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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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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후돈은 패국 교현 출신으로, 조조를 섬긴 인물이다. 13세에 스승을 모욕한 자를 죽이고, 조조가 동탁 토벌전에 참여할 때 사마로 임명되었다. 연주 방어전에서 여포와 싸우다 눈을 잃어 맹하후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하남윤을 거쳐 대장군에 이르렀다. 조조 사후 대장군으로 승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시호는 충후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맹장으로 묘사되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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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하후돈 초상화
청나라 시대에 그려진 삼국지연의의 삽화. 화살을 맞은 자신의 안구를 삼키는 모습.
이름하후돈
한자 표기夏侯惇
로마자 표기Xiàhóu Dūn
자(字)원양(元讓)
시호충후(忠侯)
별명맹하후(盲夏侯)
출생지예주패국 초현
사망일220년 6월 13일
사망 원인병사 (노환)
국적후한
친척하후련 (형제)
하후연 (사촌)
관직
최종 관직대장군
주요 경력사마
절충교위 겸 동군태수
진류, 제음태수 겸 건무장군
하남윤
겸 복파장군
전장군
대장군
봉작고안향후
군사 경력
주군조조조비
주요 참전동탁 토벌전
복양 전투
박망 전투
호관 전투
양평관 전투
유수구 전투
가족
자녀하후충
하후무
하후자장
하후자강
최소 세 명 이상의 아들
기타
묘호없음

2. 생애

하후돈은 패군(沛郡) 교현(譙縣, 오늘날 안후이성 보저우시) 출신으로, 전한 고조 유방을 섬겼던 하후영의 후손이다.[4] 13세 때 자신의 스승을 모욕한 사람을 죽여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졌다.

190년, 조조동탁 토벌전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 때, 하후돈은 사마로 임명되어 조조를 따라 종군했다.[6] 조조가 서융에게 패했을 때, 하후돈은 조조와 함께 양주로 가서 군사를 모집했으나, 새로운 병사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6] 이후 백마(白馬, 오늘날 허난성 화현)에 주둔하고 절충교위로 승진했으며, 192년 조조가 연주 자사가 되자 동군(東郡, 오늘날 허난성 푸양시산둥성 랴오청시)의 태수가 되었다.[7]

193년,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기 위해 서주로 원정을 떠났을 때, 하후돈은 복양현에 남아 근거지를 지켰다.[8] 그러나 조조가 서주에 가 있는 동안 장막과 진궁연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포를 끌어들였다. 하후돈은 권성현으로 향하던 중 여포 군대와 마주쳐 교전했고, 여포는 복양현을 점령하여 하후돈의 물자를 노획했다. 여포는 부하들을 보내 하후돈에게 항복하는 척하며 인질로 잡고 몸값을 요구했으나, 한호[11]가 군대를 안정시키고 인질범들을 공격하여 하후돈을 구출했다.[12] 하후돈은 권성에서 반란 음모를 꾸민 관리들을 처형하고 군대를 안정시켰으며,[9][13] 순욱에게 예주 자사 곽공과의 만남을 만류했으나 순욱은 곽공을 설득하여 철수시켰다.[13] 하후돈은 조조에게 충성하는 세력의 핵심 인물로서 연주 동부의 영토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조조는 반란 소식을 듣고 서주에서 돌아와 여포를 공격했고, 하후돈은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빗나간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았다.[15] 이후 '애꾸눈 하후'(盲夏侯중국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이를 싫어하여 거울을 땅에 던져 깨뜨렸다고 한다.[16] 195년, 조조는 여포를 연주에서 몰아냈다. 198년, 하후돈은 여포의 명령으로 고순의 공격을 받던 유비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고순에게 패배하고 유비를 쫓아냈다.[6]

이후 하후돈은 진류(陳留; 현재 중국 허난성 카이펑 주변) 군의 태수로 임명되었고,[18] 제음 (濟陰; 현재 산둥성 딩타오 현 근처) 군으로 옮겨 건무장군 직위를 얻고 고안향후로 봉해졌다. 그는 가뭄과 메뚜기 떼에 대처하기 위해 농업 프로그램을 주도하여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며, 이후 하남윤으로 재임명되었다.[20]

