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르네 에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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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 르네 에베르는 프랑스 혁명 시기 활동한 저널리스트이자 정치인으로, 1757년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그는 혁명 초기에 자코뱅당을 지지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 '르 페르 뒤셴'이라는 필명으로 급진적인 정치 풍자 글을 썼다. 에베르는 코르들리에 클럽의 영향력 있는 회원이 되었으며, 입헌군주제에 반대하고 파리 코뮌의 대의원으로서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도왔다. 그는 탈기독교화 운동을 주도하며 '이성의 축제'를 개최했으나, 로베스피에르와의 갈등으로 체포되어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저널 '르 페르 뒤셴'은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그가 프랑스 혁명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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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르네 에베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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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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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자크 르네 에베르 |
출생 | 1757년 11월 15일 |
출생지 | 알랑송, 프랑스 왕국 |
사망 | 1794년 3월 24일 (36세)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제1공화국 |
사망 원인 | 기요틴 처형 |
거주지 | 파리, 프랑스 |
국적 | 프랑스인 |
직업 | 언론인, 작가, 출판인, 정치인 |
부모 | 자크 에베르 (??–1766) 및 마르그리트 라 브네체 드 우드레 (1727–1787) |
배우자 | 마리 마르게리트 프랑수아즈 에베르(1792년 결혼) |
자녀 | 비르지니-스키피옹 에베르 (1793–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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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 장소 | 에랑시 묘지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몽테뉴파 (1792–1794) |
기타 소속 | 자코뱅 클럽 (1789–1792) 코르들리에 클럽 (1792–1794) |
프랑스 혁명에서의 역할 | |
활동 | 프랑스 혁명 |
소속 | 산악파 |
정치 경력 | |
직책 | 국민 공회 의원 |
임기 | 1792년 9월 20일 – 1794년 3월 23일 |
2. 생애
자크 르네 에베르는 1757년 11월 15일 프랑스 알랑송의 소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알랑송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소송으로 파산한 뒤 1780년 파리로 이주하여 초기에는 곤궁한 생활을 했다.[2] 그는 극장 관련 일을 하거나 희곡을 쓰기도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며 자코뱅당에 가담했다. 1790년부터 '르 페르 뒤셴'이라는 필명으로 저널리스트 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자신의 신문 《페르 뒤셴》(Le Père Duchesne프랑스어)을 창간했다. 이 신문은 특유의 거칠고 비속한 문체로 귀족과 성직자, 이후에는 루이 16세와 왕족을 맹렬히 비판하며 파리 상퀼로트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1791년 코르들리에 클럽에 가입하여 영향력 있는 회원으로 성장했고, 1792년 8월 10일 봉기에 참여하여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이후 파리 코뮌의 검사 대리로 선출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지롱드파 추방과 자코뱅파 독재 체제 수립에 공헌했으며, 공포 정치의 강화를 주장했다. 또한 탈기독교 운동을 주도하여 노트르담 대성당을 '이성의 사원'으로 바꾸는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다.[30][31]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노선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나 조르주 당통과 같은 자코뱅파 내 다른 지도자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공포 정치 완화를 주장하는 당통파와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부패 혐의 등으로 공격받았다. 1794년 3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타도를 위한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결국 혁명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794년 3월 24일 동지들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상퀼로트가 로베스피에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혁명의 동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1. 초기 생애
1757년 11월 15일 프랑스 바스노르망디 주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세공인이자 전직 법관, 부영사를 지낸 자크 에베르(Jacques Hébert, ~1766년 사망)였고, 어머니는 마르그리트 부내쉬 드 우드리(Marguerite Beunaiche de Houdrie, 1727년–1787년)였다. 그의 집안은 소부르주아 계층에 속했다.에베르는 알랑송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이후 알랑송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클루에(Clouet) 박사와의 소송 사건에 휘말려 파산했다. 그는 명예훼손으로 부과된 1,000 리브르의 벌금을 피하기 위해 1780년 먼저 루앙으로 갔다가, 같은 해 파리로 이주했다.[2]
파리에서 그는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루 데 누아예(Rue des Noyers)에서 한 미용사의 도움으로 생활했으며, 라 레퓌블리크 극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여가 시간에 희곡을 썼지만 상연되지는 못했다. 이후 절도 혐의로 극장에서 해고되었고, 한 의사의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편법과 사기로 생계를 유지했다고도 전해진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그는 La lanterne magique, ou Le fléau des aristocrates프랑스어(마법의 등불, 또는 귀족들의 재앙)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쓰기 시작하며 정치적인 글쓰기에 발을 들였다.
2. 2. 프랑스 혁명 참여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에베르는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자코뱅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790년부터 '르 페르 뒤셴'이라는 필명으로 언론에 글을 기고하며 저널리스트 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여 신문 《페르 뒤셴》(Le Père Duchesne)을 창간했다. 초기에는 귀족과 성직자 계층의 부패와 차별을 비판했으나, 1791년 6월 루이 16세의 바렌 탈출 사건 실패 이후에는 국왕과 왕족, 심지어 교황 비오 6세까지 맹렬하게 공격하는 논조로 바뀌었다. 그는 파리의 상퀼로트에게 더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중주의적이고 거친 문체를 사용했으며, 이는 교양 있는 엘리트들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동시에 급진적인 애국주의 해결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이었다.[18] 그는 국민 방위군 총사령관 라파예트, 미라보 백작, 파리 시장 바일 등 주요 정치인들을 비판했다.[19]
1791년 에베르는 인권과 시민권 연구 모임인 코르들리에 클럽에 가입하여 곧 영향력 있는 회원으로 부상했다. 같은 해 7월 17일, 그는 샹 드 마르스에서 루이 16세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했으며, 이후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는 입헌군주제조차 반대하며, 혁명 코뮌의 대의원으로서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계획하고 지원하여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이 봉기 동안 그는 파리의 본 누벨 구역 대표로 활동했으며, 다음 달 9월 학살을 지지했다. 1792년 12월 22일, 그는 파리 코뮌 검사 대리로 임명되었다.
