이름을 알렸고, 17세에는 당시 문단의 지도자였던 한유(韓愈)에게 격찬을 받아 그의 비호를 받았다. 810년에 진사(進士)가 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아버지의 휘(諱)였던 '진(晉)'과 진사의 '진(進)'이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시험을 거부당했다. (한유가 나서서 '휘를 변명하다'라는 글을 지어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당시 지식인들에게 진사가 되어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기에, 그 길이 막힌 이하는 실의에 빠져 장안을 떠나 창곡(昌谷)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종9품상 봉례랑(奉禮郎) 관직을 얻어 다시 장안으로 왔지만, 제례 때 석차를 맡아보는 말단 직책이었던 봉례랑 직책이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813년 봄, "봉례는 관직도 낮으니 더 무엇이 있는가"라는 시를 남기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했다.[1]
이듬해 친구 장철(張徹)을 의지해 노주(潞州)로 가서 다른 관직을 구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곡으로 돌아왔다. 817년 갑작스레 병을 얻어 어머니 곁에서 2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1] 그는 매우 마르고, 일자 눈썹을 가졌으며, 손톱을 길게 늘어뜨렸다고 묘사된다.[1]
3. 인물 및 일화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이하소전(李賀小傳)》에서는 이하의 외모에 대해 「체구가 말랐고, 가늘고 짙은 눈썹이 좌우로 이어졌으며 손톱이 이상하게 길었다」고 묘사하였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종종 타인으로부터 공격받고 배척당했다고 한다.
《이하소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낮에 천상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이하를 불렀다. 이하가 "모친이 늙고 또 병들어서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사양하자, 그 사람은 "상제께서 백옥루를 낙성하셔서 지금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는 것이다. 천상이 더 즐거우니 고통스럽지 않으리라."라고 설득했고, 이하는 웃으며 따라갔다. 그날이 이하가 숨을 거둔 날이었다고 한다. 이후 '백옥루'는 문인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그의 자는 창기(昌期)였으며, 성과 자를 결합하여 이창기(李昌期)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음울한 시풍과 대조를 이루며 '귀재'(鬼才, "귀신 같은 재능")로 알려졌으며, 이백의 '천재'(天才, "하늘이 내린 재능") 및 백거이의 '인재'(人才, "인간적인 재능")와 비교된다. 이 칭호는 송나라 학자 전이(錢易)가 그의 저서 南部新書|남부신서중국어에서 그에게 부여했다.
그는 또한 "시귀"(詩鬼)라는 별칭을 얻었으며,[1] 이백은 "시선"(詩仙)으로,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불렸다.
4. 시의 특징
이하(李賀)의 시는 독특한 특징들로 가득 차 있어, 그를 당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게 한다. 그의 시는 크게 환상성과 괴기성, 절망과 죽음의 묘사, 독특한 색채 감각, 그리고 기교적인 특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학사에서 이하(李賀)는 일반적으로 8세기 말과 9세기 초에 걸쳐 있던 이른바 중당 시대의 시인으로 여겨진다. 그의 시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동시대 선배인 맹교와 한유가 있다. 이하의 시에 영향을 준 것으로 확인된 다른 자료로는 ''초사''의 샤머니즘적 요소와 이백의 기이한 시가 있다.
그의 시는 약 240여 편이 현존한다. ''신당서''는 그의 시가 괴이함과 이하의 요절로 인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전한다. ''태평광기''에 실린 일화에 따르면 이하의 사촌이 그의 시를 모으는 일을 맡았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이하를 싫어했기 때문에 결국 수집된 시들을 변소에 버렸다고 한다. 그의 시집으로는 현재 ''이하가시편''과 ''외집'' 두 종류가 전해진다. ''이하소전''은 그를 부지런한 시인으로 묘사하는데, 그는 낡은 비단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며 시구가 떠오르면 적어 넣어 그 주머니에 보관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이 구절들을 엮어 시를 만들었다.
그의 시적 스타일은 후대 비평가들에 의해 그의 자(字)을 따서 ''장길체''라고 불렸다. 송나라의 평론가 염우는 이것을 자주 모방되는 개별 작가 기반의 시 스타일 중 하나로 꼽았다.
