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 차브차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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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리아 차브차바제는 조지아의 작가, 시인, 언론인, 출판인이자, 조지아 민족주의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조지아의 문화적 부흥과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 시대에 조지아어와 조지아 문학을 장려하고, 조지아 정교회의 독립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차브차바제는 "근대 조지아 국가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사상은 조지아의 독립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07년 암살되었으나, 사후에도 조지아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1987년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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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 차브차바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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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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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ილია გრიგოლის ძე ჭავჭავაძე |
로마자 표기 | Ilia Grigolis dze Chavchavadze |
출생일 | 1837년 10월 27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그루지야현 크바렐리 (현재의 카헤티주, 조지아) |
사망일 | 1907년 9월 12일 |
사망지 | 티플리스현 치차무리, 러시아 제국 |
안장지 | 트빌리시의 므타츠민다 판테온 |
직업 | 법학자, 시인, 소설가, 인문주의자, 출판업자, 철학자 |
국적 | 조지아인 |
사조 | 사실주의 역사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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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 |
다른 이름 | წმინდა ილია მართალი (성 일리아 정의로운 자) უგვირგვინო მეფე (왕관 없는 왕) |
영향 | 조지아의 문화 |
관련 인물 |
2. 생애
일리아 차브차바제는 1837년 조지아 카헤티 지방 크바렐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지아의 공작 칭호인 '타바디'(tavadi)였다. 그의 가문은 1726년 카케티의 콘스탄틴 2세 왕으로부터 공작 지위를 받았다.[13]
차브차바제는 트빌리시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귀족 아카데미에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학, 조지아의 역사 및 시에 대한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48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1852년 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고모의 보살핌을 받았다.[13] 1851년 트빌리시 제1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중등 교육을 받던 중, 형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8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유럽의 혁명과 주세페 가리발디의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카테리네 차브차바제 공주를 만나 니콜로스 바라타슈빌리의 시를 접하기도 했다. 건강 문제로 1859년 조지아로 돌아왔다가, 1861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민족주의를 이끌며 러시아화 정책에 저항하고 조지아어와 문화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2] 그는 "언어, 조국, 종교"를 조지아 민족주의의 모토로 삼았다.[3] 그러나 그의 사상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등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차브차바제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문학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다.[5] 1907년, 러시아 제1 국가 평의회 상원 의원을 역임한 후 조지아로 돌아오던 중, 치치사무리에서 암살당했다.[22] 그의 죽음은 조지아 사회 전체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2. 1. 가문과 유년 시절
일리아 차브차바제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조지아 카헤티 지방 알라자니 계곡의 크바렐리 마을에서 태어났다.[13] 그는 조지아의 공작 칭호인 '타바디'(tavadi)였다. 차브차바제 가문은 조지아 프샤브-헤브수레티 지역 출신으로, 1726년 콘스탄틴 2세 왕이 기사도와 국가에 대한 용맹함을 인정하여 공작 지위를 부여했다. 그 결과 가문은 카케티 알라자니 협곡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일리아는 그리고르 차브차바제와 마리암 베부리쉬빌리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리고르는 아버지와 조상들처럼 군인이었다. 그는 지역 민병대와 함께 다게스탄의 침략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했다. 크바렐리의 일리아 차브차바제 박물관 가옥은 중세 성 양식을 2층 성에 통합하여 침략 시 가옥을 보호하도록 설계되었다.
차브차바제는 1848년 트빌리시로 이주하기 전 마을의 부제에게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트빌리시에서는 명망 있는 귀족 아카데미에 다녔다. 그러나 일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학, 조지아의 역사 및 시에 정통했던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리아는 부모로부터 조지아 영웅들의 이야기를 배웠고, 어머니 마리암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소설과 시를 암송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일리아는 부제의 이야기가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1848년 5월 4일, 일리아가 10살 때 어머니 마리암이 사망했고, 아버지 그리고르는 여동생 마크리네에게 아이들을 부탁했다. 1852년 아버지 그리고르가 사망한 후, '마크리네 고모'는 일리아의 유일한 가족 보호자가 되었다.[13]
1848년, 일리아는 중등 교육을 위해 트빌리시로 보내졌다.[13] 1851년 트빌리시 제1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3년 동안 사립 학교에 다녔다. 얼마 후 아버지가 사망했고, 마크리네 고모가 가족을 돌보았다. 일리아의 중등 학교 시절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매우 힘들었다. 다게스탄의 카헤티 침략 중에 형제 콘스탄틴이 사망하면서, 차브차바제 가족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리아는 첫 번째 짧은 시 '가난한 사람의 슬픔'에서 슬픔을 표현했다.