200년대 초반, 하후돈은 원소와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하남을 지키며 조조의 서쪽 측면을 안전하게 유지했다.[21][22] 202년, 유비형주 자사 유표의 보호를 받으며 조조의 영토를 습격하자, 하후돈은 우금, 이전을 이끌고 보망 전투에서 유비에 맞섰으나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그러나 이전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23] 204년 업성 전투 이후, 하후돈은 복파장군으로 승진했지만, 하남윤 직위를 유지하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25] 207년, 조조는 하후돈의 공헌을 인정하여 그의 후작령에 1,800호의 과세 가구를 추가하여 총 2,500호가 되게 했다.[26]

215년 한중 전투에서 장로에 맞서 싸울 때, 조조 군대는 장위의 군대에 고전했다. 동소의 기록에 따르면, 조조는 하후돈과 허저를 파견하여 철수를 명령했으나,[29] 혼란 속에 일부 군인들이 길을 잃고 방어군을 기습하여 승리했다. 하후돈은 이 소식을 조조에게 보고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216년, 조조를 따라 손권에 맞서 거소로 갔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다. 217년, 조조는 철수하면서 하후돈을 26개 군(軍)을 지휘하는 지역 사령관으로 남겨두었다.[30] 하후돈은 많은 예능 댄서와 음악가를 보상으로 받았다.[31]

219년, 조조는 관우번성 전투 공격에 대응하여 모현으로 진군했을 때 하후돈을 특별히 대우하여 같은 마차를 타게 하고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전장군으로 임명했고,[32] 하후돈은 병사들을 수춘으로 돌려보낸 후 조릉에 주둔했다.[33] 219년 말, 하후돈은 진군, 환계 등과 함께 조조에게 헌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것을 촉구했다.[34]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제후왕 칭호를 계승하자, 하후돈은 대장군으로 승진했지만,[35] 두 달도 채 안 되어 사망했다.[36]

2. 1. 초기 생애와 조조와의 만남

패국 초현(譙縣, 현재의 안후이성 보저우시) 사람이다. 190년(초평 원년) 조조가 반동탁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분무장군(奮武將軍)을 칭하자 하후돈은 사마가 되었다.[5] 조조가 형양(滎陽)으로 진격했다가 서영에게 패배하여 병사가 부족해졌으므로, 하후돈은 양주(揚州)로 가서 모병하였다.[6]

14세 때, 자신의 스승을 모욕한 사람을 살해하여 거친 성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2. 2. 연주 방어와 여포와의 전투

194년(흥평 원년), 조조서주로 원정을 떠난 사이, 장막과 진궁여포를 끌어들여 연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가족이 있는 견성(鄄城)의 순욱은 다급히 하후돈을 불렀고, 하후돈은 적은 병사만으로 달려가 여포와 교전했다. 여포는 군을 물려 복양을 점거하고 군수 물자를 확보했다. 하후돈은 견성으로 들어와 장막과 내통하려던 자들을 처단했다.[56] 이 과정에서 몇몇이 항복하는 척하며 하후돈을 사로잡고 보물을 요구했다. 하후돈의 부하 한호는 동요하는 군을 진정시키고 인질범을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공격하여 하후돈을 구출했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와 여포를 칠 때, 하후돈은 유시(流矢)에 맞아 왼쪽 을 잃었다. 이 때문에 맹하후(盲夏侯)라는 별명이 생겼으나, 하후돈은 이를 싫어하여 거울을 볼 때마다 화를 내며 에 내던졌다.[57]

하후돈은 권성현으로 증원군을 이끌고 가던 중 여포의 군대와 마주쳐 교전했다. 여포는 하후돈이 없는 틈을 타 복양현을 점령하고 많은 물자와 장비를 노획했다. 이후 여포는 부하들을 보내 하후돈에게 항복하는 척하여 하후돈을 인질로 잡았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하후돈의 부대는 혼란에 빠졌으나,[10] 한호[11]가 군대를 안정시키고 인질범들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한호는 인질범들을 처형했고, 하후돈은 구출되었다.[12]