1792년 가을부터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반가톨릭주의 운동을 주도하여 노트르담 대성당을 '이성(理性)의 사원'으로 바꾸고, 약 2,000여 개의 다른 가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 시설을 파괴하거나 이성 클럽의 장소로 변경했다. 그는 기독교를 폐지하고 "이성의 숭배"라고 불리는 무신론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제전(이성의 축제)을 실행했다.[30][31] 이는 이신론적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했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 에베르는 성직자들이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민중을 착취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하며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했다.
1793년 에베르는 장폴 마라 등과 함께 지롱드파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5월 20일, 국민공회의 온건파는 12인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여 에베르를 포함한 급진파를 조사하려 했고, 5월 24일 에베르는 체포되었다. 그러나 상퀼로트의 강력한 지지로 그는 3일 만에 석방되었고, 그의 선동은 5월 31일~6월 2일 봉기로 이어져 지롱드파를 축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 7월 마라가 암살되고 경쟁 관계에 있던 앙라제(격분파)가 탄압받자, 에베르는 그 지지자들을 흡수하며 상퀼로트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공포 정치의 강화를 주장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죄 판결과 처형을 가장 먼저 요구했고, 탕플 탑에 유폐된 루이 17세의 후견인으로 구두 수선공 앙투안 시몽을 지명하여 루이 17세를 학대하고 세뇌하는 데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공주가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에베르는 자코뱅파 내에서도 급진파에 속했으며, 중도파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나 우파인 조르주 당통과는 거리를 두었다. 특히 부르주아지와 연계가 깊고 공포 정치 완화를 주장하던 당통파와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1793년 11월, 프랑스 동인도 회사 청산 과정에서의 부패 사건(동인도 회사 사건)이 드러나자, 에베르는 이에 연루된 당통파의 클로드 바지르, 프랑수아 샤보, 파브르 데글랑틴 등을 고발하여 투옥시켰다.
한편, 에베르는 1792년 2월 7일, 전직 수녀였던 마리 고필과 결혼하여 딸 비르지니-시피옹 에베르(1793년 2월 7일 – 1830년 7월 13일)를 낳았다.[20] 이 시기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파리 시장 장 니콜라 파슈 등을 접대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그의 재정적 기반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파슈가 《페르 뒤셴》의 대량 인쇄를 위탁한 점 등이 관련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에베르의 급진주의와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당통파의 카미유 데물랭은 에베르가 빈민의 편을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외국인 은행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페르 뒤셴》을 군대에 대량 납품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고 폭로했다. 궁지에 몰린 에베르는 1794년 3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을 타도하기 위해 코르들리에 클럽의 동지들에게 봉기를 호소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는 상퀼로트 간부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혁명 재판소에 회부되었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에베르는 처형되기 전에 이미 상퀼로트 내에서 지지를 상당히 잃은 상태였지만, 그의 죽음은 상퀼로트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유해는 마들렌 묘지에 매장되었으나, 묘지 폐쇄 후 파리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2. 3. 정치 활동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자코뱅당의 지지자가 되었다. 1790년 '르 페르 뒤셴'이라는 필명으로 언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11월 자신의 신문 《페르 뒤셴》(Le Père Duchesne프랑스어)을 창간했다. 초기에는 주로 귀족과 성직자 계층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1791년 루이 16세의 실패한 바렌 탈출 사건 이후로는 국왕과 교황 비오 6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792년 봄부터는 왕족 전체에 대한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의 글은 비속어를 사용하여 반동적인 왕당파나 부르주아지 측 정치인들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며, 이를 통해 상퀼로트의 대변인으로 부상했다. 이는 교양 있는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방식과는 의도적으로 대조되는 대중주의적 스타일이었다.[18] 그는 국민 방위군 사령관 라파예트, 미라보 백작, 파리 시장 장 실뱅 바일 등 주요 정치인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19]
1791년 코르들리에 클럽에 가입하여 영향력 있는 회원으로 성장했으며, 이 클럽을 주요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샹 드 마르스에서 루이 16세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했고, 이후 샹 드 마르스 학살을 경험하며 혁명적 사고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는 입헌군주제 자체에 반대했으며,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파리 코뮌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군주제 폐지에 기여했다. 또한 그해 9월 학살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792년 12월 22일에는 파리 코뮌의 검사 대리로 임명되었다.
1793년 4월부터 5월까지 마라 등과 함께 지롱드파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국민공회 내 온건파가 다수를 차지한 12인 특별 위원회는 에베르를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5월 24일 그를 체포했으나, 상퀼로트의 강력한 지지와 압력으로 인해 3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는 5월 31일~6월 2일 봉기로 이어져 지롱드파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롱드파 추방 이후 자코뱅파 독재 체제 수립과 공포 정치 강화에 기여했다.
에베르는 공포 정치 시기 동안 급진적인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유죄 판결과 처형을 가장 먼저 요구했으며, 탕플 탑에 유폐되어 있던 루이 17세의 후견인으로 자코뱅파이자 코뮌의 일원이었던 구두 수선공 앙투안 시몽을 지명했다. 시몽 등과 함께 루이 17세를 학대하고 세뇌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내친왕이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어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에베르는 탈기독교 운동을 강력히 추진했다. 1792년 가을부터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이성(理性)의 사원'으로 바꾸는 등[30][31], 약 2,000여 개의 가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 시설을 파괴하거나 '이성 클럽'의 장소로 용도를 변경했다. 이는 '이성의 숭배'라고 불리는 무신론적 제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활동은 이신론적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했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의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 에베르는 성직자들이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민중을 착취했다고 비판하며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했다.