2. 2. 학창 시절
일리야는 학업을 마친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1857년 4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기 전 일리야는 카르다나키 마을에서 그의 가장 뛰어난 시 중 하나인 "크바렐리의 산들에게"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그는 평생 동안 캅카스 산맥에 대한 존경심과 고향을 떠나는 슬픔을 표현했다.같은 해, 일리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했다. 유학 시절, 일리야는 유럽에서 일어난 수많은 혁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특히 주세페 가리발디의 투쟁과 이탈리아에서의 사건에 주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일리야는 카테리네 차브차바제 공주를 만났는데, 그녀로부터 조지아 낭만주의 왕자 니콜로스 바라타슈빌리의 시와 가사에 대해 배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혹독한 기후로 인해 일리야는 매우 아팠고, 1859년 몇 달 동안 조지아로 돌아왔다.
1861년, 일리야는 학업을 마치고 조지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여정에서 일리야는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인 "여행자의 일기"를 썼는데, 이 일기에서 그는 국가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조지아 헤비 지역의 카즈베기 산과 테르기 강을 비유적으로 비교했다.
2. 3. 정치 활동
일리야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민족주의를 주요 정치적, 사회적 목표로 삼았다. 그는 로마노프 왕가의 강제적인 러시아화 정책에 전국적으로 저항하고, 조지아어를 부활시키며, 조지아 문학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러시아 차르와 성 시노드의 통제로부터 조지아 정교회의 독립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2]1860년대, 러시아 대학에서 교육받고 유럽 사상에 영향을 받은 조지아 지식인 신세대 "테르그달레울레비"는 제국의 동화 정책에 맞서 국가 문화를 장려했다.[2] 일리야 차브차바제가 이끈 이들은 귀족 계급 쇠퇴와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더욱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러시아 관료주의 통치와 트빌리시 내 아르메니아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인구적 지배에 자극받았다. 차브차바제는 가난한 조지아 귀족이 부유한 아르메니아 부르주아에게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트빌리시에 "귀족 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저서 《울부짖는 돌》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조지아 역사를 위조하고, 토지를 매입하며, 교회를 불법 점유하고, 가난한 조지아 농가를 빚지게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주의를 비판하며, 그들이 "다른 사람이 구운 빵을 먹거나 다른 사람의 땀으로 만들어진 것을 마신다"고 묘사하고, 자신의 신문 《이베리아》에서 "교활한 고리대금업자와 파렴치한 상인"이라고 비난했다.[3] 그는 "언어, 조국, 종교"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조지아 민족주의의 모토로 삼았다. 차브차바제와 동료들은 모든 조지아인의 단결을 촉구하며 계급과 지방 분열보다 국가적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들은 독립을 위한 노골적인 반란보다는 개혁된 러시아 제국 내에서 더 큰 문화적 자유, 조지아어 장려, 조지아 교육 기관 및 조지아 정교회 지원을 요구했으며, 조지아 정교회의 독립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억압된 상태였다.[4]
차브차바제의 사상에 대한 지지자가 늘어나는 동시에,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특히 노에 조르다니아로부터 반대도 증가했다. 사회 민주당은 차르 전제 정치를 무너뜨리고 통일된 러시아 제국의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적 변혁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조지아 교회, 국가, 언어, 정체성 부활은 고려하지 않았다. 일리야는 혁명적이고 무신론적인 미래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부르주아이자 낡은 귀족으로 여겨졌다.