하후돈은 동쪽의 권성으로 가서 소규모 수비대를 증강하고, 반란에 가담할 음모를 꾸민 관리들과 수비대원들을 처형하여 군대를 안정시켰다.[9][13] 또한 순욱에게 예주 자사 곽공과의 만남을 만류했으나, 순욱은 곽공을 설득하여 철수시켰다.[13] 하후돈은 조조에게 충성하는 세력의 핵심 인물로서 연주 동부의 얼마 남지 않은 영토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순욱과 함께 현지인 정욱을 보내 범과 동아를 격려하여 저항하게 했다.[14]

조조는 반란 소식을 듣고 서주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연주로 돌아와 여포를 공격했다. 하후돈은 여포와의 전투에 참여했고, 소규모 전투 중 빗나간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았다.[15] 하후돈은 "애꾸눈 하후"(盲夏侯중국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이를 싫어하여 거울을 땅에 던져 깨뜨렸다.[16] 여포와 조조는 복양현 근처에서 100일 이상 싸웠고, 하후돈의 부장 전위가 조조의 눈에 띄었다.[17] 195년, 기근으로 인해 기세를 잃은 여포를 조조는 연주에서 몰아냈다.

198년, 여포 휘하의 고순장료가 패에 있던 유비를 공격하자, 하후돈은 유비를 구원하러 갔으나 패배했다(「여포전」).

2. 3. 조조의 중용과 하북 평정

198년(건안 3년) 9월(음력) 유비가 패성(沛城)에서 고순장료에게[58] 공격받자 구원하려 했지만 패하였다.[59]

조조가 하북으로 출진할 때 하남윤으로서 후방을 지켰다. 202년[60] 조조가 여양(黎陽, 지금의 허난성 쉰 현)에서 원담·원상 형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할 동안, 유표에게 의탁하던 유비가 섭현(葉縣)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후돈은 유비를 막으러 갔으나, 유비가 자기 진지를 태우고 박망(博望)으로[61] 퇴각하였다. 이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금과 함께 쫓았다가 복병에 당하였으나, 진영에 남아있던 이전이 구하러 달려온 덕분에 유비가 후퇴하였다.[62] 204년 이 함락되자 복파장군(伏波―)을 겸하고 편의종사가 허락됐다. 205년 조조가 광평(獷平) 방면에서 오환을 상대하는 틈을 타 병주 자사 고간이 호관(壺關)을 틀어막고 사례로 남하하는 것을 사례교위 종요[63] 함께 막았다.[64] 207년 그동안의 공로를 감안하여 식읍 1,800호를 더해 모두 2,500호가 되었다. 백랑산 전투에서 가장 공이 컸던 전주가 끝까지 봉작을 강하게 거부하기에 평소의 친분을 바탕으로 설득해보았지만 하후돈도 어쩔 수 없었다.[65]

2. 4. 한중 공방전과 만년

215년 조조가 장로정벌할 때, 장로의 동생 장위가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평관(陽平關)에서 항전하였다. 조조가 산 위의 여러 진지를 공격했지만 공략하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어났고, 군량마저 떨어져 퇴각을 결심하고 하후돈과 허저에게 산 위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고조(高祚)가 지휘하던 최전선의 부대가 밤에 장위군의 진영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때마침 사슴 수천 마리가 돌입하고 잘못 들어간 고조도 피리를 울리니 장위가 크게 놀라 도망쳤다. 하후돈과 허저는 같이 후군에 있던 신비유엽이 이 사실을 말한 후에야 알아차렸다.[66]

216년 유수구 전투에 종군한 후, 다음 해 조인, 장료, 장패[67] 등 26군을 거느리고 거소(居巢, 지금의 안후이성 차오후시)에서 손권을 방비하였다. 조조는 "위강(魏絳)은 과 화평한 공으로도 과 경(磬)을 받았는데 하물며 장군은 어떠하랴!"라고 말하며 기악명창(伎樂名倡)을 주었다. 이후 전장군에 올라 소릉(召陵)에 주둔하였다. 220년(연강 원년) 조조가 죽고 조비에 올라 하후돈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4월에 사망하였고,[68] 시호는 충후(忠侯)라 하였다.