4. 1. 환상성과 괴기성
이하의 시는 당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사후 독특한 시풍으로 주목받았다. 만당 시인 두목은 "소머리 귀신과 뱀 몸 귀신으로도 형용할 수 없다"고 극찬하며, "기존의 길을 무시했다"고 평가했다.[10]이하의 시에는 망령, 요괴, 초자연적 현상이 자주 등장한다. 도연명 등도 이러한 소재를 사용했지만, 풍자나 비유를 위한 것이었다. 반면 이하는 망령과 요괴를 '필연적'으로 등장시키고, 괴이한 현상 자체를 주제로 삼기도 했다. 이는 자신의 출세를 막는 세상을 요괴로 인식했기 때문이며, 망령과 요괴는 이하에게 현실보다 친숙한 존재였다.
이하의 시는 '절망'과 '죽음'을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버렸네"라는 구절처럼, 좌절된 현실에 대한 절망과 염세주의가 짙게 나타난다. 이러한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는 인식이 시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하의 시는 동시에 화려한 색채 감각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유리 잔과 호박 빛깔 진한 술, 술통에서 떨어지는 술이 진주처럼 붉은데"와 같이 짙고 인공적인 색채 묘사를 통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기교 면에서도 독창성을 보인다. 시구를 단절시키거나, 의미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구절을 나열하고, 독특한 비유와 신조어를 사용하는 등 기존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기교는 이하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했지만,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다음은 이하의 시 "소소소 가"의 일부이다.
| 원문 | 구어체 | 통석 |
|---|---|---|
| 유란로 | 유란의 이슬 | 희미하게 향기로운 난의 이슬은 |
| 여제안 | 우는 눈과 같네 | 눈물을 머금은 그녀의 눈과 같아 |
| 무물결동심 | 물건으로 동심을 맺는 것이 없네 | 사랑의 증표로 맺을 만한 아무것도 갖지 못했네 |
| 연화불감전 | 연꽃은 자를 수 없네 | 저녁 어스름에 아련한 꽃은, 주고 싶어도 자를 수 없네 |
| 초여인 | 풀은 자리와 같네 | 풀은 돗자리 |
| 송여개 | 소나무는 덮개와 같네 | 소나무는 덮개 |
| 풍위상 | 바람은 치마가 되네 | 바람은 옷자락과 같은 소리를 내네 |
| 수위패 | 물은 패옥이 되네 | 물은 옥 장식의 소리를 울리네 |
| 유벽거 | 유벽의 수레 | 유벽차를 탄 그녀는 |
| 구상대 | 오랫동안 서로 기다리네 |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네 |
| 냉취촉 | 차가운 취촉 | 푸르게 타는 도깨비불도 |
| 로광채 | 광채를 잃어가네 | 언젠가는 사라지네 |
| 서릉하 | 서릉 아래 | 서릉교 언저리 |
| 풍우취 | 비바람이 부네 | 어둠 속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네 |
이 시는 죽은 기생 소소소가 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환상적이고 아름답지만, 어둡고 무겁게 그려내고 있다.