차브차바제는 당시 트빌리시 정교회 신학교에 다니던 젊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문학 멘토 역할을 잠시 하기도 했다.[5]
2. 4. 암살과 사후


일리아는 러시아 제1 국가 평의회에서 상원 의원을 역임한 후 1907년에 조지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907년 8월 28일, 일리아 차브차바제는 아내 올가와 함께 트빌리시에서 므츠헤타 근교의 사구라모로 향하던 중, 치치사무리에서 매복하고 있던 6명의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차브차바제의 살해는 조지아 사회의 모든 계층이 슬퍼한 국가적 비극으로 여겨졌다. 당시 건강이 악화되어 고통받고 있던 아카키 체레텔리는 장례식에서 일리아를 기리는 훌륭한 조사를 읽었다. "일리아가 조지아 국민의 부흥에 기여한 것은 미래 세대의 모범이 될 것이다".[22]
일리아 차브차바제의 암살은 오늘날에도 논란의 대상이다. 암살 배후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차르 정부의 수사 결과는 암살범들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 "적색 부대"의 일원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소련의 수사는 차르의 비밀 경찰과 행정부가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공식적이지 않은 버전들은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멘셰비키도 살인을 조작했다고 비난한다.[8][9][10][11] 이오시프 스탈린이 암살 계획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27] 차브차바제는 사회민주주의 계획을 공공연히 무력화시켰고, 조지아 민족주의에 대해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압도적인 인기가 암살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3. 사상과 신념
일리야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민족주의에 기반한 정치, 사회적 신념을 가졌다. 그는 로마노프 왕가의 러시아화 정책에 저항하며 조지아어와 조지아 문학 부흥을 추구했고, 조지아 정교회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2]
1860년대 러시아에서 교육받고 유럽 사상에 영향을 받은 조지아 지식인 세대 "테르그달레울레비"를 이끌었던 차브차바제는 자본주의 발전과 트빌리시 내 아르메니아인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지배에 맞서 민족주의적 프로그램을 추구했다.[2] 그는 "언어, 조국, 종교"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 모든 조지아인의 단결과 국가적 이익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문화적 자유와 국가 교회 지원을 추구했다.[4]
차브차바제의 사상은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특히 노에 조르다니아의 반대에 부딪혔다. 사회 민주당은 차르 전제 정치 타도와 러시아 제국의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했기에, 조지아의 민족적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차브차바제를 부르주아적이고 낡은 귀족으로 여겼다.
차브차바제는 조지아인들 사이의 문해력 확산을 위한 협회 등 여러 공공, 문화, 교육 기관의 창립자이자 회장이었다. 그는 영국 문학 번역가였으며, 그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러시아 국가 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여러 학회의 회원이었다. 또한, 젊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문학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다.[5]
3. 1. 조지아 민족주의
일리야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민족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사회적 목표를 추구했다. 그는 로마노프 왕가의 강제적인 러시아화 정책에 저항하고, 조지아어 부활과 조지아 문학 육성을 촉구했으며, 러시아 차르와 성 시노드의 통제로부터 조지아 정교회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2]1860년대, 러시아 대학에서 교육받고 유럽 사상에 영향을 받은 조지아 지식인 세대 "테르그달레울레비"는 러시아 제국의 동화 정책에 맞서 국가 문화를 장려했다.[2] 일리야 차브차바제가 이끈 이들의 프로그램은 귀족 계급 쇠퇴와 자본주의 발전 속에서 더욱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러시아 관료 통치와 트빌리시 내 아르메니아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인구적 지배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차브차바제는 가난한 조지아 귀족이 부유한 아르메니아 부르주아에게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트빌리시에 "귀족 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저서 《울부짖는 돌》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조지아 역사를 왜곡하고, 토지를 매입하며, 교회를 불법 점유하고, 가난한 조지아 농가를 빚에 시달리게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자신의 신문 《이베리아》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주의를 비판하며, 그들을 "다른 사람이 구운 빵을 먹거나 다른 사람의 땀으로 만들어진 것을 마시는", "교활한 고리대금업자와 파렴치한 상인"이라고 묘사했다.[3] 그는 "언어, 조국, 종교"라는 슬로건을 제시하여 조지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삼았다.[4]
차브차바제와 동료들은 계급과 지역을 넘어선 모든 조지아인의 단결과 국가적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들은 독립을 위한 노골적인 반란보다는 개혁된 러시아 제국 내에서 더 큰 문화적 자유, 조지아어 장려, 조지아 교육 기관 및 국가 교회 지원을 요구했으며, 러시아 정부는 조지아 교회의 독립을 억압했다.[4]
차브차바제의 사상은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특히 노에 조르다니아는 차브차바제에 반대했다. 사회 민주당은 차르 전제 정치 타도와 러시아 제국의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했으며, 조지아 교회, 국가, 언어, 정체성 부활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리야는 혁명적이고 무신론적인 미래를 깨닫지 못한 부르주아이자 낡은 귀족으로 간주되었다.
