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 (중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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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순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중산상의 직을 역임했다. 185년 한수와 변장의 난에 종군할 기회를 얻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187년 장거, 구력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미천장군과 안정왕을 칭하며 유주를 공격했으나, 공손찬에게 패하여 선비족에게 의탁했다. 이후 유우가 유주목으로 부임하여 회유책을 펼치자 세력을 잃고 189년 왕정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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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 (중산상)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장순 |
한자 | 張純 |
로마자 표기 | Jang Sun |
시대 | 후한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중평 6년 (189년) |
출신지 | 유주어양군 |
주요 활동 | 반란 |
관직 | |
초기 관직 | 중산태수 |
자칭 관직 | 미천장군 안정왕 |
기타 | |
주군 | 영제 → 독립 세력 |
2. 생애
중평 2년(185년), 양주에서 한수와 변장이 강족과 함께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사공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토벌군을 편성했다. 옛 중산상 장순은 손견·도겸과 함께 종군하기를 원했으나, 장온은 장순에게 공손찬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다.[2]
중평 4년(187년), 장순은 이에 불만을 품고 옛 태산태수 장거·오환의 수령 구력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유주의 주도인 계를 함락시켰다. 장순은 스스로 미천장군(彌天將軍)·안정왕이라 칭하고, 우북평·요서를 공격하여 여러 군의 태수들을 죽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양주의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던 공손찬에게 장순의 반란 진압을 명했고, 공손찬은 병사를 이끌어 요동 인근의 석문산(石門山)에서 장순을 토벌하였다. 장순은 선비로 달아났으며, 오환의 탐지왕은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구력거가 유주·기주·청주·서주를 약탈하였고, 장순은 군사를 모아 요서군의 관자성(管子城)에서 공손찬을 포위하였다.
중평 5년(188년), 조정에서는 유우를 유주목에 임명하였다. 유우는 장순의 수급에 현상금을 거는 동시에 오환·선비·흉노에게 회유책을 펼쳤다. 이 결과 구력거 등은 유우에게 귀순해 왔으며, 약탈을 중지하고 모두 국경 밖으로 떠났다. 결국 장순은 세력을 잃게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 빈객 왕정(王政)의 손에 죽어 수급이 유우에게 보내졌다.[1]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중평 2년(185년), 양주에서 한수·변장이 강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사공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토벌군을 편성했는데, 옛 중산상 장순은 손견·도겸과 함께 종군하기를 원했으나 장온은 장순에게 공손찬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다.[2] 중평 4년(187년), 장순은 이에 불만을 품고 옛 태산태수 장거·오환의 수령 구력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2. 2. 장순의 난
중평 2년(185년), 양주에서 한수·변장이 강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사공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토벌군을 편성했는데, 중산상이었던 장순은 손견, 도겸과 함께 종군하기를 원했으나 장온은 장순 대신 공손찬을 종군시켰다.[2] 이에 불만을 품은 장순은 중평 4년(187년) 태산태수였던 장거, 오환의 수령 구력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유주의 주도인 계를 함락시켰다. 장순은 스스로 미천장군(彌天將軍)·안정왕이라 칭하고, 우북평·요서를 공격하여 여러 군의 태수들을 죽였다.그러자 조정에서는 양주의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던 공손찬에게 장순의 반란 진압을 명했고, 공손찬은 병사를 이끌어 요동 인근의 석문산(石門山)에서 장순을 토벌하였다. 장순은 선비로 달아났으며, 오환의 탐지왕은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구력거가 유주·기주·청주·서주를 약탈하였고, 장순은 군사를 모아 요서군 관자성(管子城)에서 공손찬을 포위하였다.
중평 5년(188년), 조정에서는 유우를 유주목에 임명하였다. 유우는 장순의 수급에 현상금을 거는 동시에 오환·선비·흉노에게 회유책을 펼쳤다. 이 결과 구력거 등은 유우에게 귀순해 왔으며, 약탈을 중지하고 모두 국경 밖으로 떠났다. 결국 장순은 세력을 잃게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 빈객 왕정(王政)의 손에 죽어 수급이 유우에게 보내졌다.
2. 3. 유우의 유화책과 장순의 최후
188년, 유우가 유주목으로 부임하여 장순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오환, 선비, 흉노 등에게 회유책을 펼쳤다. 구력거 등은 유우에게 귀순하고 약탈을 중지했다.[1] 189년 3월, 장순은 빈객(賓客) 왕정(王政)에게 살해당하고, 그 수급은 유우에게 보내졌다.[1]3. 평가
장순의 난은 후한 말기 혼란을 가중시킨 사건 중 하나이다. 187년 장순이 동향인 장거와 함께 오환의 구력거와 연계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우북평 태수 유정, 요서 태수 양종 등을 살해하고 여러 군을 점령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1] 188년 유우가 유주 목으로 부임하여 유화책을 실시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유우는 장순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오환, 선비, 흉노 등 북방 민족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구력거는 유우에게 귀순하였고, 고립된 장순은 189년 3월에 식객 왕정에게 살해당하고 그 수급이 유우에게 전달되면서 난이 진압되었다.
4.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裴松之が引く『九州春秋』より
[2]
문서
탁군의 속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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