하후돈은 215년 한중에서 장로에 맞서 싸웠으며, 당시 조조 군대는 장위(張衛)의 군대에 고전했다. 동소의 기록에 따르면, 조조는 하후돈과 허저를 파견하여 언덕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29] 혼란 속에 철수하는 군인 중 일부가 밤에 길을 잃고 방어군을 기습하여 그들이 위치에서 도망쳤다. 이 소식이 하후돈에게 보고되었고, 일부는 믿지 않았지만, 하후돈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말을 타고 앞으로 가서 조조에게 보고하여 이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장위의 입장이 붕괴되었고 장로는 곧 항복했다.

216년, 조조를 따라 남부의 경쟁자 손권에 맞서 거소(居巢, 현재의 차오후시, 안후이성)로 갔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다. 217년, 조조는 철수했지만 하후돈을 26개의 군(軍)을 지휘하는 지역 사령관으로 남겨두었다. 손권이 조조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을 포함하여 협상할 때까지.[30] 거소를 포함한 그의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많은 예능 댄서와 음악가를 받았다. 보상과 함께 내려진 황제의 명령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위강서융족을 평정했을 때, 그는 금과 재물만 보상받았다. 장군, 당신은 그보다 더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31]

219년, 조조가 관우번성 전투 공격에 대응하여 모북(摩陂, 현재의 가현 동남쪽, 허난성)으로 진군했을 때, 그는 다른 장군들이 받지 못한 특별한 예우로 하후돈을 대했는데, 하후돈을 같은 마차를 타게 하고 조조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 헌제는 조조를 "위왕"(魏王)이라는 칭호로 제후왕으로 만들었고, 명목상으로는 한나라 황제의 통제를 받는 독립적인 제후 왕국을 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조조의 많은 부하들이 그의 제후 왕국에서 관직을 받았지만, 하후돈은 여전히 한나라 중앙 정부에서 임명을 받았다. 하후돈은 자신의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조조의 제후 왕국에서 봉사할 것을 요청했지만, 조조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최고의 통치자는 신하에게서 배우고, 그다음 통치자는 신하와 친구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 관리들은 덕이 있는 고귀한 사람들이다. 왜 위와 같은 작은 왕국에서 봉사하는 것을 낮추는가?" 하후돈은 굳이 봉사하겠다고 주장했고, 조조는 그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했다.[32] 하후돈은 이후 병사들을 수춘(壽春)으로 돌려보낸 후 조릉(召陵)에 주둔했다.[33]

219년 말경, 하후돈은 진군, 환계 등과 함께 조조에게 헌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것을 촉구했다. 하후돈은 "천하 사람들은 한나라의 수명이 다했고, 이를 대체하려는 경쟁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백성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자가 백성의 마음을 얻고 그들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폐하는 30년 이상 전투를 벌여 뛰어난 업적을 이루셨으며 백성의 마음이 폐하께 있습니다. 천명과 백성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라고 말했다. 조조는 "'이러한 자질은 정치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또한 정치의 행사이다.' 만약 천명이 나에게 속한다면, 나는 주나라 문왕과 같을 것이다." [34]

조조는 220년 3월에 사망하고 그의 제후왕 칭호를 그의 아들 조비에게 넘겨주었으며, 조비는 여전히 헌제의 명목상의 신하였다. 하후돈은 4월 23일에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했다.[35] 그는 두 달도 채 안 된 6월 13일에 사망했고,[36] 조비는 예(鄴)의 동문에서 조문 행사를 주재했다.[37]

''조만전(曹瞞傳)''과 ''세어(世語)''에는 하후돈이 조조에게 먼저 유비를 제거하여 손권이 스스로 항복하도록 강요한 다음, 신화 속의 통치자 순과 의 발자취를 따라 헌제가 자발적으로 그에게 왕위를 양위하도록 하라고 제안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조조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조 사후, 하후돈은 자신의 말에 후회하며 병들어 죽었다.[38] 역사가 손성은 ''세어''의 기록을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하며, 이는 ''삼국지'' 하후돈전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후돈은 한나라 황실에서 봉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조조의 제후 왕국에서 봉사할 것을 요청했다.[39]

217년, 조조와 손권이 유수구에서 싸웠지만, 손권의 방비는 매우 견고해 조조는 공략을 포기하고 대군을 이끌고 철수했다. 전투 후, 조조는 허창으로 귀환할 때, 하후돈을 양주 방면 26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거소호변에 머무르게 하고, 장료, 장패와 같은 장군들의 지휘를 맡겼다. 조조는 악인과 가희를 하사하고, 하후돈의 공적을 옛 사람에 비유하여 칭찬했다.