3. 2. 사회 개혁 사상
일리야 차브차바제의 주요 사회 개혁 사상은 조지아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로마노프 왕가의 강제적인 러시아화 정책에 저항하고, 조지아어와 조지아 문학을 부흥시키며, 조지아 정교회의 독립성을 회복하고자 했다.[2]차브차바제는 1860년대 러시아에서 교육받고 유럽 사상에 영향을 받은 조지아 지식인 세대인 "테르그달레울레비"를 이끌었다. 이들은 귀족 계급의 쇠퇴와 자본주의 발전, 러시아 관료 통치, 트빌리시 내 아르메니아인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인구적 지배에 맞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프로그램을 추구했다.[2] 차브차바제는 가난한 조지아 귀족이 아르메니아 부르주아에게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트빌리시에 "귀족 은행"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저서 《울부짖는 돌》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조지아 역사를 왜곡하고, 토지를 매입하며, 교회를 불법 점유하고, 가난한 조지아 농민에게 빚을 지게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자신의 신문 《이베리아》를 통해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주의를 "교활한 고리대금업자와 파렴치한 상인"이라고 비판했다.[3]
차브차바제는 "언어, 조국, 종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조지아 민족주의의 모토로 삼았다. 그는 모든 조지아인의 단결과 국가적 이익을 우선시했지만, 독립을 위한 직접적인 반란보다는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문화적 자유, 조지아어 장려, 조지아 교육 기관 및 국가 교회 지원을 요구했다.[4]
차브차바제의 사상은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쪽, 특히 노에 조르다니아로부터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사회 민주당은 차르 전제 정치 타도와 러시아 제국의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적 변혁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조지아 교회, 국가, 언어, 정체성의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일리야를 혁명적, 무신론적 미래를 깨닫지 못한 부르주아이자 낡은 귀족으로 여겼다.
차브차바제는 조지아인들 사이의 문해력 확산을 위한 협회, "극단 협회", "조지아 역사-민족지학 협회" 등 여러 공공, 문화, 교육 기관의 창립자이자 회장이었다. 그는 영국 문학 번역가이기도 했으며, 그의 주요 문학 작품은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러시아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 러시아 국가 평의회(고수다르스트벤나야 두마)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러시아 지리학회 캅카스 위원회, 모스크바 대학교 민족지학 및 인류학회, 러시아 동양학회, 앵글로-러시아 문학회(런던) 회원이었다.
차브차바제는 트빌리시의 정교회 신학교에 다니던 젊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문학 멘토 역할을 잠시 맡기도 했다. 역사가 사이먼 세백 몬테피오리에 따르면, 차브차바제는 스탈린의 시를 칭찬하며 5편을 출판했고, 스탈린을 '불타는 눈을 가진 젊은이'라고 불렀다.[5]
4. 문학 활동
일리야 차브차바제는 시, 서정시, 소설, 단편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조지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19세기 조지아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조지아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차브차바제의 문학은 조지아의 자연과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조지아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조지아의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조지아어의 순수성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새로운 문학 형식을 실험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여행자의 일기''', '''은자''', '''크바렐리의 산들에게''' 등이 있다.
4. 1. 주요 작품
일리야 차브차바제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여행자의 일기''' (1861): 일리야가 학업을 마치고 조지아로 돌아오는 길에 쓴 작품으로, 국가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조지아 헤비 지역의 카즈베기 산과 테르기 강을 비유적으로 비교했다.[3]
- '''은자''' (1895): 마조리 워드로프가 영어로 번역하여 런던에서 출판했다.[5]
- '''크바렐리의 산들에게''' (1857년 4월 15일): 일리야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기 전 카르다나키 마을에서 지은 시로, 캅카스 산맥에 대한 존경심과 고향을 떠나는 슬픔을 표현했다.