1793년 7월 마라가 암살되고, 상퀼로트의 지지를 놓고 경쟁하던 앙라제(격분파)가 혁명 정부의 탄압으로 세력이 약화되자, 에베르는 그 지지자들을 흡수하여 상퀼로트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는 자코뱅파 내에서도 급진 좌파에 속했으며, 중도파인 로베스피에르나 우파인 조르주 당통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특히 부르주아지와의 연계가 깊고 공포 정치의 완화를 주장했던 당통파와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1793년 11월, 프랑스 동인도 회사 청산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부패 사건(동인도 회사 사건)이 드러나자, 에베르는 이 사건에 연루된 당통파의 클로드 바지르, 프랑수아 샤보, 파브르 데글랑틴 등을 적극적으로 고발하여 투옥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반격을 초래했다. 특히 당통파의 데물랭은 에베르가 빈민의 편을 드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파리의 외국인 은행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페르 뒤셴》 신문을 군대에 대량으로 납품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고 폭로했다. 이는 에베르가 사치스러운 부르주아 생활을 한다는 비판과도 연결되었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에베르는 1794년 3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을 타도하기 위해 코르들리에 클럽의 동지들에게 봉기를 호소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 회부되었고, 동지 17명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은 이후 상퀼로트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4.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
1792년 8월 10일 사건 이후 파리 코뮌의 검사 대리로 선출된 에베르는 공포 정치의 강화를 주장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유죄 판결과 처형을 가장 먼저 요구한 인물 중 하나였다.에베르는 탕플 탑에 유폐되어 있던 어린 루이 17세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자코뱅파이자 코뮌의 일원이었던 구두 수선공 앙투안 시몽을 루이 17세의 후견인으로 지명하게 했다. 에베르는 시몽 등과 공모하여 루이 17세를 학대하고 세뇌시켜, 그의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 고모 엘리자베트 공주가 자신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의 진술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이 날조된 문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 과정에서 그녀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고, 이는 법정에 선 마리 앙투아네트를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다.[30][31]
2. 5. 갈등과 몰락
1793년 7월 장폴 마라가 암살당하고, 상퀼로트의 지지를 두고 경쟁하던 앙라제(격분파)가 혁명 정부의 탄압으로 궤멸되자, 에베르는 그 지지자들을 흡수하여 상퀼로트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그해 가을, 지롱드파를 성공적으로 공격한 후, 에베르는 조르주 당통, 피에르 필리포,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등 온건하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그는 공포 정치의 강화를 주장하며,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신속한 유죄 판결과 처형을 요구했다. 재판 과정에서 에베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들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했다고 비난했는데,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를 바보(imbécile|앵베실프랑스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25] 또한 에베르는 탕플 탑에 유폐된 루이 17세의 후견인으로 구두 수선공 앙투안 시몽을 지명했고, 시몽 등과 함께 루이 17세를 학대하고 세뇌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공주가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거짓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었다.에베르는 기독교를 폐지하고 "이성의 숭배"라는 이름의 무신론적 제전("이성의 축제")을 추진했다.[30][31] 이는 이신론의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믿었던 로베스피에르와의 또 다른 갈등 지점이었다. 에베르는 성직자들이 종교적, 도덕적 권위를 내세워 민중을 착취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다.
자코뱅파 내 급진파였던 에베르는 부르주아지와의 연계가 깊고 공포 정치의 완화를 요구하던 당통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1793년 11월, 프랑스 동인도 회사 청산 과정에서 대규모 부패 사건이 드러나자, 에베르는 이 사건에 연루된 당통파의 클로드 바지르, 프랑수아 샤보, 파브르 데글랑틴 등을 고발하여 투옥시켰다.
그러나 당통과, 에베르의 급진주의를 경계하던 로베스피에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특히 당통파의 대변인이었던 카미유 데물랭은 에베르가 빈민의 편을 드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파리의 외국인 은행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신의 신문 《뒤셴 아버지》를 군대에 대량 구독시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폭로했다. 궁지에 몰린 에베르는 1794년 3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을 타도하기 위해 코르들리에 클럽의 동지들에게 봉기를 호소했으나 실패했다.
정부는 에베르파의 위협에 격분했고, 자코뱅 클럽의 지지를 얻어 1794년 3월 13일 밤, 베르트랑 바레르, 장마리 콜로 다르부아, 자크 니콜라 빌로 바렌 등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에베르파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혁명 재판소에 회부된 에베르는 정치적 음모자보다는 과거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며 좀도둑처럼 취급받았다. 3일간의 심리 끝에 에베르와 그의 동지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794년 3월 24일, 에베르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26] 그는 단두대로 향하는 길에 여러 차례 기절했고, 처형 직전에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고 전해진다. 처형인들은 칼날을 그의 목 위에서 몇 번 멈추는 식으로 군중을 즐겁게 한 뒤에야 그의 목을 베었다.[27] 그의 시신은 마들렌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아내 마리 마르그리트 프랑수아즈 에베르 역시 20일 뒤인 1794년 4월 13일에 처형되어 에랑시 묘지에 묻혔다.
에베르의 처형은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처형 직전 에베르는 상퀼로트 내에서도 지지를 상당히 잃은 상태였지만, 그의 죽음은 상퀼로트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명한 자코뱅 지도자 루이 앙투안 드 생 쥐스트는 에베르 처형 이후 "혁명은 얼어붙었다"고 평가했는데,[28] 이는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혁명의 지속과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에베르파의 몰락 이후 상퀼로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이는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6. 죽음 이후
유해는 마들렌 묘지 Cimetière de la Madeleine|시메티에르 드 라 마들렌fra에 매장되었지만, 후에 묘지의 폐쇄에 따라 유골은 파리 지하 묘지로 이송되었다.3. 르 페르 뒤셴
1790년부터 1794년 에베르가 사망할 때까지 발행된 《르 페르 뒤센》(Le Père Duchesne)은 프랑스 혁명 당시 매우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저널이었다.[4] 이 신문은 파리 노동 계급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으며, 에베르는 '페르 뒤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글을 썼다.[4][5] '페르 뒤센'은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와 비속어를 사용하여[5] 하층민의 정서를 대변했고, 이는 프랑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브뤼노로부터 "저속함의 호메로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0] 거리에서는 Il est bougrement en colère aujourd’hui le père Duchesne!|페르 뒤센 신부는 오늘 매우 화가 났어!fra라는 외침과 함께 신문이 팔릴 정도로 민중에게 친숙했다.
