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

2. 사건 발생

1991년 1월 29일 18시 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실종된 이형호는 사건 발생 43일 만인 3월 13일 12시 20분 경 잠실대교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배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손이 스카프와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었고, 코와 입이 테이프로 막혀 질식사한 상태였다. 부검 결과 위에 남아있던 음식물이 유괴 당일 친구 집에서 먹은 점심으로 판명되어, 유괴 직후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었다.

범인의 협박 전화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서울 또는 경기도 출신의 30대 전후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범인은 사건 당일 23시부터 16일 동안 50여 차례의 전화 통화와 10차례의 메모지를 통해 피해자의 부모를 협박했으며, 그 수법은 매우 치밀하고 지능적이었다. 범인은 피해자 부모에게 카폰을 사용하도록 지시하고, 김포공항과 대학로 등 서울 시내 여러 곳을 약속 장소로 알려주며 피해자의 아버지를 움직이게 했다.

김포공항에서는 국내선 주차구역 2구역에 차를 세우고 600번 공항버스를 타고 압구정 자택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으나, 차 뒷좌석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는 이유를 대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했다. 이후 대학로에서는 특정 빵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집에 있던 피해자의 계모에게 경찰을 불렀는지 집요하게 추궁했다. 계모가 삼촌이 함께 나갔다고 둘러댔지만, 범인은 경찰 수사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한동안 연락을 끊었다.^[1]

얼마 후 다시 연락해 온 범인은 지정된 장소에 메모지를 남기는 '무인 포스트' 방식을 사용했다. 장충동 태극당 인근의 조선일보 게시판에서 시작된 메모는 한일은행 명동지점 앞 쓰레기통에 붙어있는 입금 지시 메모로 이어졌다. 범인은 '윤△△'라는 이름으로 한일은행에 개설된 보통예금 통장에 돈을 입금하라고 지시했다.^[2]

범인은 입금된 돈을 찾기 위해 한일은행 지점을 방문했으나, 해당 계좌가 사고 신고된 계좌임이 단말기에 표시되자 은행원이 당황했고, 낌새를 눈치챈 범인은 그대로 달아나 검거에 실패했다. 이후 '김○○' 명의로 상업은행에 개설된 통장에 입금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돈을 찾으러 갔지만, 이때도 은행원이 머뭇거리는 사이 도주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CCTV가 거의 설치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범인이 방문했던 은행 지점들에도 CCTV는 없었으며, 메모지나 통장 개설 신청서에도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1]

은행 계좌를 통한 돈 인출이 어려워지자, 범인은 2월 14일 오후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올림픽대로 김포공항 방향으로 이동하다 서울교 아래 정중앙에 돌로 눌러진 메모를 확인하고 지시에 따르라는 연락을 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니 신경 쓰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메모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양화대교 남단 한강 둔치였고, 도로 옆 철제 박스 위에 돈뭉치를 올려놓으라는 것이 마지막 지시였다. 당시 철제 박스 주변에는 강남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잠복 중이었고, 피해자의 아버지는 경찰과 상의한 대로 진짜 돈 10만 원에 가짜 돈 뭉치를 섞어 신문지에 포장한 뒤 철제 박스 위에 놓고 돌아갔다.

하지만 형사들이 무전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철제 박스의 정확한 위치를 혼동하는 실수가 발생했고, 그 사이 범인이 돈을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당시 수사에서는 성문(聲紋)^[3] 분석 결과를 토대로 범인을 1명으로 추정했으나, 사람이 통행할 수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인 올림픽대로에서 순식간에 돈을 가져가려면 차량 이용이 필수적이라는 점 때문에 범인이 2명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수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1992년 3월 31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팀의 실험 결과, 철제 박스가 운전석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범인 2명 중 1명이 운전하고 다른 1명이 돈을 낚아채는 방식이어야 당시 상황이 설명 가능했다. 또한 성문을 다시 정밀 분석한 결과 미세한 차이가 발견되어 범인은 2명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1]

돈을 가져간 범인은 그날 밤 전화를 걸어 "가짜 돈이 잔뜩 섞여 있다. 아들을 되찾고 싶지 않은 것으로 알겠다. 다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을 끊었으며, 이후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범인의 마지막 통화 후 27일이 지나 이형호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사는 공개수사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친척인 이□□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전화상의 목소리와 이□□의 목소리가 일치하고, 범인이 사용한 은행 계좌 명의인 김○○, 윤△△가 실제로 이□□의 주변 인물이라는 점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협박 전화가 걸려온 날 경주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당시 사용한 고속도로 통행 영수증을 증거로 제출했고, 경찰 수사 결과 실제로 경주에 머물렀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이□□가 경주에서 전화를 걸고 서울의 공범이 이를 피해자의 집에 연결하는 방식으로 알리바이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가 대학에서 전기통신을 전공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수사를 이어갔다. 국과수의 성문 분석 결과 전화상의 목소리와 이□□의 목소리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보고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물증을 찾지 못하면서 수사는 다시 난항에 빠졌다.

한편, 상업은행 통장을 개설해주며 범인과 비교적 길게 대화했던 은행원과 피해자의 시신 발견 장소 인근 한강 둔치 잠실 지구에서 피해자를 목격했다는 매점 주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범인의 몽타주가 작성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또한 한강 둔치 잠실 지구 바로 뒤편에 위치한 잠실주공1단지에서 피해자와 범인으로 추정되는 청년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잇따르면서 수사가 활기를 띠는 듯했으나, 해당 인물들은 사건과 무관한 주민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