이하는 "귀재"라고 불릴 정도로 귀신과 죽음에 대한 묘사가 잦았다. 송나라 전희백은 "이백을 천재절이라 하고, 백거이를 인재절이라 하고, 이하를 귀재절이라 한다."라고 평했다.[7]
4. 2. 절망과 죽음의 묘사
이하의 시는 망령, 기괴한 생물, 요괴, 초자연 현상 등을 자주 묘사한다. 도연명과 같은 다른 시인들도 이러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이는 인간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위한 비유적인 장치였다. 그러나 이하의 시에서는 망령과 요괴가 '필연적'으로 등장하며, 때로는 괴이한 현상 자체가 시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이는 전도유망한 문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이하 자신이 억눌리고 입신(立身)의 길이 막히는 현실이야말로 온갖 도깨비가 날뛰는 세상과 같았고, 그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하에게 망령이나 괴이는 현실과 다르지 않은, 어쩌면 현실보다 더 친숙한 존재였다.[10]이하의 시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은 반복되는 '절망'과 '죽음'의 묘사다. 『진상에게 드림』에서 이하는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버렸네"라고 읊는다. 관료의 길이 억지로 막힌 이하의 마음은 깊은 절망에 휩싸였다. 한시는 슬픔을 노래하는 것을 꺼리지 않지만, 이하는 슬픔을 넘어선 절망,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염세주의의 극단까지 보여준다. 온갖 요괴 같은 것들이 주위를 둘러싼 절망적인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뿐이라는 인식이 이하의 시에 '죽음'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필연성'을 부여한다.[10]
4. 3. 독특한 색채 감각
이하는 시에서 독특한 색채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짙은 색채 묘사에 집착했다. "아름다운 유리 잔과 호박 빛깔 진한 술, 술통에서 떨어지는 술이 진주처럼 붉은데"(『장진주』)와 같이, 그의 시에는 선명함을 넘어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인공적이고 짙은 색채들이 넘쳐난다.[10] 이는 건강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이하의 시는 매우 비관적이고 끝없는 절망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화려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는 독특한 색채 감각 덕분이다. 한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사용하지만, 이하의 경우에는 특히 짙은 색채 묘사에 집착했다. "천상요"와 "진왕음주"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시에는 선명함을 넘어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인공적인 색채가 넘쳐난다.[4]
4. 4. 기교적 특징
이하의 시는 생전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7세로 요절한 그의 작품은 현재 240여 수가 전하고 있다.[10] 시인으로서 이하는 다른 누구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시풍(詩風)을 남겼다. 만당의 시인 두목은 이하의 시를 두고 "소머리를 한 귀신과 뱀몸을 한 귀신 등으로도 그의 시의 허황하고 환상적인 면을 형용하기에는 부족하다", "창작에 있어 그는 발자취가 남아 생겨난 길들을 모조리 무시했다"고 평가하였다.이하의 시는 종종 망령, 기괴한 생물, 요괴, 초자연 현상이 묘사된다. 도연명 등이 이러한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쓰긴 했지만, 인간 사회의 풍자와 비판을 위한 일종의 비유적, 시적 충격의 테크닉에 불과했다. 이하의 시에서 망령과 요괴는 시 속에서 '필연'으로 빈번히 등장하고, 때때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현상 그 자체가 시의 주제가 된다.
이하의 시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시 속에서 반복되는 '절망'과 '죽음'의 묘사이다. 『진상에게 드림』이라는 시에서 이하는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버렸네"라고 읊고 있다.
이하의 시는 동시에 휘황찬란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독특한 색채 감각에 있다. 미를 운문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하는 유독 짙은 색채 묘사에 집착했다. "아름다운 유리 잔과 호박 빛깔 진한 술, 술통에서 떨어지는 술이 진주처럼 붉은데"(『장진주』)라고 묘사한 부분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기교면에서도 시구를 단절시키는 것, 시 한편의 부분 부분, 혹은 하나하나의 구절이 다르고, 의미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치 그때그때 떠오른 문구를 피력한 것처럼 하나의 시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이용된 적이 없고 일반적으로도 연상하기 어려운 비유를 사용하거나 새로운 말을 지어내서 시에 쓰기를 즐기는 것은 당대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하만의 독특한 기교였다. 이러한 기교들이 이하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하면서 관람자의 이해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어, "이하의 시는 주(注)가 없이는 읽기가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의 시는 독특하며, 환상적이고 특이한 이미지가 가득하여, 그는 "귀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5. 후대에의 영향
이하는 생전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유는 이하의 문학을 이해하고 비호했으며, 이상은, 피일휴 등도 이하의 시에 심취했다. 남송 말~원나라 초 민족주의자들과 청나라의 심덕잠, 근대의 담사동, 루쉰, 마오쩌둥도 이하의 시를 애독했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이하의 『장진주』에 착안해 『속장진주』를 지었다.