초기에 《르 페르 뒤센》은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으나[14], 1791년 국왕 일가의 실패한 바렌 도주 이후 왕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었다.[14][15]
《르 페르 뒤센》은 장 폴 마라의 《민중의 벗》보다 저렴한 가격[12]과 파리 코뮌 및 정부의 대량 구매를 통한 배포[10] 덕분에 큰 인기를 누렸으며, 1793년 마라 암살 이후 파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중 하나가 되었다.[13] 이 신문은 혁명 과정에서 여론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3. 1. 창간과 발행
1789년 10월 21일 프랑스 혁명 중 선포된 계엄령은 많은 작가와 언론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페르 뒤센'(Père Duchesne, 뒤센 신부)이라는 인물을 활용한 글쓰기를 포함한 다양한 혁명적 표현 방식을 촉발했다.[3]에베르는 1790년부터 1794년 처형될 때까지 매우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저널인 《르 페르 뒤센》(Le Père Duchesne)을 통해 파리 노동 계급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는 이 저널에서 애국적인 상퀼로트인 페르 뒤센의 목소리를 빌려, 프랑스 군주나 정부 관료들과의 가상 대화를 1인칭 시점으로 서술했다.[4] 에베르는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이미 파리 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페르 뒤센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통해 익명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페르 뒤센은 강하고 솔직하며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고, 분노와 행복을 거침없이 표현했으며 비속어와 거친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5] 그의 이야기는 파리의 가난한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으며,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부추기기도 했다. 거리 행상들은 Il est bougrement en colère aujourd’hui le père Duchesne!|페르 뒤센 신부는 오늘 매우 화가 났어!fra라고 외치며 신문을 팔았다. 에베르는 페르 뒤센 캐릭터를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이 인물을 활용하여 코믹한 난로 상인의 이미지를 상퀼로트의 애국적 역할 모델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6] 혁명적 상징으로서 페르 뒤센은 종종 파이프를 물고 프리기아 모자를 쓴 모습으로 그려졌다.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인 에베르주의자들은 프랑스가 귀족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부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더 많은 귀족을 조사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자주 요구했다.[7] 《르 페르 뒤센》 65호(1790년)에서 그는 귀족을 "국가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헌법의 적"으로 규정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8] 에베르의 명성은 주로 그의 신문에서 루이 16세를 비판한 데서 비롯되었다.[9]
《르 페르 뒤센》은 독자들의 언어와 복장을 모두 반영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프랑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브뤼노는 에베르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일상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한 점을 들어 그를 "저속함의 호메로스"라고 칭했다.[10] 또한 페르 뒤센의 노동자 복장은 귀족의 화려한 복장과 대조를 이루며 혁명의 긴장감을 드러냈다.[11]
에베르 외에도 페르 뒤센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비속어를 사용한 작가들이 있었다. 앙투안 르메르는 1790년 9월부터 1792년 5월까지 《페르 뒤쉔》(철자가 다름)이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국왕과의 관계를 보존하려는 온건한 입장을 대변했지만, 에베르의 《르 페르 뒤센》이 훨씬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이는 장 폴 마라의 신문 《민중의 벗》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상퀼로트가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2] 또한 1792년부터 파리 코뮌과 전쟁 장관 장 니콜라 파슈, 그리고 이후 장 밥티스트 노엘 부쇼트가 《르 페르 뒤센》 수천 부를 구매하여 군대와 대중에게 무료로 배포한 것도 인기에 크게 기여했다. 에베르는 이를 통해 약 205,000 리브르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10] 1793년 7월 13일 장 폴 마라가 암살되자 《르 페르 뒤센》은 파리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었다.[13]

1790년에서 1793년 사이 에베르의 정치 평론은 주로 군주의 사치와 과잉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초기(1790-1792년)에는 《르 페르 뒤센》이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며 루이 16세와 라파예트 후작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시기 그의 주된 공격 대상은 교황 권위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성직자 민사 기본법의 주요 반대자인 장 시프랭 모리였다.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면서도, 에베르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매우 비판적이었다.[14]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후 여왕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쉬웠기 때문에, 에베르는 그녀를 프랑스의 여러 정치 문제에 대한 희생양으로 삼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추정된 성적 문란함을 군주제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하며, 그녀가 태도를 바꾸고 귀족적 과잉을 포기한다면 군주제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베르는 여왕이 변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고, 종종 그녀를 "마담 베토"(Madame Veto)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루이 16세를 "술 취하고 게으른 바람맞이 돼지"라고 지칭하며 국민의 적으로 묘사했다.[15] 에베르는 독자들에게 여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프랑스 대중이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 알리려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1년 1월부터 1794년 3월까지 《르 페르 뒤센》 기사의 14%에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비판 대상이었다.[16] 신문 속 페르 뒤센과 여왕의 가상 대화는 종종 그녀의 추정된 색정증을 폭로하거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17] 1791년 국왕 일가의 실패한 바렌 도주 이후 에베르의 어조는 훨씬 더 거칠어졌다.
