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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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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특은 위나라의 장수로, 원래 아문장군이었으나 제갈탄에게 무능하다고 여겨졌다. 관구검이 진동장군이 된 후 합비 신성을 수비하게 되었고, 253년 제갈각이 이끄는 오나라 군의 공격을 받았다. 장특은 항복을 가장하여 시간을 벌고 성벽을 보수하여 오나라 군을 물리쳤으며, 이 공로로 잡호장군, 열후에 봉해지고 안풍 태수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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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특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특
원어 이름張特
로마자 표기Jang Teuk
관직
안풍태수안풍 태수 (安豐太守)
잡호장군잡호장군 (雜號將軍)
아문장아문장 (牙門將)
개인 정보
출생지탁주 (涿州)
자산 (子產)
활동 시기
활동 시기삼국 시대 중기 (3세기 중반)
소속
소속 국가조위

2. 생애

장특은 본래 아문장군이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장특이 무능하다고 여겨 호군으로 돌려버리려고 했는데, 마침 관구검이 제갈탄을 대신하여 진동장군이 되자 가평 4년(252년), 장특으로 하여금 합비신성을 수비하게 했다.[1]

가평 5년(253년) 5월, 제갈각이 성을 포위했을 때, 장특은 장군 악방 등 3천 군사와 함께했다. 병사자와 전사자가 반을 넘었고, 제갈각은 토산을 쌓고 급히 공격했다. 장특은 위나라 법에 100일간 공격당해도 구원받지 않으면 항복하여도 집안을 연좌시키지 않는데 90여 일이 지났으니 곧 항복할 것이라고 오나라에 말하고, 인수를 건네주어 증표로 삼았다. 오나라는 이 말을 듣고 인수는 받지 않고 공격하지 않았다.[2] 장특은 돌아와서, 밤 동안에 가옥을 철거하여 책(柵)의 재료로 삼고, 이지러진 곳을 2중으로 보수했다. 다음날, 오나라는 격노하여 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오군은 내부에 역병이 돌아 7월에 퇴각했다.

조정은 이를 아름답게 여겨 장특에게 잡호장군을 더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안풍태수로 옮겼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장특은 탁군 출신으로, 위나라 장수 제갈탄 휘하의 아문장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제갈탄이 동진장군으로 있을 때, 장특은 그를 섬겼다. 관구검이 제갈탄의 뒤를 이어 동진장군이 된 후, 장특에게 합비의 신성을 지키도록 했다.

253년, 동오의 섭정 제갈각이 군대를 이끌고 신성을 포위했다. 장특은 악방 등과 함께 3,000명의 군대로 성을 방어했다. 유정정상을 보내 증원을 요청했으나, 제갈각의 군대에 붙잡혔다. 장특은 거짓으로 항복 의사를 밝히고, 시간을 벌어 성벽을 수리하고 방어를 강화했다. 다음날, 장특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동오군에 맞섰다. 제갈각은 속은 것을 알고 분노하여 공격했지만, 이미 지친 동오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다.

위나라 황실은 장특의 공을 치하하여 잡호장군으로 임명하고, 이후 안풍군 태수로 재임명했다.

2. 2. 합비 신성 전투 (253년)

장특은 탁군 출신으로, 본래 아문장군이었다. 252년, 관구검제갈탄을 대신하여 진동장군이 되면서 장특에게 합비 신성을 수비하게 했다.[1]

253년 5월, 제갈각이 이끄는 오나라 군대가 합비 신성을 포위했다. 장특은 악방 등 3천 군사와 함께 성을 지켰다. 병사와 전사자가 반을 넘었고, 제갈각은 토산을 쌓고 급히 공격했다. 장특은 위나라 법에 100일간 공격당해도 구원받지 못하면 항복하여도 집안을 연좌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 90여 일이 지났으니 곧 항복할 것이라고 오나라에 말하고 인수를 건네주어 증표로 삼았다. 오나라는 이 말을 듣고 인수는 받지 않고 공격하지 않았다.[2]

장특은 돌아와 밤 동안 가옥을 철거하여 성벽을 보수했다. 다음날, 오나라는 격노하여 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오군은 내부에 역병이 돌아 7월에 퇴각했다.

조정은 이를 높이 평가하여 장특에게 잡호장군을 더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안풍 태수로 임명했다.

2. 3. 전투 이후

장특은 원래 아문장군이었으나, 상관인 제갈탄에게 무능하다고 여겨졌다. 252년, 동흥 전투에서 에게 패배한 제갈탄은 관구검과 임지를 교대하게 되었고[1], 장특은 관구검에 의해 합비 신성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253년, 오의 제갈각에게 합비 신성이 포위되어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장특은 오군에게 "지금, 저는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위의 법에 따르면, 성이 공격을 받아 백 일이 지나도록 구원이 없으면 항복해도 가족이 연좌되지 않습니다.[2] 우리가 공격을 받은 지 이미 90여 일이 지났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성 안의 사람들과 의논한 후 명부를 넘겨주겠다고 하며 자신의 인수를 증표로 제시하였다. 오군은 장특의 말을 믿고 공격을 중지했고, 인수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장특은 그 틈을 타 성벽을 보강했고, 다음 날에는 오군에게 "나에게는 오직 전투에서의 죽음뿐이다!"라고 말했다. 오군은 격노하여 공격을 재개했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공적으로 장특은 잡호장군으로 승진했고, 열후에 봉해졌으며, 안풍 태수로 옮겨졌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제108회에서 등장한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처럼 제갈각으로부터 합비신성을 지켜냈다.

4. 평가

4. 1. 현대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참조

[1] 서적 三国志 魏書
[2] 문서 "百日守れば罪を問わない」しきたりそのものは事実で、後年に呉の[[陶璜]]が[[西晋]]の[[楊稷]]を攻めた時、楊稷は百日経たずに降伏しようとしたが陶璜はこれを拒み、楊稷軍に不足した食料を与えてまで籠城を続けさせ、百日経ってからようやく降伏を受け入れている。"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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