219년, 조조는 관우에 대비하기 위해 마파에 주둔했을 때, 하후돈을 불렀다. 조조는 하후돈을 특별히 친밀하게 여기고 중히 여겨, 수레 동승 및 침실 출입을 허락했으며, 그 후한 대우에 비견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위나라 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지금까지 하후돈은, 위왕으로 즉위한 후의 조조 휘하에서 유일하게 후한의 관직에 있었고, 관직의 높낮이에 큰 차이는 있어도 한의 직신이라는 입장은 조조와 같았다. 이는 조조가 "불신의 예"[55]로, 하후돈에게 위나라 관직을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하후돈은 자신에게 과분한 대우라며 이를 굳게 사양하고, 위나라 관직을 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고 한다.

하후돈은 조조에게 황제위에 오르도록 열성적으로 권했다고도 하며(『위씨춘추』), 환계가 조조에게 황제위에 오르도록 권하자 이의를 제기하며, 먼저 유비를 멸망시킨 후 황제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고도 한다(『조만전』, 『세어』).

하후돈은 여러 군을 지휘하여 수춘으로 귀환했고, 소릉에 주둔했다. 220년 정월,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위왕을 계승하자 3월 대장군(삼공을 능가하는 군무・군정의 최고 직위)에 임명되었지만, 연강 원년(220년) 4월, 조조의 뒤를 따르듯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문제기」). 먼저 조조가 황제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것을 후회했기 때문에 발병했다는 설도 있다(『조만전』, 『세어』). 시호는 '''충후'''.

233년 (조예의 대) 5월, 위나라의 공신 중에서 공훈이 현저한 자로서, 하후돈은 조인・정욱과 함께 조조의 묘정에 제사되었다. 공신의 합사는 여러 번 행해졌지만, 이 세 사람이 처음이었다.

3. 성품과 평가

하후돈은 매우 충성스러웠고 조조의 신임도 남달랐다. 조조의 수레에 동승했으며 다른 장수들보다도 특히 중하게 대우받아 그 침실까지도 출입하였다. 말년에 다른 장수들이 모두 위나라 관직을 받을 때 혼자만 여전히 한나라 관직이었다. 이는 신하의 에 어긋난다며 상소했다. 조조가 “듣건대 신하란 스승 같은 자가 최선이요 벗 같은 자가 차선이라 했으니 무릇 그 덕만 귀히 여기면 되오. 어찌 구구한 위나라 관직에 연연하시오?”라고 하건만 고집스레 청하여 전장군에 임명됐다. 출정할 때도 스승을 모셔서 학문을 익혔다. 청렴하고 검소하여 조금이라도 재물이 생기면 주위에 나눠주었고 다른 경제행위는 하지 않아 관청에서 타다 썼다. 14살 때 자신의 스승을 모욕한 사람을 죽일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배잠(裴潛)은 하후돈이 조조의 일족이자 능력과 경험에서 첫째가는 장수로 동탁에게 여포가 있다면 조조에게는 하후돈이 있었다고 평했다. 하후돈은 종종 군에 있었지만, 스승을 초빙하여 학문을 배우도록 했다. 그는 검소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였으며, 남는 재산을 빈곤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그는 돈이 부족할 경우 백성들에게 직접 징수하는 대신 관청의 금고에서 가져다 썼다.[47]

233년 (조예의 대) 5월, 위나라의 공신 중에서 공훈이 현저한 자로서, 하후돈은 조인, 정욱과 함께 조조의 묘정에 제사되었다. 공신의 합사는 여러 번 행해졌지만, 이 세 사람이 처음이었다.