4. 2. 문학적 영향
린 코핀이 번역하고 기아 조카제가 지원했으며, 도도나 키지리아가 서문을 쓴 ''조지아 시: 루스타벨리부터 갈라티온까지: 이중 언어 선집''(블루밍턴, 인디애나, Slavica, 2013)에 일리아 차브차바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아르투어 라이스트가 번역 및 편집한 ''게오르기셰 디히터(Georgische Dichter)''(드레스덴-라이프치히, 1887)에는 일리아 차브차바제의 시와 다른 조지아 시인들의 시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있다.[1]
마조리 워드로프는 일리아 차브차바제의 ''https://dspace.nplg.gov.ge/bitstream/1234/331240/1/The_Hermit_1895.pdf 은자''(런던: Bernard Quaritch, 1895)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2]
5. 평가와 유산
일리아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역사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조지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차브차바제의 죽음 이후, 조지아 사회민주당원들, 특히 멘셰비키는 국민들 사이에서 큰 힘과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는 1918년 조지아 민주 공화국 독립 선언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소련 시대에도 조지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90년, 차브차바제가 생전에 설파했던 국가 부흥 구상은 더욱 힘을 얻었다. 2002년 미헤일 사카슈빌리는 차브차바제의 정치적 유산을 주장하며 통일 국민 운동을 결성했고, 이는 2003년 장미 혁명으로 이어졌다.
5. 1. 조지아에서의 평가

일리아 차브차바제는 "근대 조지아 국가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그의 민족 각성은 조지아 국민에게 "국가의 무관의 왕"이라는 칭호를 안겨주었다.[13] 그의 업적은 생전은 물론 소련 시대에도 인정받았으며, 1937년 소련 당국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도 했다. 소련 시대에는 차브차바제의 농노제 거부와 비판이 특히 강조되었다.
1921년 조지아에 대한 소련의 침공 이후,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자유와 민족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1987년,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성 일리아 의인"으로 시성했다.[13] 같은 해, 소련 반체제 인사 지식인들은 조지아 민족 부흥과 정치적 독립을 촉진하는 일리아 차브차바제 협회를 설립했다. 1989년 트빌리시 반소 시위에서 그의 시, 소설, 정치적 신념은 조지아 독립 투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스티븐 킨저는 1998년에 차브차바제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존경받는다고 평가했다. 좌파는 불의에 대한 그의 증오, 중도파는 비폭력 휴머니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조국, 언어, 신앙'이라는 슬로건을 채택하여 그를 지지한다.[14]
일리아 주립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기관과 거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16][17] 그의 주요 작품은 조지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편, 일리야 차브차바제의 암살은 오늘날에도 논란의 대상인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가 암살의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24][25][26] 역사가 사이먼 세백 몬테피오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암살 계획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27]
5. 2. 현대적 계승
일리아 차브차바제는 "근대 조지아 국가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13] 그의 민족 각성은 조지아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국가의 무관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업적은 생전뿐만 아니라 소련 시대에도 인정받았으며, 1937년 소련 당국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도 했다. 특히 소련 시대에는 차브차바제의 농노제 거부와 비판이 강조되었다.1921년 소련의 조지아 침공과 소련으로의 합병 이후, 차브차바제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조지아의 자유와 민족 해방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1987년, 조지아 정교회는 차브차바제를 "성 일리아 의인"으로 시성하였다.[13]
1987년 10월, 조지아 민족 부흥과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일리아 차브차바제 협회가 소련 반체제 인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989년 트빌리시 반소 시위에서 일리아 차브차바제의 시, 소설, 정치적 신념은 조지아 독립 투쟁의 동력이 되었다.
스티븐 킨저는 1998년에 차브차바제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널리 존경받는다고 언급하며, "오늘날 조지아의 좌파는 불의에 대한 그의 증오 때문에 차브차바제를 포용하고, 중도파는 그의 비폭력 휴머니즘 때문에 그를 사랑하며,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슬로건 '조국, 언어, 신앙'을 채택했다."라고 썼다.[14] 여기서 '신앙'은 조지아 정교를 의미한다.[15]
2006년에는 일리아 주립 대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6] 트빌리시의 주요 도로인 일리아 차브차바제 대로를 포함하여 여러 거리와 길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7] 그의 주요 작품, 특히 "사람이 사람인가?!"는 조지아 학교에서 "조지아어 및 문학" 수업 시간에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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