5. 1. 중국 문학
이하 생전에는 '괴이한 것'에 대한 동경이 깊었던 한유가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자이자 강력한 비호자였다. 만당 시대에 이르면 이하의 동족으로 유미적 경향을 추구한 이상은과, 대조적으로 혁명적 사회파였던 피일휴(皮日休)가 이하의 시에 심취하였다. 남송 말기에서 원 초기의 한족 민족주의자들도 이하의 시를 아꼈는데, 특히 사호(謝翺)의 시에서 그 영향이 현저히 드러난다.청에 이르면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서 비평가 심덕잠은 이하의 시를 두고 「천지간에 이런 문필은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했다. 근대에는 청말의 혁명가 담사동,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이 이하의 시를 애독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근대 작가 중에는 이즈미 쿄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히나츠 코스케, 호리 타츠오, 미시마 유키오 등이 이하의 시를 즐겨 읽었다. 쇼와 후기, 헤이세이 시대 작가 중에는 가인 츠카모토 쿠니오[8], 쿠루마야 쵸키치는 이하를 본떠 필명을 지었고, 쿠사모리 신이치는 전기를 저술했다.
5. 2. 한국 문학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이하의 『장진주』의 마지막 구절 "술은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 이를 수 없으리니"에 착안해 『속장진주』를 지었다.5. 3. 일본 문학
쇼와 후기, 헤이세이 시대 작가 중에는, 가인 츠카모토 쿠니오[8], 쿠루마야 쵸키치는 이하를 본떠 필명을 지었고, 쿠사모리 신이치는 전기(아래 참조)를 저술했다.6. 저명한 작품
이하의 대표적인 시로는 〈추래(秋來)〉가 있다.
| 원문 | 구결 | 통석 |
|---|---|---|
| 동풍경심장사고(桐風驚心壯士苦) | 동풍(桐風)은 마음을 놀라게 하고 장사(壯士)는 괴로워하네 | 오동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가 씩씩한 나를 놀라게 하네 |
| 쇠등락위제한소(衰燈絡緯啼寒素) | 쇠퇴한 등불 아래, 귀뚜라미는 차가운 비단을 짠다 | 꺼져가는 등불 아래, 귀뚜라미가 베 짜는 소리를 내며 우네 |
| 수간청간일편서(誰看靑簡一編書) | 누가 푸른 책 한 권을 볼까 | 누가 나의 이 책을 읽어줄까 |
| 불견화충분공두(不遣花蟲粉空蠹) | 벌레가 가루가 되어 헛되이 좀먹게 하지 않으리 | 좀벌레가 헛되이 가루로 만들어 좀먹게 하지 않으리 |
| 사견금야장응직(思牽今夜腸應直) | 생각이 이 밤을 끌어, 창자는 곧게 펴지네 | 그것을 생각하니 오늘 밤, 나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네 |
| 우랭향혼조서객(雨冷香魂弔書客) | 비는 차갑고, 향기로운 혼은 서객을 조문하네 | 차가운 비가 내리는 가운데, 향기로운 여인의 혼이 나를 조문하네 |
| 추분귀창포가시(秋墳鬼唱鮑家詩) | 가을 무덤에서 귀신은 포가의 시를 읊네 | 가을 무덤에서 귀신은 포조의 만가를 읊네 |
| 한혈천년토중벽(恨血千年土中碧) | 한 맺힌 피는 천 년 동안 흙 속에서 푸르네 | 한을 품고 죽은 자의 피는 에메랄드가 되어 영원히 남네 |
7. 한국어 번역
| 한국어 번역 |
|---|
참조
[1]
웹사이트
李贺故里文化旅游开发项目
http://www.ly.gov.cn[...]
2017-02-04
[2]
웹사이트
Chinese Text Project entry '夢天'
http://ctext.org/tex[...]
2017-02-21
[3]
웹사이트
Mèng Tiān
http://poetrynook.co[...]
[4]
웹사이트
Chinese Text Project entry 秦王飲酒
http://ctext.org/tex[...]
2017-02-25
[5]
웹사이트
Allusions to Classical Chinese Poetry in Pink Floyd
http://www.cjvlang.c[...]
[6]
뉴스
昌谷的李賀
http://newpaper.dahe[...]
河南日報
[7]
서적
宋代文人の詩と詩論
創文社
2009-06-27
[8]
서적
李賀詩集 中国の詩集 カラー版
角川書店
1972
[9]
문서
넘겨주기
[10]
문서
현존하는 그의 작품이 많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평소 이하와 사이가 나빴던 사촌 형제들이 이하가 사망한 뒤 그의 작품을 모두 뒷간에 버렸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전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