3. 2. 내용과 특징
1789년 10월 21일 계엄령 선포는 많은 작가와 언론인에게 영향을 미쳐 혁명적 사고의 다양한 질문과 패턴을 촉발시켰다. 이 시기 《페르 뒤센》(Père Duchesne, 뒤센 신부)이라는 인물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 등 다양한 형태의 저술 활동이 나타났다.[3]1790년부터 1794년 사망할 때까지 에베르는 매우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저널인 《르 페르 뒤센》(Le Père Duchesne)을 통해 파리 노동 계급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는 자신의 저널에서 애국적인 상퀼로트인 '페르 뒤센'의 목소리를 빌려, 페르 뒤센이 프랑스 군주나 정부 관료들과 나눈 가상의 대화를 전달하는 1인칭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4] 에베르는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이미 파리 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페르 뒤센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통해 익명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페르 뒤센은 강하고 솔직하며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큰 분노를 느끼면서도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고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또한 재치 있고 사색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비속어와 거친 단어를 끊임없이 사용했다.[5] 그의 이야기는 가난한 파리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으며,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조장하기도 했다. 거리 행상들은 "Il est bougrement en colère aujourd’hui le père Duchesne!" (페르 뒤센 신부는 오늘 매우 화가 났어!)라고 외치며 신문을 팔았다. 에베르가 페르 뒤센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인물을 활용하여 코믹한 난로 상인의 이미지를 상퀼로트의 애국적 역할 모델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6] 혁명적 상징으로서 페르 뒤센은 종종 파이프를 물고 프리게 모자를 쓴 뻣뻣한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인 에베르주의자들은 프랑스가 과거의 악습으로 여겨지는 귀족 계급을 제거해야만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더 많은 귀족을 조사하고 처형해야 한다는 견해를 자주 표명했다.[7] 《르 페르 뒤센》 65호(1790년)에서 그는 귀족들을 "국가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헌법의 적"이라고 정의하며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8] 에베르의 명성은 그가 맡았던 직위나 파리 클럽에서의 역할보다는, 그의 신문에서 루이 16세를 신랄하게 비판한 데서 주로 비롯되었다.[9]
페르 뒤센은 독자들의 언어와 복장을 모두 반영했기 때문에, 그의 독자들은 그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행동으로 옮겼다. 프랑스 언어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페르디낭 브뤼노는 에베르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일상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한 점을 들어 그를 "저속함의 호메로스"라고 불렀다.[10] 또한, 페르 뒤센의 노동자 복장과 귀족의 화려한 복장의 극명한 대조는 혁명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11] 에베르 외에도 페르 뒤센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비속어를 통해 노동 계급에 호소하려 한 작가들이 있었다. 르메르(Antoine Lemaire|앙투안 르메르프랑스어)는 1790년 9월부터 1792년 5월까지 철자가 다른 《페르 뒤쉔》(Père Duchêne)을 발행하며 국왕과 국가의 관계를 보존하려는 "온건한 애국자"의 목소리를 냈지만, 에베르의 《르 페르 뒤센》이 훨씬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이는 장 폴 마라의 신문 《민중의 벗》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상퀼로트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2] 또한 파리 코뮌과 전쟁 장관 장 니콜라 파슈, 그리고 이후 장 밥티스트 노엘 부쇼트가 《르 페르 뒤센》 수천 부를 구매하여 군인들과 대중에게 무료로 배포한 것도 인기에 크게 기여했다. 이로 인해 에베르는 약 205,000 리브르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10] 1793년 7월 13일 장 폴 마라가 암살되면서 《르 페르 뒤센》은 파리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었다.[13]
1790년에서 1793년 사이 에베르의 정치 평론은 주로 군주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초점을 맞추었다. 초기(1790-1792년) 《르 페르 뒤센》은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으며, 루이 16세와 라파예트 후작에게도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 시기 그의 주된 공격 대상은 교황 권위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성직자 민사 헌법의 주요 반대자인 장 시프랭 모리였다.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면서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는 줄곧 비판적이었다.[14]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후 여왕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점을 이용하여, 에베르는 그녀를 프랑스의 여러 정치 문제에 대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그녀의 추정된 성적 취향을 군주제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하면서도, 만약 그녀가 태도를 바꾸고 귀족적 사치를 포기한다면 군주제가 구원받고 국민의 호의를 되찾을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왕이 변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종종 그녀를 "마담 베토(Madame Veto)"라고 부르거나 루이 16세를 "술 취하고 게으른 뿔난 돼지"라고 지칭하며 국민의 적으로 묘사했다.[15] 처음에는 에베르가 독자들에게 여왕에 대해 교육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 대중이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리려고 노력했다. 1791년 1월부터 1794년 3월까지 그의 신문 기사 중 14%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루었으며,[16] 페르 뒤센과 여왕의 가상 대화를 통해 그녀의 추정된 색정증을 묘사하거나 회개를 촉구하는 형식을 취했다.[17] 국왕 일가의 실패한 바렌 도주(1791년 6월) 이후 에베르의 논조는 훨씬 더 거칠어졌고, 루이 16세와 교황 비오 6세를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다.