4. 가계

경극 "정군산"에 등장하는 하후돈의 분장. 파란색 바탕은 그의 강직하고 용감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후돈은 전한 고조를 섬긴 하후영의 후손이라고 한다. 『삼국지』(배송지 주석 인용)의 『조만전』과 『세어』에 따르면, 조숭(조조의 아버지)은 숙부(아버지의 동생)에 해당한다고 한다. 조조사촌이며 하후연은 종형제(먼 친척)에 해당한다.[40]

관계이름비고
본인하후돈
장남하후충(夏侯充)하후돈 사후, 뒤를 이었다.[40]
손자하후이(夏侯廙)하후충의 아들.[44]
증손하후소(夏侯劭)하후이의 아들. 《진양추(晋陽秋)》에서는 하후좌(夏侯佐) 사후에 먼 친척 중에서 맞이한 양자로 기록되어 있다.[44]
차남하후무『연의』에서는 양자라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42]
아들하후자장
아들하후자강[43]
동생하후렴(夏侯廉)하후돈 생전에 열후에 봉해졌다.[42]
조카하후좌『진양추』에 따르면 고안향후가 되었으며, 266년에 사망하여 이로써 하후돈의 직계 자손은 끊어졌다.[45]



하후돈 사후에 하후돈의 7명의 아들과 2명의 손자가 관내후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40]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연의 형으로 묘사된다. 또한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와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만화 《삼국지》에서는 하후은이 하후돈의 동생으로 등장한다. 하후은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연의 본편에는 그러한 기술은 없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 하후돈은 많은 전투에 참여해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맹장으로 묘사되었다. 서영, 변양, 교유 등을 직접 베었다. 을 잃는 장면은 고순과 싸우다가 조성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로 된 것을 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며 삼키고는 조성을 죽이는 것으로 그려졌다. 예형을 통해 완체장군(完體―)이라고 조롱당하는 장치로도 활용되었다. 오관참육장을 벌인 관우와 싸우려는데 장료가 말렸다. 박망파 전투제갈량에게 당해서 스스로를 포박해 죽기를 청하는데 조조가 풀어주었다. 경기 등이 일으킨 난을 진압한다. 죽을 때는 조조처럼 복황후, 동귀인(董貴人), 두 황자, 복완, 동승귀신을 보고 놀라 이 드는 것으로 처리하였다.[48]

하후돈이 화살에 맞아 눈을 잃는 모습의 명나라 시대 목판 삽화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 하후돈은 삼국 시대 이전과 기간 동안의 역사적 사건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하후돈과 관련된 ''삼국지연의''의 허구적인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

  • 하비 전투#하후돈, 왼쪽 눈을 잃다
  • 박망파 전투#허구에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하후돈은 경솔한 면도 있지만, 무용에 뛰어난 맹장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동탁 휘하의 서영을 찔러 죽이고, 여포 휘하의 장수인 고순일기토로 물리치며, 관우와도 맞붙는 등 활약을 펼친다.

하후돈의 이미지를 굳게 한 일화는 여포와의 싸움에서 비롯된다. 이 싸움 중, 여포의 장수를 추격하는 하후돈을 진중에서 확인한 적장 조성은 화살을 쏘아 하후돈의 왼쪽 눈을 맞춘다. 이 때 하후돈은 박힌 화살을 눈알째로 뽑아내어 "부모에게 받은 몸을 버릴 수 없다"(原文「父精母血不可棄也」)라고 외치며 그것을 먹고, 곧바로 왼쪽 눈을 쏜 조성을 다음 화살을 쏠 틈도 없이 얼굴에 꽂아 죽인다. 공융예형을 조조에게 추천했을 때, 예형이 조조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여러 가지로 험한 말을 하자, 하후돈은 "완체(五體滿足)"라고 비꼬아졌다.

신야의 유비 토벌에서는 10만 명의 병사의 대장으로 침공했을 때, 적 선봉 조운을 추격하다가 박망파까지 깊숙이 쫓아간다. 이전이 "박망파는 화계에 유리한 지형이다"라고 간언했지만, 제갈량의 화계에 걸려 대패하고 만다 (박망파 전투). 많은 부하를 전사시킨 책임을 지고,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밧줄로 몸을 묶어 조조와 대면했지만, 조조에게 용서받는다.

