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장정옥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정옥은 청나라 시대의 문신으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쳐 벼슬하며 고위직을 역임했다. 1700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한림원에서 시작하여, 군기처 대신을 지냈으며, 《명사》 편찬에 참여했다. 옹정제의 신임을 받아 전당포와 은, 《고금도서집성》을 하사받았으며, 건륭제 시대에도 중용되었으나 말년에 관계가 악화되었다. 1755년 사망 후, 옹정제의 명에 따라 태묘에 신주가 안치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 이러한 영예를 받은 유일한 한족 관료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나라의 태보 - 쉬스창
    쉬스창은 청나라 말 문관으로 시작하여 중화민국 국무총리와 대총통을 역임했으며, 군벌 간의 세력 다툼 속에서 조정 역할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예술 활동에 전념했다.
장정옥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근선(勤宣) 3등 백작
이름장정옥(張廷玉)
출생일1672년 10월 29일
출생지베이징, 중국
사망일1755년 5월 19일
사망지안후이성 퉁청시
직업정치인, 학자, 역사가
아버지장영(張英)
형제자매장정로(張廷璐) (형제)
자녀장약애(張若靄), 장약징(張若澄), 장약정(張若廷)
관직
영반군기대신재임 시작: 1731년
재임 종료: 1732년
이전: 마르사이
이후: 오르타이
군기대신재임 시작: 1729년
재임 종료: 1749년
이전:
이후:
보화전대학사재임 시작: 1728년
재임 종료: 1749년
이전:
이후:
문화전대학사재임 시작: 1727년
재임 종료: 1728년
이전:
이후:
문연각대학사재임 시작: 1726년
재임 종료: 1727년
이전:
이후:
협판대학사재임 시작: 1725년
재임 종료: 1726년
이전:
이후:
호부상서재임 시작: 1723년
재임 종료: 1726년
동시 재임: 쉬위안멍
이전: 톈충뎬
이후: 장팅시
예부상서재임 시작: 1723년
재임 종료: 1723년
동시 재임: 수쿠
이전: 천위안룽
이후: 장보싱

2. 생애

장정옥은 안후이성 퉁청에서 태어났다. 1700년(강희 39년) 과거에서 진사가 된 후 한림원에 들어갔다. 이후 서길사, 검토, 시강학사, 내각학사, 형부 시랑 등을 역임했다. 강희제의 인정을 받아 대학사, 이부, 형부, 한림원 수서관 총재직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조정 대사에도 참여하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를 섬겼다.

뛰어난 문장 실력을 갖춘 장정옥은 1739년(건륭 4년) 《명사》를 편찬했다. 강희제의 유언을 발표한 인물이 장정옥인지, 롱코도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다. 그는 강희제에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관료였으며, 세 황제 모두에게 신임을 받았다.

2. 1. 옹정제 시대

옹정제군기처 대신으로 임명되었던 장정옥의 문장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어지(御旨) 담당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1725년(옹정 3년)에는 소장 가치 금액이 4만위안 정도로 평가되는 전당포를 하사받았고, 1730년(옹정 8년)에는 2만위안과 《고금도서집성》을 하사받았다. 이처럼 장정옥은 옹정제의 신임을 받아 황제의 사적인 자문 기구인 군기처의 첫 번째 구성원이 되었다.

2. 2. 건륭제 시대

옹정제가 사망하고 건륭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장정옥은 계속해서 황제를 보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건륭제는 장정옥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만주족 출신 대신 악이태와의 갈등도 이러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켰다.

1749년, 장정옥은 두 번째로 퇴직을 요청하며, 옹정제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신주를 태묘에 안치해 줄 것을 건륭제에게 요청했다. 건륭제는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장정옥이 직접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고 아들을 보낸 것에 크게 분노했다. 이 일로 인해 장정옥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제자 왕유돈까지 관직에서 해임되는 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750년, 장정옥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지만, 황제의 맏아들 영황의 죽음으로 인해 황제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건륭제는 장정옥에게 태묘에 안치된 관리들의 목록을 보내며 스스로 자격을 되돌아보라고 명했고, 장정옥은 결국 모든 영예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같은 해, 사돈인 주권의 사건에 연루되면서 장정옥은 황제로부터 받은 모든 포상을 몰수당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장정옥은 1755년 병으로 사망한 후 옹정제의 유언과 건륭제의 결정에 따라 태묘에 안치될 수 있었다. 그는 청나라 시대에 이러한 영예를 받은 유일한 한족 관료였다.

2. 3. 죽음

1749년(건륭 14년) 장정옥은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건륭제는 선친 옹정제의 명에 따라 장정옥을 태묘에 모시고, '문화(文和)'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청나라 시대에 태묘에 배향된 유일한 한족 관료였다.

말년에 장정옥은 만주족 출신 대신 악이태와 갈등을 겪었고, 건륭제 또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1749년, 장정옥은 두 번째로 퇴직을 요청하며 옹정제의 유언대로 자신의 신주를 태묘에 안치해 줄 것을 건륭제에게 요청했다. 건륭제는 불쾌했으나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장정옥이 직접 감사 인사를 하지 않고 아들을 보낸 것, 자신을 꾸짖는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황제를 알현한 것 등으로 인해 건륭제의 분노를 사 작위를 박탈당했다.

1750년, 장정옥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으나, 황제의 맏아들 영황의 죽음으로 건륭제는 또다시 분노했다. 건륭제는 장정옥에게 태묘에 배향된 관리들의 목록을 보내며 자격을 반성하라 명했고, 장정옥은 태묘 배향을 철회하고 처벌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철회는 허락했으나 추가 처벌은 하지 않았다. 같은 해, 사돈인 주권의 사건에 연루되어 장정옥은 황제로부터 받은 모든 포상을 몰수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1755년 장정옥이 병으로 사망하자, 건륭제는 옹정제의 유언과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여 장정옥을 태묘에 배향했다.

3. 평가

장정옥은 강직한 성품과 원칙을 중시하는 훌륭한 관료로 평가받았다.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1739년 《명사》를 편찬하였다. 강희제의 유언을 발표한 사람이 장정옥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신임받는 관리 롱코도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다. 장정옥은 강희제에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격변기 속에서도 살아남아 세 황제 모두에게 신임을 받은 유일한 관료였다. 그의 만주족 경쟁자였던 오르타이는 옹정제와 건륭제를 섬겼다.

그러나 말년에는 만주족 출신 대신 악이태와 갈등을 빚었고, 건륭제 또한 그를 적대시했다. 1749년(건륭 14년) 고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다 84세로 타계하였다. 건륭제는 선친 옹정제의 명에 따라 태묘에 배향하고, '문화(文和)'라는 시호를 내렸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