1791년 7월 17일, 에베르는 샹 드 마르스에서 루이 16세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했고, 이후 샹 드 마르스 학살에서 라파예트 후작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시위대가 진압당하는 사건을 겪었다. 이는 그를 더욱 혁명적인 방향으로 이끌었고, 《르 페르 뒤센》은 다른 혁명가들의 고상한 진지함이나 이성적 호소와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며 파리 상퀼로트에게 더 잘 어필할 수 있는 대중주의적 스타일을 채택했다. 그는 경제 통제와 전쟁 승리를 위한 급진적 애국주의 해결책을 지지하며, 교양 있는 엘리트들과의 분리와 격렬한 반대를 표명했다.[18] 《르 페르 뒤센》은 국민 방위군 사령관 라파예트, 저명한 정치가였던 고 미라보 백작, 파리 시장 장 실뱅 바일과 같은 주요 정치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793년 대중 연설에서 에베르는 라파예트를 비판하며, 자신은 "배신자를 추격해 온 정직하고 충실한 페르 뒤센"이며 "라파예트를 하늘 높이 칭찬"하는 다른 페르 뒤센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19]
코르들리에 클럽의 일원이었던 에베르는 혁명적인 파리 코뮌에서 활동했으며, 1792년 8월 10일 봉기 동안 파리의 본 누벨 구역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다음 달 9월 학살을 지지했으며, 비록 당원은 아니었지만 급진적인 몽테뉴파의 이상에 대부분 동의했다. 1792년 12월 22일, 그는 코뮌 검사의 두 번째 대리로 임명되었고, 1793년 8월까지 지롱드파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1793년 4월부터 5월까지 그는 장 폴 마라 등과 함께 지롱드파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1793년 5월 20일, 국민공회의 온건파 다수는 음모자들을 조사하고 기소하기 위해 지롱드파 주도의 12인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5월 24일 에베르는 체포되었으나, 상퀼로트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국민공회는 3일 후 그의 석방을 명령해야 했다. 그의 반(反)지롱드파 선동은 5월 31일~6월 2일 봉기에서 지롱드파가 축출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93년 8월 28일, 그는 자코뱅 클럽에 앙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이를 국민공회에 전달할 것을 건의했다. 이 제안은 자크 니콜라 빌로 바렌 등에게 큰 찬사를 받았지만,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이것이 "귀족들을 기쁨으로 채울"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시기 에베르는 마리 고필(Marie Goupil, 1756년생)을 만났다. 그녀는 생토노레 거리의 프로비던스 수녀원에서 수녀 생활을 그만둔 37세의 전직 수녀였다. 그들은 1792년 2월 7일에 결혼했고, 딸 비르지니-시피옹 에베르(Virginie-Scipion Hébert, 1793년 2월 7일 – 1830년 7월 13일)를 낳았다.[20] 이 기간 동안 에베르는 사치스러운 부르주아 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파리 시장이자 전쟁 장관인 장 니콜라 파슈를 비롯한 여러 유력 인사들을 접대했으며, 아름다운 태피스트리 등으로 집을 꾸미고 우아하게 옷을 입는 것을 즐겼다. 이는 파리 코뮌 의장 피에르 가스파르 쇼메트의 검소한 태도와 대조되었다. 그가 이러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적 자원을 어디에서 얻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파슈가 《르 페르 뒤센》의 대량 인쇄를 위탁한 것과 안드레스 마리아 데 구즈만의 정부이자 아내였던 들로네 당제르와의 관계 등이 거론된다. 1793년 2월, 그는 동료 부르주아 에베르파와 함께 곡물에 대한 가격 상한제(최고가격법)에 반대 투표했는데, 이는 사재기를 유발하고 불만을 야기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3. 3. 영향력
1789년 10월 21일 계엄령 선포는 많은 작가와 언론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혁명적 사고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글쓰기 방식, 특히 《페르 뒤센》(Père Duchesne)이라는 인물을 활용한 글쓰기를 촉발했다.[3]1790년부터 1794년 사망할 때까지 에베르는 매우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저널 《르 페르 뒤센》(Le Père Duchesne)을 통해 파리 노동 계급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이 저널에서 애국적인 상퀼로트인 '페르 뒤센'의 목소리를 빌려, 프랑스 군주나 정부 관료들과의 가상 대화를 담은 1인칭 서술을 사용했다.[4] 에베르는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이미 파리 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신화적 인물 '페르 뒤센'을 통해 익명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5] 페르 뒤센은 강하고 솔직하며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는 큰 분노를 느끼면서도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고,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으며, 재치 있고 사색적인 면모도 보였다. 특히 비속어와 거친 단어를 끊임없이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했다.[5] 그의 이야기는 파리의 가난한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으며,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조장하기도 했다. 거리 행상들은 Il est bougrement en colère aujourd’hui le père Duchesne!|페르 뒤센 신부는 오늘 매우 화가 났어!프랑스어라고 외치며 신문을 팔았다. 에베르는 페르 뒤센이라는 기존 인물을 활용하여, 그 상징적 이미지를 코믹한 난로 상인에서 상퀼로트의 애국적 역할 모델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6] 혁명적 상징으로서 페르 뒤센은 종종 파이프를 물고 프리게 모자를 쓴 뻣뻣한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인 에베르주의자들은 프랑스가 귀족을 제거해야만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더 많은 귀족을 조사하고 처형해야 한다는 견해를 자주 표명했다.[7] 《르 페르 뒤센》 65호(1790년)에서 그는 귀족을 "국가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헌법의 적"으로 규정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8] 에베르의 명성은 그가 맡았던 직위나 클럽 활동보다는, 그의 신문에서 루이 16세를 비롯한 왕족과 귀족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서 비롯되었다.[9]
페르 뒤센은 독자들의 언어와 복장을 모두 반영했기 때문에, 그의 독자들은 그의 메시지를 경청하고 행동했다. 프랑스 언어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페르디낭 브뤼노는 에베르가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일상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점을 들어 그를 "저속함의 호메로스"라고 불렀다.[10] 또한, 페르 뒤센의 노동자 의상과 귀족의 우아한 복장의 날카로운 대조는 혁명의 긴장에 작용했다.[11] 에베르는 프랑스 혁명 동안 페르 뒤센의 이미지를 사용한 유일한 작가가 아니었고, 또한 노동 계급에 어필하기 위해 비속어를 채택한 유일한 작가도 아니었다. 당시 또 다른 작가인 르메르는 1790년 9월부터 1792년 5월까지 《페르 뒤쉔》이라는 제목의 신문을 쓰기도 했는데(그는 에베르와 철자를 다르게 썼다), 여기에서 그는 국왕과 국가의 관계를 보존하려는 "온건한 애국자"의 목소리를 빌렸다. 르메르의 인물 역시 많은 욕설을 사용했고 프랑스 군대에 연설했다. 그러나 《르 페르 뒤센》이 훨씬 더 인기를 얻었는데, 그 이유는 장 폴 마라의 신문인 《민중의 벗》보다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이는 상퀼로트가 접근하기 더 쉽게 만들었다.[12] 인기는 부분적으로 파리 코뮌과 전쟁 장관 장 니콜라 파슈, 그리고 나중에는 장 밥티스트 노엘 부쇼트가 《르 페르 뒤센》 수천 부를 구매하여 대중과 군대에 무료로 배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792년부터 파리 코뮌과 전쟁 장관들이 신문을 구매하여 배포했으며, 1793년 5월과 6월에는 전쟁 장관이 "애국심을 계몽하고 고취"하기 위해 신문을 구매했다. 에베르는 이 구매로 약 205,000 리브르를 받은 것으로 추산된다.[10] 1793년 7월 13일 장 폴 마라의 암살은 《르 페르 뒤센》이 파리에서 부동의 베스트셀러 신문이 되도록 이끌었다.[13]