마지막에는 조조가 위독해지자 침대 곁으로 불려가, 거기서 조조가 예전에 살해한 인물들의 망령을 보게 된다. 이로 인해 하후돈은 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6. 대중문화 속 하후돈

중국의 잡극(zaju)에서는 하후돈이 종종 촉한의 영웅들에게 패배하는 광대 역할로 등장하며, 박망파 전투에서 제갈량에게 패하거나 관우에게 백마에서 망신을 당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49][50] 명나라 시대의 주유둔(朱有燉)이 쓴 15세기 희곡 《관운장의 의로운 용맹함으로 금을 거부하다》에서 하후돈은 자신의 소개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으며, 요새를 마주하면 두려워하고, 칼날을 무서워하며 화살을 피해 도망친다"고 묘사된다. 허창에서 눈을 잃고, 복양 전투에서 장료에게 다리를 절단당한 그는 더 큰 부상을 두려워한다. 그는 안량의 도전 소식을 듣고 당황하며, 병사들이 마늘 외에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데 안량이 갑옷을 너무 많이 입었다고 비웃는데, 이는 계획에 대한 말장난으로, 《손자병법》을 오해한 것이다. 그는 몇 번의 싸움 만에 패배하고 관우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승리의 공을 주장한다. 그는 이후 조조에게 관우를 비방하여 관우가 죽기를 바라며, 조조에게 관우가 떠날 것이니 그를 죽여야 한다고 경고하지만 조조는 그를 무시한다. 그 후 관우와 함께 보상을 받으려 한다. 조조의 명령으로 떠나는 관우에게 마지막 장에서 연회를 베풀라고 명을 받았지만, 명령을 무시하고 술에 취해 잠든 관우를 살해하려 한다. 그러나 관우가 깨어나고, 하후돈은 압도적인 관우의 위력에 겁에 질려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한다.[51]

하후돈은 코에이의 진·삼국무쌍 시리즈 비디오 게임 시리즈와 무쌍 오로치 시리즈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코에이의 삼국지 전략 게임 시리즈의 모든 작품에도 등장한다.

매직 더 개더링 수집 카드 게임의 포털 삼국지 세트에는 "외눈의 하후돈"(Xiahou Dun, the One-Eyed)이라는 이름의 하후돈 기반 카드가 있다.[52]

애니메이션 《일기당천》, 《연희무쌍》, 《유유시키》에서도 하후돈이 언급되며, 일본 이름인 "카코톤"으로 알려져 있다.

하후돈은 또한 《토탈 워: 삼국》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조조 휘하의 장수로 게임에 두드러지게 등장한다.[53]

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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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문서 The 2nd year of the Tai'shi era corresponds to 22 Feb 266 to 10 Feb 267 in the Julian calen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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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in Plain Language Hackett Publishing Company
[49]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010-08-18
[50] 서적 Battles, betrayals and brotherhood: early Chinese plays on the Three Kingdoms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12
[51] 서적 Battles, betrayals and brotherhood: early Chinese plays on the Three Kingdoms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12
[52] 웹사이트 Xiahou Dun, the One-Eyed (Portal Three Kingdoms) - Gatherer - Magic: The Gathering https://web.archive.[...]
[53] 웹사이트 TOTAL WAR: THREE KINGDOMS WARLORD LEGENDS – CAO CAO https://www.totalwar[...] 2018-10-26
[54] 문서 詳細は「三国志 (吉川英治)#作品の特徴」および「三国志 (横山光輝の漫画)#登場人物」を参照
[55] 문서 自らの配下として扱わない特別待遇。演義において関羽が曹操に投降する際に「漢室に投降するのであって、曹操個人に投降するのではない」と宣言する有名な場面があるが、これは関羽の方から自らに対して「不臣の礼」を取り、漢の直臣の身分を保証するよう要求した事を意味する。
[56] 서적 《삼국지》10권 위서 제10 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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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서적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61] 서적 《삼국지》18권 위서 제18 이전
[62] 서적 《삼국지》13권 위서 제13 종요
[63] 서적 《삼국지》16권 위서 제16 [[두기 (백후)|두기]]
[64] 서적 《삼국지》11권 위서 제11 전주
[65] 서적 《위명신주》(魏名臣奏)에 실린 [[동소]]의 표(表), 《위진세어》(魏晉世語) ; 배송지 주석, 《삼국지》8권 위서 제8 장로에서 인용
[66] 서적 《삼국지》18권 위서 제18 장패
[67] 서적 《삼국지》2권 위서 제2 문제 조비
[68] 서적 《위서》 ; 배송지 주석, 《삼국지》9권 위서 제9 하후돈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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