1790년에서 1793년 사이 에베르의 정치 평론은 군주의 사치스러운 과잉에 초점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1790년부터 1792년까지 《르 페르 뒤센》은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고, 심지어 루이 16세 국왕과 라파예트 후작의 의견에도 호의적이었다. 이 시기의 그의 격렬한 공격은 교황 권위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성직자 민사 헌법의 주요 반대자인 장 시프랭 모리를 겨냥했다. 페르 뒤센의 인물은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지만, 그는 항상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우 비판했다.[14]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후 여왕이 조롱의 쉬운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프랑스의 많은 정치적 문제에 대한 희생양으로서 신문에서 일관된 표적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과잉과 그녀의 추정된 성적 취향을 군주제의 문제의 핵심으로 파악함으로써, 에베르의 기사는 만약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방식을 바꾸고 귀족의 과잉을 포기한다면 군주제가 구원될 수 있고 여왕이 국민의 호의로 돌아갈 수 있다고 제안했다. 군주제가 회복될 수 있다는 그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에베르는 여왕이 순종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종종 그녀를 "마담 베토"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루이 16세 국왕을 "술 취하고 게으른 중이 돼지"라고 지칭함으로써 그녀를 국민의 사악한 적으로 묘사했다.[15] 처음에는 에베르가 독자들에게 여왕에 대해 교육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 대중이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리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에베르의 정치적 수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부여했고, 혁명이 전개되면서 그녀는 1791년 1월부터 1794년 3월까지 그의 신문 기사의 14%에 등장한다.[16] 페르 뒤센이 신문에서 그녀와 나누는 많은 가상 대화는 그녀의 추정된 색정증을 보여주거나, 그녀에게 회개하고 그녀의 사악한 방식을 포기하도록 간청하려는 시도이다.[17] 국왕의 실패한 바렌 도주로 인해 에베르의 어조는 상당히 거칠어졌다.
자크 르네 에베르의 출판물인 《르 페르 뒤센》이 1790년부터 1794년 사이의 정치적 사건의 결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장폴 베르토, 제러미 D. 팝킨, 윌리엄 J. 머레이와 같은 프랑스 혁명 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 언론의 역사를 연구하여, 혁명 기간 동안 읽었던 신문과 잡지가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정기간행물이 반드시 그러한 정치적 성향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예를 들어, 개인의 계층은 정치적 결정을 지시하고 영향을 미치는 데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에베르의 글은 그의 독자들에게 종종 극적인 정도로 영향을 미쳤지만, 《르 페르 뒤센》은 복잡한 정치적 혼합의 한 요소일 뿐이었으며, 그의 글이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켰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 기간 동안 그의 광범위한 독자층과 목소리는 그가 중요한 공인이었음을 의미하며, 《르 페르 뒤센》의 프랑스 일반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은 실제로 주목할 만했다.
4. 탈기독교화 운동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구체제의 유산인 가톨릭교를 부정하고 세속 사회를 건설하려는 탈기독교화 운동이 전개되었다.[21] 에베르는 이 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지지자 중 한 명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 것과 달리, 에베르파와 함께 종교에 대한 즉각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22]
에베르는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종교가 이성과 진보의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예수를 반신이 아닌 훌륭한 ''상퀼로트''라고 칭하며 기존의 종교적 권위를 부정했다.[23]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에베르는 탈기독교화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성직자 추방, 교회 폐쇄, 종교 기념물 파괴 등 과격한 조치들을 지지했다.[24] 1793년 10월 21일에는 모든 의심스러운 사제와 그들을 숨겨준 사람들을 즉시 사형에 처하는 법안 통과에도 영향을 미쳤다.[24]
특히 1793년 11월 10일, 에베르파가 주도하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이성의 축제는 탈기독교화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축제를 통해 대성당은 '이성의 사원'으로 선포되었으며, 이는 이성 숭배를 확산시키려는 에베르의 의도를 보여준다.[22]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탈기독교화 운동과 이성 숭배는 로베스피에르의 비판에 직면했고, 이후 로베스피에르 주도로 최고 존재 숭배가 선포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4. 1. 배경
프랑스 혁명 시기 탈기독교화 운동은 세속 사회를 이루기 위해 구체제의 미신과 가톨릭교를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전역에 이미 세속화 경향이 나타났지만, 특히 공포 정치 기간인 1793년 9월부터 1794년 8월 사이에 프랑스 정치인들은 급진적인 탈기독교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21]로베스피에르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며 공격적인 탈기독교화가 지방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자크 르네 에베르와 그를 따르는 에베르파는 종교를 자발적이고 폭력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22] 에베르는 작가이자 철학자인 볼테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볼테르처럼 다양한 종교적 믿음에 대한 관용이 미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하며, 전통 종교가 이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에베르는 나아가 예수를 반신이 아닌 훌륭한 ''상퀼로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볼테르는 또한 에베르에게 전통 종교를 대체할 시민 종교의 기본 원리를 제공했고, 이는 에베르가 탈기독교화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3]
탈기독교화 프로그램은 가톨릭교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를 대상으로 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24]
1793년 10월 21일에는 의심스러운 사제와 그들을 숨겨준 사람을 즉시 사형에 처하는 법이 통과되기도 했다.[24]
1793년 11월 10일, 에베르파는 이성의 여신을 기리는 시민 축제인 제1회 이성의 축제(''Fête de la Raison'')를 팔레 루아얄의 서커스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 개최하며 대성당을 "이성의 사원"으로 개칭했다. 이는 많은 역사가들이 탈기독교화 운동의 절정으로 여기는 사건이다.[22] 그러나 1794년 6월 7일, 이전에 이성 숭배를 비판했던 로베스피에르는 새로운 국교를 주장하며 국민 공회에 유일신 존재 인정을 권고했고, 다음 날 유신론적 최고 존재 숭배가 혁명의 공식 종교로 선포되었다. 에베르의 축제와 달리, 이 엄격한 새 종교는 파리 대중에게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4. 2. 전개
탈기독교화는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일어난 운동으로, 지지자들은 세속 사회를 이루기 위해 구체제의 미신과 가톨릭교를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세속화 경향은 18세기 프랑스 전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특히 공포 정치 기간인 1793년 9월부터 1794년 8월 사이에 프랑스 정치인들은 "급진적 탈기독교화" 개념을 받아들이고 논의하기 시작했다.[21] 로베스피에르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며 탈기독교화의 공격적인 추진이 지방에서의 반란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 반면,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들인 에베르파는 종교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22]에베르는 작가이자 철학자인 볼테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볼테르처럼 에베르는 다양한 종교적 믿음에 대한 관용이 인류가 미신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이며, 전통적인 종교는 이러한 목표 달성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에베르는 예수가 반신(半神)이 아니라 훌륭한 ''상퀼로트''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볼테르는 또한 에베르에게 전통 종교를 대체할 시민 종교의 기본 원리를 제공했고, 이는 에베르가 탈기독교화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3]
가톨릭교, 나아가 모든 형태의 기독교를 대상으로 한 탈기독교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
- 성직자 추방 및 다수의 사형 선고
- 교회 폐쇄
- 혁명적이고 시민적인 컬트 제정
- 종교 기념물의 대규모 파괴
- 공적 및 사적 예배와 종교 교육 금지
- 성직자의 강제 결혼
- 성직자의 사제직 강제 포기[24]
1793년 10월 21일에는 의심스러운 모든 사제와 그들을 숨겨준 사람들을 즉시 사형에 처하는 법이 통과되었다.[24]
1793년 11월 10일, 탈기독교화 운동은 정점에 달했다. 에베르파는 이성의 여신을 기리는 시민 축제인 제1회 이성의 축제(''Fête de la Raison'')를 팔레 루아얄의 서커스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 개최했으며, 대성당을 "이성의 사원"으로 개칭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탈기독교화 운동의 절정으로 평가한다.[22]
그러나 1794년 6월 7일, 이전에 이성 숭배를 비판했던 로베스피에르는 새로운 국교를 제안하며 국민 공회에 유일한 신의 존재를 인정할 것을 권고했다. 다음 날인 6월 8일, 유신론적 최고 존재 숭배가 혁명의 공식 종교 의례로 출범했다. 에베르의 축제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과 달리, 이 엄격한 새로운 덕의 종교는 파리 대중으로부터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다.
4. 3. 이성의 축제
탈기독교화는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구체제의 가톨릭교를 거부하고 세속 사회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었다.[21] 로베스피에르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며 급진적인 탈기독교화가 지방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에베르와 그의 추종자인 에베르파는 종교를 보다 적극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22]에베르는 작가이자 철학자인 볼테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볼테르처럼 다양한 종교적 믿음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며, 전통 종교는 오히려 진보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에베르는 예수를 신적인 존재가 아닌 훌륭한 ''상퀼로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볼테르의 사상은 에베르에게 전통 종교를 대체할 시민 종교의 개념을 제공했으며, 이는 에베르가 탈기독교화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3]
탈기독교화 운동은 성직자를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하고, 교회를 폐쇄하며, 혁명적이고 시민적인 컬트를 만들고, 종교 기념물을 파괴하는 등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공적, 사적 예배와 종교 교육이 금지되었고, 성직자들은 강제로 결혼하거나 사제직을 포기해야 했다.[24] 1793년 10월 21일에는 모든 의심스러운 사제와 그들을 숨겨준 사람들을 즉시 사형에 처하는 법이 통과되기도 했다.[24]
1793년 11월 10일, 에베르파는 탈기독교화 운동의 절정으로 평가받는 제1회 '이성의 축제'(''Fête de la Raison'')를 개최했다. 이 축제는 이성의 여신을 기리는 시민 축제로, 처음에는 팔레 루아얄의 서커스에서 열렸으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져 대성당을 '이성의 사원'으로 개조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이어졌다.[22]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움직임은 이성 숭배를 비판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반발을 샀다. 1794년 6월 7일, 로베스피에르는 새로운 국가 종교로서 최고 존재 숭배를 제안하며 국민 공회가 유일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권고했다. 다음 날 최고 존재 숭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에베르의 축제와 달리 이 엄격한 새 종교는 파리 대중에게 외면받았다.
5. 유산과 평가
자크 르네 에베르의 출판물인 《르 페르 뒤센》이 1790년부터 1794년 사이의 정치적 사건 결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프랑스 혁명 역사가들인 장폴 베르토, 제러미 D. 팝킨, 윌리엄 J. 머레이 등은 프랑스 혁명 시기 언론의 역사를 연구했다. 이들은 혁명 기간 동안 읽었던 신문과 잡지가 독자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반드시 정기간행물이 그러한 정치적 성향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사회 계층 같은 요소가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에베르의 글이 그의 독자들에게 때로는 극적인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된 독자층이었던 상퀼로트의 움직임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 여러 요소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는 그의 글이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결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 기간 동안 에베르가 확보했던 광범위한 독자층과 그의 목소리는 그를 중요한 공적 인물로 만들었으며, 《르 페르 뒤센》이 프랑스 일반 대중에게 미친 영향력은 주목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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